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은 눈으로 진실을 보는 내감의 몽상가
세상의 문밖에서 속삭이는 내밀한 고백
눈을 감고도 눈을 감고 싶어졌다
문을 잠그고 손잡이를 일곱 번 돌리는 습관하고는 다른 것이다
나는 안으로 안으로 눈을 열고 들어갔다
– 「감은 눈」 부분
올해로 등단 15년차를 맞는 시인 이민하의 네번째 시집 『세상의 모든 비밀』이 출간되었다. 2012년 현대시작품상을 수상한 작품 「세상의 모든 비밀」을 포함한 총 61편의 시가 묶였다. 전위시의 대표주자, “단 한 번도 상투적으로 말하지 않는 시인” “말놀이로 세계 건축의 기초공사”를 마쳤다고 평가받는 시인 이민하는 은폐된 현실의 한 국면을 도드라지게 하는 환상을 통해 말의 힘으로 상처를 이겨내는 용기를 보여줘왔다. 첫 시집 『환상수족』(2005)에서 변용과 왜곡 그리고 환상 체험이라는 ‘언어의 착란’을 통해 상식과 질서의 세계를 파괴하고, 그 자리에 가공된 시적 이미지의 세계를 구축했다면, 『음악처럼 스캔들처럼』(2008)에서는 기면증 환자의 악몽과도 같은 체험을 불안하고 강박적인 언어로 구현하였고, 『모조숲』(2012)에서는 현실을 드러내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환상을 이어가며 ‘모조’적 진실이라는 새로운 문법과 전복된 세계를 창조했다. 이번 시집에서는 안전한 상태로 획일화된 공간에 머물기를 거부하고 세계 바깥에 놓인 존재로서 기성의 진리와 허위에 일격을 가하는 모험을 계속해나간다.
비밀로 넘쳐나는 부동의 세상
늙은 소녀들은 아직 사랑이 넘치고
구걸하는 남자들은 눈물이 넘쳐서
기울지도 침몰하지도 않는
어떤 세계에서
흩어진 나의 비밀들은 어느 귀를 타고 흘러가는가
내가 같은 남자와 백번째 헤어진 날에 대해
당신은 지금 내 비밀 하나를 보관 중이다
혀처럼 얇게 저며진 물결 하나가 귓속으로 들어갔다
의도하지 않아도
언젠가 귀를 기울이는 쪽에서
당신도 모르게 식은땀이 흐를 것이다– 「세상의 모든 비밀」 부분
표제작이기도 한 이 시는 말들의 운동과 흐름을 다루며 동시에 “내통하는 입과 귀가 몰래 낳는 기형의 비밀들”에 귀 기울인다. 말들이 개개인의 소소한 사정을 비밀과 음모로 재생산하고 유통하는 구조를 지니듯, 이 시 역시 부속 이미지들을 파생시키는 흐름과 정박의 구조를 갖고 있다. 말들은 넘쳐흐르지만 그저 말들로 말들을 보충하기만 하는 세계. 이 “기울지도 침몰하지도 않”는 부동성은 진실을 은폐한 채 허위의 말만이 떠도는 견고한 세계를 보여준다. 성찰 없는 말들은 형태만 변주되어 흘러 다닐 뿐 총량이 어느 한곳으로 기울지 않는다. 누구도 이 흐름을 멈추려 하지 않고, 멈출 수 없다는 점에서 어쩌면 공평한 것일 수도 있다. 내 사정이 비밀이 되어 돌고 돌아 다시 내 귓전을 때리는 날 흐르는 식은땀을 감수할 수만 있다면 아무런 불평 없이 우리는 “세상의 모든 비밀”과 더불어 살 수 있다.
