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이야기하는 담대한 관찰의 기록,
더 나은 나를 만들어가려는 시인의 첫걸음
임솔아의 첫번째 시집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됐다. 시인은 2013년 중앙일보신인문학상 시 부문으로 등단한 후, 2015년 제4회 문학동네 대학소설상을 수상하며 장편소설 『최선의 삶』을 출간한 바 있다. 현재 시와 소설을 함께 쓰고 있다.
첫 장편소설을 통해 가출 청소년들이 마주한 사회와 그들 사이의 갈등, 폭력 등을 단호한 시선으로 풀어냈던 임솔아는 이번 시집에서도 날카롭고 예민한 감각을 덤덤하게 표현해냈다.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에는 불합리함과 폭력으로 얼룩진 세상 속에서 차마 적응하지도, 타협하지도 못한 채 놓여 있는 나와 그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편들이 다수를 이룬다. 이에 더해 세상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나아가 한 발 한 발 내 안의 갈등들을 풀어가려는 시도를 담은 시들은 글로써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시인의 의지를 충실히 담아냈다.
지옥 같은 별, 나를 둘러싼 세상에
남겨진 나와 또 다른 나이곳을 떠나본 자들은
지구가 아름다운 별이라 말했다지만
이곳에서만 살아본 나는
지옥이 여기라는 걸 증명하고 싶다나를 여기에 둔 채 나는
저곳으로 다시 빠져나가서
―「아름다움」 부분
창문을 열면 창 안에 서서 창문을 세어보는 나를 볼 수 있다. 알알이 유리가 빛나고 있다. 불을 끄면 창밖에 서 있는 나와 창 안에 서 있는 내가 함께 사라질 수 있다.
―「석류」 부분
이 시집의 화자에게 이 세상은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 다른 사람들에겐 “아름다운 별”이지만, 나에게는 곧 “지옥”일 뿐이다. “기린에 기린이 없”고, “지구에 지구가 없”고, “사람에 사람이 없”는 갖은 모형/가짜들이 가득한 세계 속에서 나 역시 “사람 같은 모형”, 사람이되 사람이 되지 못한 채로 세계 속에 놓여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화자는 자신과 세계 속의 자신을 분리함으로써 ‘나’를 구성하고 있는 세계를 인지한다. 즉, 나와 내 주위를 둘러싼 세계와의 간극을 확인하고, 객관화하는 과정을 통해 세상 속 자신의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임솔아는 “창문” “액자” “사진” “티브이” 등 몇몇 단어들을 끌어들인다. 창 안의 ‘나’가 창밖의 ‘나’를 보고, 바다를 액자에 걸고, 그 “바다에 가라앉는 나”를 지켜보는 등 시적 화자의 행동은 내가 속한 세상을 재현하면서, 그 밖에 또 다른 ‘나’를 위치시킴으로써 정해진 틀 안의 나를 관찰하도록 한다. 이 몇 가지 장치를 활용한 시쓰기는 갈등과 폭력이 난무한 세상에서의 나(모형으로서의 나)와 그것을 바라보는 나를 차분히 분리해내고 있다. “나를 여기에 둔 채” “나는/저곳으로 다시 빠져나”감으로써 사회의 울퉁불퉁함을 명확히 바라보되 무던한 표현들로 시를 채우는 것이다.
“나는 죽었구나 그랬는데
사라지고 있는데
살 것 같다.”종종 착한 사람 같다는 말을 듣는다.
[……]
나의 선의는 같은 말만 반복한다. 미래 시제로 점철된 예보처럼 되풀이해서 말한다.
선의는 잘 차려입고 기꺼이 걱정하고 기꺼이 경고한다. 미소를 머금고 나를 감금한다.
창문을 연다. 안에 고인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을 창밖으로 민다.
오늘 날씨 좋다.
―「예보」 부분
저 쥐 좀 봐, 누구는 잉어 같고 누구는 쥐새끼 같겠지.
사람들을 따라갈수록 나는 거짓말이 되어가.[……]
바닥까지 가라앉고 나서야 시체는 다시
물 위로 떠오른다고 한다. 나는 의자들과 함께 젖었고 드디어 걸어갔다.
―「중계천」 부분
임솔아가 세상을 인식하고, 그 세상과 자신 사이의 갈등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과정에는 그에 대한 행동이 뒤따른다. 날씨 예보처럼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이야기만 되풀이해서 말하던 ‘나’, “종종 착한 사람 같다는 말을 듣”던 ‘나’는 창문에 갇혀 있었던 셈인데, 이제 그 창문을 열고, 그 안에(화자의 내면에) 고여 있던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을 창밖으로” 밀어내는 것이다. 사람들이 착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사람이지만 창문을 열어 들여다보면 같은 말만을 수동적으로 반복하는 내가 있고, 결국 내가 아닌 나를 밖으로 (착한 사람들과 함께) 밀어냄으로써 나는 내가 될 수 있다. 세상의 호의적인 평가에 타협하지 않음으로써 나는 내가 된다.
