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특정한 젠더여도 여전히 인간의 일부로 여겨질 수 있을까?
특정한 욕망을 표현해도 살아갈 수 있을까?
그리고 타인과 사회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을까?”
이 시대 가장 중요한 페미니즘 사상가 주디스 버틀러가
퀴어, 여성, 유대인, 철학자로 스스로를 전면화하고
개인의 역사를 드러내며 써 내려간 전복적 저작 출간!
이번엔 ‘젠더 허물기’다. 『젠더 트러블』로 철학과 페미니즘 학계에 커다란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주디스 버틀러가 이번에는 『젠더 허물기Undoing Gender』로 국내 독자들을 찾아왔다. 버틀러는 이 시대 가장 중요한 페미니스트이자 철학자, 정치 이론가 중 한 사람으로 퀴어 이론을 창시했다고 이야기되며, 2015년 파리 테러를 비롯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 등 다양한 현실 영역에 목소리를 내면서 행동하는 진보적 지식인으로도 자리매김했다.
『젠더 허물기』는 1999년에서 2004년 사이에 쓴 글을 모은 것으로, 페미니즘 이론의 고전이 된 『젠더 트러블』에서 선보인 수행성 개념 등 초기 이론을 이어받아 윤리적 폭력 비판, 사회 소수자들의 공동체, 정체성과 보편성 문제 등 정치윤리적 사유로 나아가는 후기 이론의 출발점이 된 책이다. ‘젠더’가 어떻게 구성되고 수행되는지 이론적으로 고찰하던 버틀러는 이제 남자와 여자라는 규범적 젠더 개념을 허물고, 개별적이고 단독적 주체인 ‘나’ 대신 ‘우리’라는 주체를 호명해낸다. 무엇보다『젠더 허물기』는 이론적 정교함에서 현실적 정치성으로 선회해 ‘인간’이란 무엇이며 ‘살 만한 삶’이란 누구에게 가능한지와 같은 삶의 문제에 관한 성찰을 풀어낸다. 또한 차이를 수용하는 올바른 방식으로서 끊임없이 ‘문화 번역’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트랜스젠더, 인터섹스 등 눈에 보이지 않는 소수자들의 삶의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슬픔, 애도의 정치학을 구사하는 버틀러의 날카롭고 급진적인 논제들은 많은 독자들에게 공감과 대화, 비평과 생각의 전환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문학과지성사 ‘우리 시대의 고전’ 22권).
퀴어 이론의 창시자 버틀러가 삶의 경험에서 건져 올린 정치윤리적 성찰
2015년 한국에는 ‘여성 혐오’ 문제를 비롯해 다양한 페미니즘 이슈들이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SNS에서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태그 걸기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고, 각종 성폭력 문제에 대한 성찰의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높았으며, 리베카 솔닛, 게일 루빈, 케이트 본스타인 등의 중요한 저작들이 연이어 출간되었다. 『젠더 허물기』의 출간은 이러한 바람의 대미를 장식하는 책이 될 것으로 보인다.
『젠더 허물기』에서 주디스 버틀러는 스스로를 유대인, 여성, 비학제적 교육을 받은 철학자, 젠더 동일시의 문제를 겪는 퀴어로 정체화하고 개인적 삶의 역사를 드러낸다. 청소년기에는 지하실에 처박히거나 술집을 전전하던 문제아였고, 대학 시절에는 니체와 셸러를 경멸하며 완벽한 철학이라는 것에 환상을 품었다가 깨져버리기도 했으며, 페미니즘 철학 강의를 시작할 때 있었던 일화 등을 언급하면서 제도 철학 학계에서 자신이 어떻게 배제되었는지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처럼 엘리트 지식인인 동시에 주변인이자 소수자라는 버틀러의 타자적 위상에서 나온 문제의식은 성적 비결정성이나 불확정성으로 고통받는 현실의 인터섹스와 트랜스섹스 문제로 확대된다. 남자로 태어나 여자로 키워졌고, 다시 남자로 ‘전환’한 데이비드 라이머의 비극적 삶과 그를 둘러싼 ‘전문가 집단’의 해석과 결정 들은 비규범적 성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것의 함의를 상징적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이분법적 젠더 규범에 반기를 든 버틀러의 논의는 이제 더욱 확장된 인간의 존재론, 존재에 대한 인식 가능성의 문제로 연결된다. 이 책에서 버틀러는 ‘우리’라는 주어를 종종 사용하는데, 여기서의 ‘우리’는 제1의 성인 남성과 다른 대우를 받아왔고, 공적 발언의 중요성을 의심받아온 여성들이자 비규범적 젠더를 수행해온 퀴어들, 제도권에 속하지 않은 사회 소수자들을 지칭한다.
