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구보씨의 일생

경성 모던보이 박태원의 사생활

박일영 지음 | 홍정선 감수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16년 5월 25일 | ISBN 9788932028545

사양 변형판 156x231 · 376쪽 | 가격 16,000원

책소개

우리 모두의 소설가 ‘구보씨’

나의 아버지, 박태원!

 

역사에 빼앗긴 인간 박태원의 일생을 되살려낸

아들 팔보의 생생한 기록

 

2016년은 한국 문단에 하나의 상징으로 남은 ‘소설가 구보씨’ 박태원이 세상을 등진 지 30년이 되는 해다. 박태원 30주기를 맞이하여, 박태원의 맏아들 팔보(八甫) 박일영이 월북 이후 물음표로 남은 아버지의 행적을 쫓으며 일생을 재구성한 회고록 『소설가 구보씨의 일생』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박태원과 열두 살까지 함께 살다 전쟁 때 헤어져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되어버린 박일영은, 구보의 아들이어서 기억하고 기록할 수 있는 소소하고 내밀한 에피소드, 그리고 의문에 싸여 있던 월북 이후 박태원의 삶과 창작 활동을 집요하게 추적해 재구성해낸 기록을 이 책에 담았다. 그 역시 누군가의 친구, 남편, 아버지, 형제였던 ‘구보씨’. 동료 문인들과 경성을 활보하던 ‘모당뽀이’ 박태원의 사적인 삶과, 한국전쟁과 남북 분단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휘말려 모든 것을 잃고 새롭게 시작해야 했던 북에서의 발자취, 병중에도 소설을 놓지 않고 국민 작가가 된 박태원의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삶이 『소설가 구보씨의 일생』에서 생생하게 펼쳐진다.

 

문학을 전공하는 분들이라면,

‘소설가 박태원’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 책을 들춰볼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선,

이 책은 그저 나의 외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일 뿐이다.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나의 외삼촌이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한 줄 한 줄 써 내려간 글인 것이다.

 

아들이 아버지에 대해 쓴다는 것.

어릴 적 헤어진 아버지에 대해 쓴다는 것.

전쟁과 분단으로 빼앗겨버린 아버지에 대해 쓴다는 것.

그것은 무척 아름답고도 처절한 글쓰기이다.

 

저자는 아버지에 대한 어릴 적 기억들을 하나하나 긁어모으고,

헤어진 뒤 아버지의 발자국 또한 집요하게 재구성한 끝에,

마침내 이 한 권의 책으로 아버지를 다시 만나고야 만다.

 

열두 살 가을에 헤어져서

두 번 다시 보지 못한,

그 아버지를 말이다. _봉준호(영화감독, 박태원의 외손자)

 

구보, 아들의 손으로 되살아나다

크게 3부로 나뉘는 이 책은, 저자가 「책머리에」에서 겸손하게 밝혔듯이 학문적 성과를 분석하기보다 자신과 12년간 함께한 (그리고 더 많은 세월 함께여야 했을) ‘인간’ 박태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한국에서 편집자로 일하다 미국으로 가 공부를 마치고 어느덧 은퇴하게 된 저자는 도서관에서 아버지의 자취를 찾기 시작한다. 동생 ‘재영’이 모은 자료들을 참고해 옛 문헌들을 하나하나 조사하며 문학적 흐름과 과거의 기억을 되새기고, 이산가족 상봉 프로그램에 수차례 참석해 구보의 북녘 가족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그곳에서의 삶을 짐작해낸다. 그렇게 모아낸 수십 년치 기록은 “아름답고도 처절”(봉준호)하기까지 하다. 또한 박태원 특유의 문체를 닮아 끊길 듯 끊이지 않고 물 흐르듯 이어지는 긴 문장과 그 안에 자연스레 녹아 있는 ‘서울 사투리’는 읽는 맛을 배가시킨다.

