현실을 짊어지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인간의 운명
그 존재를 탐구하는 시인 특유의 풍경학
김명인이 열두번째 시집 『이 가지에서 저 그늘로』(문학과지성사, 2018)를 출간했다. 시인은 첫 시집 『동두천』(문학과지성사, 1979)을 상자한 이래 기억과 시간이 인간의 삶에서 갖는 근원적 의미에 대해 깊이 있게 탐구해왔다. “길 위에 선 시인”이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김명인은 고향이 없거나 터전을 잃은 이들의 혼란과 고통을 중심으로 길 위에 선 자들과 꾸준히 걸음을 맞춰왔다. 한국전쟁 이후 어지러운 사회 변화를 온몸으로 겪으며 개인의 상처뿐 아니라 사회 깊숙이 새겨진 상흔까지 파고들어 서정적 풍경을 시로 승화시켜온 그는 시력 50년을 향해가고 있는 지금까지도 길 위에 선 존재들을 들여다보며 스스로의 시 세계를 넓혀가고 있다.
흘러가버린 시간 위에서, 우리의 모습도 달라지고
스물몇 살의 여자가 이순을 넘겨 전화를 걸어왔다
골격만 앙상한 출렁다리 되짚고 오는
밑도 끝도 없는 추락에 관해 듣다가
웬 공배인가 싶어 40년을 몽땅 제하고
이태 동안 무수히 들락거렸던
그 다방의 몽환 속에 혼자 앉았다
그녀를 기다리며 중얼거린다, 아득할 거라는데
조금도 설레지 않고 지루하기만 한
어떤 어긋남에 관한 이야기, 실은 보리수나무
그늘 탓이겠지, 한참 걸어오다 문득
다방 입구에 걸린 커다란 거울 안쪽에
무언가 놓고 왔다, 사정없이 짓뭉개진 약속이다 보니!
―「보리수다방」 전문
시간의 흐름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우리는 모두 이 질문의 답을 알고 있다.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모든 사람은 시간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 이는 김명인의 시 속에서도 드러나 있다. 시 「보리수다방」에서 화자는 한때 이십대였던 여자를 40년의 세월을 건너뛰고 다시 만나게 된다. 그 만남이 설렐 것이라 생각했지만, 오히려 “지루하기만” 할 뿐. 만나야 할 때 만나지 못하고 흘러버린 세월 앞에서 여자와의 만남은 “어떤 어긋남”을 증명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다방 입구에 걸린 커다란 거울”을 마주했을 때 화자는 “무언가 놓고 왔”음을 깨닫는데, 그들이 놓쳐버린 것은 아마도 이미 변해버린 마음, 다르게 쌓여버린 추억, “짓뭉개진” 그때의 약속 같은 것이리라.
이렇듯 시인은 시간 안에서 탄생과 소멸이라는 변화를 겪어야 하는 인간의 운명을 그대로 응시한다. ‘거울’이라는 상징에서도 드러나는바, 나를 바라보는 또 다른 ‘나’를 통해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김명인의 시적 화자는 시간의 변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눈앞의 풍경을 건조한 시선으로 그려내는 데에 성공한다.
벗어날 수도, 그렇다고 받아들이기도 어려운 현실의 굴레
멸치 가게 여자가 박스를 열어
몇 묶음째 상품을 보여준다
몸과 몸을 흩어 한 무리임을 확인시키지만
군집을 모르는 손님에겐 못 가본 바다 같다
있다 해도 짓뭉개진 뒤에야 놓여날
그물망, 어제까지 안 그랬다고 여자가 말했다
은빛 파도에 떠밀려 파닥거리는 멸치를
채반째 데쳐 비늘이 생생하도록 바람에 널었으니
그물을 싣고 항구를 들락거리는 건 배의 사정,
장마 탓이지만 마침 그때 일이 떠올랐을 뿐
머리를 떼면 흑연 같은 속셈이 딸려 나와
멸치는 곤곤해진다, 그러니 안주로 부른들 뭐 하랴
촘촘하게 엮인 투망을 덮어쓰는 절기에도
물기 다 거둔 멸치는 건건하다
비쩍 마른 여자가 삐꺽거리는 좌판에서 돌아선다
한 번도 제 영역을 지켜낸 적 없는, 멸치
저걸 덮치려고 고래까지 아가리를 활짝 벌린다―「멸치처럼」 전문
멸치 가게에서 넘치도록 차 있는 멸치를 사려다, 문득 화자는 멸치의 삶에 대해 생각해본다. “한 번도 제 영역을 지켜낸 적” 없는 존재, 누군가의 안주거리가 될 뿐인 존재, 그의 본래 거주지인 바다로 돌아간다고 해도 고래의 밥이 될 것이 뻔한 존재에 대해서. 이 시에서 표면적인 화자는 비루해 보이는 멸치를 세밀하게 뜯어보는 관찰자로서 드러난다. 하지만 우리는 바로 그 아래 감추어진 다른 층위의 화자를 발견해낼 수 있다. 바로 제목에 붙은 조사 ‘~처럼’을 통해서 말이다. 관찰의 대상이던 멸치는 사실, 멸치처럼 사는 나, 멸치처럼 비루한 인간·현실 등으로 치환되면서, 시인이 말하려던 건 멸치의 비루함이 아닌 ‘멸치처럼 비루한 나’였다는 것이 밝혀진다. 현실에 거리를 두고 이 복잡한 세상을 그저 관조하고 싶으나, ‘나’ 역시 그 현실의 일부이기에 어쩔 수 없이 이 시는 나의 이야기가 되어버리고 마는 셈이다.
