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가 레비나스에게 보낸 마지막 작별인사
아듀adieu 혹은 신에게로à-Dieu
이것은 애도의 말이 아닌 맞아들임의 말이다
1995년 12월 25일 세상을 떠난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장례식장에서 자크 데리다가 낭독한 조사 「아듀」와 레비나스 사망 1주기를 기념하여 열린 학회에서 데리다가 개막 강연으로 발표한 「맞아들임의 말」을 엮은 『아듀 레비나스Adieu à Emmanuel Lévinas』가 출간되었다. 데리다가 레비나스에게 다른 애도의 말이 아니라 “아듀adieu”라는 말을 먼저 건네고, 레비나스가 생전에 이 말을 어떻게 사유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자고 제안한 이유는 무엇일까. 또한 “아듀”와 “맞아들임”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이 책에서 데리다는 “아듀” “환대” “맞아들임” “무한” “응답” “타자” “윤리” “여성성” 등의 개념을 중심으로 레비나스의 철학을 자기 식으로 재해석하고 정리함과 동시에, 그의 철학에서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면들과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들을 짚어보려고 한다. 따라서 레비나스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뿐만 아니라 데리다의 철학을 이해하는 데에도 상당한 도움이 된다. 특히 이 책은 한 철학자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수용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모범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아듀는 우리의 삶과 생각을 무한으로,
잉여의 영역으로 데리고 간다
1964년, 레비나스의 주저 『전체성과 무한』을 분석한 논문 「폭력과 형이상학」을 발표한 이후로, 레비나스의 철학과 끊임없는 대결을 펼쳐온 데리다가 “아듀”라는 추도사를 통해 말하고자 한 바는 무엇일까? 데리다는 다른 곳에서 “아듀”라는 말이 다음의 세 가지 경우에 사용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하나는 다른 서술적인 말들에 앞서 하는 인사나 축복의 말로 “안녕” “반가워” 등을 의미한다. 두번째는 헤어질 때, 혹은 영원히 헤어질 때,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 하는 인사이다. 그리고 세번째는 데리다가 이 책에서도 강조하고 있는 “신에게로à-Dieu”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책의 원제 “Adieu à Emmanuel Lévinas”는 “레비나스를 신에게로”라는 의미로도 풀이될 수 있다. 데리다는 “아듀라는 인사는 끝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아듀는 “존재와 무의 양자택일을 거부하면서”, 한정된 우리의 생각과 삶을 무한으로, 잉여의 의미로 데려간다. 즉, 레비나스를 신에게 보낸다는 것, 신에게 맡긴다는 것은 레비나스의 사상에 대한 모든 가능성을 열고 그를 맞아들이는 것, 그의 철학이 가질 수 있는 모든 함의와 발전 가능성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는 것이다. 이 책을 옮긴 문성원 교수의 해석을 덧붙이자면, “아듀”는 데리다가 이제 신에게 맡겨진, 무한한 가능성에 맡겨진, 그 가능성을 채워나갈 우리에게 맡겨진 레비나스에게 새롭게 건네는 인사의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예루살렘에서 오늘날의 시리아까지,
수백만의 “상–파피에(불법이민자들)”와 “정해진 주거가 없는 사람들”을
환대한다는 것에 대하여
데리다는 레비나스의 사상을 되짚어보고 그것을 둘러싼 20세기 말의 정치적 상황을 보여줌과 동시에, 이에 대한 데리다 자신의 독특한 해석을 펼쳐나간다. 먼저 세상을 떠한 위대한 철학자에게 뜨거운 존경과 우정의 말을 건네면서도, 거의 철학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문제제기를 하며 여러 각도에서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레비나스가 강력한 유대적 전통의 영향 아래 사유를 전개했다면, 데리다는 레비나스가 내세운 윤리적 명제들이 어떻게 보편적이 될 수 있는가를 계속 물고 늘어진다. 대표적으로 피난처로 부각되는 예루살렘이 그러한데, 데리다의 논의 속에서 예루살렘은 특정한 지역명을 넘어서는 보편적인 자리를 가리키는 말이 된다. 또한 레비나스가 타자에 대한 책임을 일깨우는 윤리, 정치 너머의 윤리를 강조한다면, 데리다는 레비나스가 말한 “환대”와 “맞아들임”의 개념을 통해 이 윤리의 문제가 어떻게 정치와 엮일 수 있는가를 문제 삼는다. 그는 “도처에서 모든 종류의 피난자들”이 “집단 수용소에서 유치 수용소로, 국경에서 국경으로, 매일매일 감옥에 갇히고 추방”되며 “환대에 반하는 범죄”를 견뎌내고 있는 오늘의 시대에 환대에 대한 진중한 숙고가 필요함을, 레비나스의 논의를 경유하여 재차 강조한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은 현재의 우리 사회에도 절실한 것이라 하겠다.
