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적인 함성이 광장 전체를 집어삼켰다”
우리 시대의 ‘괴물’,
그 형체 없는 목소리의 공포!
1995년 등단 이후 8년 동안 7권의 책을 써낸 뒤 돌연 잠적, 10년 만에 침묵을 깨고 나타난 소설가 백민석이 또다시 엄청난 괴력으로 소설을 써내고 있다. 2013년 복귀와 함께 출간한 소설집 『혀끝의 남자』 이후 〈수림〉 연작과 〈아트 워〉 연작 등을 발표하는 동시에 『문학과사회』에 연재한 장편소설 『공포의 세기』를 책으로 엮었다. 무서운 존재가 어느 날 살그머니 내 옆으로 다가와, 꿈과 현실을 쫓아다닌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괴물로 태어나거나, 괴물이 되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작품은 새 밀레니엄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출발한다. ‘모비’라는 괴물 같은 소년의 잔인무도한 강도 행각과 함께 평범한 일상 속에서 튀어나온 망령이 ‘경, 심, 령, 효, 수’라는 인물들을 따라다니며 기괴한 행동과 범죄를 이어가게 하는 가운데, 이들은 ‘불의 혀’라는 사인으로 우리 세기의 ‘괴물’로서의 인증을 해 보인다. 악의 경계도 범주도 없는 ‘우리의 세기’, 2016년 오늘, 다른 누구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가 여기에 펼쳐진다.
“세상이 변한 것 같다. 그때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머지않은 미래에 조지 오웰의 『1984』 같은 획일적인 전체주의 사회가 올 거라고 생각했다. 빅브라더 같은 하나의 커다란 배후, 세계 권력, 정치세력이 모든 것을 통제하는. [……] 그런데 막상 이천 년대가 오자 현실은 그것과 반대로 굴러가기 시작한 거다. 고체였던 것들이 액체가 되고 전체주의적이라기보다는 카오스적이고 뭐라고 규정지을 수 없는 세상이 된 것이다.”
_백민석, 인터뷰 「우리 세기의 ‘공포’를 말하다」에서
‘악’이란 무엇이며 악인은 또 누구인가
오늘날 우리는 각종 ‘악’을 마주하며 살고 있다.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테러, 혐오 범죄, 권력형 비리, 지위를 앞세운 성범죄 등 약자를 향한 범죄에 우리 시대의 모두가 몸서리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범죄 앞에서 우리는 무엇보다 그 실체와 대상이 불분명할 때 더 큰 두려움을 느낀다. 『공포의 세기』에서는 모두 우리 사회 공동체 안에서 공통된 경험을 하며 살아온 사람들이 어느 날 도처에서 각자의 타깃을 향해 테러를 저지른다. 서로 간에 원한도 선과 악의 경계도 불분명하다. 눈에 안 보이고, 실체가 없고, 뭔가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잡히지 않는 말 그대로 호러에 가까운 악의 현현. 이성이나 과학 같은 근대성으로도 파악할 수 없는 어떤 것. 소설의 중심축이 되는 모비는 그렇게 만들어진 ‘안티크라이스트’이다. 작가는 이러한 악의 모티프가 코스모스의 질서가 아닌 카오스의 질서에서 살아가는 ‘현대성’의 표현이며, 이것은 ‘헬조선’이라는 삶의 조건일 수도 있고 더 근본적인 무언가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현대’라는 조건에서 더 이상 장발장은 없다. 다만 우리 안에 ‘악’의 조건이 있을 뿐이다. 내가 언제든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공포의 세기』가 전하는 또 하나의 공포다.
심장에 망령의 손길이 와 닿을 때마다 사람들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한숨 소리를 들으며 경은 슬픔에 가슴이 무너졌다. 세상은 살아서 지옥이었다. 지옥이 아닌 삶을 사는 사람들은 극소수였다. 그리고 그 극소수가 자신의 삶을 지옥이 아닌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삶을 지옥으로 만들고 있었다. 어쨌든 그들의 삶도 지옥이었으니까. (pp. 301~02)
백민석만의 ‘충격’ 문법 ― 공포의 세기를 ‘실감’케 하다
백민석이 다시 나타났을 때 두 팔 벌려 환영한 독자라면 또 하나의 ‘충격’을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백민석만의 이 거친 충격 문법은 어떤 카타르시스를 유발한다기보다는 감각과 정서를 깨우는 방식으로 활동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번 소설 『공포의 세기』의 가장 강렬한 충격은 등장인물들 간의 연결 고리라 할 수 있는 ‘불의 혀’ 모티프에서 느낄 수 있다. 모비에서 번지는 폭력 에너지는 ‘경, 심, 령, 효, 수’라는 인물을 통해 각자의 개연성과 원초적 기억을 바탕으로 발산된다. 모비를 지배하는 영적인 기운이나 ‘경, 심, 령, 효, 수’를 움직이는 망령은 통제 불가능한 방식으로 우리의 땅에 피를 뿌린다.
이제 더 이상 하나의 거대한 권력이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시대가 아니다. 무엇으로도 통제 불가능한 정신적 묵시록의 세계에서 백민석만의 ‘충격’ 문법은 지금을 대변하는 소설 문학의 정수를 느끼게 할 것이다.
‘그럼 이거나 먹어.’
모비는 팔을 휘둘러 오피스 걸의 긴 머리채를 잡아 끌어올렸다. 그러곤 팔을 뽑아 군중에게 던졌다. 다리도 뽑아 던지고 허리도 반을 갈라 던졌다. 그걸로 부족하자, 다시 중년 사내를 낚아채 똑같은 과정을 반복했다. 피의 보라가 광장 전체로 번져나갔다.