 

경성 모던보이의 탄생

1에는 구보가 태어나 성장하여 학창 시절을 보내고,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기까지의 일화가 소개된다. 구보의 트레이드마크인 ‘오갑빠 머리’와 ‘대모테 안경’ 같은 독특한 외모에 대한 설명부터 호불호가 뚜렷한 성격과 취향 등 우리가 기억하는 ‘소설가 구보씨’와 가장 비슷한, 유쾌하고 개성적이며 총기 어린 청년 소설가의 모습이 가득하다. 아들 된 입장에서 저자는 구인회 참여에서 친일 의혹까지 작품 활동과 그에 관련된 시시비비를 조심스레 가려보기도 한다.

 

오갑빠 머리와 대모테 안경

나는 하는 수 없이 빗과 기름을 가지고서 이것들을 다스리려 들었다. 그러나 약간량의 포마드쯤이 능히 나의 흥분할 대로 흥분한 머리털을 위무할 도리는 없는 것이다. 그래, 나는 취침 전에 반드시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빗질을 하고, 그리고 그 위에 수건을 씌워 잔뜩 머리를 졸라매고서 잤다.

[…] 성미나 한가지로 나의 머리가 그처럼 고집 센 것은 슬픈 일이다. 그러나 또한 어찌할 도리가 없다. 나이 삼십이 넘었으니, 그만 머리를 고치라고 말하는 이도 있으나, 그것이 나의 악취미에서 나온 일이 아니니, 이제 달리 묘방이라도 생기기 전에는 얼마 동안 이대로 지내는 밖에 별수가 없는 것이다.

(「여백을 위한 잡담」, 『박문』 1939년 3월호)

 

아내와의 첫 만남

어머니가 숙명고녀를 다니고 아버지는 아직 제일고보에 적을 두고 있던 시절, 아마 1929년 어름해서일 것이다. 어머니가 학교에서 영어 연극을 하게 되었단다. 한데 제일고보 상급생들이 그 소문을 듣고는 공연 날짜를 맞춰 구경들을 왔다는데, 그날의 히로인은 단연 어머니 정애 양이었고, 구경 온 제일고보 학생 중엔 구보도 끼어 있었다.

아버지는, 제일고보 학적부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어학, 특히 영어에 남다른 흥미를 보였고 공부를 열심히 하셨다.

[……] 한데 뒤에 어머니로부터 나온 얘기로는 ‘그중에서 주역을 맡았던 여학생이 그래도 제법이더라’ 하는 평을 달았다니, 이미 구보는 미래의 신붓감을, 학창 시절의 영어 회화 실력으로써 점검한 셈이 된다. (pp. 73~74)

 

친구를 빼앗긴 이상(李箱)

가장 먼저 피로연장에 현신을 한 것은 역시 구보의 결혼을 가장 가까이에서, 물론 축하를 해줘야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염려를 했던 이상이다. 허구한 날 붙어 다니며 문학을 하던 이상으로서는, 그의 천재적 예감이 그를 괴롭혔는데, 그게 무언고 하면 혹 구보가, 그럴 리는 없겠지만, 자기와 어울리는 시간을 줄이지나 않을까 한 것이다. 그래서 붓을 들고 내리갈긴 첫마디가 ‘구보, 여보게, 결혼은 하더라도 이 둘도 없는 친구 버리지 마시게……’ 하는 마음에서 ‘면회거절반대(面會拒絶反對)’였는데, 그의 예감은 적중을 하여, 구보는 신혼 재미에 한동안 두문불출이었단다. 상(箱)은 늘 하던 대로, 예의 그 다방굴로 사흘을 거푸 찾아가 구보의 창문 아래서 구보를 불렀으나 안에서는 묵묵부답이었다. 나흘째는 손이 아프게 창문까지 두드렸으나 역시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니, 사랑으로 방음장치(?)가 잘 된 들창이 열릴 리가 없었으리라. (p. 80)

 

문우들의 방명록

bbb

 

 

 

 

 

 

 

 

 

이태준의 결혼의 법칙―합해서 하나여야!/결혼을 항해에 비겨 순항을 빈 김기림

 

 

