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과 주체의 관계를 전복시키는 시 쓰기
한국 시의 관행에 반하는 이수명의 끝없는 실험!
감정을 덧입혀 대상을 왜곡하는 화자의 시선에서 벗어나, 오로지 대상을 중심으로 세계를 읽어내는 언어의 발견을 시작으로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온 이수명이 일곱번째 시집 『물류창고』(문학과지성사, 2018)를 출간했다. 『마치』 이후 4년 만의 시집이다. 이수명은 1994년 『작가세계』로 등단한 이래 일곱 권의 시집과 다수의 시론집, 평론집 들을 출간하며 현대시에 관한 깊은 연구를 기반으로 시단에서 꾸준한 활동을 이어왔다.
특히 이번 시집에서는 “물류창고”라는 제목으로 총 열 편의 시가 수록되었다. 특별한 구분 없이 불쑥불쑥 등장하는 「물류창고」를 통해 주체와 대상의 경계가 불분명해지고, 그에 따라 어떤 행위를 하는지 명확한 의미를 부여하기 어려운 행위들이 무한히 반복하는 공간으로서의 물류창고를 보여줌으로써, 시인은 ‘무효’로 수렴하는 시적 언술을 향해 전진하는 말들을 풀어낸다.
“우리는 물류창고에서 만났지”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새로운 시적 공간
시 「물류창고」 열 편은 제목만으로는 서로를 구별할 수 없도록 일련번호를 붙이지 않았다. 우리는 여기서 이 시들이 연작시가 아니고 그저 ‘물류창고’라는 시로서 흩어져 있는 별개의 작품들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물류창고일까, 대체 이 공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물류창고’는 일반적으로 물건을 보관하는 곳이며, 상품을 빼고 넣을 때에만 열린다. 물류창고라는 공간의 안팎에는 보관되고 운반되는 대상이 있으며, 그를 수행하는 주체, 그리고 운반 혹은 보관 등의 행위가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물류창고들 간에 구별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쉽게 볼 수 있고, 언젠가 분명 한 번쯤은 보았지만 그렇다고 물류창고를 특별히 의식하게 되는 일은 많지 않기 때문에 그것들 사이의 개별성을 인지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창고에서 일하는 사람처럼 차려입고
느리고 섞이지 않는 말들을 하느라
호흡을 다 써버렸지[……]
무얼 끌어 내리려는 건 아니었어
그냥 담당자처럼 걸어 다녔지
바지 주머니엔 볼펜과 폰이 꽂혀 있었고
전화를 받느라 구석에 서 있곤 했는데
그런 땐 꼼짝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지
―「물류창고」(pp. 14~15) 부분
어디에나 있지만 그래서 오히려 인식되기 어려운 곳, 이수명의 물류창고에서 우리는 이상한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분명 누군가가 있는데 그런데 그들은 마치 “창고에서 일하는 사람처럼” 차려입고, “담당자처럼” 돌아다니며, “꼼짝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담당자면 담당자고, 일을 하면 하는 것일 텐데, ‘~처럼’ 보인다는 시인의 언술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더군다나 이들은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갔다가 거기서/다시 다른 방향으로 갔다가/돌아오곤” 하며, 어떤 행위를 본격적으로 수행하는 데까지 끝내 다다르지 못한다.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조재룡은 『물류창고』 속 시 세계에는 “‘끝없는 끝에서in fine sine fine’ 오고가기를 반복하거나 그마저 왔다 갔다, 그저 따라 하는 주체가 있을 뿐”이라며, “새로운 행위는 실행되지 않는다”는 지점에 주목한다. 특히 시인은 「물류창고」 열 편과 그 외의 시들을 교차로 배치시키는 동시에, 무한한 행위가 반복되는 공간으로서의 물류창고 역시 반복되도록 위치시킴으로써 이러한 효과를 증폭한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한다는 것을 명확히 알기 어려울 때 우리는 자동적으로 이런 질문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대체 여기서 뭘 하려는 걸까?