한편, 버틀러는 난해한 문장을 구사하여 이해가 수월치 않다는 점으로 유명한데, 이는 그녀의 사유가 일반적 인식의 지평을 넘어서 있기에 친숙하지 않고 또한 라캉, 푸코, 레비-스트로스, 헤겔, 하버마스 등의 주류 담론은 물론 브라이도티, 매키넌, 이리가레, 벤저민 등 페미니즘 이론에 대한 메타 글쓰기 방식을 주로 사용하며 그 외에도 자신에 대한 비판 내지 비평에 직접 응답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다른 책들에 비해 이해가 용이하다. 비교적 쉽게 쓰였으면서도 핵심적 아이디어들을 두루 담고 있다는 장점 덕분에 『젠더 허물기』는 버틀러의 이론 세계에 들어가는 입문서로서 역할을 톡톡히 해낼 것이다.
페미니즘 철학사에 한 획을 그을 또 하나의 필독서
버틀러는 “지금 당장 페미니즘 이론 과목에서 무엇을 가르치겠느냐”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답한다. “페미니즘 이론은 페미니즘이 도전받는 부분에 응수하는 것 말고는 다른 연구가 없다.” 페미니즘이란 이미 알고 있는 지식 정보의 전달이 아니라 뭔가 전혀 다른 것, 재표명의 요구에 따르고 위기에서 비롯된 요구에 따르는 것이다. 페미니즘 이론은 사회운동으로서의 페미니즘과 구분할 수 없다. 운동이 없다면 페미니즘 이론은 아무 내용도 없을 것이다.
버틀러는 이 책에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무엇이 좋은 삶인가? 어떻게 해서 좋은 삶은 여성을 포함하지 않는 것으로 개념화되었는가? 여성에게 좋은 삶은 무엇인가? 또한 이런 페미니즘적 사유는 일련의 다른 질문으로 연결된다. 누구의 삶이 삶으로 간주되는가? 우리는 삶이 언제 시작되고 언제 끝나는지를 어떻게 결정하는가? 어떤 조건에서, 어떤 수단을 통해서 삶이 존재화되어야 하는가? 삶이 생겨날 때 그 삶을 돌보는 것은 누구이며, 삶이 저물 때 그 삶을 돌보는 것은 누구인가? 그것은 어떤 가치에 관한 것인가? 버틀러는 페미니즘이 여성에 대한 성적․비성적 폭력에 대항해왔다는 점은 다른 운동들, 반동성애공포증, 반인종차별, 트랜스 및 인터섹스 행동주의 등과 연합할 기반으로 작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나와 다르다는 것, 내 존재에 위기와 문제를 가져온다 하더라도 그 차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윤리적 방식이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이기도 하다. ‘올바른 것’을 모두에게 강제하면 ‘어떤’ 삶 자체가 배제당할 수도 있다. ‘올바른’ 것과 ‘좋은’ 것은 가장 근본적인 범주를 괴롭히는 긴장에 대해 열려 있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버틀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일 것이다.
‘나’에서 ‘우리’로!
