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삶은 내게 신비한 수수께끼,나는 어떻게 지금 이곳에 서게 된 것일까.”
영국에 뿌리내린 식민지인,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나이폴
이방인의 긴 여정을 거친 뒤, 중년에 마주한 삶의 진실
2001년 노벨문학상을 비롯하여 부커 상, 호손 상 등 다수의 상을 수상한 제3세계 문학의 기수 V. S. 나이폴의 『도착의 수수께끼The Enigma of Arrival』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영국령 트리니다드 토바고에서 인도 이민자 3세로 태어난 나이폴. 모던 라이브러리와 각종 매체 선정 20세기 100대 소설에 꼽히는 나이폴의 또 다른 명작 『비스와스 씨를 위한 집』(2014년 문학과지성사 출간)에서는 자신의 아버지와 어린 시절에 대해 썼다면, 이 책은 나이폴이 마침내 모든 가능성이 막힌 식민지 트리니다드를 떠나 국가 장학금을 받고 옥스퍼드로 유학을 가는 순간부터 작가가 된 이후까지의 이야기를 소설화한 작품이다.
고난을 딛고 꿈을 이룬 작가의 중년은 안정적이고 성취감에 휩싸여 있을 것 같지만, 경계인으로서의 긴 여정은 그를 매일 머리가 터지는 악몽을 꾸는 신경쇠약으로 내몰았다. 혈통적으로는 인도인이고 고향은 트리니다드, 사는 곳은 영국인 나이폴은 어느 곳에도 소속될 수 없는 국외자이며, 이방인이었다. 어려서부터 영국식 교육을 받고 서구 문명에서 영감을 받고 자란 작가 나이폴의 정체성은 핍박받는 피지배인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오롯이 서구인으로서 살 수도 없었다.
수십 년간 이어진 이방인으로서의 삶, 죽음을 직접적으로 대면하는 중년을 통과하며 삶의 깊은 진실에 다가간 나이폴은 비로소 영국의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식민지인도 영국인도 아닌 한 인간의 이야기를 쓴다. 그 이야기를 쓰는 과정, 고향을 떠난 순간부터 월트셔의 삶에 안착하기까지 나이폴의 긴 여정을 담은 것이 바로 이 책 『도착의 수수께끼』다. 이 책은 나이폴을 평생 따라다녔던 정체성과 삶에 대한 고뇌와 성찰이 담긴, 문학적 완결판 같은 작품이다.
“단순한 우연 이상의 어떤 힘이 나를 이곳으로 데려왔다”
‘도착의 수수께끼’는 이탈리아 화가 키리코Giorgio de Chirico의 그림 제목이다. 황량한 해안가 건물 앞에 두 사람이 서 있다. 이 둘은 도착한 것인지 떠나는 것인지, 혹은 서로 아는 사이인지도 불확실하다. 나이폴의 상상에서 방문자는 도시의 활기에 휩싸여 점차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을 잊어버리고 그저 낯선 곳에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는 “나는 어떻게 여기 있게 되었는가?”를 되짚어볼 것이다. 나이폴은 이 그림이 자신의 경험을 에둘러 표현해준다고 생각했다.
유학길에 중간 기착지로 들른 대도시 뉴욕에서 택시 기사에게 바가지를 쓰고, 매체에서만 보던 미국 담배와 『뉴욕타임스』도 사보고, 처음 보는 뜨거운 수돗물에 화상을 입을 뻔하고, 좌절감에 휩싸여 잠든 여행 첫날은 우습고도 쓰라린 경험들이다. 이렇게 시작된 나이폴의 여정은 개인으로서나 작가로서나 거듭되는 떠남과 어딘가에 ‘도착’하려는 시도의 연속이었고, 이런 이방인으로서의 삶은 큰 피로감을 주었다. 지친 그가 월트셔 주의 시골집에 자리 잡고, 날마다 새롭게 자연에 눈을 뜨면서 서서히 치유된다. 그는 이것을 ‘두번째 탄생’이라고 말한다. 이 작품은 현재와 과거, 월트셔와 트리니다드 섬을 오가며 자연 풍경과 이웃들, 일상생활 등을 담담하게 서술한다. 그리고 오랜 시간 두 개의 세계와 자아에서 세상을 바라봤던 나이폴은 이런 평범한 일상들에서 제국과 식민지, 혹은 지나간 역사와 현재의 사람 사이의 정교하고 중층적인 의미망을 형성한다.