역자 문성원 교수가 말하듯, 독자들은 작지만 만만치 않은 사유를 담고 있는 이 책을 읽으며 “데리다가 레비나스에게 건네는 물음이자 응답을, 언뜻 복잡해 보이지만 매우 풍부하고 집요하며 잘 짜인 구조의 대화를 목도”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 속으로
오래전부터, 아주 오래전부터 저는 두려웠습니다. 에마뉘엘 레비나스에게 “아듀”라고 말해야 할 날이 말입니다.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 말을 하는 순간, 그것도 큰 목소리로, 이 자리에서, 그의 앞에서, 그와 이렇게 가까이서, 아듀라는 이 말을 발음하는 순간, 제 목소리가 떨리리라는 것을. “아-듀a-Dieu”[신Dieu-에게로a], 이 말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에게서 가져온 것입니다. 그는 이 말을 제가 달리 생각하도록 또는 달리 발음하도록 가르쳐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11쪽)
죽음, 그것은 먼저 무화無化; aneantissement나 비-존재, 또는 무이기 이전에 일종의 경험, 살아남은 자가 겪는 “응답-없음”의 경험입니다. 이미 『전체성과 무한』은 죽음을 “무로의 이행”으로 보거나 “다른 실존으로의 이행”으로 보는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전통적 해석을 의문시합니다. 죽음을 무와 동일시하는 것은 카인과 같은 살인자가 바랄 법한 일이지요. 레비나스는 카인이 “죽음을 이렇게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무는 이제 “일종의 불가능성”으로서, 또는 더 정확히 말해 금지로서 제시됩니다. 타인의 얼굴은 내게 살해를 금지시킵니다. 타인의 얼굴은 내게 말하지요. “죽이지 말라.”(20~21쪽)
저는 중단이라는 말을 들으면, 제가 레비나스에게서 감지했던 중단에 대한 불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그는 전화 통화를 하다가 매 순간 단절과 침묵 또는 소멸을, 타자의 “응답-없음”을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문장들을 말하는 사이에 또 때로는 문장 중간에서도 곧바로 “여보세요, 여보세요”라고 상대방을 다시 부르곤 했지요.
우리가 살아 있다고 알아온 사상가, 우리가 읽고 거듭 읽어온 위대한 사상가가 침묵한다면 어떻게 될까요?(28쪽)
이 질문-기도가 나를 레비나스에게로 돌려세웁니다. 그것은 아마, 내가 처음에 말했던 이 아-듀의 경험에 이미 참여하고 있었을 겁니다. 아-듀라는 인사는 끝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아-듀는 어떤 목적성이 아니”라고 레비나스는 말하지요. “궁극적인 것이 아닌” 이 “존재와 무의 양자택일”을 거부하면서요. 아-듀는 존재 너머의 타자에게 인사를 건넵니다.(36쪽)
칸트에 따르면, 보편적 환대가 평화로서 설립되어 자연적 적대를 끝장내야 한다는 겁니다. 레비나스에게서는 그 반대죠. 알레르기 그 자체가, 얼굴의 거부 또는 망각이, 그 이차적 부정성을 평화의 바탕 위에 기입하게 됩니다. 정치적 질서에 속하지 않는, 적어도 단순히 정치적 공간에 속하지 않는 환대의 바탕 위에 말이죠. 아마 여기에 칸트의 평화 개념과의 두번째 차이가 있을 겁니다. 칸트의 평화 개념은 겉보기에 법률적이고 정치적이죠. 국가들 사이의, 그리고 공화국 제도와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반면에 레비나스는 「정치는 이후에!」의 마지막에서 “평화는 순수하게 정치적인 사유를 넘어서는 개념이다”라는 시사를 내놓지요.(99쪽)
사태는 환대에 반하는 범죄에 의해 악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범죄를 우리 시대의 객客들과 볼모들이 견뎌내고 있지요. 우리 가까이에서건 멀리서건 일어나는, 집단 수용소에서 유치留置 수용소로, 국경에서 국경으로, 매일매일 감옥에 갇히고 추방되는 일들을 말입니다(그래요, 환대에 반하는 범죄들이죠. 이건 “환대 죄délit d’hospitalité”와 구별해야 합니다. 환대 죄란, 이방인을 불법적 상황에서 유숙시키는 이는 누구든 처벌하고 감옥까지 보내던 것을 일컫습니다. 이 환대 죄가 오늘날 프랑스 법에 의해, 1938년에서 1945년의 법령과 행정명령의 정신을 통해, 같은 이름으로 다시 현실화하고 있어요).(140쪽)