모든 성별을 떠나, 존재하는 모든 삶을 그 자체로 인정하는 세상을 위해
정리하자면 『젠더 허물기』는 나에서 우리로, 젠더 계보학에서 정치윤리학으로, 개별적이고 특수한 젠더 행위 주체에서 문화 번역, 즉 우연적이고 경쟁하는 열린 보편성으로 전환하는 길목에 있는 책이다. 따라서 버틀러 사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 이 책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핵심은 서로 다른 차이를 대면하고 공존할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며, 당연시되어온 기준, 규범, 규칙을 형성하는 조건과 권력관계에 대해 끊임없이 정치적, 윤리적으로 심문하는 일이다. 규범에 대한 모든 저항은 이미 그 안에 규범을 품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오히려 규범을 작동시키거나 강화하기도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논의에 반대 혹은 찬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 논의를 가능하게 하는 틀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 모태적 인식 가능성에 대항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규범 바깥에 있는 섹슈얼리티, 친족, 공동체의 삶을 생존 가능하게 만들고 급진적 성정치학의 지평을 열어내기 위해서 지금 절실히 요구되는 실천 과제이다.
각 장에 대해
1장 「나 자신을 잃고」는 살기 좋은 삶은 어떤 것인지, 삶을 인식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결국 혼자만의 삶이 존재할 수 없는 이 공동체 사회 속에서 규범적 ‘인간’ 개념에 포함되지 않는 많은 퀴어와 성소수자들에 대해 재고할 것을 요청한다.
2장 「젠더 규제들」은 젠더를 규제하는 푸코의 규제 권력 개념이나 라캉의 상징계를 중심으로 한 구조주의 정신분석학에 대한 비판의 장이다. 상징적 위치가 변화 가능한지 심문하고, 만약 변화가 불가능하다면 이미 고정된 권위적 법질서가 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한다. 문제는 이런 규범의 지배에 저항할 방법이 있는가이다.
3장 「누군가를 공정하게 평가한다는 것」은 데이비드/브렌다의 사례를 분석함으로써 현재 의료계에서 행해지는 성 교정 수술이 사실상 인터섹스 당사자는 배제한 채 진지한 고민이나 관심을 결여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4장 「젠더 진단 미결정」은 젠더 정체성 장애를 병으로 규정하는 의료 규범에 대한 이중적 비판이다. 성전환 수술에서 보험 보조금을 받으려면 우선 젠더 정체성 장애 판정을 받아야 하는데, 이런 중대한 결정이 왜 본인의 의사나 의지보다는 제도 의료 관행에 의존하는지를 중심으로 논의가 펼쳐진다.
5장 「친족은 언제나 이미 이성애적인가?」는 친족과 결혼 제도의 관계에 대해 비평적 반성의 관점을 취할 것을 요청한다. 게이 결혼 합법화 운동이나 결혼의 대안으로 시민연대협약 등을 추구하는 운동은 그에 포함되지 않는 많은 성행위와 관계들을 불법적으로 만들고, 합법/불법의 위계 구조를 만든다.
6장 「인정을 향한 갈망」은 제시카 벤저민의 인정 이론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장이다. 버틀러는 파괴와 부정을 구분하는 벤저민의 이론을 독해하고, 서로를 인정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고찰한다.
7장 「근친애 금기의 난제」에서는 근친애와 규범적 친족의 문제, 그리고 그 둘의 상관관계를 조망한다. 정신분석학은 근친애 금기를 상징적 가족 구조의 근원으로 공고히 만들면서 근친애 금기의 보편성을 주장하려 한다. 이는 게이와 레즈비언의 양육 형태, 한부모 가족, 복합 가족 등의 형태를 탈실재화하여 유령 같은 존재로 만든다. 버틀러는 이성애적 친족 규범과 근친애 금기에 대한 근본적 재사유가 필요하다고 호소한다.
8장 「몸의 고백」은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분석하면서, 성이 억압되었다는 정신분석학적 전제가 모호한 무의식적 죄의식을 만들고, 그 죄의식이 처벌에 대한 욕망을 만든다는 논의를 펼친다.