눈 감은 몽상가의 야행(夜行)
어느 날 한 사람이 담장을 넘어와서 나를 몰래 데려갔다 누구냐고 묻지 않고 그를 따라갔다 입을 찾을 수 없었지만 묵음으로도 알 것 같았다 손을 잡고 있었지만 세상에 없는 피부 같았다 [……] 다음 날 밤에도 나는 다른 담장을 더듬었다 내가 나를 못 알아볼까 봐 더러운 잠옷을 입고 갔다 빈집을 터는 기분이어서 한 사람은 늘 꿈 밖에서 망을 봤다
– 「야행」 부분
인용된 시에서 볼 수 있듯 시인은 꿈속과 그 바깥의 경계를 더듬어가며 낯선 세상으로의 모험을 이어간다. 상투와 안이의 세계에 머무는 것을 거부하고, 그 세계의 바깥쪽을 탐색하는 여정이다. 문학평론가 함돈균이 이민하 시의 ‘환상’에 대해 “초현실이거나 비현실이었던 적이 없었다. 그녀에게 환상은 언제나 은폐된 현실의 한 국면을 도드라지게 하는 첨예한 방법론”이라고 설명한 것처럼, 시인의 환상은 편집증적 몰입이나 환상으로의 도피와는 확연히 다른, 현상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등장한다. 특히 이번 시집에서는 환상이 눈 뜬/눈 감은, 담 안/담 너머, 꿈속/꿈 밖 등 경계 사이에서 발휘된다.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오형엽은 이를 “몽상가의 야행”이라고 칭하면서 “명료한 인식과 몽상의 경계에 맺”히는 “꿈의 안과 밖의 경계에 세계의 0과 1 사이의 공간”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벽 속에 나란히 누운, 나의 절반인 당신에게
스무 해 동안 갈아주지 못한 기저귀가 생각난 듯 갑자기
엄마는 하얀 시트를 둘둘 만 채 벽 속으로 들어갔다.
앰뷸런스도 배웅하지 못한 나는 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있었다.
문법보다 마법을 배웠더라면 두 손으로 벽을 비집고 엄마를 꺼낼 수 있었을까.
딱딱한 것을 보면 왜 잠만 올까.
벽 속에 누가 있다. 가구가 늘어도 한쪽 벽엔 늘 네모난 빈자리가 놓여 있는 이유.
나는 벽과 나란히 누워 있다.[……]
서늘한 것을 보면 왜 잠만 올까.
벽 속에 누가 있다. 손끝으로 벽을 쓸어보면 생생하게 묻어나는 마지막 체온.– 「벽 속의 누가(累家)」 부분
이민하가 주목한 그 경계, 환상들이 튀어오르는 ‘이면의 세계’에는 누가 있는 걸까. 이 시집에서는 그간 이민하의 시에서 좀처럼 볼 수 없었던 개인사의 이력들이 드러난다는 점을 먼저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시인은 이제 이례적인 ‘고백’을 시작한다. 2012년 현대시작품상을 수상하며 시인은 자선 에세이에서 “차갑고 무심했던 아버지가 내게 물려준 피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친해지기도 전에 엄마가 세상을 떠난 탓인지 제 시에는 사람들이 함께 둘러앉아 즐길 만한 음식 냄새는 배어 있지 않습니다”라고 밝힌 적이 있다. 뒤표지 글에서 시인이 말하듯 2015년은 고인이 된 시인의 어머니와 이민하 시인이 같은 나이가 되는 해다. 이번 시집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죽음과 어둠, 상실에 대한 흔적 또한 시인이 대학 시절 어머니를 잃은 기억에서부터 온 것이 대부분이다. 오형엽은 해설에서 “개인사의 특수한 내력조차 이제 감은 눈이 마주한 벽에 투영되는 ‘세상의 모든 비밀’에 귀속”됨을 지적하며, 상투적이거나 유난한 자기 고백이 아닌 “과거의 바람이 현재의 ‘나’를 뒤흔들 힘을 잃게 하고, 단지 그것을 세사(世事)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시인의 자세에 주목한다.
