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길만 걷고 싶지만, 도무지 독하지 않을 수 없는 열다섯 인생!
여기, 인생이 파란만장한 한 소녀가 있다. 나이는 열다섯, 이름은 한동이. ‘그 나이에 엄살은!’이라는 빤한 말은 넣어두자. 개구리 올챙이 적 시절을 잊은 우리 어른들의 오해와 속단일 뿐.
두 권의 소설집과 다섯 권의 장편소설을 통해 고유의 세계를 실현해온 구경미 작가가 문학과지성사에서 그의 세 번째 청소년소설 『파란만장 내 인생』을 펴냈다. 제목 그대로 ‘파란만장한’ 열다섯 성장통을 온몸으로 겪고 있는 주인공 ‘한동이’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그 친구들의 이야기다. 소설은 주인공 ‘한동이’와 그 친구들의 시점으로 전개되며, 읽는 내내 그들을 둘러싼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소설을 더욱 재미있고 생동감 넘치게 만드는 개성 강한 주변 인물들이 작품 곳곳에 두루 포진해 있다는 점도 이 책의 장점이다. “과연 구경미만큼 가볍고 재밌고 능글스럽게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 건들건들 딴청 떨듯 그러나 진지하고 성실하게, 구경미가 펼쳐 보이는 유머의 향연……”(김숨)이라는 평에서도 짐작되듯, 구경미 특유의 능청스러운 유머는 이 소설에서도 여전히 빛을 발한다. 따라서 독자들은 주인공 ‘한동이’를 비롯한 열다섯 아이들의 진지한 고민과 한숨에 마음 한편 공감하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삐죽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다.
그럼에도 『파란만장 내 인생』의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결코 과장이거나 엄살인 것은 아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누구에게나 삶은 정답 없는 문제지처럼 부려져 있고, 그것을 푸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비단 열다섯 인생이라고 예외겠는가. 우리가 흔히 예상하는 학업과 성적, 진로 문제 이 외에도 그들에게는 나름의 디테일한 고민과 갈등이, 그리하여 속속들이 말 못 하는 속사정이 앞으로 살아가야 할 시간만큼 켜켜이 쌓여 있다. 마냥 어려 보이지만, 하루가 다르게 몸도 마음도 성장해가는 아이들. 그들을 향한 작가 구경미의 따뜻한 관심과 신뢰, 애정 어린 시선이 이 소설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이 책이 웃음과 재미는 보장! 그에 더해 깊은 공감과 감동을 독자들에게 선사하는 까닭이다.
“요즘 부쩍 더 느낀다. ‘우리 땐 안 그랬는데 요즘 아이들은……’ 하면서 혀를 차는 어른들의 ‘우리 때’보다 요즘 아이들이 훨씬 더 성숙하다는 것을. ‘우리 때’보다 더 팍팍한 세상을 살면서도 꿋꿋하게 더 잘 헤쳐 나가고 있다는 것을.” _「작가의 말」에서
아이들은 ‘관계’를 통해 성장한다
소설은 ‘마녀 할머니의 독 탄 떡볶이집’을 주요 배경으로 펼쳐진다. 주인공 ‘한동이’는 ‘마녀 할머니’의 손녀딸로, 엄마가 죽고 홀로 된 아빠가 재혼한 이후 집을 나와 할머니 댁에 얹혀산다. 할머니의 떡볶이 가게는 ‘동이’ 그리고 동이의 절친 ‘수민’과 ‘아영’의 아지트다! “나에게도, 아니 우리에게도 떡볶이나 닭꼬치를 씹으며 하루 일과를 정리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단 말이다”라는 ‘동이’의 항변이 그럴싸해 보이지 않는가.
“뭔 놈의 인생이 이리 심심하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할머니와 달리, ‘동이’의 인생은 시끌벅적, 요란하기 그지없다. ‘마녀 할머니’라는 별명이 무색하지 않게 독한 말들을 스스럼없이 쏟아내는 할머니, 세상 착하기만 한 아빠와 그냥 싫은 새엄마, 집안의 독재자인 막무가내 큰아버지에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친구들까지…… 이렇듯 주인공 ‘동이’를 비롯해 주변의 다양한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나름의 사연을 가지고 살아 숨 쉬며 소설 속에서 좌충우돌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만들어낸다. “인물들은 자기들끼리 찧고 까불고 떠들 뿐 나를 끼워주지 않는다. 나는 유리창 밖의 제3자가 되어 그들을 지켜보고, 그들의 대화를 엿듣는다”라는 작가의 말처럼, 어느새 그들은 우리 곁에 친구처럼 가족처럼 다가와 있다.
