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실들 속에서 태어났다”
세계의 접힌 페이지가 문득 열리는 순간
눈보라 속 한 송이 눈을 포착하는 힘
시인이자 소설가, 평론가인 이장욱의 네번째 시집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199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뒤 이장욱은 줄곧 아무에게도 읽히지 않은 세계의 접힌 부분들을 펼쳐 읽으며 단정한 문장으로 낱낱의 세계를 건져 올리는 일을 계속해왔다. 20년이 넘도록 서서히 변화하고 성장하면서도 세계라는 “수수께끼들 앞에서 충실하려고 노력”(『기린이 아닌 모든 것』 ‘작가의 말’에서)하는 기조는 바뀌지 않았다. 첫번째 출간한 시집에서의 ‘현실과 꿈의 경계 지점에 놓여 있는 시들’(오형엽)은, 4년 뒤 두번째 시집에서의 ‘익숙하면서도 낯선 공간’과 “현재와 과거가 혼재된 시간”(이광호)으로 확장된다. 소설과 시를 가리지 않는 특징이라 이장욱표(標)라고 이름 붙여볼까 싶은 “조금 낯선 무엇, 약간 비스듬히 어긋나 있는”(강지희) 정서는 사실 처음부터 해독해낼 작정을 하고 읽으려 든다면 오히려 그 의미가 퇴색될 수도 있다. 지난 세번째 시집 추천사에서 동료 시인이자 연구자인 진은영은 이렇게 말했다. “그의 시에 대해서는 덧붙일 것이 없으니까. 어떤 좋은 그림들은 그것을 끼워넣을 모든 액자를 조잡하게 느껴지게 할 만큼이나 좋다.” 그리고(그래서), 네번째 시집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에는 해설이 없다. “일관된 생애” 속에서 문득 출몰했다 서서히 사라지는 것들, “어렴풋이 보이는 것들과/어렴풋이 보이지 않는 것들 사이에서”(「초점」) 맴도는 존재들, 그리고 이미 말해진 것, 맹세한 것, 확신하는 것이 아닌 모호함 속에서야 가능해지는 이장욱 특유의 세계가 담긴 5부 61편의 시들을 온전히 대면하게 하기 위해서다.
단 한 권의 책
아무래도 나는 어제의 옷을 다시 입고
오늘의 외출을 하는 것이었다.
거짓된 삶에 대하여 계속
무언가를 떠올렸다.
―「일관된 생애」 부분
“모든 것은 이미 배달되었다.”(「우편」) 시집 첫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모든 것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내일의 내가 이미 씌어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따라/살아”(「내 인생의 책」)가듯이, 우리는 “정기적으로 식사를” 하고 “같은 목소리로 통화를 하”고 “비슷한 슬픔에 빠”지는 “일관된 생애”(「일관된 생애」)를 지속하고 있는 하나의 희미한 덩어리일지도 모른다.
그 ‘덩어리’의 세계는 이 시집에서 이를테면 영원한 “눈”이 내리는 “겨울” 같은 곳이다. 그렇다면 우리 하나하나의 삶은 “눈송이”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의 삶이 ‘접힌 페이지’처럼 드러나지 않는 이유, 그러니까 낱낱의 눈송이를 쉽게 “해독하지 못하는 이유는 영영/눈이 내리고 있기 때문/너무 많은 글자가 허공에 겹쳐 있기 때문”이다. “내 인생이 적혀 있는 책”은 “수만 명이 겹쳐 써서 새까만 표지”인 데다 “목차가 없고/제목이 없고/결론은 사라”진 채 혼자 서가에 꽂혀 있지만, 우리에게는 “눈송이 하나가 내리다가” “딱/한 문장”에 멈추듯이(「내 인생의 책」), 덩어리에서 “불쑥” 유일해지는 어떤 순간을 포착하는 서로가 있다.
“증인들은 […] 내리는 눈송이들의 궤적을 다 기억합니다.”