구보씨 가족의 아침 식사

‘오늘 아침에는, 우리, 김치찌개를 맛나게 해 먹자’ 하셨다면, 모두가 이 닦고 세수 얼른 하고, 풍로에 숯불을 피운다, 부채질을 한다, 하고 부산을 떨었다. 숯불이 괄하게 피었으면 소금을 한 줌 뿌려 숯내가 나지 않는 걸 확인한 연후에, 소반 옆에 들여다 놓고,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폭소시지나 짜지 않은 베이컨을 지지다가, 통김치 치마만 한옆에 넣고 익혀서, 고기 한 점 밥숟갈 위에 얹고, 그 위에 긴 치마를 펴서 숟가락 밖으로 나가지 않게 채곡채곡 사려서 조심스레 입으로 가져가면, 코끝을 맴도는 냄새와 혀끝에 감도는 조금은 뜨겁고 시고 그런 맛을 지금도 생각만 하면 눈이 스스르 감기며, 입안 가득 침이 고인다. 그야말로 어린 시절의 잊을 수 없는 추억의 장이 활짝 펼쳐지는 그런 맛이다. 예의 아버지가 늘 말씀하시는 서른두 번 씹고 넘길 동안 입안에서 고루 느껴지는, 더운밥에 김치찌개의 고 맛이라니, [……] 그 맛과 가족 간에 흐르는 훈훈한 정감, 그리고 그 운치, 그게 바로 우리 아버지 구보가 가꾸어가던 가족의 행복이었다. (p. 67)

 

 

요동치는 역사의 한복판에서

2는 해방 이후, 전쟁을 맞닥뜨리고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버린 구보 가족의 이야기다. 야맹증이 심한 구보가 종군기자로 차출되어 가족들은 내내 마음을 졸여야 했다. 겨우 돌아오고 나서 박태원은 ‘남조선문학가동맹 평양시찰단’에 뽑혀 다시 가족을 떠난다. 어머니 김정애 여사는 아버지 구보를 보호하고자 여맹에 부역해야 했고 종신형 선고를 받기까지 한다. 철모르던 남매들이 겪은 고된 피난길과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 과정을 담았다.

 

붙들려간 아버지

어머니는 아버지가 낯선 젊은이를 따라가신 후 이틀은 우리들이 혹 아버지에 대해 물을까 겁을 내시는 듯, 대수롭지 않은 일에 웃기도 하시고 별로 맛도 없는 그런 반찬을 만들어놓으시고도 맛있다고 우리에게도 먹어보라시며, 혼자서 맛이 있는 양 ‘냥냥, 아, 마싰다’를 연발하기도 했지만, 우리들은 우리들대로 짚이는 데가 있었다. 아버지가 무언가 잘못돼가고 있는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되도록 다투는 일도 삼가고 조용히, 책을 읽는다든가 하면서 나름대로 아버지가 얼른 돌아오셨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p. 195)

 

종신형 언도를 받은 어머니

어머니에게 종신형을 내릴 만큼 무거운 죄상(罪狀)이란 것이 ‘이적행위(利敵行爲)’다. 지아비의 방패막이가 되어야 했던 사정으로 마지못해 여맹 일을 본 일이 세상이 바뀌자 ‘부역’이란 대역죄로 둔갑을 하게 된 것이었다. 남들보다 학벌이 있어 여맹 부위원장 자리가 주어졌고, 전세가 뒤집힐 무렵엔 위에서 시키는 통에 할 수 없이 성북 제2지구 반원들로부터 빨랫비누 스무 장을 거둬, 인민군 군복 70착(벌)을 주민들과 함께 빨아주었다. 그리고 그 세탁한 군복에 견장(肩帳)을 달아주었다는(짐작건대 견장 속에 마분지가 들어 있어 세탁을 하려면 견장을 뗐다 나중에 제자리에 꿰매 달아야 했었나?) 일이, 어머니가 1950년 7월 25일부터 동년 9월 27일까지 두 달 남짓한 적치하에서 저지른 ‘이적행위’의 전부였다. (p. 221)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3는 남쪽 가족과 생이별한 다음의 이야기로 그간 알려져 있지 않던 박태원의 월북 이후의 삶을 다룬다. 저자는 구보가 절친한 친구였던 정인택의 아내와 재혼하게 된 사연을 새어머니 권영희 여사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미루어 짐작해본다. 원래도 나빴던 시력이 급격히 저하되고, 나중엔 몇 차례 쓰러져 집필조차 어려운 상황에서도 소설 쓰기를 놓지 않았던 구보가 끝내 반신불수가 되어 생을 마감하기까지의 과정을 북에서 출간한 『삼국지』 『동학농민전쟁』 등의 저서와 함께 허심탄회하게 풀어놓는다.

