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한 현재형의 사유와 문장으로 읽는
오정희 문학 50년의 전경(全景)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독일 리베라투르 상 수상
한국 현대 여성소설의 원류이자 작가들의 작가, 오정희
1968년 단편 「완구점 여인」으로 데뷔한 이래, ‘소설 쓰기의 전범’ ‘작가들의 작가’ ‘단편 미학의 정점’ 등 숱한 명명과 함께해온 작가 오정희(1947~ ), 그녀의 주요 소설들을 새롭게 정비한 〈오정희 컬렉션〉(전 5권, 문학과지성사, 2017)이 출간되었다. 겹겹의 강렬한 이미지와 상징의 언어, 시적인 문체, 현실과 기억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치밀한 구성력을 바탕으로 오정희의 소설은 삶의 허기, 근원적인 불안과 슬픔에 사로잡힌 존재의 심연을 탐색하고 성찰해왔다. 거부와 순응, 질서와 혼돈, 안주와 탈출의 욕망이 쉼 없이 교차하고, 개인적 기억에서 신화적 차원의 ‘깊은 과거’로 읽는 이를 추동하는 오정희 소설은 읽은 이라면 누구나 사로잡히고 마는 그 “정밀하고 비밀스럽고 무서운 아름다움”으로 일찍이 한국 현대문학의 ‘살아 있는 신화’가 되었다. 특히 전후와 산업화를 거치며 한국 사회에 더욱 깊게 뿌리 내린 가부장적 질서 안에서 여성의 몸, 여성적 삶, 여성의 정체성이 겪는 내밀한 감정을 형상화하는 데 독보적인 성취를 이루며 이후 한국 여성문학의 원류로 자리 잡았다.
“1980년대 이후 한국 여성문학의 테마와 방법 대부분은 오정희의 작품을 근간으로 형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자의 내면독백을 앞세워 실제 현실과 환상의 구분을 모호하게 처리하는 수법, 단정적인 해석을 거부하는 시적 언어의 효과, 여성성을 통해 인간 존재에 대한 이해를 확장하는 작가의식. 이 모든 것은 오정희 문학의 인장(印章)인 동시에 시간을 뛰어넘어 1990년대 여성문학을 관통하는 주제의식이자 방법론이기도 했다. 1990년대 이후 한국 여성문학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거기엔 오정희 소설이 있다.” (심진경, 문학평론가/국민일보 2017.5.30)
“태어나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사라져버린 말들”(「파로호」),
그 여성의 언어를 발설하려는 절실한 욕망을 담다
지난 2013년 한국과 일본의 여성작가들이 함께한 대담에서, 여성적 자의식이 작품에 미치는 영향을 묻는 질문에 오정희는 “나 자신이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적 삶의 조건과 현실, 심리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으며 가장 절실하고 잘 다룰 수 있는 주제”라고 답한 바 있다. 역시 “소설은 미지의 독자를 향한 것이지만 결국 내게 들려주는 이야기다. 내 안에 아직 형상화되지 않은 무엇이 들어 있는지 궁금하고 기대하게 된다. 그것은 인생은 끝까지 다 마신 술병이거나 다 읽은 책이 아니라는 얘기”라며 자신의 소설에 대한 생각을 밝히기도 했다. “삶의 방식이자 사랑의 방식으로 문학을 택한”(2007년 『오정희 깊이 읽기』 대담에서) 작가의 이런 고백들 속에서 우리는 어렵지 않게, 예나 지금이나 이 사회에서 여성으로 글을 쓰는 것의 실존적 사회적 의미에 대한 작가 오정희의 고민을 짐작해볼 수 있다.
“오정희 문학 50년은 한국 문학이 여성적 인식을 새롭게 하면서 존재론적 성찰의 새로운 지평을 전복적으로 환기한 50년이고, 한국 소설이 새로운 담론과 문체로 정녕 문학적인 문체의 집을 지을 수 있었던 50년이었다.” (우찬제, 문학평론가)
겹겹의 문장에 복잡다단한 욕망을 아로새기며
삶의 진실과 인간 존재의 허무를 보여주는 작품집 5종 리뉴얼
이번 〈오정희 컬렉션〉을 새롭게 준비하는 과정에서 작가는 가까이는 10년 사이, 멀게는 40년 만에 다시 펼쳐든 교정지를 앞에 두고 문장들에 골몰했다. 더러는 정성을 기울여 문장을 다듬기도 했다. 여기에 초판 편집상의 오류를 바로잡고 본문 디자인과 책의 장정 또한 새로 꾸렸다. 이번 컬렉션이 오정희 소설이 익숙한 독자에겐 오랜 벗의 반가운 안부로, 교과서로만 접했던 독자에겐 오정희 문학의 진면목을 경험하는 계기로 다가가길 기대해본다.