죽은 사람과 살아 있는 사람이 반씩 섞여 있는 마을에 머물렀다. 막힌 굴뚝과 산책로를 손보고 낡은 식탁보와 새벽 꿈자리를 갈아주고 싶었다. 길에서 사라졌던 신비와 아이들이 내내 따라다녔다. [……] 숙자 씨에겐 꼭 맞는 시집을 지어주고 떠날 참이었다. 그녀는 흙이 되었다가 물이 되었다. 서쪽에 묻혔다가 남쪽으로 흘러갔다. 이제야 친구가 되었지만 그녀 나이에 이른 나를 데려가지 않았다. 그녀의 死생활을 지켜주려고 뒤를 밟았다. 나는 나무가 되었다가 물고기가 되었다. – 「뒤표지 글」에서
조금은 느지막이 꺼내어놓은 시인의 고백. 그렇지만 ‘단 한 번도 상투적으로 말하지 않는 시인’ 이민하의 내밀한 고백은, ‘언제나 두 겹으로 기능하는 시어’를 통해 이미지와 서사 사이에 환상의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직시된 현실을 상영하는 그만의 독특한 시적 문법으로 천천히 풀려 나온다. “그녀의 死생활을 지켜주려고 뒤를 밟았다”는 시인은 스스로 눈 감고 어둠으로 다가가 “안으로 안으로 문을 연다”.
■ 시집 속으로
반쯤 감긴 눈으로 나는 걸었네
자작나무 숲은 얼마나 먼가
당신은 꼭꼭 숨어 해먹 위에서 잠들었네
나는 열두 시에 도착했네
안개를 들추고 숨을 죽였네
이마 위의 그림자를 쓸어 올리며 당신은 실눈을 떴네
낡고 빛바랜 청포장이 지평선까지 흘러내렸네
젓가락처럼 식도를 모아 점심을 나누고
나는 햇잎으로 입을 훔치며 오후의 거리로 내려왔네
숨바꼭질하는 연인들의 미로원을 지나
식칼들의 합주 속에 군무를 추는 불빛 지붕들을 돌아
장마철에도 나는 숲길을 올라갔네
빗줄기가 신발에 갈고리를 걸고 예인선처럼 끌었네
나는 열두 시에 도착했네
눈꺼풀 위의 빗방울을 개미처럼 튕기며 당신은 잠들었네
해먹 위에 우산을 씌워주고 돌아와
어제는 자전거를 타고 갔네
질주하는 트렁크에 히치하이크한 날도 있네
심장에 낀 살얼음을 긁으면서도 갔네
자면서도 나는 우편낭을 챙겼네
뿌옇고 까만 그을음이 끼는 정오와 자정
자면서도 당신은 편지를 쓰고 있었네
공중에서 녹색 머리칼들이 떨어져 글자들 사이에
섞였네
바람의 잔이 떠다니고
발목만 땅에 묻힌 백골들이 빈속을 채우며 앉아
있었네
횃불을 든 마을 사람들이 왁자하게 몰려왔네
당신은 주섬주섬 자작나무 숲을 수레에 실었네
비켜 앉은 내 손 위로 수레바퀴가 지나갔네
밤과 낮이 천천히 뒤집혔네
굴러 떨어진 나무토막을 하나씩 던지며
사람들은 모닥불을 피우다 돌아갔네
아직 뜨거운 잔가지 하나를 뭉개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자작나무 숲은 얼마나 먼가
반쯤 감긴 눈으로 나는 걸었네
– 「열두 시를 지나는 자화상」 전문
나는 옆집 아이의 태생의 비밀을 알고 있다
그 애 아빠의 정치적인 비밀을 알고 있다
왜 그들은 내게 입막음을 안 하나
하루아침에 미용실 여자가 미인이 된 까닭을,
편의점 남자가 시인이 된 까닭을, 그들이 손잡고 구청에 간 까닭을,
석 달 후 남자 혼자 구청에 간 까닭을 나는 알고 있는데
여자의 머리색이 남자의 정치색과 어울려
신발 속에 감춰진 짝짝이 양말처럼 아무도 모르게
호들갑을 피우는 오후
