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R 15
분야 시, 문학과지성 시인선 R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
낱낱이 피어오르는 작은 삶들과
세상의 초록에 바치는 싱그러운 찬사
오늘을 바라보게 하는 어제의 시
“1965년 등단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칠 줄 모르는 창조의 에너지를 보여주면서 한국 현대 시에 진화의 의미를 부여한”(문학평론가 이광호) 시인 정현종의 네번째 시집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초판 발행 1989)가 29년 만에 문학과지성 시인선 R시리즈의 열다섯번째 책으로 복간되었다. 시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을 포함한 64편의 시는 시절마다 새롭게 읽혀왔다.
해마다 여러 시인의 많은 신간이 출간되면서도 여전히 정현종의 시가 널리 호명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새로운 시선으로 정현종의 시를 포착해낸 철학자 김동규에 따르면 “생명이 고갈된 도시에서도 사람은 사랑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생명과 폭넓은 의미에서의 사랑, 그리고 사람. 지금 이 도시에 가장 필요한 그 의미들에 대한 단단한 고찰 위에 일구어진 시들은 생명이 경시되고 편리주의와 이기주의로 병든 오늘 더더욱 빛을 발한다. 1980년대, 폭력과 저항의 시대에 시인이 시로써 드러낸 변화와 포용을 다시 만나보자.
생명, 싱싱한 혼란 속에서 발견하는 세계의 깊이
여러 시와 산문, 인터뷰에서 공공연히 밝혀왔듯 정현종의 시는 시골 산천을 헤매며 자연 속 생명의 꿈틀거리는 감각을 직접 느낀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 태어났다. 그는 문학 선생의 “머뭇거리는 소리”나 “길들은 소리”를 듣는 것보다 “피는 꽃이든 죽는 사람이든 살아 시퍼런 소리를 듣는” 게 낫고, “무엇보다도 살아 있는 걸/확실히 손에 쥐어보”는 게 시 창작에 더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시 창작 교실」). 시인 스스로 “언어의 고고학”이라 부르기도 하는 시의 근원이, 머릿속에서 맴도는 관념이 아닌 애정을 담아 바라본 세상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그의 시는 시대나 세대를 가리지 않고 가깝게 읽힌다.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에서 생명에 대한 애착은 그 기저에 죽음이 도사리고 있기에 한층 각별하다. 이 시집의 시들은 시대의 공포와 죽음을 목도한 시인이 1980년대를 휩쓴 폭력과 거친 세상을 비판하는 한편, 나아가 고통을 회피하기보다 감싸 안으려 한 흔적이기도 하다.
유리창을 깨며 들어온 최루탄이
안에서 터져 삽시간에
가스실이 된 건물 속에서
눈물 콧물 속에서
보지도 못하면서
숨도 못 쉬면서
질식사경窒息死境에서
참 귀신처럼 살아가는구나
―「귀신처럼」 부분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더 나는 생명 현상들에 감동합니다. 모든 생명의 움직임에 감동하지 않고는 시가 나오지 않는 것이니까 옛날이라고 해서 그렇지 않았을 리 없겠습니다만, 근년에 한결 더 그렇습니다. 숲에 가서 초록 나뭇잎과 풀들을 보면 어떤 때는 광희(狂喜)에 가까운 기쁨으로 부풀어 오르고, 나는 새들, 꽃들, 풀벌레들 같은 것들이 너무 사랑스러워 감탄하며 혼자 웃기도 하는 것입니다만, 사실 생명의 기쁨은 무슨 추상적인 이념이나 거창한 철학 속에 들어 있는 게 아니라 이렇게 작은 것들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명에 대한 감각이 날로 민감해지는 것은 세상의 거칠음과 비례해서 그렇게 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니까 가령 초록 풀잎들에 대한 감동의 배경에는 거친 세상, 죽음이 떠도는 세상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정현종, 「구체적인 생명에로」(『작가세계』 1990년 가을호)
사랑, 삶의 순간순간 피어나는 꽃봉오리들
이처럼 생명과 사랑 같은 묵직한 단어들은 정현종 시에서 관념적 용례를 벗어나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생명은 “시골 국민학교”처럼 소박한 곳에 있다. 그리고 “재게 움직이는” 분식집 아주머니처럼 오늘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에게서, 우연히 마주친 “마악 벙그는 목련”(「신바람」) “잘생긴 나무”(「숲에서」)에서 발견된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넓은 세상 사이사이 숨어 있는 이들 가장 사소한 존재에 눈길을 주어 저마다의 빛나는 순간들을 ‘이쁘게’(「움직임은 이쁘구나 나무의 은혜여」) 바라보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는 숨어 있는 작은 삶, 낮은 목소리에 바치는 찬란한 헌사이자 모두에게 그런 ‘사랑’을 권유하는 전언이다.
오래도록 우리의 삶에 스며온 정현종의 시는 앞으로도 독자와 함께 성장하며 새롭게 읽힐 것이다. 중학교 교과서에 수록된 첫 시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은 얼마 전 방영된 TVN 드라마 <시를 잊은 그대에게>에서 주요하게 다뤄지기도 했다. 언제나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 숨쉬는 정현종의 시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그 섬에 가고 싶다”는 1970년대의 「섬」(『나는 별아저씨』)에서부터 작년 연말 영부인 김정숙 여사의 방중 때 낭송되었던 「방문객」(『광휘의 속삭임』, 2008)에 이어, 등단 50주년인 2015년 발표한 『그림자에 불타다』에 다다르는 시인의 53년 시 인생. 그 허리께쯤 위치하는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는 정현종의 시 세계를 이해하는 데 제격인 시집일 것이다.
