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부서진

조수경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16년 10월 27일 | ISBN 9788932029139

사양 변형판 125x192 · 256쪽 | 가격 12,000원

수상/추천: 세종도서 교양 부문 선정 도서

책소개

“사는 게, 재앙 같아”

 

악몽보다 지독하고 공포영화보다 참혹한

일상의 뚜렷한 균열, 발밑의 지옥

 

 

내 시선이 머무는 곳은 어둡고 악취가 풍기는 곳이다. 누군가는 그곳을 들여다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수경, 인터뷰 「징후들」, 『문학과사회』 2013년 겨울호)

 

201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조수경 작가의 첫 소설집 『모두가 부서진』이 출간되었다. 지난 10년간 SBS라디오 작가로도 꾸준히 활동해온 조수경은 그간 발표한 소설들로 호기심을 자극하는 강력한 서사를 구사하는 데 탁월함을 보여주었으며, 인간 사회의 어둡고 추한 민얼굴에 주목하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아왔다. 성인용품 판매점에서 일하는 고독한 장애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등단작 「젤리피시」는 “단순한 유행 감각의 소산이 아니다. 이 작가는 인간의 깊은 내부 세계를 들여다보는 안목을 갖추었다. 또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묘사 능력도 탁월했다”(문학평론가 방민호·소설가 성석제)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이번 소설집에서 작가는 아무렇지 않은 듯 보이지만 모두가 조금씩 부서진 채로 살아가는 우리 일상의 면면, 그 안에 도사린 등골 서늘한 균열들에 집중한다.

 

 

몸도, 마음도 조금씩 부서진 사람들의 도시

 

잠결에 서늘한 기운을 느끼고 눈을 떴을 때, 그것이 그저 느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두컴컴한 방에서 그녀는 내 머리맡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희고 가느다란 두 팔을 치켜든 채로. 단단하게 모아 쥔 두 손에는 과도가 들려 있었고 칼끝은 나를 향해 있었다. 내가 잠에서 깨어났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녀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심장에 칼날 대신 눈물이 내리꽂혔다. [……] 오직 나만이 그녀를 구원해줄 수 있다는 어리석은 믿음. 그렇게 몇 년을 더 보내고 난 뒤에야 나는 그녀가 불행 안에 머물러야 하는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게 되었다. (「오아시스」, pp. 216~17)

 

도시는 말끔하고 행복한 사람들로 가득 찬 듯한 착시를 불러일으키는 장소지만, 한편으론 그 허상에 의해 자기 삶에서조차 주변화되어버린, 흠 많고 길 잃은 사람들의 집합소이기도 하다. 『모두가 부서진』의 수록작 여덟 편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 또한 각자의 부서짐을 치열하게 경험해간다. 이는 하반신 마비(「젤리피시」)처럼 눈에 보이는 장애에서부터, 눈앞에 직면한 이혼(「유리」), 아버지의 외도에서 기인한 강박적 순결 콤플렉스(「마르첼리노, 마리안느」), 부모에게 버려진 뒤 방향을 잃어버린 청춘(「떨어지다」), 거짓으로 유지된 연인 관계의 파경(「할로윈―런, 런, 런」), 임신 문제를 둘러싼 고부 갈등(「지느러미」) 등 다양한 방식으로 구현된다. 누구나 하나쯤 자기 몫으로 가지고 있을 법한, 누구나 피하려 하지만 아무도 비껴갈 수 없는 각자의 불행을 작가는 집요하게 들여다본다.

 

 

악몽과 현실이 혼재된 일상

 

여느 여고생들처럼 명랑하던 소녀가 침묵과 가까워지게 된 것은 한 여자가 전동차로 뛰어드는 모습을 목격한 뒤부터였다. 그 일은 마리안느의 눈앞에서 벌어졌다. 검은 원피스를 입고 있던 여자가 검은 보디백에 담겨 플랫폼으로 옮겨지기까지 마리안느는 의자에 굳은 듯 앉아 있었다. 시신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수습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린 걸 보면 여자의 몸은 부서지고, 찢기고, 으깨진 채 사방으로 흩어진 것이 분명했다.