“고립되어 있으면서도 가장 생생하게 살아 있는 오정희의 여성 캐릭터. 나는 그 여성들을 상상하며 일상을 견디고 허무에 지지 않으려 애쓰는 법을 배웠던 것 같다.” ―강영숙(소설가)
“삶의 끈질긴 생명력과 부조리함을 드러내는 장면 위로 자신을 임계점까지 몰아갔을 선생의 모습이 겹쳐 떠오른다. 나는 여전히 오정희 문학의 그늘 안에 있다.” ―하성란(소설가)
“어떤 진실은 왜 선명한 단문이 아니라 섬세한 이야기로 전해져야만 하는지, 소설이라서 가능한 방식으로, 소설적 경험을 하며 배웠다. 번번이 다시 깨쳤다.” ―김애란(소설가)
“시원(始原)과 정전이 된 소설은 마치 삶처럼 거기에 그대로 남는다. 오정희 소설이 내게 그런 것처럼.” ―편혜영(소설가)
“아이들의 상처를 선생은 일체의 낭만도 없이, 기적이나 구원에의 한 줌 희망도 없이 예민하고 정확하게 형상화한다. 그 가차 없음만이 우리를 생각하게 할 수 있다.” ―정이현(소설가)
■ 작가의 말
오래전에 쓴 자신의 소설들을 읽는 일에는 어느 정도 용기가 필요했지만 그것은 참 이상하고 특별한 경험이기도 했다. 과거로의 시간 여행인 듯 그 소설들을 쓰던 당시의 주변 정경, 한 문장 한 문장을 마음을 다해 써나갈 때의 정황 즉 생생히 살아나는 나의 모습과, 책을 낼 때마다 후기라는 형식을 빌려 토로한 도저한 결의와 문학에의 열정, 안타까움 들에 쓸쓸해지기도 하고 미소가 지어지기도 했다. 글을 쓰면서, 글을 읽고 생각하면서, 글로 인해 괴로워하면서 행복하고 고마운 인생이고 세월이었다.
다시 읽어보면서 지금이라면 조금 달리 쓸 것 같은 내용과 표현 들이 더러 짚어지기는 했으나 대체로 그때의 그 자리에 그대로 두기로 했다. 이미 지나온 길이고 그렇게 쓸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최선을, 나 자신을 인정하자는 생각이었다.
첫 창작집을 낸 이래 오랜 세월 문학과지성사는 늘 내게 정다운 곳이었다. 다만 순정한 마음으로, 따뜻한 배려와 후의에 감사할 뿐이다.
2017년 12월 오정희
불의 강
『불의 강』(초판 1977년)은 오정희의 첫 소설집으로 데뷔작 「완구점 여인」을 포함한 총 12편의 단편소설이 묶여 있다. 초기작의 대표적 특징인 ‘절망적인 자해(自害)의 심리 상태’ ‘자기 파괴적으로 끌려 들어가는 욕망’이 두드러지며, 황폐하고도 매혹적인 요기의 빛을 발산한다.
비틀리고 일그러진 불모의 세계, 일상의 친숙함과 아늑함 대신에, 삭막하고 메마른 먼지들로 뒤덮인 폐허의 잔해들만 나뒹굴고 있는 일상의 풍경들, 그 속에서 끊임없이 꿈틀거리며 헐떡이며 마음의 사막을 가로질러가는 결코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내출혈. (문학평론가 박혜경)
오정희의 소설에 투사된 이 ‘고독한 욕망의 내출혈’은 안식처로부터 끊임없이 벗어나 서성거릴 수밖에 없는 아내 혹은 남편 들(「불의 강」 「안개의 둑」), 쇠락한 몸 안에 갇힌 성욕과 고독에 짓눌리는 노인들(「적요」 「관계」), 메마른 관능의 세계에서 방황하는 인물들(「주자」 「완구점 여인」) 등 일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세계와 불화하는 많은 존재들로 구체화된다. 섬뜩하리만치 날카로운 적의를 감추고 살아가는 일상인들의 모습에서, 그 내면에 자리한 상상적 살의를 발견하고 가차 없이 날것으로 드러낸 오정희의 『불의 강』. 이 작품집은 철저히 고립된 존재들에게서 터져 나오는 그 생생한 욕망들을 통해 읽는 이의 감각을 예민하게 깨워나간다.
불의 강(江)
미명(未明)
안개의 둑
적요
목련초(木蓮抄)
봄날
관계
번제(燔祭)
직녀
산조(散調)
주자(走者)
완구점 여인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