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수 마차를 탄 기사

크레티앵 드 트루아 지음 | 유희수 옮김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16년 10월 14일 | ISBN 9788932029108

사양 신국판 152x225mm · 204쪽 | 가격 12,000원

책소개

그는 그 유일한 대상만을 골똘히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보지도 듣지도 못합니다.”

 

프랑스의 셰익스피어 크레티앵 드 트루아의 대표작

왕비 귀네비어와 기사 랜슬롯의 애절한 사랑을

처음으로 소설화한의 중세 기사 문학의 고전

 

16세기 영국 문학의 셰익스피어에 비견되는 12세기 프랑스 문학의 대표 작가 크레티앵 드 트루아의 로망 『죄수 마차를 탄 기사Le chevalier de la charrette』(대산세계문학총서 138)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고대의 사랑 이야기를 발굴하여 라틴어가 아닌 통속어(프랑스어)로 소설을 썼다는 점에서 유럽 문화사에 새 시대를 연 작가로 평가받는 크레티앵 드 트루아. 그는 작품 활동 초기부터 고대의 작품과 전설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그의 문학적 위상을 높인 것은 아서왕에 관한 전설에서 영감을 얻은 다섯 개의 로망으로, 이 작품들은 프랑스에서 인기를 끌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언어로도 번안되어 당시 유럽 문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죄수 마차를 탄 기사』 역시 아서 왕 전설에서 영감을 얻어 쓴 작품으로, 귀네비어와 랜슬롯의 연애를 처음으로 다룬 작품이다.

전설에서 모티프를 얻어, 당시 작가가 발 딛고 활동했던 귀족 사회의 정치 · 문화적 이상을 반영한 『죄수 마차를 탄 기사』는 기사의 모험담과 궁정식 사랑, 종교적 포부가 혼합된 중세 기사 문학의 고전이다.

 

 

신의를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은

두려움을 무릅쓰고 불가사의한 진실을 찾아 모험을 떠난다.”

중세 기사 문학의 고전

 

아서 왕이 연회를 연 어느 승천절, 낯선 기사가 나타나 아서 왕의 부인 귀네비어를 인질로 요구한다. 아서 왕은 속수무책으로 왕비를 떠나보내는데, 뒤늦게 한 기사가 그 뒤를 쫓는다. 기사는 죄인을 공시하고 처형장으로 수송하는 마차로, 일단 타면 재산과 권리 · 명예, 모든 것을 잃는 치욕을 감수해야만 하는 죄수마차까지 얻어 타며, 오로지 왕비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모든 위험을 감수한다. 죄수 마차를 탔던 기사 랜슬롯은 온몸에 상처를 남기는 칼 다리를 건너 왕비를 구해 둘만의 꿈같은 밀회도 즐기나, 시련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왕비를 탐하는 왕자 멜리아건트의 계략으로 랜슬롯은 다시 위험에 처하게 된다.

 

크레티앵이 프롤로그에서 암시하듯 이 로망은 기본적으로 ‘모험담’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비스런 인물이 왕비를 술수나 무력으로 납치하여 접근이 불가능한 초자연적인 자기 왕국으로 데려가고, 연인이 어렵사리 추적하여 초인적 무공으로 되찾는 전형적인 구도를 보인다. 크레티앵은 켈트 신화의 저승과 아주 흡사한 신비적 주제를 원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귀네비어가 끌려간 곳은 깊은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무서운 기사나 마법이 지키는 칼 다리(지옥에 있는 다리)나 잠수교를 통하지 않고는 접근이 불가능한 왕국이다. 그리고 지옥처럼 들어가기는 쉽지만 나오기는 어렵다. 우리의 기사는 이 모든 고난을 극복하고 그의 신(神), ‘사랑’을 구해낸다.

 

 

사랑의 명령에 따른 행동은 하나도 비난받을 이유가 없어.”

중세의 사랑 이야기 중 최고의 걸작

 

『죄수 마차를 탄 기사』는 왕이나 제후의 궁정을 배경으로 주군의 부인과 휘하 기사의 연애를 다룬 ‘궁정식 사랑’의 전범으로 꼽히는데, ‘궁정식 사랑’은 가부장이 강요한 사랑 없는 부부관계가 아니라 당사자의 뜻으로 맺어진 혼외 관계에서만 ‘순수하고 참된’ 사랑이 가능하다고 본 음유시인들의 자유주의적 연애관이 반영된 것이다. 간단히 말해 궁정식 사랑의 기본 구도는 범접하기 어려운 주군의 부인에 대한 기사의 간통적 사랑이다.

