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자유롭고 영원히 평안하길,
시대의 비극 위로 날아오를 새들을 향한 염원
1983년 무크지 『언어의 세계』로 문단에 데뷔한 이래 올해로 소설 이력 35주년을 맞은 작가 정찬의 소설집 2종이 동시에 출간되었다.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의 스물아홉번째 책으로 출간된 개정판 『완전한 영혼』과, 제25회 오영수문학상 수상작을 표제작으로 한 신작 소설집 『새의 시선』이다. 그간 정찬의 소설에 대하여 “인문학으로서의 문학에 충실한 소설, 소설이 인문학에서 차지해야 할 본연의 자리에 걸맞게 인간에 대한 탐구를 본격적으로 수행하는 소설”(문학평론가 홍정선), “성과 속, 혹은 본질과 현상의 중간에서 그들 사이의 분리를 넘어선 교통에 대한 추구”(문학평론가 권영민), “소설의 개념에 대한 고정관념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열린 의식의 소산”(문학평론가 장영우) 등 다양한 분석과 평가가 제출된 바 있다.
정찬의 여덟번째 소설집 『새의 시선』은 표제작인 제25회 오영수문학상 수상작을 포함하여 총 일곱 편의 단편을 수록하였다. 누구보다 시대의 아픔에 통감하여 그 슬픔의 한가운데로 투신하면서도, 단순히 비감에 젖어드는 손쉬운 길을 경계하고 섬세하게 육화한 소설적 언어로 미학적 성취를 이뤄내는 정찬 소설의 특장이 돋보이는 신작이다. 이 책의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이소연은 “(정찬이) 인간성과 신성을 구성하는 두 축인 ‘윤리’와 ‘아름다움’을 동시에 품고, 깊은 예술혼과 탐색의 열정으로 이들을 혼융시킨다”는 점을 지적하며, “그의 소설은 삶의 진실과 예술의 아름다움을 함께 성취하고자 하는 노력의 소산”이라고 평하기도 하였다.
비극에서 또 다른 비극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참상
형조가 술을 다시 마시기 시작한 것은 성당 건물이 철거되면서부터였다. 1994년 시화방조제가 완공되자 수자원개발공사가 사리포구를 포함하여 고잔 들판 일대에 신도시를 건설하기로 한 것이었다. 사리포구 언덕은 순식간에 폐허가 되었다. 그 폐허가 어떤 심리의 회로를 거쳐 8년 전 고문기술자에 의해 파헤쳐진 자신의 육신과 동일시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차명아로부터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형조의 살을 파헤치는 쇠붙이가 눈에 보이는 듯했다.
형조가 세상을 떠난 것은 1995년 12월이었다. 날씨가 몹시 추웠고, 눈이 흩날렸다. 그가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은 새였다. 새는 하늘처럼 보이기도 하고 바다처럼 보이기도 하는 푸른 공간을 날고 있었는데, 싱싱한 생명의 에너지를 품은 날개가 눈부셨다.
– 「사라지는 것들」, p. 105
이 책에서 다뤄지는 사건들은 다음과 같다: 1986년 김세진·이재호 분신자살 사건, 2009년 용산참사(「새의 시선」)/1999년 씨랜드 참사(「등불」)/2014년 세월호 참사(「사라지는 것들」 「새들의 길」 「등불」). 이 외에도 구체적인 사건으로 언급되지 않은 혈육의 갑작스런 실종이나 자동차 사고, 친구의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사망 등이 곳곳에 가득 차 있다. 정찬은 슬픔의 한복판에 온몸을 던지면서도 감상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반복되는 역사의 비극들 사이사이 놓인 연결고리에 집중한다. 효율만 찾는 자본주의, 폭력마저 불사하는 전체주의 사회에서 목숨을 잃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면 살아남은 자, 구조된 자는 가라앉은 자, 사라진 자를 어떻게 기억하고 살아갈 것인가. 이것이 집요하고도 치열하게 제기되는 이 소설집의 질문이다.
날개 없는 이들의 비상(飛上), 아름다움으로의 승화
“김세진이 새가 되었다고 생각하세요?”
“희망이죠.”
“아름다운 희망이군요.”
“무서운 희망이기도 하지요.”
“왜요?”
“불길을 견뎌야 하니까요.”