이 같은 화자의 적극적인 행동은 시집에서 다른 방식으로 여러 번 등장하는데 결국 하나의 이야기로 모아진다. 얼룩진 흰 티셔츠에 치약을 묻혀 얼룩을 지우고(「기본」), “바다에 가라앉”아 부식되어버린 나(「아름다움」)는 “불가능을 보여주는 서커스 단원이 되고” 싶고, “잉어를 따라 헤엄쳐가는 쥐처럼 숨을 거스르고 싶”다며, “드디어”(「중계천」) 걸어간다. 세상의 부조리를 인식하는 데에서 나아가 다시 걸어 나가는 화자의 모습은 지옥 같은 세상을 아주 작은 움직임으로 계속해서 바꿔가겠다는 어떤 의지를 상상케 한다. 특히 시집의 뒤표지에서 “젠더, 나이, 신체, 지위, 국적, 인종을 이유로 한 모든 차별과 폭력에 반대”한다는 임솔아 시인 자신의 강력한 목소리와 같이 읽는다면, 시집 안의 화자와 시집 밖의 시인이 내고 있는 명확한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다. 개인의 행동이 모든 것을 바꾸지 못하더라도, 이 세계 속에서 내 안의 구김을 해결하고, 어떻게 살아갈지를 결정하는 과정의 시작을 이 시집은 보여주는 셈이다.
■ 시집 속으로
오늘은 내가 무수했다.
나를 모래처럼 수북하게 쌓아두고 끝까지 세어보았다.
혼자가 아니라는 말은 얼마나 오래 혼자였던 것일까.
―「모래」 부분
사라지고 있는데
살 것 같다.나를 살게 하는 것들과
나는 만나본 적이 없다.
―「여분」 부분
신도 인간을 이렇게 계속 찾아다닐 것이다. 그래서 집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아프냐고 물어주길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 잃어버렸을 뿐 유실물 보관소의 물건들은 누구도 버린 적이 없었다.
―「승강장」 부분
비탈길을 마구 굴러가는 수박처럼 나는 내 몸이 무서워지고. 굴러가는 것도 멈출 것도 무서워지고.
공중에 가만히 멈춰 있는 새처럼 그 새가 필사적으로 날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처럼. 제자리인 것 같은 풍경이 실은 온 힘을 다해 부서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모래들이 있다.
―「옆구리를 긁다」 부분
누구야, 왜 따라와. 밤길이 걱정이 되었어. 나를 빤히 쳐다본다. 내가 모르는 내 비밀이 발끝에 엉겨 붙는다. 내가 모르는 내 비밀이 덥석 자라난다. 내 행세를 하기 시작한다.
―「뒷면」 부분
■ 뒤표지 글
핏줄이 입술을 뚫고 밖으로 나왔다. 고구마 순처럼 자라나기 시작했다. 핏줄에서 잎사귀 같은 것이 생겨났다. 수백 개의 잎사귀들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오 년 후에도
십 년 후에도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자는 말과
눈이 와,
눈이 많이 와,
죽여버릴 거야,
같은 말들이 우수수 피어났다.
벌레들이 핏줄을 타고 올라와 잎사귀를 갉아 먹었다. 구멍이 났고 찢어졌다. 새들이 날아왔고 새들이 집을 지었다. 아침마다 나는 새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가을에는 잎사귀들이 떨어졌다. 겨울에는 새들이 날아갔다. 나는 동그랗게 웅크리고 앉아 사라진 입술에 대해 쓰기 시작했다.
젠더, 나이, 신체, 지위, 국적, 인종을 이유로 한 모든 차별과 폭력에 반대합니다.
■ 시인의 말
언니가 열쇠라는 것만 알았지.
방 열쇠를 나눠 가지면 된다는 걸 나는 몰랐어.
내 방에선 끔찍한 다툼들이 얽혀
겨우겨우 박자를 만들어내.
언니는 말했지.
이런 세계는 풀 수 없는 암호 같고,
그런 건 낙서만큼의 가치도 없다고.
그건 얼마나 옳은 생각인지.
언니와 나 사이에 사는 사람들과
열쇠를 나누어 가지면 좋을 텐데.
2017년 3월
솔아가
1부
석류 /모래 /아름다움 /보풀 /예보 /벤치 /기본 /두꺼비와 나 /여우 /오월 /동물원 /여분
/같은 /악수 /나를 /중계천
2부
아홉 살 /환승 /승강장 /티브이 /모형 /계속
3부
개처럼 /렌트 /옆구리를 긁다 /케빈 카터 /살의를 느꼈나요? /어째서 /하얀 /익스프레스 /첫 밥솥 /멍 /대신 /동시에 /뒷면 /가방 /비극 /그래서 그랬다 /복성루 /예의 /보일러실 /만진다 /다음 돌 /별로
4부
가장 남쪽 /룸메이트 /노래의 일 /빨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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