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학이 그려온 인간과 나무의 상호작용
문학적 징후와 창작의 근간을 밝히는 ‘나무의 수사학’
문학평론가이자 서강대학교 국문학과 교수인 우찬제의 새 연구서 『나무의 수사학』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래 꾸준히 한국 문학을 연구해온 저자는 이번 책에 5년 여간 집필해온 원고를 묶었다. 『나무의 수사학』은 한국 현대문학에서 인간과 자연, 사회적 징후로서 그려진 나무의 이미지를 조망하고 그 특성을 온전히 해석하고자 노력한다. 특히 계절에 따른 문학적 상상력의 변화를 감안하여 나무와 인간의 상호작용을 사계로 구분해 심도 있게 통찰한다.
1장에서는 봄-나무의 생명력을 다룬다. 정현종과 김지하의 시편 등에 나타난 나무의 생명 원리뿐 아니라 이청준의 소설에서 영감받은 화가 김선두의 그림을 통해 상호텍스트적 효과까지 살핀다. 2장에서는 여름-나무의 변신과 욕망을 다룬다. 김훈과 이승우, 한강의 소설 등이 묘사하는 나무를 통해 가능세계에 대한 인간의 꿈과 욕동의 양상을 세밀하게 고찰한다. 3장에서는 가을-나무의 반성과 성숙을 다룬다. 황순원과 이문구의 소설, 김광규의 시편 등을 통해 절정을 지나 순응에 접어든 나무와 인간 내면의 풍경을 나란히 관측한다. 4장에서는 겨울-나무의 치유력을 다룬다. 김정희의 「세한도」 영향 아래 씌어진 작품들과 박완서의 소설을 두루 거치며 자연 섭리에 따른 나무의 죽음과 신생의 의미를 인간사와 함께 탐문한다.
이처럼 『나무의 수사학』은 한국 현대문학에서 나타난 인간과 나무의 오랜 연관성뿐 아니라 관련 논의들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또한 창작의 배경과 그 아름다움을 섬세하게 되짚어볼 수 있다는 점만으로 문학 작품 속 나무 연구에 대한 의미 있는 변곡점이 될 것이다.
인간-나무, 무한한 가능성의 수형도(樹型圖)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나무는 인간과 밀접하게 교감해온 생명체였다. 깊게 뿌리 내린 몸으로 하늘을 향해 우뚝 서 있는, 자연적이고 신화적인 존재였다. 저자는 나무가 수많은 문학 작품 속에서 인간의 의식을 포착할 수 있는 통로로 묘사되어왔음을 지적한다. 또한 인간이 나무에 상상적인 접목을 시도함으로써 창의적인 예술의 세계로 진입해가는 과정을 설득적으로 묘사한다. 여기서 인간과 나무의 교감은 생태적 공생을 넘어 우주적 상상력이 발현되는 계기로써 작용한다.
나무가 우리를 찾아오건, 우리의 생각이 나무에 가닿게 되건 간에 인간과 나무 사이의 소통과 교감, 몽상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이야기의 나무들, 상상의 나무들은 새로운 우주를 향해 무한한 몽상을 계속하게 될 터이다. 아마도 이 책은 그 몽상 여행의 소로를 따라가며 인상적인 ‘가능성의 나무’들을 성찰하는 여정을 보일 것이다.
―「프롤로그」
나무 이상의 나무 이야기
시인 이형기는 “나무는 제자리에 선 채로 흘러가는 천년의 강물이다”(「나무」)라고 하며 나무의 정지 상태와 끊임없는 활동성, 고요와 소란, 찰나의 아름다움과 무궁무진한 생명력을 동시에 주목한 바 있다. 소설가 한강은 「채식주의자」에서 나무와 인간의 양상을 통해 식물성의 윤리를 다뤘다. 폭력적 현실로부터 식물적인 상태로의 회귀 충동을 미학적인 문체로 그려낸 것이다. 시인 김형영은 “나무는 내가 안은 게 아니라 나무가 나를 제 몸같이 안아주나니, 산에 오르다 숨이 차거든 나무에 기대어 나무와 함께 나무 안에서 나무와 하나되어 쉬었다 가자”(「나무 안에서」)라고 했다. 여기서 객관적으로 나무를 안은 것은 시인일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나무가 자신을 안아준다고 감각한다. 나무와의 연결을 통해 인간적 한계를 넘어선 물아일체의 상상력을 이룬 것이다.
이처럼 나무는 문학 작품 속에서 다양한 층위의 의미체로 역할해왔다. 인간 내면과 시대 의식을 담은 그릇일 뿐 아니라 창작의 은밀한 조력자로서도 기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무의 수사학』은 단지 나무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 책은 나무와 인간, 나무와 문학, 그리고 온 우주를 향해 뻗어나가는 예술적 상상력에 관한 탐구이다.