‘봐라. 물고기 두 마리로 내가 너희를 다 먹인다.’
하지만 허기의 함성은 채워질 줄 몰랐다. (p. 287)
‘우리의 세기’의 ‘공포’를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
대한민국이 ‘국정 농단 사태’로 분노와 공포에 휩싸여 있다. 공포는 사람을 두려움에 떨게 할 뿐만 아니라 종국에는 두려움에 지쳐 무기력하게 만들 수도 있다. 이것은 공포 이후의 공포다. “그의 삶 자체가 하나의 실체 없는 음모일 수 있었다”고 말하는 이 소설 『공포의 세기』는 문학이 어떻게 ‘현재’에 대한 은유가 될 수 있는지를 여실하게 보여준다. 세상에는 분명한 악이 있지만 또한 구분이 불분명한 선과 악이 혼재하며, 권력과 재력 앞에 무너진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 안의 누구든 내 안의 무엇이든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경고를 받아 들게 한다. “절망적인 함성이 광장 전체를 집어삼”키고 있지만 우리는 이 절망과 공포를 어떻게 사유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이것이 현재의 국가 사태와 『공포의 세기』가 우리에게 던지는 과제이다.
한창림은 수업을 계속했다. 윌리엄 터너의 풍경화를 프로젝터로 스크린에 띄워놓고, 이것처럼 바다에 뜬 배를 한번 그려보라고 했다. 요트도 좋고 돛단배도 유조선도 좋다고 했다. 모비는 스케치북 가득 코발트색이 창창한 하늘에, 황금색 파도가 치는 바다, 그리고 핏빛 통통배를 그려 제출했다. 수업을 듣는 열두 명의 수용자 가운데 시간 안에 그림을 끝낸 건 그뿐이었다. 손놀림이 놀라웠다. 그러다가 한창림은, 모비가 삼 년을 갇혀 있던 강력범이란 사실을 떠올리곤, 그 손놀림이 어떤 손놀림일 수 있는가 하는 생각에 순간 아찔했다. (p. 227)
본문 속으로
그의 슬픔은 이주일의 손에 난데없이 나타난 그 책을 펼쳐 읽을 이가 이 세상에 없다는, 황당한 깨달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세상 어느 누구에게도 그 책을 펼쳐 읽어낼 능력은 없다. 그는 테이블 건너편에서 아내가 팔을 뻗어 손을 잡는 것을 느꼈다. 아내의 시선은 당혹감과 두려움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는 아내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입을 벌리고 소리내 울었다. p. 53
‘정의봉이 마침내 위력을 발휘했네.’
에이전트가 효의 옆에 걸터앉으며 속삭였다. 칭찬하고 기운을 북돋아주려는 목소리였다.
‘그래, 사람을 죽인 감상이 어때?’
“이렇게 쉬워도 되는 건가 싶어.”
‘담배 배우는 거나 같지. 처음엔 가슴이 꺼져라 기침도 나고 뇌도 뒤집히는 것 같고. 하지만 곧 하루에 세 갑씩 피우게 될 거야.’ p. 125“야, 골대! 저리 가 서 있어.”
소년이 소리 질렀다. 습기로 무거워진 대기가 소년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아침에 갈아입은 옷이 습기와 땀에 젖어 돌멩이를 몇 개 매단 듯 축 처졌다. 기름땀이, 곰팡내와 코를 찌르는 암내가, 시뻘건 진흙과 짓이겨진 풀에서 배어 나온 풀물이 그들을 더 사납게 만들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그들이 웃을 때는 누군가 울 때뿐이었다. 누군가 아프고 서럽고 괴로워 눈물을 흘릴 때뿐이었다. 그러면 그들은 더 큰 고통 속으로 떠밀리기라도 하려는 듯 입매를 흉측하게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움직이면 죽을줄 알아!” p. 136
모비 아버지는 그림자 속에서 끔찍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 눈과 이빨에서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그는 뻣뻣하게 얼어붙어 눈을 뗄 수도 도망갈 수도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 느끼는 감정이 공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공포란 이렇다라는 사실을 마흔을 넘긴 지금에서야 깨닫고 있었다. [……] 난생처음 느껴보는 칠흑 같은 어두운 감정에 모비 아버지의 등뼈는 돌처럼 단단히 굳고 두 다리는 세상을 다 짊어진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겨우겨우,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감쌀 수 있었다. 자신이 맞서 싸울 수 없는 상대에게서 얼굴을 숨기고 감추려는 사람처럼. 자신이 결코 이길 수 없는 상대에게서 미증유의 상대에게서 영영 도망치려는 사람같이. pp. 164~65
모비는 눈을 떴다. 그의 발치에 왕국이 엎드려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명령이 떨어지길 소원하고 있었다.
‘형제들아.’
왕국이 내지르는 환호가 모비의 심장을 꿰뚫었다.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
열광에 사로잡혀 실신하는 자들이 나타났다. 흐느끼고 울부짖고 날뛰었다. 왕국이 모비의 말을 합창했다. 그들은 이제 그의 형제였고, 낙심치 않는 자들이었다. 그의 영광스러운 형제였고 어떤 경우에도 의심하지 않는 자, 광신도들이었다. pp. 295~96
나는 아무도 아니다
나는 모두다
이주일 디너쇼
내 마음은 늑대와 함께 갇혔다
블러디 메리
폭굉
나는 내 안에서 나를 잃었다
불이 그 구름 가운데 있으리라
열쇠와 책
혀가 말한다
너희가 우릴 만들었다
내 이름은 공포다
불의 혀
공포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