 

재혼 혹은 전우로서의 결합

나는 생각했소. 어떤 의미에서건 나를 자기의 방조자로 선택해준 그 믿음이 고맙기도 하려니와 그처럼 자존이 강한 그가 나를 찾아와 생활을 합치자는 제의를 하기에 이른 그의 처지가 나의 가슴을 쳤소. 그때 그의 처지는 말할 수 없이 아주 어려운 때였소. 여러모로 말이오. (권영희 여사의 편지에서, p. 254)

 

시력을 잃은 구보

아버지는 재혼 뒤에도 한동안은 소리 없이 혼자 외출을 곧잘 하셨다고 한다. 앞을 잘 보시지도 못하면서 갖은 모양을 다 내고 나가셨단다. [……] 그런데 한번은 풀이 죽어 들어오시는데 이마에는 상처를 입어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었단다. 새어머니가 가슴이 덜컹 내려앉아 물어보니, 혼자 걸어오시다가 맨홀에 발을 헛디뎌 빠지셨다는 것이다. 마침 점심들을 하느라 주위에 자리를 잡고 있던 일꾼들이 아버지를 구출해줬는데, 웬 버젓이 차려입은 신사가 벌건 대낮에 맨홀에가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꼴을 보고는, 모두들 한마디씩을 했던 모양이다. [……] 젊어서부터 남의 눈이라면 어마 뜨거라 줄곧 의식하며 사신 구보께서 무어라 발명도 못 하고 하릴없이 허우적거리기만 했을 것을 떠올리니, 반세기가 흘러버린 지금도 말을 잊고 망연해지기만 한다. 어쨌건 그 일이 있은 후, 새어머니 말에 의하면, 아버지는, 다신 혼자서 바깥출입을 하신 일이 없었다고 한다. (p. 282)

 

 

저자는 맺음말 격인 「부치지 못한 편지」에 이르러, 할아버지가 구보(九甫)고, 아버지가 그보다 덜 된 팔보(八甫)라면, 칠보(七甫)라 불리면 되겠다는 자신의 자식들을 저세상에 있는 부친께 하나하나 인사시킨다. 그리고 박문원과의 정신적 연대가 북에서 박태원의 ‘행복한’ 삶을 가능하게 했다는 생각을 에둘러 전한다. 수십 년 전 헤어진 아버지를 그리며 내내 발자국을 쫓다 “마침내 이 한 권의 책으로 아버지를 다시 만나고야”(봉준호) 만, 희수(喜壽)에 다다른 아들의 마지막 편지가 담담하게 가슴에 와닿는다.

목차

책머리에
1부. 경성 모던보이의 탄생
1장 | 소년 태원, 청년 구보가 되다
탄생과 성장
학창 시절
동경 유학과 뜻밖의 귀국
성격과 취향
2장 | 노총각 장가들다
신여성 김정애 양
“다방골 봇다잉 장가가오!”
아버지가 된 구보
돈암정 487번지 22호
3장 | 문단 활동과 주요 작품
구인회(九人會)와 문우들
구보의 작가의식
일제 말기의 작품 활동과 친일 시비

2부. 요동치는 역사의 한복판에서
1장 | 해방에서 전쟁까지
해방을 맞아
혼돈의 시간
전쟁의 참혹한 아픔
2장 | 월북과 가족 이산
평양시찰단의 일원으로 차출되다
가족, 풍비박산이 되다
1・4후퇴

3부.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1장 | 낯선 삶을 견디며
월북 당시의 정황
죽마고우의 아내와 재혼하다
2장 | 치열한 창작 활동
실명과 전신마비를 부른 창작열
구보와 『삼국지』
건강 악화

맺음말 부치지 못한 편지
가계도
연보
서지 목록

작가 소개

박일영 지음

박태원의 맏아들. 1939년 추석, 서울 종로 예지동에서 태어났다. 혜화국민학교 5학년 때 전쟁을 겪고 큰댁을 따라 남쪽으로 피난을 갔다가 1956년 서울로 돌아와 1959년 경동고등학교를, 1963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수학과를 졸업했다. 1962년 가을부터 7년간 도서출판 정음사의 편집자로 근무하다가, 1969년 여름 미국으로 건너가 오늘에 이르렀다.