9장 「성차의 끝?」은 근원적 성차를 인정하는 페미니즘과 인정하지 않는 페미니즘에 대한 고찰을 통해 젠더라는 용어 속에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까지 포괄하는 열린 의미의 생산적 미래와 소통적 정체성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10장 「사회 변화의 문제」는 젠더 관계와 사회 변화의 문제를 다룬다. 페미니즘의 철학적 추구가 삶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가 중심 주제이다. 버틀러는 브라이도티, 미첼, 스피박의 선행 연구들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성차란 구성적이건 근본적이건 간에 반드시 이성애적일 수만은 없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11장 「철학의 ‘타자’가 말할 수 있는가?」에는 저자 자신의 개인사가 상당히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처음부터 삶과 관련된 것으로 철학을 접했던 버틀러는 철학이 학제적 권위에 안주하는 것은 진정한 철학적 자세가 아니라고 말하며, 철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한다.
■ 책 속으로
2001년 9월 11일 이후 미국에서 우리는 폭력으로 둘러싸인 모든 곳에 있었다. 폭력이 저질러지고 폭력을 겪고 폭력을 두려워하며 더 많은 폭력을 계획하는 모든 곳에 있었다. 확실히 폭력은 최악의 질서의 전조이자 다른 인간에 대한 인간의 나약함이 가장 공포스럽게 노출되는 방식, 즉 어떤 삶 자체가 다른 사람의 의지에서 나온 행동 때문에 파괴될 수 있는 방식이 분명하다. [……] 어떤 면에서 우린 모두 이런 특정한 나약함, 몸으로 사는 삶의 일부인 타인에 대한 나약함을 안고 살아간다. [……] 우리의 삶이 타인에게 의존한다는 사실은 비군사적인 정치적 해법을 주장할 근거가 될 수 있다. 이런 비군사적 정치 해법은 신체적 취약성에 대해 지속적으로 숙고하여 어떤 정치학이 구상될지를 생각하기 시작할 때 치워버릴 수 없는 것, 함께 참여해야 할 것, 심지어 따라야 할 기준 같은 것이다. (1장 「나 자신을 잃고」, 42~43쪽)
젠더는 정확히 어떤 사람‘인’ 것도 아니고, 그 사람이 ‘가진’ 것도 아니다. 젠더는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의 생산과 규범화가 그 젠더 특유의 호르몬, 염색체, 심리적인 것과 수행적인 것 사이의 형태들을 따라 생겨나는 장치다. 젠더가 언제나 전적으로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의 토대를 의미한다는 가정은 요점을 놓치고 있는데, 요점은 그런 일관된 이분법의 생산은 우연적인 것으로 어떤 대가를 치러야만 나타나며, 그 이분법에 꼭 들어맞지 않는 젠더 조합도 그것의 가장 규범적인 사례만큼이나 젠더의 일부라는 것이다. 젠더의 정의를 젠더의 규범적 표현물과 융합해버리면 자기도 모르게 젠더의 정의를 규제하는 규범의 권력을 강화하게 된다. (2장 「젠더 규제들」, 73쪽)
브렌다는 “나한테 주어졌던 그따위 장난감도 좋아하지 않았어요”라고 말하는데, 이 대목에서 브렌다는 이렇게 싫어하는 것이 어떤 증거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 같다. 그리고 브렌다가 이런 ‘반감’을 젠더 디스토피아의 증거로 생각하는 이유는, 브렌다가 자기 경험에 대해 했던 모든 말을 진정한 젠더에 맞거나 그에 반한다는 증거로 이용하려는 여러 사람들의 말을 몇 번이나 계속 들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하는 게 타당해 보인다. [……] 자기 아들이 뜨개실을 갖고 놀거나 딸이 트럭을 갖고 놀면 일반적으로 부모는 젠더 정체성 클리닉으로 달려가는 것인가? [……] 이런저런 장난감 취향이나 치마 입는 성향에, 어깨너비나 몸의 날씬함 등에 매달려 있는 젠더의 진리에 관한 불안감이 작용하는 것일까? (3장 「누군가를 공정하게 평가한다는 것」, 116쪽)