『죄수 마차를 탄 기사』에서 랜슬롯은 주군 아서 왕의 부인이자 자신이 흠모하는 귀부인인 귀네비어를 구출하기 위해 갖은 치욕과 수모, 극단적 위험과 모험을 감수하면서 무용을 발휘한다. 치욕의 마차인 ‘죄수 마차’는 사회적 준칙과 일상적 윤리를 넘어선, 심지어는 기사도적 명예를 초월한 욕망과 그에 따른 시련, 엑스터시가 곁들여진 ‘종교와 같은 사랑’을 드러내는 매개물이다.

그러나 궁정식 사랑에는 기사도나 궁중예절처럼 그 나름의 준칙이 있다. 불륜이지만 윤리적 질서와 절제를 준수하여 일정한 선을 넘지 않으며, 이 선을 지키지 않으면 사랑할 자격을 잃는다. 이러한 궁정식 사랑의 특징은 『죄수 마차를 탄 기사』에서 처음 드러난 것으로, 이 작품은 이런 유형에서 선구자적 작품이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사랑은 그저 불같은 본능적 열정만 보여준 것과 달리, 랜슬롯과 귀네비어의 사랑은 욕망의 절제와 섬세함, 세련됨이 드러난다고 평가받는다.

크레티앵은 다양한 인물에 대한 거침없으면서도 섬세한 묘사, 인간 마음의 깊숙한 곳을 탐색하는 통찰, 설명을 미루고 신비한 부분을 남겨두어 낯섦의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야기 방식을 보여주어, 중세의 작품에서 기대되는 것 이상의 세련미와 흥미를 자아내는 아름다운 문학 작품을 남겼다.

또한 이 작품은 당시 귀족들의 배타적인 예절인 ‘궁중 예절’과 사회상, 12세기 말에 새롭게 등장하는 주종 관계와 국가 권력의 요구에 부응하는 당대의 현실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이기도 하다.

 

 

서양 중세사 연구자의 철저한 고증에 의한 번역

 

이 책은 샤를 멜라 Charles Méla가 펴낸 고증본(Le chevalier de la charrette, Paris: Librairie Générale Française, 1992)을 저본으로 삼았다. 크레티앵이 쓴 원본은 현존하지 않고 후대에서 필사한 여덟 종류의 사본이 남아 있으나, 그중 13세기 초 프로뱅에서 기오Guiot라는 필경사가 정성스레 쓴 샹파뉴 사본 C와 13세기에 필사한 것으로 보이는 또 다른 샹파뉴 사본 T, 두 개만 완전본이다. 그 후 몇몇 고증본이 출간되었으나 이본들 사이의 차이점을 철저하게 대조하지 않거나 이본들 사이의 라임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결함이 있다. 옮긴이 유희수는 멜라의 고증본을 기본으로 하여 다른 판본을 비교하며 결함을 보완했다.

또한 번역 저본의 원문은 단락 구분이 없이 2연 대구 라임을 맞춘 운문으로 되어 있으나, 원문의 행을 일대일로 맞춰 운문 형식으로 번역할 경우 읽기가 매우 껄끄러웠다. 그리하여 구절의 순서와 리듬을 무시한 산문으로 바꾸고 적절한 곳에서 단락과 절을 구분함으로써, 오늘날 우리 독자들에게 원작의 향기를 담으면서도 가독성이 높은 전설적인 사랑 이야기를 선사했다.

 

 

책 속으로

이 마차에 탄 사람은 모든 존엄성을 상실했습니다. 이후 어느 궁정에서든 아무도 그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를 받들어 환영하는 일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시절 잔혹한 죄수 마차가 의미했던 바입니다. 그래서 이런 속담이 생겨났습니다. ‘거리에서 죄수 마차를 만나거든 성호를 긋고 화를 입지 않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십시오.’

[……] 사랑과 화해할 수 없는 이성은 그에게 이 마차에 타지 말라고, 비난받고 모욕당할 짓은 하지 말라고 가르치며 훈계합니다. 심장이 아니라 입술에만 머물러 있던 이성은 위험을 무릅쓰고 그에게 이렇게 권고한 것입니다. 반면에 심장에 있던 사랑은 즉각 죄수 마차를 타야 한다고 그에게 명령조로 재촉합니다. 사랑이 그걸 원합니다. 기사는 죄수 마차에 펄쩍 올라탑니다. 사랑이 원해 명령한 것이라면 치욕이 뭐 대수이겠습니까. _ 16~17쪽

 