나는 여전히 어딘가에 도착하고 떠나고 다시
도착했는데
실은 그것이 나의 모든 것
―「구원」 부분
많은 것들이 ‘명백한 척’을 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사이를 바라보며 찰나에 밑줄을 긋고 수수께끼를 충실히 겪어내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때로 “내리는 눈의 마음을./자기 자신을./단 한 글자도”(「영숙의 독심술」) 읽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다. 덩어리인 것들, 그 “정지한 세계”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 세계”를 차라리 “사랑하려고 했”다면 곧 “매우 견고한 침묵을 갖게”(「얼음처럼」) 될 것이다. 그러나 일관된 생애에 찾아드는 “한 번 몸을 돌리면 모든 게 바”뀌는 교차로(「交叉路」), “어둠이었다가/순식간에 동이 트는 세계”(「깜빡임」), “뜻밖의 곳에서/뜻밖의 것들이 튀어나”(「박스」)오는 이 모든 순간들의 “증인”이 되는 일은 너무나 신비롭다. 눈보라 속 한 송이 눈의 궤적을 포착하듯이, “모든 것이 순식간에 배경이 되는 곳”에서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람(“행인”)처럼 세상이라는 배경에 흡수되었던 누군가는 “문득” “난데없이” “순식간에” “행인들 가운데서” “불쑥/정확한 말을 내뱉”으며 ‘태어난다’(「영숙의 독심술」). 증명할 필요 없이, 자연스럽게. “나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한다./그것이 세계라고.(「을지로」)”
소설이 아니라서 가능한
이 시집을 읽는 또 하나의 즐거움은 저자가 시인이자 소설가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겠다. 여러 평론가들은 이장욱의 시와 소설이 매우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매끄럽게 해석되지 않는 공백의 지점들”(조연정)을 포함하고 있다고 짚곤 한다. “세상의 모든 기차역에 서 있는 사람”(「영원에 가까운 삶」)인 듯 ‘허공 자체인 것’을 말하려는 시도가 소설[소설집 『기린이 아닌 모든 것』(2015)과 장편소설 『천국보다 낯선』(2013)]과 이 시집에 수록된 동명의 시들(「기린과 기린이 아닌 모든 것의 사이에서」 「천국보다 낯선」)에서 얼마나 다른지 어떻게 변주되는지 비교해보는 것도 ‘이장욱’이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축구가 도달할 수 없는 야구의 의의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고, 야구가 도달할 수 없는 축구의 가치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축구가 아닌 야구가 있으며, 야구가 아닌 축구가 있지요. 저는 그것이 세상의 아름다움이자 신비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맥락에서, 시가 할 수 있는데 소설이 할 수 없는 것, 또는 소설이 할 수 있는데 시가 할 수 없는 것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시의 심연과 고도를 품고 있는 소설들을, 그리고 소설의 품과 구체성을 지닌 시들을 많이 보아왔으니까요. 단지 시와 소설은 서로 다른 모듈들로 이루어진 체계라고 할 수는 있을 듯합니다. 그러니 서로 다른 매력을 발생시키는 것이겠지요. 저는 제 삶과 정신과 감성의 힘이 허용하는 한, 그 상이한 매력들 속으로 조금씩 더 깊이 들어가보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이장욱, <2014년 3월 ‘이달의 소설’ 선정 인터뷰> 중에서
시집 속으로
모든 것은 이미 배달되었다.
그것이 늙은 우편배달부들의 결론,당신이 입을 벌려 말하기 전에 내가
모든 말을 들었던 것과 같이같은 계절이 된 식물들
외로운 지폐를 세는 은행원들
먼 고백에 중독된 연인들
그 순간누가 구름의 초인종을 눌렀다.
뜨거운 손과 발을 배달하고 있다.
우리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있는
바로 그 계절로단 하나의 답장이 도착할 것이다.
조금 더 잔인한 방식으로―「우편」 전문
그것은 내 인생이 적혀 있는 책이었다. 어디서 구입했는지
누가 선물했는지
꿈속의 우체통에서 꺼냈는지나는 내일의 내가 이미 씌어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따라
살아갔다.
일을 했다.