어째서 유방 축소술을 받고자 하는 여성에게는 정신과 인증이 필요 없는데, 음경 축소술을 원하는 남성에게는 그것이 필요한지를 현 젠더 규범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는 일은 물론 흥미롭다. 에스트로겐을 투약하는 여자나 비아그라를 먹는 남자에게는 정신장애의 예후가 없다. 내 생각에 그것은 이들이 ‘자연스러운’ 것을 확대하려 하는 만큼, 규범 안에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 보험업계에서는 여성이 작은 젖가슴을 원하는 것은 말이 되어도 젖가슴을 아예 원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보는 것이다. 유방을 원치 않는다는 것은 그녀가 여자이기를 바라는지 여부를 의문스럽게 만든다. (4장 「젠더 진단 미결정」, 142~43쪽)
결혼을 할지 말지, 임신을 할지 말지, 또 아이를 양육할지 말지에 관한 이런 논쟁 전체에 성적인 장이 배제되어 있다는 것은, 그 대답이 ‘네’이든 ‘아니요’이든 모든 대답이 갑작스레 현실을 제한하는 작용을 한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 이런 것들이 결정적인 문제이고 우리가 어느 편인지 알고 있다고 결정해버리면, 우리는 근원적인 상실의 구조, 즉 애도할 대상의 이름조차 부를 수 없는 상실의 구조를 가진 인식론의 장을 이미 받아들인 것이 된다. 이런 규범의 관점으로는 사유할 수 없게 된 섹슈얼리티, 친족, 그리고 공동체의 삶은 급진적 성정치학의 상실되었던 지평을 형성해낸다. 그제야 비로소 우리는 애도할 수 없는 것의 궤적을 따라 ‘정치적으로’ 우리가 갈 길을 발견하게 된다. (5장 「친족은 언제나 이미 이성애적인가?」, 210쪽)
근친애 금기를 상징적 가족 구조의 근원으로 보장하고자 하는 법은 그것에 반드시 따르는 상징적 결과물만이 아니라 근친애 금기의 보편성까지 주장한다. 그렇게 정식화된 법의 상징적 결과 중 하나가 바로 부모 역할을 하는 게이와 레즈비언 형태, 싱글맘 가족, 아버지나 어머니가 하나 이상일 수도 있는 복합 가족의 배치를 탈실재화하는 것인데, 여기서 상징적 위치는 새로운 사회적 형성 속에 확산되어 재의미화된다. 우리가 이런 법의 지속적인 상징적 효과를 고집한다면 근친애적 행위가 일어난다고 생각하기란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성애적 규범성에 도전하는 방식으로 한부모나 양친 부모가 갖는 심리적 자리에 대해 생각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힘들어질 것이다. (7장 「근친애 금기의 난제」, 252쪽)
성에 관해 말하는 즐거움은 성에 대한 즐거움인가, 아니면 말하는 것에 대한 즐거움인가? 또 이 둘이 완전히 다른 형태의 즐거움이라면, 서로 관련은 되어 있는 것인가? 고백의 내용은 무엇인가? 고해 형식이 진정제 작용을 하는 어떤 행동, 욕망, 불안, 지속적 죄의식인가? 고백이 시작되면 보통은 어떤 행동에 초점을 맞추지만 그 행동이 고백해야 할 욕망의 근원을 숨길 수도 있다. [……] 피분석가는 고백의 내용을 어떤 행동, 욕망의 행동, 성적 행동으로 상상하면서 말하지만 그런 말 자체가 새로운 매개가 된다. 이 행위는 정말 어떤 새로운 행위가 되거나, 예전 행위에 새 생명을 불어넣게 되기 때문이다. (8장 「몸의 고백」, 262쪽)