시집 속으로
내 소리도 가끔은 쓸 만하지만
그보다 더 좋은 건
피는 꽃이든 죽는 사람이든
살아 시퍼런 소리를 듣는 거야
무슨 길들은 소리 듣는 거보다는
냅다 한번 뛰어보는 게 나을걸
뛰다가 넘어져보고
넘어져서 피가 나보는 게 훨씬 낫지
가령 ‘전망’이란 말, 언뜻
앞이 탁 트이는 거 같지만 그보다는
나무 위엘 올라가보란 말야, 올라가서
세상을 바라보란 말이지
내 머뭇거리는 소리보다는
어디 냇물에 가서 산 고기 한 마리를
무엇보다도 살아 있는 걸
확실히 손에 쥐어보란 말야
그나마 싱싱한 혼란이 나으니
야음을 틈타 참외 서리를 하든지
자는 새를 잡아서 손에 쥐어
팔딱이는 심장 따뜻한 체온을
손바닥에 느껴보란 말이지
그게 세계의 깊이이니
선생 얼굴보다는
애인과 입을 맞추며
푸른 하늘 한번 쳐다보고
행동 속에 녹아버리든지
그래 굴신자재屈伸自在의 공기가 되어 푸르름이 되어
교실 창문을 흔들거나 장천長天에
넓고 푸르게 펼쳐져 있든지,
하여간 사람의 몰골이되
쓸데없는 사람이 되어라
장자莊子에 막지무용지용莫知無用之用이라
쓸데없는 것의 쓸데 있음
적어도 쓸데없는 투신投身과도 같은
걸음걸이로 걸어가거라
너 자신이되
내가 모든 사람이니
불가피한 사랑의 시작
불가피한 슬픔의 시작
두루 곤두박질하는 웃음의 시작
그리하여 네가 만져본
꽃과 피와 나무와 물고기와 참외와 새와 애인과 푸른 하
늘이
네 살에서 피어나고 피에서 헤엄치며
몸은 멍들고 숨결은 날아올라
사랑하는 거와 한 몸으로 낳은 푸른 하늘로
세상 위에 밤낮 퍼져 있거라.
―「시 창작 교실」 전문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아이가 플라스틱 악기를 부 ─ 부 ─ 불고 있다
아주머니 보따리 속에 들어 있는 파가 보따리 속에서
쑥쑥 자라고 있다
할아버지가 버스를 타려고 뛰어오신다
무슨 일인지 처녀 둘이
장미를 두 송이 세 송이 들고 움직인다
시들지 않는 꽃들이여
아주머니 밤 보따리, 비닐
보따리에서 밤꽃이 또 막무가내로 핀다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전문
뒤표지 글
생명이 고갈된 도심에서도 사람은 사랑하며 살아간다. 사랑은 도시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아지랑이다. 사랑은 아스팔트 위의 아지랑이가 아니라 봄날의 아지랑이에 더 가깝다. [……] 불멸에 눈먼 도시의 인간들은 ‘넘치는 현재’를 영원히 미룬다. 그러나 시간이 영원히 흘러가더라도 현재는 결코 넘치지 않는다. 오로지 사랑만이 현재를 찰랑댈 수 있기 때문이다. 지상에서의 영원은 오직 사랑하는 순간에만 머문다. 사랑할 때에만, 현재는 흥건히 넘쳐흘러 과거와 미래를 아우르고 통합할 수 있다. 사랑하는 지금 이 순간에만 영원이 삶에 스며든다.
생의 아지랑이, 곧 사랑으로 충만해진 현재를 시인은 활짝 핀 꽃에 빗댄다. 생이 온통 그런 현재로 만발하기를 기원한다. “모든 순간이 다아/꽃봉오리인 것을,/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꽃봉오리인 것을!”(「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_김동규(철학자)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잎 하나로
품
그게 뭐니
몸뚱어리 하나
매지호梅芝湖에 가서
소리의 심연深淵 2
생명 만다라
어떤 평화
땅을 덮으시면서
풀을 들여다보는 일이여
낙엽
한 청년의 초상
외설
예술이여
신바람
어디 우산 놓고 오듯
상품 商品은 물신物神이며 아편
제주도에게
몸이라는 건
숲에서
○
깊은 가슴
나무의 사계四季
무를 먹으며
정들면 지옥이지
자기기만
학동마을에 가서
담에 뚫린 구멍을 보면
술잔 앞에서
빈방
오늘도 걷는다마는
시 창작 교실
귀신처럼
움직이기 시작하였도다
태양에서 뛰어내렸습니다
궁지 1
시골 국민학교
송아지
움직임은 이쁘구나 나무의 은혜여
쌀
모든 ‘사이’는 무섭다
이 열쇠로
가을에
흙냄새
자장가
새한테 기대어
막간幕間
천둥을 기리는 노래
두루 불쌍하지요
내 게으름은
생명의 아지랑이
밤 시골 버스
너는 누구일까
어스름을 기리는 노래
자〔尺〕
새로 낳은 달걀
문명의 사신死神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가난이여
아무 데로도 가는 게 아닌
잃어야 얻는다
손
내가 잃어버린 구름
해설 | 봄과 연애·김동규
기획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