레비나스는 곧바로, 환대의 이 의무가 이스라엘과 여러 민족들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유대인적 사유”에만 본질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그것은 인간적인 것 일반에 대한 인류애로의 접근을 열어놓습니다. 유일한 책임의 소환과 인간적인 보편성 사이의 범례성, 그리고 선출의 만만찮은 논리. 오늘날은 인도주의적humanitaire 보편성이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겁니다. 적어도 그것이 숱한 어려움과 애매성을 가로질러, 예를 들면 비정부적 기구로서, 민족-국가와 그 정치를 넘어서 가려고 하는 한에서요.(142쪽)
그러나 타자에 대한 직접적이고 무한하며 무조건적인 맞아들임을 유보시키고 무한정하게 조건짓는 이 모든 이유들 때문에, 레비나스는 언제나 [……] 지금의 평화la paix maintenant를 선호합니다. 또 그는 세계시민주의/세계정치주의cosmopolitisme보다 보편성을 선호하지요. 내가 알기로, 레비나스는 세계시민주의/세계정치주의라는 말을 쓰지 않거나 자신이 고려할 바로 여기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적어도 두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는 이 정치주의가 순수한 환대를, 따라서 평화를, 무한정한 과정의 한 항으로 귀착시키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잘 알려진 이데올로기적 함축들 때문입니다. 그 함축들에 들어 있는 현대의 반유대주의가, 스토아주의나 바울의 기독교에서부터 계몽주의와 칸트에게까지 전달된 세계정치주의의 아름다운 전통을 억누르고 있기 때문이죠.(167쪽)
우리는 다만, 피난의 권리와 우리 시대의 모든 긴급함과 관련해서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중요해진 차이를 칸트와 레비나스 사이에서 분명히 하려는 것뿐입니다. 우리 시대, 도처에서, 이스라엘에서, 르완다에서, 유럽에서, 아메리카에서, 아시아에서, 그리고 세계의 모든 성 베르나르 성당들에서, 수백만의 “상-파피에”(불법이민자들)와 “정해진 주거가 없는 사람들”이 동시에, 다른 국제적 권리를, 다른 국경의 정치를, 다른 인도적인 것의 정치를, 즉 민족-국가의 이해관계를 넘어 효과적으로 작용하는 인도적 참여를 요구하고 있다는 긴급함과 관련해서 말이지요.(189쪽)
그러면서 레비나스는 아-듀를, “동일성의 자기 동일시”와도 “자기의식”과도 합치하지 않는 이 “무한 관념의 비상한 구조”라고 부르지요. 그것은 “에게”가—이것이 그것의 역할이죠—무한을 향해 자기를 돌려놓기se tourner 때문입니다. [……] 이 a(에게)는 단지 무한에게만 유일하게 열려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신에게 말함에 열려 있죠. 달리 말해, 그것은 자신의 방향으로 자기를 돌리고 자기를 보냅니다. 우선 거기에 응답하기 위해, 우선 그것으로부터 응답하기 위해서요. 그것은 자신의 “에게”를 무한에게, 이 “에게”를 부르고 자신을 그것에게 보내는 무한에게 보냅니다.(192쪽)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낯선 이를 사랑하는 신”은 그래서 존재와 현상 너머의, 존재와 무 너머의 신이 아닐까요? 그 신은 말 그대로 존재하지 않고 “존재에 의해 오염되지” 않았다 해도 아-듀를, 인사를, 성스러운 이별을, “낯선 자에 대한 사랑”으로서의 욕망에 바치는 신이 아닐까요? 신의 “실존” 이전에 또 저편에서, 신의 있을 법한 있을 법하지 않음 바깥에서, 가장 절망적이지는 않다 해도 가장 세심한, 가장 “깨어난degrise”(레비나스는 이 말을 좋아합니다) 무신론에 이르기까지, 아-듀라고 말함은 환대를 의미할 겁니다.(195~196쪽)
프롤로그
아듀
맞아들임의 말
Ⅰ
Ⅱ
Ⅲ
Ⅳ
Ⅴ
Ⅵ
옮기고 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