한때 16명의 정원사를 거느렸지만 이제 한 명도 고용하기 힘들게 쇠락한 정원과 오래된 집을 정성껏 가꾸며 평범한 일상에 충실했던 잭의 죽음은 나이폴에게 끊임없이 밀려드는 노쇠와 쇠락의 변화에 인간이 어떻게 맞설 것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또한 농장 관리인 필립스 씨로부터는 우리가 딛고 사는 땅은 그저 단순한 땅이 아니라는 걸, “땅은 우리가 거기에 불어넣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우리의 기분과 추억에 공감”한다는 걸 배운다. 이 외에도 새로 온 농장 일꾼 레스와 브렌다 부부의 애증과 살인, 장원의 마지막 정원사 피턴의 은퇴 등 장원과 사람들의 이야기가 모자이크처럼 조화롭게 결합하여 인간 삶의 정경을 펼쳐 보여준다.
식민지 출신의 자아와 제국의 언어로 글을 쓰는 작가의 화해
나이폴의 정체성과 삶에 대한 고뇌가 담긴 자전 소설
잭과 그의 시골집 그리고 그의 정원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내가 그 계곡에서 두번째 삶을 시작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연 세계에 두번째로 눈을 뜨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었다. _155쪽
1987년, 나이폴은 오랜 창작 활동 끝에 처음으로 영국과 영국에서의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도착의 수수께끼』를 발표했다. 그가 18세에 트리니다드 섬을 떠나 영국으로 건너온 지 37년, 그리고 첫번째 소설 『신비한 안마사』(1957)를 출간한지 30년 만의 일이었다. 당시 나이폴은 서머싯 몸 상과 부커 상 등 영국의 권위 있는 문학상을 모두 수상한 명망 높은 작가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늘 비난이 따라다녔는데, 사람들은 성공한 작가인 그가 제3세계인을 대변해주길 바랐지만 그는 그에 부응하는 작가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유학을 떠나는 비행기에서부터 영국식 교육이 그에게 주입한 가장 문화적인 작가, 즉 영국적인 작가가 되고자 부단히 애를 쓴다. 어린 나이에 시작된 이러한 노력은 그때까지의 자신, 자신의 타고난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그는 결국 자신의 진정한 문학적 주제는 트리니다드와 자신을 분리하고 타고난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을 다시 기억하고 회복하는 데 있음을 깨달았다. 시골뜨기 아시아인 소년과 그가 되고자 하는 메트로폴리탄적 작가 그 사이의 간격. 그 둘의 통합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글쓰기가 필요했는지!
『도착의 수수께끼』에 도달해서야 식민지 출신의 자아와 영국에 살며 제국의 언어로 글을 쓰는 작가이기도 한 나이폴의 분리된 자아가 비로소 온전한 하나로 드러난다. 사탕수수 대농장의 흑인 노예들을 대체할 계약직 노동자로서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를 떠나 역시 또 다른 식민지인 트리니다드 섬으로 이주해온 이민자의 후손이었던 나이폴은 이 책에서 자신이 어떻게 바로 그 제국주의자들의 땅에 힘겹게 뿌리를 내리고 두번째 인생을 맞이하게 되었는지, 두 개의 자아가 어떻게 오랜 글쓰기의 여정 끝에 통합을 이루었는지, 그리하여 마침내 평생 처음으로 ‘집’(실제로 나이폴은 이 작품의 배경인 윌트셔 주 솔즈베리에서 부인과 함께 지금까지 살고 있다)이라고 할 만한 곳에 어떻게 ‘도착’했는지를 이야기한다.