(「마르첼리노, 마리안느」, p. 47)

 

살인마 수한은 꿈속에서의 수한.
현실에서의 수한은 착하고 다정한 사람.
꿈은 가짜. 현실은 진짜.
무엇이 진짜인지 잘 알고 있었지만, 몇 달간 계속 이어지는 꿈 때문에 이제 나는 정말로 수한이 두려웠다. 처음엔 가짜라는 걸 알고도 무서운 정도였지만, 점차 가짜를 진짜라고 믿게 되었다. 요즘에는 이불 속에 망치를 숨겨두고 그것을 한 손에 꼭 쥐어야만 간신히 잠이 들 정도였다. 오랜 불면이 꿈과 현실의 경계를 허물어뜨리고 있었다. (「할로윈―런, 런, 런」, p. 143)

 

사소한 균열은 점차 뚜렷한 붕괴가 되고 이내 걷잡을 수 없이 일상을 망가뜨린다. 결말에 이르러 인간 본성에 존재하는 기괴하고 뒤틀린 면모를 마주하게 한다는 점은 조수경 소설의 특장이다. 특히 작가는 소설 도입부에 종종 꿈을 배치함으로써 이 불쾌한 진실을 고지하곤 하는데, 일반적인 도피처로서의 꿈이 아닌 지독한 악몽을 통해 어떤 각성을 이끌어낸다. 예를 들어 「할로윈―런, 런, 런」의 거짓으로 유지되었던 기나긴 연인 관계가 이미 끝나버렸음을, 나아가 이들의 관계가 서로 먹고 먹히는 좀비들의 관계만큼이나 적대적임을 보여준다. 한편, 「마르첼리노, 마리안느」의 마르첼리노가 꾸는 꿈은 마르안느와의 사랑이 오로지 쾌락에만 골몰한 불륜일 뿐임을, 그 죄를 알면서도 늘 신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있음을 스스로 알게 한다. “조수경의 인물들은 꿈들이 고지하는 진실을 부인함으로써 가까스로 현실의 삶을 유지한다. 혹은 불쾌하게도 현실의 삶이 실은 살 만한 것으로 ‘상상’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자꾸 알려주려 애쓰는 꿈과 사투를 벌이며, 고통스럽게 살아간다”(김형중, 해설 「“앞으로도 네 소설 잘 지켜볼게”).

 

 

지옥을 버티는 저마다의 방식

 

여자의 얼굴이 크게 인쇄된 면을 찾아 방바닥 한가운데에 잡지를 펼쳐놓았다. 그 아래에 실리콘 가슴을 가져다 놓았다. 다시 포르노 스타의 토막 난 은밀한 부위, 그리고 여자의 다리를 본뜬 쿠션을 차례로 늘어놓았다. 나는 내가 창조해낸 여자 옆에 나란히 누웠다.
카리브 해의 바닷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여자와 나는 백사장에 누워 하늘을 바라본다. 분홍빛 파도가 밀려와 여자와 내 몸을 적신다. 여자의 분절된 몸이 하나로 이어진다. 여자는 몸을 천천히 일으켜 세운다. 한 걸음씩 발을 내딛다 춤을 추기 시작한다. 전라의 아름다운 육신이 부드럽게 출렁인다. 여자는 춤을 추며 내게 다가온다. (「젤리피시」, p. 94)

 

조수경이 들여다보는 삶의 진실은 언뜻 망치로 짓이겨진 살점과 찢기고 끊어져버린 신체, 피가 낭자한 지하실에서 개가 갓난아기를 잡아먹고 마약에 취한 채 에이즈 보균자와 동침하는 죽음충동으로 귀결되는 듯하다. 혹은 왜곡된 욕망에 이끌려 약한 사람이 더 약한 이에게 폭력을 가하고 타인의 불행을 집요하게 캐내며 균열을 은폐해가는 방식으로만 생이 유지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작가는 악몽이야말로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현실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누군가는 완벽한 고독 속에서 이미 분절되어버린 몸을 다시 잇는 재생의 꿈을 꾸도록 한다. 모두 쉽게 눈감고 합리화함으로써 왜곡된 진실이 세계를 지배하게 된 우리의 오늘에 각성의 안경을 건네줄, 조수경 소설의 첫걸음이 시작됐다.

