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점, 예술의 근원이며 새로운 사유를 태동시키는,
그 보이지 않는 것에 무한히 다가가기 위한
불가능한 시도로서의 글쓰기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으며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러나 모든 인간 경험의 근원에 있으며
때문에, 나와 너의 공동 지대로서 빛나는 암점에 대한 탐구
언어, 몸, 타자 등에 관해 독창적인 사유를 전개해온 숭실대 철학과 박준상 교수의 신작 『암점』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블랑쇼의 사상 전반을 해석한 『바깥에서』, 예술과 타자의 관계를 탐구한 『빈 중심』, ‘우리의 주체성’이 갖는 정치성을 이야기한 『떨림과 열림』에 이은 네번째 저작이다. 박준상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으며 언어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그것, 나와 타자의 공동의 지대를 여는 그 무언가를 암점暗點이라는 단어에 응축시켜 탐사해나간다. 그는 모든 인간 경험의 근원에 있는 이 암점에서 새로운 사유가 태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그리고 극단적인 자본주의화 속에서 혹사당하고 방기된 각기 고립된 ‘나’가 ‘우리’로서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다.
또한 이 책에는 다양한 장르의 예술작품들에 대한 글이 여러 편 수록되어 있는데, 저자는 이것이 특정 이론을 정립하고 그에 의거하여 각각의 작품을 비평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경험’과 직접 대면하기 위한 사유의 통로로서, 다시 말해 “관념으로부터는 시작될 수 없는” 사유를 촉발시키기 위해 예술과 문학의 힘을 빌려온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고백한다. 박준상은 그렇게, ‘철학적인 것’과 ‘문학적인 것’ 사이에서 무한히 진동하며 질문을 겹겹이 쌓아가는 글쓰기를 통해 진리의 세계가 아닌 암점의 보이지 않는 지대 속으로 우리의 등을 떠민다. 문학평론가 강동호의 말처럼, 『암점』은 “예술에 대한 사유-글쓰기가 어떻게 그 자체로 예술적일 수 있는지를 경험하게 해주는” 하나의 “문학적 사건”이라고 할 것이다.
암점, 그 가능성의 영도를 위하여
사전적으로 암점은 망막에서 시세포가 없는 시야 결손 지점을 의미하지만, 이 책에서는 일종의 은유적 의미로 쓰였다. 저자는 ‘예술작품을 볼 때 우리는 과연 무엇을 보는가’라는 질문으로 문을 연다.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을 볼 때 우리는 화폭에 그려진 해바라기 외에 또 무엇을 발견하려고 하는가? 우리가 하나의 예술작품을 감상할 때 찾는 것은 감각기관을 통해 물리적으로 감각되거나 언어로 규정될 수 있는 것 그 너머에 있다.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 내면을 스치고 지나가는 시간의 흔적, 바로 암점. 이 책은 인간이 필연적으로 언어를 매개로 세계를 이해하고 표현하는 존재이고 그럼으로써 인간이 세계에 대해 주체로 서게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언어 이전의 것, 설사 언어의 규정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부터 새어 나와 멀리 달아나는 감각적인 것(정념)이 갖는 힘에 관심을 기울인다. 언어는 과거라는 시간에 종속될 수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사건의 한복판에 제대로 개입할 수 없다.” 나와 사물이 주체와 객체로서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타인이 내 몸을 건드리며 내게 남긴 어떤 흔적, 순간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져가는 오직 그러한 감각만이 사건의 실상을 드러낼 수 있다. 여기에 암점에 대한 사유가 갖는 급진적인 가능성이 있다.
타자, 가장 급진적인 ‘공동의 인간’
암점에 대한 사유는 이 책의 또 다른 키워드라고 할 수 있는 ‘몸’과 ‘타자’에 대한 사유로 전이된다. 어느 시점 이후로 우리는 ‘타자’의 문제(타자에 대한 윤리, 타자에 대한 절대적 환대 등)에 주목해왔지만, 이때의 타자는 나와 전적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의미에서의 타자, 나에 대해 완전히 초월적인 자였다. 그러나 과연, 타자와 나 사이에 어떠한 공동 영역도 없는가? 박준상은 이러한 물음을 5·18에 대한 물음과 포개놓는다. 타자는 ‘차이’의 영역에 방치되지 않고, 오히려 가장 급진적인 ‘공동의 인간’으로 제시된다(에마뉘엘 레비나스에 대한 비판). 저자는 5월 광주를 ‘몸이 몸에 공명했던 사건’이라고 말한다. 광주의 비참한 몸은 어떠한 언어의 접근도 허락하지 않으며, 자유·평등·해방이라는 보편적 기준들과 민주주의라는 일반적 기준에조차 저항한다. 그 몸은 타자의 몸, 생명이 기입되어 있는 실존으로서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동시에 모두의 것, ‘우리’에게 속한 것으로 남는다. “타자는 나와 함께 전前의식적인, 전언어적인 공동 영역에, 몸의 영역에 가장 깊숙이 들어와 있는 자가 된다.”