다양한 인물들이 뿜어내는 개성과 각각의 사연은 주인공 ‘동이’를 중심으로 얽히고설키며 크고 작은 사건사고들을 일으킨다. 부잣집 철없는 막내딸 ‘수민’은 자신을 못 믿고 감시하는 엄마와 냉전 중이고, 아빠 없이 미용실을 운영하는 엄마와 사는 ‘아영’은 사사건건 모든 일에 참견하는 동네 아주머니들 때문에 입을 다물어버리기도 했다. 늘 큰소리에 폭력을 행사하는 막무가내 큰아버지는 주인공 ‘동이’를 잠재적 문제아로 낙인찍으며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다. 어디 그뿐인가. 큰집 사촌오빠는 퇴학당하기 직전이고, 개중 모범생인 사촌언니는 가족 모두의 뒤통수를 치고 가출을 감행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동이’를 끌어들여 가출을 방조하게 한 건 덤!
꽃길만 걷고 싶지만, 도무지 독하지 않을 수 없는 열다섯 ‘동이’의 인생! 그러나 소설 속 주인공들은 자신들에게 닥친 많은 문제를 결코 외면하거나 회피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어느 상황에서나 상처와 갈등은 있기 마련이고,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미룰 수도, 피해서도 안 되는 자기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다. 때론 어른들의 불신과 의심에 반항하기도 하고, 기존의 규범과 가치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며 자신들만의 세계를 꿋꿋이 구축해간다. 때론 그것이 하찮고 보잘것없는 시도에 그칠지라도.
‘함께’여서 즐거운 열다섯 인생
동이, 수민, 아영…… 말 그대로 파란만장한 열다섯 시기, 이들은 ‘함께’이기에 즐겁고 더욱 성장해간다. 이들의 인생은 모르는 것투성이,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지만 함께 이야기하고 부딪쳐가며 세상을 향해 서툰 한 걸음을 내딛는다.
아빠에게 엄마는 “놓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은 사람”이었다고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는데, 그 말은 토씨 하나 안 빼놓고 새엄마에게도 유효하다. ‘동이’는 ‘사랑’이 무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또래 친구들이 아이돌 때문에 치고 박고 싸우다가 급화해하기도 하는 모습에 아빠의 사랑을 곱씹어본다. 새엄마가 ‘그냥’ 싫은 것은 자신마저 엄마를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엄마를 “굴러온 돌”이라고 스스럼없이 내뱉는 할머니의 말은 너무 심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새엄마에게도 자식이 있었으면 아빠도 그 아이 때문에 상처를 받았을까,라고 ‘동이’는 입장을 바꿔 고민해보기도 한다. 사촌언니 ‘동주’의 가출로 인해 ‘동이’ 또한 의도치 않게 피해를 입지만, 절친 ‘수민’ ‘아영’과 함께 언니를 찾을 계획을 세우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제시한다. ‘수민’의 다이어트 때문에 세 친구 모두 수민이 엄마에게 빚을 지게 되었지만, 어른들에게 손 벌리기보다 스스로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인다. 이렇듯 열다섯 꽃 같은 나이에도 숱한 갈등과 문제 상황은 결코 끊이지 않지만, 그들은 ‘마녀 할머니의 독 탄 밥’도 함께 먹어주는, 모름지기 친구이기에 ‘파란만장한’ 인생도 이겨낼 수 있다.
“난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는데?”
“이해는, 생각한다고 되는 게 아냐.”
“그럼?”
“그냥…… 하는 거지.”
‘동이’와 ‘수민’의 대화가 보여주듯, 세상을 향해 한발 한발 나아가는 이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그저 ‘이해’ 아닐까. 어른들의 잣대로 재단하지 않고 따뜻한 관심과 애정, 공감과 신뢰를 보여주는 것. 그것은 비교와 경쟁, 피상적인 관계가 난무하는 팍팍한 세상에서 아이들이 “건강한 기운과 에너지로” 오늘을 살아가는 데 힘을 불어넣어줄 것이다.
■ 책 속으로
나에게도, 아니 우리에게도 떡볶이나 닭꼬치를 씹으며 하루 일과를 정리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단 말이다. 일의 원인과 결과를 따져보고, 미래를 예측하고,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장소가 간절하게 필요했다. 오늘처럼 사건이라도 하나 터지는 날이면 더욱 그랬다.
“난 그 애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떡볶이 접시를 넘기며 수민이가 말했다. 나는 접시를 넘겨받은 후, 고개를 돌려 수민이를 보았다.
“응. 농담 아니고 진짜.”
묻지도 않았는데 수민이가 말했다.
“난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는데?”
“이해는, 생각한다고 되는 게 아냐.”
수민이가 내 손에서 접시를 가져갔다.
“그럼?”
“그냥…… 하는 거지.”
입안 가득 떡볶이를 넣고 우물거리며 수민이가 말했다. (8~9쪽)
메뉴판 아래에는 ‘임산부나 노약자, 심신 허약자는 사망에 이를 수도 있으니 메뉴 선택 시 매우 주의하시기 바랍니다’란 문구가 A4 용지에 인쇄, 코팅되어 떡하니 붙어 있었다. 물론 할머니 소행이었다.