선박처럼 무거운 귀를 잠시 멈추고 잠이 오는 의자에 앉아
문맹인 나는 머리색을 바꾸고
색맹인 애인은 이별의 편지를 바꾸고내 귀를 타고 밀입국한 사람들은
어떻게 빠져나온 것일까 반대편 귀를 향하여
얼굴을 뒤집고
지하철 남자의 의족이 지상의 물결 위로 떠오를 때
인어공주가 되는 이야기
아름다운 두 다리의 침묵에 대하여
진위 논란으로 시끄러운 세상에 대하여
칼의 입맞춤 대신 물거품이 되어 바다에 녹아버린
성전환자의 슬픈 동화 속에서
목소리를 가로챈 마녀의 기술처럼
목사의 안수기도에 섞이는 어떤 성분들
이를테면, 앞 못 보는 어둠의 눈을 번쩍 후려치는
어떤 선언들늙은 소녀들은 아직 사랑이 넘치고
구걸하는 남자들은 눈물이 넘쳐서
기울지도 침몰하지도 않는
어떤 세계에서
흩어진 나의 비밀들은 어느 귀를 타고 흘러가는가
내가 같은 남자와 백번째 헤어진 날에 대해
당신은 지금 내 비밀 하나를 보관 중이다
혀처럼 얇게 저며진 물결 하나가 귓속으로 들어
갔다
의도하지 않아도
언젠가 귀를 기울이는 쪽에서
당신도 모르게 식은땀이 흐를 것이다
– 「세상의 모든 비밀」 전문
■ 시집 해설
시인은 안전한 상태로 획일화된 세계의 비전에 편집증적으로 머무는 것을 거부하고 그 세계의 바깥쪽에 상실된 상태로 남은 채 기성의 진리와 허위에 일격을 가하는 시적 모험을 개시한다. 바깥에 놓임으로써 그는 “내통하는 입과 귀가 몰래 낳는 기형의 비밀들”에 귀를 기울인다. 이제 시인은 내감의 몽상가가 된다._문학평론가 조강석
■ 뒤표지 글
죽은 사람과 살아 있는 사람이 반씩 섞여 있는 마을에 머물렀다. 막힌 굴뚝과 산책로를 손보고 낡은 식탁보와 새벽 꿈자리를 갈아주고 싶었다. 길에서 사라졌던 신비와 아이들이 내내 따라다녔다. 통역 대신 수다를 거들었다. 우편함엔 잎을 깔아 문 앞에 세웠다. 날개를 다친 당신도 쉬었다 가기를.
숙자 씨에겐 꼭 맞는 시집을 지어주고 떠날 참이었다. 그녀는 흙이 되었다가 물이 되었다. 서쪽에 묻혔다가 남쪽으로 흘러갔다. 이제야 친구가 되었지만 그녀 나이에 이른 나를 데려가지 않았다. 그녀의 死생활을 지켜주려고 뒤를 밟았다. 나는 나무가 되었다가 물고기가 되었다.
1부
원근법/이 시는 커튼의 종류일까/체육 입문/에덴의 비밀/포도나무 아래서/피조물의 추억/이인(異人)의 방/휴일의 쇼/노래/siesta/열두 시를 지나는 자화상/화양(華陽) 시절/백혈병/기억의 밥/수인(囚人)/공원의 아름다움/下女/7인분의 식사
2부
붉은 스웨터/타이피스트/백치(白痴) 바나나/만남의 광장/묶여 있는 두 얼굴/식물인간/흑백사진모녀/그루밍 패밀리/소시민(小詩民)/눈물/젖은 방/당신이라는 과학/육체의 비밀/야행(夜行)/tattoo/물의 시절/수중 극장/물결/벽 속의 누가(累家)/애도의 문제/감은 눈/에로스
3부
옛 맛/파묘(破墓)/해변의 동화/노스탤지어/음식의 윤리/세상의 모든 비밀/전람회 잡담/공(空)의 관람/안과 밖/죽은 사회의 시인/무궁동(無窮動)/버스 여행자/고양이와 고양이들/어둠은 우리를 눈뜨게 하고/가족의 이해/지하 이웃/자정의 말굽 소리/외투가 지나간다/나비論/요조숙녀
해설 | 감은 눈과 세계의 이본・조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