문학은 정말 ‘종말’에 이르렀는가?
: 자본의 언어에 저항하는 몸의 언어로서의 문학의 언어
이 책이 ‘나’에서 ‘우리’로의 전환을 강조하는 배경에는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사회를 개인주의에 근거한 역설적 전체주의라고 보는 저자의 진단이 자리 잡고 있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는 자본이 유일한 공동의 척도가 되며, 개인들은 그러한 자본의 요구를 내면화하여 고립된 채로 살아간다. “사람들을 고독에 빠뜨림으로써만, 반자본적 공동 영역을 빼앗아버림으로써만 그들을 전체에 통합시키는 체제.” 하지만 여기에는 이데올로기적 언어가 완전히 틀어막을 수 없는 구멍이 존재한다. 인간들 사이의 통로를 만드는 구멍, 의식과 차원을 달리하는 몸이라는 통로의 구멍. 이 책은 이러한 구멍을 드러내고 그 구멍을 통해 말하게 하기 위해 문학적 언어를 요청한다. 일반적 명제들을 의문에 부치는 문학의 언어, 즉 몸의 언어는 나와 타인의 공동 영역에 있을 ‘우리’의 몸을 증언한다. “과학과 철학과 종교의 이름으로 시도하는 모든 언어적 규정이 실패하는 곳에서, 아니면 그 불충분성이 명백해지는 곳에서 문학이 시작된다.” 저자는 가라타니 고진이 ‘문학의 종말’을 선언했던 것과는 달리 문학은 종말에 이르지 않았다고 말하며, 문학의 필연성을 다시 강조한다. 문학의 언어는 언어와 관념에 사로잡힌 ‘나’에게서 벗어나 서로에게 열리고 함께 공명할 수 있는 공간을 한껏 열어젖힌다.
책의 구성
이 책은 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1권 ‘예술에서의 보이지 않는 것’은 문학을 제외한 예술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빈센트 반 고흐와 파울 첼란의 공통의 영역을 찾아가며 암점에 대한 사유를 펼치는 논고들, 그리고 김경주의 극작품, 함정식의 영화, 양혜규의 미술작업, 안애순이 연출한 무용작품에 대한 평문 형식의 글들이 함께 실려 있다.
2권 ‘몸의 정치와 문학의 미종말未終末’은 문학과 관계된 글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타자: 공동의 몸」 「죽음과 마주하는 무감각—광주를 다시 응시하며」는 타자와 나의 공동 영역에 대한 질문을 5‧18에 대한 질문과 겹쳐놓으며, 「몸의 언어로서의 문학적 언어」 「문학의 미종말未終末—몸, 공空의 자리」는 문학적 언어의 정치적 가능성을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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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서 예술을 경험하는 것과 예술을 철학적으로 사유한다는 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이 책은 예술에 대한 경험과 사유가 조우하는 독특한 순간에 대한, 경험의 범주와 사유의 한계를 초과하는 공간에서 발생하는 특별한 사건에 대한 철학적 증언이다. 예술과 철학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익명의 시공간, 그 공동의 시간과 장소를 박준상은 암점暗點이라고 부른다. 유한성의 표지이자 무한성의 징표로서의 암점은 예술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철학적 사유의 태동을 일으키는, 어떤 가능성의 영도이다. 그것을 향한 박준상의 섬세하고도 아름다운 철학적 사유는, 예술에 대한 사유-글쓰기가 어떻게 그 자체로 예술적일 수 있는지를 경험하게 해주는, 문학적 사건이다._강동호(문학평론가)
박준상의 『암점』은 예술작품의 체험을 특정성에 대한 어떤 불일치의 체험으로 성찰하도록 한다. 인간의 결정이 텅 비어 있는 시야에서 위성처럼 떠돌며 새로운 술어들로 가득 차 있는 그의 글쓰기는 인간이 인간에게 가장 위협적으로 발생되어지는 인질극처럼 낯설고 새로운 사유의 사건으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감각기관이 고장 난 낱말들, 지워지는 이미지들, 소리 없는 음악, 불협화음의 공간들은 낯설지만 그가 예술작품 속에서 발견해온 호명술로 우리 앞에 매혹적으로 나타난다. 눈에 보이는 대상에 의존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파동을 따라가며 거의 무차별적인 텅 비어 있는 감정과의 내연관계를 만들어가며 태어나는 사유 속에서 우리는 출렁인다._김경주(시인)
본문 속으로