 

 

■ 본문에서

남편과 별거를 하고 몇 개월이 지났을 때 대학 동창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냥 얼굴이나 보자기에 만나서 밥을 먹고 차를 마셨다. 헤어지기 전에 동창이 불쑥 내 팔을 붙잡았다. 며칠 전에 내 남편을 봤다고, 웬 여자와 함께 있었다고 동창은 말했다. 그리고 며칠 뒤에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별일 없지? 그래도 너, 남편 뒷조사는 꼭 해봐라. 혹시 모르잖니.”
남편과 내가 멀어진 것은 우리 둘의 문제였다. 물론, 내가 모르는 어떤 일이 있을 수도 있었다. 별거 후에 남편이 누군가를 만났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저 친구나 직장 동료와 함께 있었던 것뿐인지도 몰랐다. 그때 나는 내가 처한 현실보다 남의 불행을 캐내려는 사람이 더 무서웠다._「유리」, pp. 28~29

 

마르첼리노의 몸집만 한 구덩이가 완성됐을 때 멀리서 바람이 불어왔다. 낫을 휘두르듯 예리한 바람이 지나가자 목이 날아갔다. 마르첼리노는 몸에서 떨어져 나간 머리를 품에 안고 구덩이로 들어갔다. 그것은 자신의 무덤이었다. 마르첼리노는 구덩이에 누워 죽음 속으로 가라앉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그것은 무섭고 쓸쓸한 꿈이었고, 때문에 마르첼리노는 꿈속의 일들을 곧장 지워버렸다._「마르첼리노, 마리안느」, pp. 45~46

나는 춤을 청하듯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튜브 걸’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동그란 원을 그리듯 휠체어를 밀었다. 멀어질 듯 밀착되고, 흐느끼듯 가라앉다 이내 경쾌하게 튀어 오르던 몸짓. 오래전 영화에서 본 장면이 떠올랐다. 그때 흘러나왔던 연주곡을 흥얼거리면서 ‘튜브 걸’과 함께 가게 안을 빙글빙글 돌며 춤을 췄다._「젤리피시」, pp. 80~81

 

“역시 사람은 부모를 잘 만나야 한다니까.”
“코딱지만 한 철공소 가지고 또 저런다, 병신새끼.”
“코딱지만 한 철공소라도 사장은 사장이지. 안 그러냐?”
동의를 구하듯 돌김이 돌아보면 빡구는 말없이 담배를 빨았다. 한숨 대신 연기를 길게 내뿜고 난 뒤에야 빡구는 목소리를 낮게 깔며 대꾸했다.
“씨발, 부모라도 멀쩡히 살아 있는 게 어디냐.”
이렇듯 신세한탄은 언제나 빡구로 마무리되었다. 할머니와 단둘이 살아온 빡구 앞에서 돌김은 더 이상 푸념을 늘어놓을 수 없었던 것이다. 돌김이 투덜거릴 때마다 맛세이는 욕을 해주었지만 한편으로는 은근히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그런 맛세이를 보면 빡구는 몹시 불안해졌고 매주 로또라도 사서 주머니에 넣어둬야 그래도 내가 뭔가 하고 있구나, 싶어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_「떨어지다」, pp. 101~02

 

영수의 말처럼 사장은 영리한 사람이었다. 버려진 테마파크를 헐값에 사들이고 입장료를 받았다. 사람들은 공포를 느끼기 위해 기꺼이 돈을 지불했다. 이곳에서 그로테스크한 사진을 촬영해 블로그에 올리는 것이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매달 보름달이 뜨는 밤에는 이벤트가 열렸다. 티켓을 구입한 사람들이 생존 게임을 시작한다. 좀비(로 분장한 아르바이트생)들이 돌아다니며 사람을 사냥한다. 자정에 시작된 게임은 해 뜨는 시각에 맞춰 종료된다. 아침이 올 때까지 좀비에게 잡히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이 승자가 되어 상금을 받는다…… 이것이 바로 ‘좀비나이트’ 행사였다. 사람들은 진짜에 가까운 공포를 원했고, 오래전 이곳에서 일어난 사고는 그들이 원하는 자극에 충분한 배경이 되어주었다._「할로윈―런, 런, 런」, p. 132

 