삶 너머의 어떤 것이 아니라, 삶 자체가 최우선이다
–죽음과 죽음에 대처하는 방법
이 작품의 출발은 정체성을 찾는 여정이었으나, 단지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나이폴은 지친 몸을 이끌고 월트셔에 도착한 며칠 뒤 키리코의 그림을 보고 이 작품을 구성하지만, 마침내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죽음에 대한 새로운 인식 때문이라고 말한다. 죽음과 죽음에 대처하는 방법이 이 작품의 모티프였다. 죽음의 시기가 다가왔음을 알면서도 평상시와 같이 휴일 저녁 친구들과의 한잔을 잊지 않고 평범한 일상을 지키다 세상을 뜬 잭, 평화롭게만 보이는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치정 살인, 시골집을 자주 방문하던 작가 앨런의 자살과 장원 관리자 필립스 씨의 갑작스런 죽음, 트리니다드 섬에 있던 여동생의 죽음과 장례식, 그리고 자기 자신이 죽음의 문턱에서 되돌아온 경험.
그의 주변은 온통 폐허로 둘러싸여 있었다. 사방의 모든 것이 변화였고, 성장과 창조의 주기가 얼마나 짧아졌는지 상기시키는 것들뿐이었다. 하지만 잭은 삶과 사람이 진정한 신비라는 걸 느끼고 있었다. [……]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삶 너머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삶 자체가 최우선임을 확신했던 것이다.” _150쪽
나이폴은 여러 죽음을 바라보며, “신비한 수수께끼로서의 인간과 인생”과 “인간의 진정한 슬픔과 종교를 발견”하고, “인간에 대한 이 새로운 경의”와 마주하고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트리니다드와 영국, 과거와 현재, 삶과 죽음을 오고 가는 30여 년의 긴 여정 끝에 나이폴은 비로소 식민지인도 영국인도 아닌 인간의 이야기를 쓸 수 있었다. 바로 『도착의 수수께끼』를.
■ 본문 속으로
단순한 우연 이상의 어떤 힘이 나를 이곳으로 데려왔다. [……] 그리고 영국에서 내게 가장 쓰라린 이방인의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그런데 이제 아이러니하게도—혹은 적절하게도—, 이 몰락한 영지의 장원 안에서 살면서, 산책을 위해 밖으로 나다니면서, 그 불안감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리고 이 거친 정원과 저지대 목초지 옆의 과수원에서 나는 내 기질과 완벽하게 어울리고, 내가 어린 시절 트리니다드에서 영국의 자연에 대해 그릴 수 있었던 그 모든 이상적인 모습에 정확히 부합하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발견했던 것이다. _85~87쪽
이곳의 아름다움, 점차 깊어진 이곳에 대한 나의 커다란 사랑, 내가 알았던 다른 어떤 장소에 대한 애정보다도 더 커다란 사랑이 나를 너무 오랫동안 이곳에 머물게 했다. [……] 언제나 일종의 거래가 있기 마련이다. 나의 경우에는 작가로서의 재능과 자유 대신, 글 쓰는 삶의 노고와 좌절감, 그리고 내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지내야 하는 대가를 치렀다. 또한 나 자신의 장소를 갖지 못하는 상실감 대신, 윌트셔에서의 두번째 인생이라는 선물을 받았다. 그것은 더 행복한 두번째 유년기, 숲 속의 아지트를 갖고 싶은 어린아이의 꿈의 성취와 더불어 자연에 대한 인식에서 두번째 탄생이었다. _142~43쪽
나는 치유되기 시작했다. 아니, 단순한 치유 이상이었다. 이 계곡과 내 시골집이 있는 장원의 영지에서 기적이 일어난 것이었다. 영국의 오래된 심장부, 내게는 완전히 낯선 장소인 이 비현실적인 환경에서, 나는 두번째 기회, 새로운 인생이 주어졌음을 깨달았다.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도 훨씬 더 풍요롭고 충만한 인생이었다. _164쪽
나는 내 인성의 이런 변화를 목격했다. 하지만 이것을 하나의 주제로 인식조차 하지 못했고, 내 일기장에 그런 이야기는 한마디도 적지 않았다. 일기를 쓰는 사람과 여행자 사이에 벌써 틈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미 그 사람과 작가 사이에는 간격이 있었다.