“그 정도로 맵지는 않아.”
아무리 임산부나 노약자라 해도 떡볶이가 매워서 죽었다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나는 옳은 소리를 했을 뿐인데, 돌아오는 대답은 걸작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독한 줄 아냐?” (15쪽)
그렇다면 나는…… 나는 내 감정과 상관없이 그 여자와 절교하거나 친교할 수 있을까.
내가 그 여자를 거부하는 건 비단 아빠와 결혼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보란 듯이 집 안에서 엄마의 흔적을 모두 지워냈기 때문이기도 했다. 엄마가 쓰던 가구들을 모두 내다 버리고 새 가구들로 집 안을 채웠다. 장롱도 텔레비전도 냉장고도, 하다못해 세탁기까지 모두 다 바꿨다. 벽지도 새로 발랐다. 장판도 갈았다. 천장의 등도 새 디자인으로 바꿔 달았다. 바뀌지 않은 건 거실 바닥뿐이었다. 그러나 거실 바닥은 하도 쓸고 닦아서 엄마의 냄새가 조금도 나지 않았다. 집 안 분위기가 너무 달라져서 우리 집이 전혀 우리 집 같지 않았다.
아빠와 동생은 새집으로 이사하기라도 한 듯 마냥 좋아했다. 집 안에서도, 아빠와 동생의 기억 속에서도 엄마는 지워졌다.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인 것처럼. 완벽하게. 엄마를 기억하는 건 나뿐이었고, 그래서 나는 외로웠다. (85쪽)
나는 거기까지 듣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마음이 복잡했다. 동주 언니도 걱정됐고, 그 여자가 한 말도 얼마간 충격적이었다. 재혼한 건 아빠나 그 여자나 마찬가진데, 아빠는 백년손님이고 그 여자는 굴러온 돌 취급이라는 말 때문이었다. 맞다, 아니다,를 떠나서 나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문제였다. 만약 그 여자에게도 자식이 있었다면 내가 그 여자에게 하는 것처럼 아빠를 미워하고 증오했을까. 아빠가 보기 싫어서 집을 나가버렸을까. 만약 그런 상황이었다면 아빠는 상처받지 않고 지금처럼 잘 지낼 수 있었을까. (125쪽)
우리는 청소를 시작했다. 가게 구석구석, 샅샅이. 탁자는 행주로, 바닥은 물걸레로, 벽은 삶아 빤 걸레로. 할머니가 날이 퍼렇게 선 도끼눈을 뜨고 우리를 감시했다. 청소가 다 끝나기도 전에 손님들이 밀려들었다. 가게는 할머니 혼자 할 때보다 더 붐볐다. 인근 학교들에 소문이 다 났다. 학생들 사이에 우리는 한 번은 반드시 관람해야 하는 진기한 구경거리가 되어 있었다.
손님이 있든 없든 우리는 앉을 수 없었다. 손님이 부르면 공손한 표정으로 즉시 튀어가야 했다. 손님이 떠난 자리는 잽싸게 치워야 했고, 싱크대가 넘치기 전에 설거지를 해야 했다. 물이며 고추장, 간장, 물엿 같은 무거운 것들을 날라야 했고, 수십 가지에 달하는 재료들을 알파고처럼 신속 정확하게 손질해서 대령해야 했다. 그리고 그 모든 일들이 우리가 가장 취약한, 속도와의 싸움이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든, 모든 행위 모든 장소에 할머니의 눈과 잔소리가 있었다. (189쪽)
할머니는 툭하면 내게 시비를 걸었다. 틈만 나면 놀렸다. 나를 놀리는 데서 삶의 의미와 재미를 찾는 게 분명했다. 내가 없으면 심심해서 어떻게 살려고 걸핏하면 쫓아내겠다고 협박이었다. 그래도 본인 파악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했다. ‘마녀 할머니의 독 탄 떡볶이’라니.
“그 마녀 할머니 마실 가신다. 저녁 먹고 올 거니까 기다리지 마라. 아 참, 밥할 때 독 탔는데 처먹고 죽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라.”
손녀에게 태연하게 그런 말을 내뱉고는 밖으로 나갔다. 우리 할머니가 이런 사람이다. 하고 싶은 말에 거침이 없는 사람. 상대방에게 내가 어떻게 보일까 개미 눈물만큼도 신경 쓰지 않는 사람. 손녀가 먹을 밥에 거리낌 없이 독을 타는 사람.
나는 아영이와 수민이에게 전화해서 우리 집으로 오라고 말했다. 독 탄 밥 정도는 함께 먹어줘야 친구지. (195쪽)
나 한동이, 도대체 사랑을 모르겠다
눈에 띄고 싶지 않아
우리는 모두 잠재적 문제아?
절교와 친교의 패러다임
난 아니야
좀 즐거우면 안 돼?
(배)고프니까 청춘이다
노동과 노예 사이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