홍정선 감수

홍정선은 1953년 예천 출생으로,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82년 『문학의 시대를 창간하면서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저서로 『역사적 삶과 비평』(1986)『신열하일기』(1993)『카프와 북한 문학』(2008)『프로메테우스의 세월』(2008) 등이 있으며 대한민국문학상(신인상)소천비평문학상,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인하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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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4 =

  1. 신원
    2016.06.03 오전 10:03

    구보씨에게

    구보씨,
    당신은 소설 말미에 혼인에 대한 가느다란 긍정을 남겨놓았습니다. 혼인을 수용하는 마지막 한 줄의 의미심장한 문장이 바로 오늘날 이 땅을 활보하는 수많은 구보들, 당신의 무성한 자손들에 대한 예고였을까요?

    86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거리는 온통 구보들의 세상입니다. 그들은 당신과 마찬가지로 걱정 많은 어머니를 집에 남겨두고 하릴없이 길 위를 배회하는 일로 하루를 다 써버립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카페에 들러 차를 마시고, 생활이라 불릴 만한 생활을 가지지 못해 자괴하고 있습니다. 천지가 개벽한 이 시대에도 그들은 여전히 황금을 쫓아다니는 이들을 비난하다가 남몰래 그들을 부러워합니다. 당신이 소설에서 묘사한 상황으로부터 여태껏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채 구보들은 모두 두통과 귓병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세상 사람들 모두 정신병자이지 아닐까 의심하고 있습니다. 또한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연인들을 두고 구보들은 자신이 누구에게도 완전한 행복을 선사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랑도 불가능합니다.

    당신은 소설에서 다섯 개의 사과를 먹는 세 가지 방법에 대한 언급을 한 바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 사과를 먹을 것인가. 1. 맛있는 것부터 먹는다. 2. 점입가경의 형태로 맛없는 것을 먼저 먹고 맛있는 것을 나중에 먹는다. 3. 마구잡이식으로 손에 집히는 것 아무것이나 먼저 먹는다. 저는 오랫동안 맛없는 사과를 야금야금 먹으며 맛있는 것을 최후에 맛보려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이 문제의 근본 오류, 맛있는 사과는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맛없는 사과 네 개를 먹는 동안 조금씩 속이 거북하게 차오르다가 마지막으로 응당 맛있어야 할 그 사과를 한 입 깨물었을 때, 그것이 앞의 네 사과와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얼마나 실망스러웠던가. 이럴 줄 알았으면 마구잡이식으로 먹거나 맛있다 여겼던 것을 먼저 먹을 것을. 사과의 비유에서 당신은 내일 다시 사과를 처음부터 새로 선택할 경우라던가, 불공정 게임에 항의할 만한 어떤 여지도 남겨놓지 않고 소설을 끝내버렸습니다.