– 「새의 시선」, p. 58
사회적 자살이든 사고에 의한 사망이든,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이 끓어 넘치는 시대를 그리면서도 정찬은 아름다움을 품는다. 특히 이번 소설집에서는 공통적으로 새의 이미지가 자주 출현하는데, 완전한 자유를 향해 날아오르는 이미지가 시적이면서도 동시에 회화적으로 다가온다. 이 날개 없는 존재들의 상승은 막연한 낭만성이 아닌 세상의 비참 속 활활 타오르는 고통에서 비롯하였기에, 준엄하고 냉철한 현실 인식을 기반으로 한 진정한 미학적 경지에 이를 수 있었다. 고통의 심연에서 비로소 투명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는 지독한 역설을 통해 우리는 소설가 정찬의 단단한 세계관과 깊은 예술혼을 엿볼 기회를 만난다.
「작가의 말」에서 “만장이 펄럭이는 세계 속에서 넋을 피할 도리가 없었”다고 고백하는 소설가 정찬. 세계에 대한 그의 애증 어린 시선으로 시대의 문제를 안고 죽음으로 걸어 들어간 이들의 억울함을 망각의 영역에서 구제해내는 꾸준한 작업이 소설집 『새의 시선』에 한데 모였다. 이 문제작들은 ‘기억’을 현재의 시점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윤리적이면서도 미학적인 의미를 부여하며 우리를 좀더 나은 내일로 나아가게 할 것이다.
■ 책 속으로
“과거는 고정된 시간의 어떤 형태가 아닙니다. 현재의 시선에 의해 끊임없이 변하는 역동적인 생명체입니다. 상상은 과거를 현재와 연결시킴으로써 과거를 역동적인 생명체로 만드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합니다. 상상력이 없으면 과거에 갇혀버리는 거죠. 과거에 갇히면 현재의 시간이 의미를 가질 수 없습니다. 의미 없는 삶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어떤 비정상적인 행위도 의미 없는 삶보다 나으니까요.”
– 「양의 냄새」, p. 50고래의 눈동자가 보인다. 눈동자에 그녀가 비친다. 태아처럼 웅크리고 있다. 너를 내 몸 안에 품었을 때, 투명한 꽃 같은 너를 처음 느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한 생명이 또 하나의 생명을 품는다는 것이 그토록 기쁠 줄은 난 몰랐어. 그런데 이제는 네가 나를 품는구나. 하지만 난 너의 몸속에 오래 있을 수 없어. 너는 먼 여행을 떠나야 하니까. 고래의 눈동자에 눈물이 고인다. 눈동자에 비친 그녀의 모습이 흐려진다. 고래는 천천히 물결 아래로 사라진다.
– 「새들의 길」, p. 138“이 칼 …… 저에게 맡겨주시면 안 될까요?”
그녀는 칼을 내려다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왜요?”
“제가 갖고 싶어서요.”
그는 그녀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녀의 얼굴 속에 아내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아내의 얼굴 너머 투명한 빛이 보였다. 백합이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가로수 잎들이 바람에 지던 11월 어느 날, 외출한 아내가 백합 다발을 가득 안고 들어와 눈처럼 흰 화병에 담아 그의 방 창가에 놓았다. 그것이 아내의 마지막 선물임을 그때는 까맣게 몰랐다.
– 「등불」, p. 164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그의 몸에서 움직임이 나타났다. 미세한 움직임이었다. 아래로 늘어뜨린 두 손이 모이면서 정수리로 올라가더니 목, 가슴으로 내려왔다. 가슴에 머문 두 손이 겸손하고 간절했다. 잠시 후 그가 무릎을 꿇었을 때 병원에서 무릎 꿇고 소리 죽이며 울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의 이마가 땅에 닿았다. 이어 가슴과 배, 팔과 다리가 땅에 닿으면서 몸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그 모습이 슬펐다. 운명을 알 수 없고,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유한한 존재가 운명과 죽음을 내려다보고 있는 높은 존재를 향해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 자세로 간구하는 몰아의 모습이 불러일으키는 슬픔이었다.
– 「카일라스를 찾아서」, p. 196─ 아, 예술 작품을 창조한다는 것은 언제나 질 수밖에 없는 천사와의 싸움인 것을……
클로드의 탄식 어린 목소리가 들려오면서 풍경이 바뀐다. 목을 맨 클로드가 허공에 걸려 있다. 거무죽죽한 혀가 입 바깥으로 길게 늘어져 있고, 튀어나온 두 눈에는 핏줄이 서 있다. 얼굴은 완성하지 못한 자신의 그림 쪽으로 향해 있다.
– 「플라톤의 동굴」, p. 226
양의 냄새
새의 시선
사라지는 것들
새들의 길
등불
카일라스를 찾아서
플라톤의 동굴
해설 비참한 생에 신성이 깃들 무렵・이소연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