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평정을 위하여”
“평온한 적요”를 누릴 시간,
‘노화-방지anti-aging’가 아닌 ‘노화의 기술art of aging’을 권하다!
2016년 지난여름, 책과 함께한 소년기와 청년기 그리고 중장년을 지나 노년에 이른 생의 경험과 회한을 담은 글 모음집 『기억의 깊이』를 낸 김병익이 이번에는 서평/칼럼집 『시선의 저편—만년의 양식을 찾아서』를 펴냈다. 이 책은 2013년 여름부터 『한겨레』에 ‘특별 기고’라는 이름으로 써온 글들을 엮은 것으로, 은퇴 후 마음대로 읽고 쓰고 생각하며 누려온 시간의 기록이다. 이 글들을 써오는 2013년부터 2016년의 시간은 저자가 76세에서 79세에 이르는 시간으로 고요하고 한적한 시간일 듯하지만, 그사이 ‘나이 듦’의 죄 많음을 증거하듯 고통스럽게 ‘어린 죽음’을 목격해야 했고, 50년 지기 친구를 앞세운 허탈함과 함께 ‘비수(悲愁)’의 한스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저자는 책 읽는 일상을 지속할 수밖에 없었는데, “자유롭지만 방만하며 넓지만 얕고 나직하지만 수선스런 글꼴”이라는 저자의 겸허한 고백은 아마도 그렇게 스쳐온 ‘현재’ 시간을 무겁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특히 저자가 그사이 읽은 70여 권의 목록을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그 목록은 소설에서부터 과학 교양서, 경제학 이론서와 생과 죽음을 고백하는 자서전에 이르기까지 다양해, 지치지 않는 ‘탐서’의 마음과 함께 오래 품은 생각도 ‘책’을 통해 의심하고 자신을 바꾸려는 ‘배움’의 자세를 엿보게 한다.
아직 연재 중인 시점에서 책을 서둘러 내는 것은 초등학교 동창으로 만난 아내와의 결혼 50주년
[golden wedding, 金婚式]을 기념하기 위함이라는 수줍은 고백도 이 책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주고 있다.
다름의 공존
_서로 인정하고 싸우며 ‘함께’ 나아가는 길
이 책은 ‘사유의 도구’로서의 책의 쓰임을 여실하게 담고 있다. 산업화, 과학화, 도시화의 시대에 ‘발전’을 지지하는 의견과 그것의 위험성을 폭로하는 의견의 책을 고루 읽으며 저자는 이쪽도 옳고 이쪽의 말도 맞다는 딜레마에 부딪힌다. “언젠가 우리는 내핍생활을 하거나 아니면 붕괴의 길을 택해야 할 것이”라는 무서운 경고의 말을 피할 길이 없지만 산업화의 혜택을 과거의 ‘제로 상태’에서 현재의 ‘풍요 상태’까지 목도해온 저자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일 것이다. 이렇게 저자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의견을 모두 경청하듯, (이를 테면 문명 비판적인 마크 바우어라인의 『가장 멍청한 세대』와 사이버 문화에 적극 동의하는 『생각은 죽지 않는다』를 함께 펴놓고 이 책의 한 줄을 읽고, 또 저 책의 한 줄을 읽으면서) 스스로를 긴장의 줄타기로 내모는 독서를 즐기는 것이다. 또한 전혀 다른 성격의 두 사람이 이끈 독립운동(『이승만과 김구』)을 생각하며 어떤 주의주장도 ‘하나만’이 옳을 수 없다는 것과 아무리 오래 다듬은 생각도 시대에 맞지 않거나 잘못된 점이 발견되면 수정되어야 할 것을 고백기도 하는데, 이런 모습은 저자만의 삶에 대한 정직한 태도와 방식을 잘 보여준다.
저자는 “그이는 오랫동안 최선의 삶을 살았고 일부러 음식을 끊음으로써 위엄을 잃지 않은 채 삶을 마쳤다”(『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는 헬렌 니어링의 고백을 읽으며 무심한 삶을 졸여오는 죽음의 숭고를 실감하기도 한다. ‘삶의 마침’을 참관하며 “몸의 욕망을 내려놓고 내면의 고요함을 끼워 넣기”를 권하고 이유이다. “누구도 경험할 수 없는 죽음은 고통스런 불안이고 일상으로 겪는 노화는 애달픈 불평이어서, 나이 들수록 게으르고 무모해지는 타성에 이처럼 아름다운 평정의 마음을 바라는 것”이 과람한 욕심이라고 말하지만,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나이를 거스르려는 괴물스런 노력보다는 고요와 안식을 기도하는 이런 자연스런 노화에서 진정한 생의 아름다움을 느낄 것이다.
어수선한 시기, 어떻게 헤쳐가야 할지 막막한 지금, 이 책 뒤에 다시 이어질 김병익의 글이 궁금해지는 건, 젊은이들을 향한 따뜻하고 깊은 다독거림의 말과 날카롭지만 명징한 넓은 사유를 경청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저편’을 향하고 있는 시선의 ‘너비’가 그 안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서문
서설_ 디지털 기기를 익히며
2013년에 만나는 ‘빅 브러더’
‘자서전들 쓰십시다’를 재청함
‘에어컨 디톡스’ 실패 유감
문화생태계 변화와 내면의 문화
캐럴 들으며 ‘엉뚱한 데서 놀다’
‘성장 없는 발전’을 향하여
자연 그대로의 자연공원으로
나를 지울 권리, 나를 지킬 자유
6・25에서 60년, 뒤돌아봐야 할 ‘세월(호)’
한반도의 지정학―건널목에서 알박이로
(탈)성장 사회의 길―이스터섬 혹은 월든
“그해 겨울(과 봄)은 따뜻”했던 이유
‘만년의 양식’을 찾아서
네메시스의 복수
세 도시 이야기
‘검소한 풍요’를 소망하다
새말, 줄임말, 늙은 말
디지털 툴, 그 불편한 기대
‘어제가 없던 어느 날’ 문득
『이승만과 김구』에서 얻은 낙수
분노의 봄
인공지능 유감
시인들의 옛집
엑스트라의 얼굴들
작은 거인의 어깨 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