    당신의 소설을 읽는 내내, 마음속에서 울화와 같은 것이 치밀어 오르기를 반복하다가 맥이 탁탁 풀리며 점점 쓸쓸해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1930년이나 2016년이나 별반 다를 바 없는 무명 소설가의 삶, 읽히지도 않을 가치 없는 것을 써대는 것이 아닌가 스스로를 향한 회의는 귓병과 두통으로 둔갑하여 병적으로 자신을 괴롭히고, 벗들은 점점 멀어져 가고, 자신을 둘러싼 거짓말들만이 명백한 사실이 되어가는 초라한 소설가의 일상. 단념하는 것이 가장 쉽고, 고독한 것이 제일 익숙하고, 불완전하다는 느낌만이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느낌일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트에 무언가를 끼적거린다는 것이 나쁜 습관이 아니고서야 무엇일까요. 나쁜 습관을 직업으로 삼겠다는 결심은 또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요. 희망이 잠시 우리를 희롱할 때, 그것에 놀아났다가 깨고 나면 여전히 탁한 어둠의 밤이고 더러운 이부자리 위이고 손발이 차가울 뿐인데 이것을 지겹도록 반복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여기 여자 구보 한 사람이 오늘도 여러 가지 거짓말을 하고 집을 나섰습니다. 남편에게는 최고의 소설을 쓰겠다고 장담하고, 시부모에게는 이미 직장을 구했노라 출근하는 척 연기를 했고 아이에게는 위대한 것에 대한 열망을 결코 포기하지 말라고 충고한 뻔뻔한 거짓말쟁이! 사실 이 구보가 오늘 쓴 것은 구보의 삶에 대한 일기 한 장뿐입니다. 구보의 일기를 읽고 자신이 구보의 후손인 것을 발견한 뒤 놀라서 또다시 구보의 일기를 한 장 더 쓴 것이 오늘 해낸 단 한 가지의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세상의 수많은 구보들을 떠올리며, 그들이 모두 이런 일기를 써댄다면 그나마 이 일기조차 희소가치는 없는 것이구나 잠시 절망하면서 그들과 연대할 것인가 적대할 것인가 망설이다가, 우습게도 그녀의 아주 작은 산책의 반경 내에서는 다른 구보들과 마주칠 행운조차 없겠구나 실소하였습니다. 구보 가계의 오래된 족보와 왕성한 번식력, 그 수많은 구보의 이름들 중에 그녀의 이름 하나, 결국 그녀도 금력에 이끌려 혼인할 것이고 족보에서 제 이름이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사람들은 언젠가 저 여자도 구보의 씨족이었지 하다가 금세 자신들의 화젯거리로 돌아가겠지요. 블로그, 이곳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으면서도 늘 반복되며 시간을 잡아먹는 구보들의 영원한 거리입니다. 구보들은 문자 밖에서 살아가는 것을 몹시 두려워하기 때문에 문자를 더욱 겹겹이 껴입고 자신을 설명해야 합니다. 아무도 설명을 원하지 않는 상황에서 끝없이 자신에 대해 설명하는 안쓰러운 구보들의 운명에 대해 저는 이마저도 습관의 지배인가 일종의 중독인가 참담함을 누를 수 없습니다.

    해가 저물고, 카페가 문을 닫을 시간, 구보들이 혼인을 고려하며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입니다. 사실 누구와 혼인할까 따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혼인을 하겠다는 결심이 이미 구보에게는 타협이니까요. 자신을 견지하지 못하고 넘쳐나는 시간을 견뎌내지 못 해서, 혼인을 해서라도 생활을 만들자, 피동적으로 무엇엔가 떠밀려 앞으로 나가 보자 도돌이표만 돌 수 없으니, 이런 생각 자체가 구보 정체성의 타락이며 오염인 줄 알지만 저는 오늘도 혼인하러 집으로 돌아갑니다. 오늘은 혼인할 수 있어야 할 텐데, 혹 구보의 유전자를 알아보고 사람들이 꺼려하지 않을까 잠시 걱정하다가 아니야 그 소설을 읽은 사람은 많지 않아, 무신경한 사람들이 얼마나 행복한데 소설 읽을 시간이 있어, 그 무덤덤함이야말로 구보들을 구해주지, 다시 희망이 마음속에 일어나고 맙니다. 잘못된 희망이지만 또 반쯤 속아 얼른 짐을 싸고 귀가합니다. 구보씨, 당신은 소설 속에서 영원히 산책하며 똑같은 일상을 반복할 텐데, 저는 소설 밖에서도 이를 행할 수 있으니 우리는 놀랍도록 연결되어 있습니다. 당신의 소설은 기적처럼 나에게 다가왔고 당신이 정체를 알려왔을 때, 나는 분명 남다른 목적이 있으리라 직감했습니다. 어서 소설 속에서 걸어 나와 당신의 불쌍한 후손에게 벗이 되어 주세요. 함께 카페에 가고 같이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에 대해 얘기해요. 저를 여기 혼자 뺑뺑이 돌게끔 내버려 두지 마세요. 구보의 삶과 행복, 이 멀고 먼 두 단어를 연결하는 방법에 대해 함께 상의해요. 내일도 저의 독서는 계속됩니다. 모른 척하지 말고, 다음번 소설에서도 저에게 새로운 암시를 부탁해요! 그럼 오늘 밤도 안녕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