요컨대 나무는 나무 그 이상의 것이다. 그러기에 나무 안에서, 나무를 통하여, 나무를 넘어서, 인간의 상상력은 무궁무진 심화 확산될 수 있다. 그 나무의 이야기, 나무의 이미지, 나무의 상징 들은 때로는 신화적인 동일성을 확인해주기도 하고, 때로는 산뜻하고 전위적인 탈주를 통하여 참신한 새로운 경지를 보이기도 한다. 그러기에 나무의 수사학은 계속 탐문될 수 있는 가능성을 거듭 확인할 수 있다. 나무의 상상력의 지속과 변화가 계속되는 한, 나무의 수사학은 줄곧 의미심장한 탐문 영역으로 의미심장하게 작동될 것으로 생각한다.
―「에필로그」
■ 책 속으로
나무는 “사회 과정이나 집단 정체성을 나타내는 가장 뚜렷하고 강력한 상징”이다. 세계 미술사를 장식한 수많은 나무 그림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거니와, 한국 현대문학 또한 그런 맥락에서 접근하면 새로운 이해의 지평에 도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p. 13~14통상 뿌리는 땅속으로 파고드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눈으로 보기 어렵지만, 어떤 면에서 하늘을 향해 뻗어가는 가지들과 거울상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둥을 가운데로 하여 뿌리와 가지는 서로가 서로의 거울이 되는 것이다. 식물학자 르켄은 자신의 경험적 성찰을 바탕으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때로 일을 마친 후 나무 그늘 아래서 쉬면서 나는 땅과 하늘이 뒤바뀐 이런 의식의 반상실 상태로 빠져들곤 한다. 나는 하늘에서 탐욕스레 공기를 마셔대는 나뭇잎-뿌리에 대해, 그리고 지하에서 기쁨으로 몸을 떠는 경이로운 나뭇가지인 뿌리에 대해 생각한다. 나에게 식물이란 줄기 하나에 잎 몇 장을 단 존재가 아니다. 나는 식물을 언제나 감추어진 채 꿈틀거리는 제2의 가지를 가진 것으로 보곤 한다.”
—p. 55~56언어가 시의 핵심 매체임에 틀림없지만, 언어 또한 연금술사인 시인에 매달려 있기 마련이다. 시인의 관찰과 인지, 탐문과 인식, 비판과 성찰의 과정에서, 언어는 태생적 ‘불충족성’을 넘어서고자 한다. 이와 같은 시인과 언어의 상호작용을 통해 의미 있는 중얼거림의 지평이 형성된다. 이를테면 봄날 창밖에 산수유 꽃이 핀다. 꽃이 피는 형상은 우선 시각의 대상이지만, 이미 관음(觀音)의 경지에 이른 시인은 보는 것을 넘어 듣는다. 시각과 청각의 통감각으로 새로운 언어를 조형한다. 그 결과 “창밖에서 산수유 꽃 피는 소리”라는 한 줄이 얻어진다.
-p. 283
책머리에 5
프롤로그
1 나무의 이야기, 이야기의 나무 10
2 ‘가능성의 나무’와 가능성의 수사학 35
1장 봄‐나무 : 뿌리 내리기와 생명의 나무
1 봄–나무의 풍경 53
2 『세상의 나무들』과 황홀경의 수사학 62
3 나무의 율려와 우주목의 새싹 83
4 ‘남도’ 나무와 생명의 길 찾기 97
5 나무와 새의 합창, 그 상생과 구도(求道)의 나무 112
6 봄–나무와 생명의 뮈토스 137
2장 여름‐나무 : 변신의 수형도와 욕망의 나무
1 여름–나무의 풍경 143
2 나무의 욕망과 변신 152
3 무화과나무 속꽃의 은유 169
4 나무로의 변신, 그 식물성의 저항 181
5 보이는 나무, 보이지 않는 숲 191
6 여름–나무와 욕망의 뮈토스 210
3장 가을‐나무 : 난세의 풍경과 상처의 나무
1 가을–나무의 풍경 217
2 질곡의 역사와 상처받은 나무 225
3 곧은 나무와 굽은 나무의 역설 244
4 투명한 비움과 회귀의 나무 265
5 ‘가을 거울’로서의 나무와 생태 미학 278
6 가을–나무와 상처의 뮈토스 302
4장 겨울‐나무 : 봄을 그리는 나목(裸木)과 치유의 나무
1 겨울–나무의 풍경 309
2 「세한도」와 그 그림자 318
3 나무의 죽음과 신생을 위한 역설 339
4 치유와 재생의 나무 351
5 겨울 나목과 봄에의 믿음 363
6 겨울–나무와 치유의 뮈토스 383
에필로그
1 사계 뮈토스와 가능성의 수형도 387
2 나무의 상상력과 나무의 수사학 394
텍스트 399
참고 문헌 403
찾아보기 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