암점暗點은 망막에서 시세포가 없는 시야 결손 지점을 의미하지만, 이 책에서는 물론 그러한 일반적인 의미가 아니라 일종의 은유적 의미로 쓰였다. 말하자면 여기서 암점은 눈으로부터 몸으로 이동(장소 이동, 은유, 즉 메타포가 본래적으로 의미하는 바)한다. 이 단어는 여기서 보이지 않는 대상이 아니라, 주객 분리 이전 또는 이후에—따라서 우리의 어떤 조건하에서—볼 수 없게 되는 동시에 보이지 않는 것, 보다 정확히, 볼 수 없게 되기에 보이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암점 1, 5쪽)
우리가 흔히 ‘영감’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술가의 시간과의 싸움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예술적 영감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선물이 아니고 일종의 싸움이다. 모든 예술은 사격과 비슷하다. 모든 예술은 시간의 포착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는 점에서 사격과 유사하다. 그리고 그 사실이, 예술의 분야를 불문하고, 많은 예술가들을 창조의 고통으로 내모는 원인을 설명해준다. 즉 그들은 보이지 않고 규정되지 않기에 붙잡을 수 없는 것을, 즉 시간을 붙잡아야 하는 불가능성과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암점 1, 31~32쪽)
하나의 이미지가 아무리 아름다울지라도, 아무리 안정된 구도 위에 놓여 있을지라도 거기에 동요를 가져다주는 시간. 세계가 아무리 견고하고 아무리 이해의 범위 내에 들어오는 것처럼 보일 때라도 그 상관항인 ‘나’의 한계를, ‘나’의 구멍(유한성, 따라서 죽음, 또는 순간・현재에서의 삶)을 가리키는 그것, 따라서 세계의 총체성과 완결성을 영원히 불가능하게 만드는 빈 곳을 드러내는 그것, 그러나 그것은 삶의 한계를 가리키는 데에 따라, 또한 삶이 분출되고 있음을, 생성되고 있음을 말하지 않는가?(암점 1, 58쪽)
정확히 말한다면, 광주의 비참한 몸은 어떠한 언어의 접근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언어에, 모든 관념에, 모든 의미 기준에, 원칙적으로는 자유・평등・해방이라는 보편적 기준들과 민주주의라는 일반적 기준에조차 저항한다. [……] 그 몸은, 그 몸의 죽어감은 어떤 고귀한 관념 위에 올라타서 고귀해지기를 바라지 않으며, 어떠한 관념을 통해서도 보편화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 몸은 비참함 그 자체로서만 영광에 이르며, 더 낮아짐으로써만 더 드높아지고, 더 유일하고 더 단독적이 됨으로써만 공동의 것이 되며, 더 고독하고 더 고립됨으로써만 ‘우리’를 말한다.(암점 2, 46쪽)
몸의 말은 불가능한 것, 즉 어떠한 주체도 홀로 자기 안에서 생성시킬 수도 완결시킬 수도 결론에 이르게 할 수도 없는 것이다. [……] 그 사실의 징표가 『소년이 온다』의 경우 그 언어가 남기는 최후의 효과인 아픔이다. 슬픔도 연민도 아닌 아픔, 어떠한 카타르시스도 가져오지 않는, 해소되지 않는 아픔, 가라앉지 않는 상처의 흔적, ‘내’게 어떠한 안전하거나 안정된 지점․시점도 내주지 않는 응결된 정념의 조용하지만 냉혹한 떨림.(암점 2, 50~51쪽)
몸의 주체성, 그것은 왜 주체성인가? 몸 자체가 사회 일반 또는 일반 사회로부터, 인간 일반으로부터, 사회적 기준들 일반으로부터 벗어나 고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몸 자체가 그 모든 일반에 저항하기 때문이다. 돼지의 울음, 돼지의 고독, 즉 몸의 고독이 몸의 주체성을 ‘말하며’, 공의 자리에서의 텅 빈 고독일 수밖에 없고, 그 공은 바로 사회 일반과 자아 일반의 의식적・관념적 울타리 한가운데 뚫린 구멍[空]일 수밖에 없다.(암점 2, 147~148쪽)
그러나 문학은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인간의 최저점(밑바닥)으로 하강해야 한다. [……] 사회의 높은 위치의 반대 지점인 최저의 위치에 놓인 몸은, 그 인간-동물의 몸은 어떠한 지적인 것도 도덕적인 것도 이상도 제시할 수 없으며, 다만 하나의 한계를, 실존적 한계를 ‘말한다’. 즉 말하지 않고 침묵으로 되돌려놓는다. 즉 그 한계를, 무 그 너머로까지 치닫는 자신의 고독을, 공을 감지하고 우리로 하여금 감지하게 한다.(암점 2, 154~155쪽)
1권 예술에서의 보이지 않는 것
머리말
I
원음악源音樂
불협화음不協和音
II
무의미해지기
시차時差의 무대
다르게 기도하기
찢김과 몸 그리고 언어
이미이자 아직—교차시간에서의 몸
2권 몸의 정치와 문학의 미종말未終末
I
타자: 공동의 몸
죽음과 마주하는 무감각—광주를 다시 응시하며
II
시의 자기혐오
시의 불꽃
몸의 언어로서의 문학적 언어
문학의 미종말未終末—몸, 공空의 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