두 기사는 각자 선택한 길로 갑니다. 죄수 마차를 탄 기사는 마치 사랑의 나라에 아무런 방어 없이 무기력한 상태로 끌려온 포로처럼 깊은 명상에 빠져들었습니다. 깊은 생각 속에서 몰아의 경지에 이릅니다. 그는 자기가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알지 못합니다. 자신의 이름도 더 이상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자신이 무장을 했는지 안 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모든 것이 그의 기억에서 다 지워졌습니다. 그것을 위해 나머지 모든 것을 다 잊어도 되는 한 가지만 빼고는 말입니다. 그는 그 유일한 대상만을 골똘히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보지도 듣지도 못합니다. _25~26쪽

 

그는 한 올이라도 끊어질까 봐 사뭇 부드러운 손길로 빗에서 머리카락을 빼냅니다. 세상에 그토록 소중한 것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머리카락에 대한 숭배가 시작됩니다. 머리카락을 눈에다 입에다 이마에다 볼에다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수도 없이 가져다 댑니다. 그럴 때마다 환희를 느낍니다. 그것에 그의 행복이 있고 그것에 그의 부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는 그것을 가슴에, 속옷과 살 사이의 심장 가까이에 품습니다. 에메랄드나 석류석을 한 마차 가득 준다고 해도 그것과 바꾸고 싶지 않습니다. _43쪽

 

[……] 왕비는 그를 더 당혹스럽게 만들기 위해 한마디 대꾸도 해주지 않습니다. 곧바로 침실로 돌아갑니다. 랜슬롯은 눈과 마음으로 그녀를 침실 입구까지 따라갑니다. 그러나 눈의 여정은 짧았습니다. 침실이 너무 가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눈은 가능하다면 그녀를 더 따라가고 싶었습니다. 마음은 더 큰 권력을 휘두르는 대영주처럼 문지방을 넘어 왕비의 발걸음을 따라 들어갔습니다. 눈은 눈물을 글썽이며 몸과 함께 문밖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_102쪽

 

그는 그녀 앞에 머리를 숙여 경배합니다. 어떤 성인의 유골에도 이처럼 숭경한 적이 없습니다. 왕비는 손을 뻗어 그를 맞습니다. 그를 얼싸안고 가슴 가까이로 꽉 껴안습니다. 침대 안으로 끌어당깁니다. 극진한 환대를 베풉니다. 그건 심장과 사랑에서 분출한 겁니다. 그녀가 그를 이토록 환대하게 한 것은 사랑입니다. 그러나 랜슬롯에 대한 그녀의 사랑이 열렬했다면 그는 그녀를 십만 배 더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 이제 랜슬롯은 바라는 걸 다 이루었습니다. 서로 껴안고 있을 때 왕비가 그와의 교제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얼마나 흐뭇해하는지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기쁨 속에서 나눈 입맞춤과 포옹의 유희가 너무나도 달콤했기에 그는 정말로 환희의 극치를 체험합니다. _116~17쪽

목차

죄수 마차를 탄 기사

옮긴이 해설 _ 왕비와 기사의 애절한 궁정식 사랑
작가 연보
기획의 말

작가 소개

크레티앵 드 트루아 지음

파리 동부 트루아의 소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성직자가 되기 위한 고전 교육을 받은 뒤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북프랑스 궁정 문학의 본산인 샹파뉴 백작 궁정에 드나드는 수많은 문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백작 부인 마리 드 샹파뉴가 그의 후원자였다. 샹파뉴 백작 궁정에서 문장관(紋章官)으로 근무했고, 말년에는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달자스를 위해 헌신했다.
고대 로마 작가 오비디우스의『사랑의 기술』을 부분적으로 번안한 작품 두 개와『변신』을 부분적으로 번안한 작품 두 개, 아서왕과 5∼6세기 브리튼의 영웅담에 초점을 맞춘『마크 왕과 이졸데』를 프랑스어로 썼으나, 이 가운데『변신』의 제6부를 번안한『필로멜레』만이 현존한다. 크레티앵을 12세기 대표 작가로 만든 것은 프랑스어로 쓰인 로망들이다.『에레크와 에니드』『클리제스』『사자와 함께한 기사』와『죄수 마차를 탄 기사』, 유고작『그라알 이야기』가 있다. 그는『그라알 이야기』를 완성하지 못하고 1190년 이후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의 사랑 이야기를 발굴하고 라틴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소설을 썼다는 점에서 유럽 문학사에 새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받는 그는 16세기 영국 문학의 셰익스피어에 견줄 만큼 12세기 프랑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유희수 옮김

1952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고려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과 대학원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경남대 사학과 교수를 거쳐 1996년부터 고려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을 『서양 중세사 강의』와 『서양의 가족과 성』(이상 공저)이 있고, 옮긴 책으로 『매너의 역사: 문명화 과정』 『중세의 소외 집단: 섹스․일탈․저주』(공역), 『몽타이유: 중세말 남프랑스 어느 마을 사람들의 삶』 『서양 중세 문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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