드디어 외로워져서밤마다 색인을 했다. 모든 명사들을 동사들을 부사들을 차례로 건너가서
늙어버린 당신을 만나고
오래되고 난해한 문장에 대해 긴 이야기를우리가 이것들을 해독하지 못하는 이유는 영영
눈이 내리고 있기 때문
너무 많은 글자가 허공에 겹쳐 있기 때문당신이 뜻하는 바가 무한히 늘어나는 것을 지옥이라고 불렀다. 수만 명이 겹쳐 써서 새까만 표지 같은 것을 당신이라고
당신의 표정
당신의 농담
당신이 나를 바라보는 이상한 꿈을 지나서페이지를 열 때마다 닫히는 것이 있었다. 어떤 문장에서도 꺼내어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당신은 토씨 하나 덧붙일 수 없도록 완성되었지만
눈 내리는 밤이란 목차가 없고
제목이 없고
결론은 사라진
나는 혼자 서가에 꽂혀 있었다. 누가 골목에 내놓았는지
꿈속의 우체통에 버렸는지
눈송이 하나가 내리다가 멈춘
딱
한 문장에서―「내 인생의 책」 전문
나는 깊은 밤에 여러 번 깨어났다. 내가 무엇을 읽은 것 같아서.
나는 저 빈 의자를 읽은 것이 틀림없다. 밤하늘을 읽은 것이 틀림없다. 어긋나는 눈송이들을, 캄캄한 텔레비전을, 먼 데서 잠든 네 꿈을
다 읽어버린 것이의자의 모양대로 앉아 생각에 잠겼다. 눈발의 격렬한 방향을 끝까지 읽어갔다. 난해하고 아름다운,
텔레비전을 틀자 개그맨들이 와와 웃으며 빙글빙글 돌았다. 나는 잠깐 웃었는데,무엇이 먼저 나를 슬퍼한 것이 틀림없다. 저 과묵한 의자가, 정지한 눈송이들이,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물끄러미 내 쪽을 바라보는 개그맨들이
틀림없다. 나를 다 읽은 뒤에 탁,
덮어버린 것이.
오늘 하루에는 유령처럼 접힌 부분이 있다. 끝까지 읽히지 않은 문장들의 세계에서나는 여러 번 깨어났다. 한 권의 책도 없는 텅 빈 도서관이 되어서. 별자리가 사라진 밤하늘의 영혼으로. 그러니까
당신이 지금 읽은 것은 무엇인가?밤의 접힌 부분을 펴자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문장들이 튀어나왔다.
―「밤의 독서」 전문
뒤표지 글(시인의 글)
지금 막 허공에 번지는 무수한 빛깔들을 말하려는 힘
퇴근 시간과 임종이 각자의 비율로 임박하는 힘
곤충들의 밤이 깊어가는 힘
맹세하지 않는 힘
확인하려 하지 않는 힘
우리는 사실들 속에서 태어났다
세상의 모든 가로수가 황혼 녘의 바로 이 나무가 되는 속도로
어둠이 오는 길을 하나하나 바라보는 눈으로
우리가 말하지 못한 모든 것들이 사실로 물들어서
사실들의
참된 의욕과 함께
시인의 말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하다
고 중얼거렸다.
그것이 차라리 영원의 말이었다.
물끄러미
자정의 문장을 썼다.
나는 의욕을 가질 것이다.
2016년 6월
이장욱
1부
우편
일관된 생애
얼음처럼
불멸의 개
음악에게 요구할 수 있나?
아직 눈사람이 아닌
튀어나온 곳
을지로
아침들의 연결
비밀
초점
표백
2부
내 인생의 책
신발을 신는 일
전봇대 뒤의 세계
택시에 두고 내렸다
개폐
괄호처럼
필연
종말론사무소의 일상 업무
깜빡임
은행에서의 다다이즘
交叉路
야간근무자
영숙의 독심술
3부
샌드 페인팅
영원회귀
승강기
양치기의 삶
밤에는 역설
손톱 바다
이제 바닥에 긴 몸을 붙이고 잠을 자려는 욕망 외에
다른 어떤 것으로도 존재하지 않는 개에 대하여
가면을 쓴 아이가
조용한 의자를 닮은 밤하늘
월인천강
대답하는 사람
4부
근린공원
유물론자의 거울
사려 깊은 여성들
유엔안보리
유리컵을 던질 때
식물의 그림자처럼
천국보다 낯선
박스
물질적인 생년월일
구원
위험구역
기린과
기린이 아닌 모든 것의
사이에서
밤으로의 긴 여로
5부
영원한 증인
동물사전
개들의 예언
영원에 가까운 삶
무간도
일치
복종하는 힘
소울 키친
밤의 부족한 것
두번째 강물
움직이는 바다
밤의 독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