M은 혼자였습니다. 남자는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M의 얼굴을 마주 봤습니다. 눈길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잠시 당황한 기색을 보이던 M은, 그러나 이내 입꼬리를 올리며 웃음을 흘렸습니다. 간격이 좁혀질수록 남자의 심장은 빠르게 뛰었지요. 침을 길게 뱉고 M은 남자를 향해 똑바로 걸어왔습니다. M이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남자는, 눈을, 내리깔았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무조건반사와도 같은 것이었지요. 무조건반사는 주로 생존에 직결된 반응을 담당하고 있으니까요. 병신. M은 남자의 뒤통수를 한 대 갈겨주고 골목을 빠져나갔습니다. 동생은 화가 난 얼굴로 앞서 걸어갔습니다. 그날, 집에 돌아온 남자는 나사를 집어 삼켰습니다._「사슬」, pp. 171~72

 

여자는 소매를 걷어 올렸다. 어항 안에 뜰채를 집어넣자 놀란 물고기들이 재빨리 도망쳤다. 그러는 와중에 몇 마리는 그물 안에 걸려들었다. 여자는 서두르지 않았다. 물살처럼 부드러운 손놀림으로 제법 많은 물고기를 건졌다. 족히 스무 마리는 될 것 같았다. 뜰채를 들고 여자는 욕실로 향했다. [……] 변기 뚜껑을 열었다. 세정제 때문에 파란빛을 띠는 물은 더없이 맑아 보였다. 여자는 뜰채 안에서 파닥거리는 물고기들을 모조리 털어냈다. 작은 물고기들이 변기 안을 정신없이 휘젓고 다녔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주홍빛 생명체들을 바라보다가 여자는 물을 내렸다. 어항 안에 사는 물고기는 다시 50여 마리가 되었다._「지느러미」, p. 185

 

집에서 차를 몰고 30분만 달려가도 메마른 벌판이 나오는 곳. 그녀에게서 벗어나 미국까지 날아왔지만 늘 어둡고 축축한 무언가가 내 발목을 잡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뿜어내는 불행의 기운이 이곳까지 뻗칠 때면 나는 한없이 우울해져 광야로 나갔다. 세상에서 가장 황량한 곳에 가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죽고 싶은가 아닌가. 텅 빈 땅의 한가운데에 서 있으면 살고 싶다는 욕망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고 그 사실에 안도했다._「오아시스」, p. 185

 

 

 

■ 해설에서

조수경의 인물들은 꿈들이 고지하는 진실을 부인함으로써 가까스로 현실의 삶을 유지한다. 혹은 불쾌하게도 현실의 삶이 실은 살 만한 것으로 ‘상상’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자꾸 알려주려 애쓰는 꿈과 사투를 벌이며, 고통스럽게 살아간다. 조수경 소설 속에서 꿈은 실재를 향해 나 있는 문이고, 그것을 돌파하려는 지난한 노력이 이 작가의 글쓰기를 윤리적이게 한다._김형중(문학평론가)

 

 

■ 작가의 말

 

처음 소설을 쓴 건 열세 살 때였다. 나는 호기심이 많고 금방 싫증을 내는 사람인데, 변함없이 나를 뜨겁게 만드는 것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일뿐이다. 나는 내가 ‘작가의 몸’으로 태어났다고 믿는다. 이를테면 눈이나 심장 같은 것들이.

몇 해 전, 나의 연인이 세상을 떠난 뒤로 자해하듯 엉망으로 살았다. ‘환상의 빛’에 매료되는 순간이 많았고, 정신을 여러 번 놓을 뻔했지만, 그럼에도 완전히 놓아지지 않은 걸 보면 내 생에 대한 의지가 생각보다 강한 것 같다(정신을 놓는다는 건 일종의 마취와도 같은 것인데, 나는 마취가 잘 되지 않아 그 모든 것들을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다). 그리고 내가 삶을 붙잡는 방식은 언제나 무언가를 ‘쓰는’ 일이었다.

오래 읽힐 좋은 책 한 권쯤은 꼭 남기고 가고 싶다. 그러려면 나는 아주 오래 살아야할 것이다.

 

2016년 10월

조수경

목차

유리
마르첼리노, 마리안느
젤리피시
떨어지다
할로윈―런, 런, 런
사슬
지느러미
오아시스

해설 “앞으로도 네 소설 잘 지켜볼게”_김형중
작가의 말

작가 소개

조수경 지음

1980년에 태어나 서울과 경기를 오가며 자랐다.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 201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젤리피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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