민주적 기획으로서의 페미니즘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무언가에 모두 다 동의할 수 있다는 전제를 박탈당하거나, 아니면 그와 똑같이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가치가 논쟁 중에 있으며 그런 가치는 정치적 경합을 벌이는 영역에 남게 되리라는 생각을 수용해야 한다. 이는 마치 내가 페미니즘은 그 무엇으로도 확립될 수 없고 스스로에 대한 반성으로 가는 길에 방향을 잃을 것이며, 이런 자기반성의 순간을 넘어 세계에 대한 적극적 참여의 길로 나갈 수 없으리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페미니즘은 이런 형태의 내부적 불화가 나타나는, 관련된 정치적 실천을 하는 과정에 있다. 그리고 나는 이런 불화를 단일성으로 화해시키려는 욕망에 맞서는 것이 바로 페미니즘 운동을 살아 있게 만든다고 단호히 주장할 것이다. (9장 「성차의 끝?」, 278쪽)
미국의 페미니스트 캐서린 매키넌이 수년 전 빈에서 열린 인권 포럼에서 자신은 “보스니아 여성을 대표한다”고 선언했을 때 우리는 이것을 꽤 문제적으로 보았다. 아마 그녀는 보스니아 여성에게는 목소리가 없다고 생각한 듯하나, 보스니아 여성들이 자신들의 입장을 전용하여 식민화하려는 매키넌의 시도에 대해 공식적으로 반대를 표명했을 때 그녀도 분명 뭔가 다른 것을 배웠으리라 생각한다. ‘문명’ ‘근대성’ ‘진보’ ‘계몽’ 그리고 ‘백인 남성의 과제’라는 이름으로 발생하는 선교의 역사와 식민 팽창의 역사를 본다면, 페미니스트는 또한 빈곤층, 토착민, 그리고 학계에서 근본적으로 권리가 박탈된 사람들을 ‘대표’한다는 것이 그들을 가르치려 들면서 식민화하는 노력은 아닌지 물어야 한다. (10장 「사회 변화의 문제」, 359쪽)
내가 예일 대학 철학과에서 페미니즘 철학에 관해 강의를 시작했을 때, 강의실 뒤편에 다소 성가신 인물 몇 명이 눈에 띄었다. 성인들 몇 명이 이리저리 서성대면서 내 강의를 듣다가 갑자기 강의실을 나가고 1~2주 뒤에 되돌아와서는 그 성가신 의례를 똑같이 반복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내가 시험 삼아 드 만의 세미나에 참석했을 때 행동했던 그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이들은 내가 가르치고 있던 게 철학의 분류 하에 일어난다는 사실에 분개한 정치 이론가들이었다. 그들은 완전히 들어와 자리 잡지도 못했지만 그렇다고 떠나지도 못했다. 그들은 내가 뭐라고 말하는지 알아야 했지만 그 강의를 들을 만큼 가까이 다가가는 것도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다. 그건 내가 나쁜 철학을 가르치고 있는지 또는 철학을 잘 가르치고 있는지의 문제가 아니라, 내 강의가 철학이기는 한 건지의 문제였다. (11장 「철학의 ‘타자’가 말할 수 있는가?」, 378쪽)
감사의 말
서문 | 합주 행위
1장 나 자신을 잃고: 성적 자율성의 경계에서
2장 젠더 규제들
3장 누군가를 공정하게 평가한다는 것: 성전환과 트랜스섹슈얼의 알레고리
4장 젠더 진단 미결정
5장 친족은 언제나 이미 이성애적인가?
6장 인정을 향한 갈망
7장 근친애 금기의 난제
8장 몸의 고백
9장 성차의 끝?
10장 사회 변화의 문제
11장 철학의 ‘타자’가 말할 수 있는가?
옮긴이 후기 | 나를 허물고 우리로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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