“여기서 뭘 하려던 거지” “글쎄 모르겠어”
의미를 갖기 힘든 행위의 무한한 반복
그는 묻는다 뭘 모르는 거지
나는 말한다 창고 안을 돌아다니면
뭘 하려 했는지 자꾸 잊어버려
저쪽으로 갔다가 글쎄 모르겠어 그냥 돌아오게 돼―「물류창고」(pp. 32~33)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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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페이지를 넘기면 다음 페이지를 참고하라는 말만 나온다.―「흥미로운 일」 부분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하지만 자기 안에서 답을 찾기 어려울 때 우리는 흔히 다른 사람의 말이나 글을 참고한다. 이 시집 안에서도 역시 “여기서 뭘 하려던 거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참고할 페이지를 펼치는 화자가 등장한다. 그런데 이 참고 페이지 역시 몹시 수상하다. 표시할 수 없는 페이지가 등장해서 다시 앞으로 넘기면 “다음 페이지를 참고하라는 말만” 나오고 다음 페이지에는 다시 “표시할 수 없는 페이지”가 나옴으로써, 사실상 참고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는 채로 무한히 페이지를 앞뒤로 넘기는 동작만이 남는다.
결국 “여기서 뭘 하려던 거지”라는 질문 앞에서 화자는 “글쎄 모르겠어”라고 답하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없음을 확인하는 데 이른다. 무한히 반복되는 행동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다다르고도 그 행동을 계속하는 것 외에 달리 뭔가 할 것도 없는 상태 속에 이 시집은 놓여 있다. 알 수 없고, 할 수도 없는 상황 속에서 우리는 무효로 수렴되는 행위를 엿볼 뿐이다. 영원히 무효의 지점에 도달하는 곳이 바로 이수명의 물류창고들이다. “‘나아갈 수 없음’과 ‘할 수 없음’을 주체-대상-행위의 무효를 무한히 방출하는 고유한 문장들로,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그는 ‘오늘’을 활활 태운다”(문학평론가 조재룡).
■ 시집 속으로
오늘 하나씩 천천히 불 켜지는 거리를 걸어보지 않겠니
하늘을 위로 띄워보지 않겠니
부풀어 오르는 셔츠에 재빨리
우리는 죽었다고 쓰지 않겠니풍경을 어디다 두었지 뭐든 뜻대로 되지 않아
풍경은 우리의 위치에 우리는 풍경의 위치에 놓인다
너와 나의 전신이 놓인다―「셔츠에 낙서를 하지 않겠니」 부분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몸이 얼어붙어 있었다. 충분히 잠들지 못한 탓이야, 어제 저녁을 먹으러 나가지 않았을 뿐이니 아무 문제도 없을 거야,
―「저속한 잠」 부분
멀리서 흘러와 서 있는 이상한 돌들처럼 우리는 여기 붙어 서서 꿈쩍도 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해요 우리는 똑같아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화성에 닿았다. 잊지 못할 휴가일 거야 정말 그래
우리는 갑자기 사라진 것처럼
우리는 조금 웃어보자
좋아요 흰 부츠를 나란히 신었을 뿐인데우리는 정말 다 꿰매어진 것만 같았다.
―「휴가」 부분
■ 뒤표지 글
대화는 건물 밖에서 해주시기 바랍니다
정숙이라 씌어져 있었고
그래도 한동안 우리는 웅성거렸는데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소란하기만 했는데
창고를 빠져나가기 전에 정숙을 떠올리고
누군가 입을 다물기 시작한다.
누군가 그것을 따라 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조금씩 잠잠해지다가
계속 계속 더 잠잠해지다가
이윽고 우리는 어느 순간 완전히 잠잠해질 수 있었다
■ 시인의 말
그가 말했다.
물류창고로 사용해도 좋습니다.
2018년 6월
이수명
I
나의 경주용 헬멧 /셔츠에 낙서를 하지 않겠니 /밤이 날마다 찾아와 /물류창고 /풀 뽑기 /물류창고 /이디야 커피 /물류창고 /이렇게 /물류창고 /최근에 나는 /물류창고 /통영 /물류창고 /저속한 잠 /물류창고 /아무도 태어나지 않은 해였다 /물류창고 /여름에 우리는 /물류창고 /항상 새것 같은 /칩 /휴가 /물류창고
II
너는 묻는다 /조가비에 대고 /녹지 않는 사람 /안부 기계 /연립주택 /노면의 발달 /투숙 /오늘의 경기 /다음 뉴스 /원주율 /티베트여서 그래 /머릿속의 거미 /개가 나타나는 순간 /시멘트가 좋다 /봄 소풍 /하양 위로 /인사를 나누는 동안 /계속
III
오늘의 미세먼지 /주민 센터 /이불 /여기서부터 서울입니다 /비를 위해서 /신분당선 /흥미로운 일 /덤불 가운데 식탁보 /나의 중얼거리는 사람 /토마토수프 /편의점 /걸어가던 개 /우리를 제외하고
해설
‘끝없는 끝’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조재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