우리는 늘 시간에 매여 현실에 발을 붙이고 있어야 하는 존재이다. 현실에서 스스로를 분리하지도 그렇다고 자연스레 섞이지도 못하는 분열된 존재들을 현실과 함께 묶어버리는 방식이 바로 정과리(문학평론가)가 제시한 김명인 “특유의 풍경학”일 것이다. “현실과 불화한 존재들 자신이 그 풍경 속에 휘말려 들어가 있다는 것”, 그 결과 인간이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그렇게 묶인 통째의 풍경을 끌고 가는 것과 같다.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도리어 현실을 꽉 쥐고 한 발 한 발 내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시인의 시 쓰기도 현실에서의 탈피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지난 세월 꾸준히 활동을 이어온 김명인의 시력을 두고 보았을 때 그를 둘러싼 현실의 아픔과 곤란함이 그가 시를 쓸 수 있도록, 새로운 길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해준 것은 아닐까. 이 질문에 명확한 대답을 할 수는 없을지라도 여전히 우리는 김명인의 시와 함께 각자의 길 위에 서 있다.
■ 시집 속으로
우리가 죽음이라 불러서 은밀하고 두터운
생식들은 지켜진다, 어둠 속에서
삐져나온 손이 다른 손목을 휘어잡는다
상대는 안 보이는데 끈끈하게 질척거린다면
나를 휘어잡은 것 너의 사랑인가, 눈먼 유전자인가
―「유전자전」 부분미지를 사랑하는 여러분!
그는 앞장서 내일로 떠났습니다
그를 따르려거든
쉬지 말고 걸어 내일로 가십시오자정을 두드리는 혼곤한 수신호라면
그건 내일에의 의지,
열대우림에서 베어진 통나무가 얼음박물관의 기둥이 되듯
쓰임새 모르는 내일은 저를 쓰려고
먼 곳에서 먼 곳으로 옮겨 가는 중이다
―「내일」 부분여행은 목적지가 분명해서 좋았다
살아선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것
출발지가 목적지기도 한 여행,
그런데 네가 너머로 잠적해버렸다면?
어깨 위에 산다는 짐승의 울음소릴 혼자 들었다
―「너머」 부분
■ 뒤표지 글
윤곽이 부서진 목관을 건져냈을 때
잠수부는 두께가 어림되지 않는 펄 속이라 했다
주검을 담았다 해도 수압이 눌러버리면
형해는 먼지처럼 흩어졌을 테지만
염려를 다해 크레인이 끌어 올린 목관은
조석으로 파고든 내외의 침탈을 조각으로 견뎌온 듯
이건 비유를 머금은 것이지만 형상을 잃기까지
사물은 얼마나 오래 인내하는 것일까?
바다로 나간 목관이 개펄 속에 파묻혀
수백 년을 버텨낼 동안
함께 난파당했던 주검은 어디를 떠돌고 있었을까?
다만 잔해들이 바다 밑에서 건져졌고
둘러선 시간은 볼모 같았다는 것
여기 흐릿한 유구가 있다, 언제 마련됐을까
가늠이 안 되는 널판자 몇 쪽
개펄이 보관했지만
깨진 질그릇처럼 용도를 다한!
■ 시인의 말
제 몸이 아니라며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앉는다.
서쪽은 없다고 나는 중얼거리지만
이 추궁 견뎌야만 그 땅에 내려선다고?
2018년 8월
김명인
I
멸치처럼 /유전자전 /수심에 길들여지지 않는 장님물고기 /둠벙 속 붕어 /내 부족함은 좌파인 빗소리로 채워진다 /끄나풀 /죽은 공장 /주름 /메기 /물의 윤회 /표적과 겨냥 /아가미
II
늦가을이면 광채 속에 /내일 /우마 /파촉 /너머 /손의 표정 /보탤수록 모자라는 /이 가지에서 저 그늘로 /홍합 /우두커니 /벌새 /간담 /망상어 /밤낚시
III
간반 /호박 달 /수면장애 /뇌출혈 /세간 /못 맡는 봄 /식민 일기 /윤택이 /빙산의 일각 /바다공동묘지 /활개 /포도밭 엽서 /사다리 /보리수다방 /나비는 팔랑거리며 날아내리고 /월정에서 /치자꽃 향기로 쓰는 복면
IV
숙맥 /하마 /어부의 귀 /삼류 /물고기 입장 /이목 /얼굴 1 /얼굴 2 /습지보존회의 /밤의 열정 /경마 /기차는 지나간다 /등대와 시
해설
통으로 움직이는 풍경・정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