그 사람과 작가는 동일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작가로서 깨달은 가장 위대한 발견이었다. 그런 통합에 도달하기까지는 시간이(그리고 얼마나 많은 글쓰기가 필요했는지!) 걸렸다. _175~76쪽
샤워장은 내 방에 딸려 있었다. 엄청난 사치였다. 나는 공동욕실을 써야 하는 줄 알고 내심 두려워했다. 한쪽 수도꼭지에 ‘온수’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그것은 내가 평생 한 번도 보지 못한 세밀한 구별이었다. 트리니다드에서는, 그 엄청난 더위 속에서는 언제나 보통 온도의 물, 즉 그냥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목욕을 하거나 샤워를 했다. 더운 물 샤워라니! 나는 중요한 날이면 우리 어머니가 나를 위해 (향이 나는 약재인 님나무 이파리를 넣어) 준비해주시던 따뜻한 목욕물(양동이에 담긴) 정도의 미지근한 물을 예상했다. 하지만 웰링턴 호텔의 온수는 그 정도가 아니었다. 온수는 말 그대로 온수였다. 나는 샤워 부스에서 얼른 몸을 피해 가까스로 화상을 모면했다.
대단했던 하루는 그렇게 끝이 났다. [……] 고향을 떠난 지 불과 24시간도 안 됐는데, 굴욕감만 쌓여가고 있었다. _180~81쪽
그것은 단지 내가 열여덟 살에 너무 미숙했거나 혹은 앞으로 무엇에 관한 글을 쓸지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받은 교육이, 그 교육 중에서도 더 ‘문화적’이고 가장 훌륭한 부분이, 작가는 분별력을 지닌 사람이며 내적 성장을 기록하고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개념을 내게 심어주었던 것이다. [……] 그런 종류의 작가(내가 해석한)가 되기 위해서 나는 거짓을 가장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 나와 같은 배경에서 나올 수 없는 다른 사람인 척해야만 했던 것이다. 글 쓰는 인격체 아래에 식민지 출신의 힌두인이라는 자아를 감추면서, 나는 나 자신과 나의 글쓰기의 소재에 상당한 손상을 입혔다. _232~33쪽
하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세상을 다시 만들었다. 우리가 여동생의 죽음 때문에 한자리에 모이고 그 죽음을 기억하고 기려야 할 필요를 느꼈을 때 깨달은 것처럼, 모든 세대는 그렇게 한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죽음을 직시하게 했다. 그것은 나로 하여금 내가 밤마다 잠을 자면서 깊이 생각해왔던 죽음을 대면하게 했다. 그것은 마치 그 순간을 내게 대비시키기라도 한 것처럼, 우울증이 만들어놓은 텅 빈 자리에 진짜 슬픔을 채워 넣었다. 그것은 내게 신비한 수수께끼로서의 인간과 인생을 보여주었다. 인간의 진정한 종교, 슬픔과 영광을. 그리고 바로 그때, 실제 죽음과 대면하고 인간에 대한 이 새로운 경이와 마주했을 때, 비로소 나는 나의 초안과 숱한 망설임들을 옆으로 밀어두고 잭과 그의 정원에 대해 매우 빠르게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_552쪽
■ 이 책에 바쳐진 찬사들
어떤 헛된 환상도 지니지 않은 사람의 작품…… 이 작품은 나이폴이 현존하는 가장 뛰어나고 통찰력 있는 소설가란 진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_ 버나드 레빈, 『선데이타임스』
이 책은 내가 근래 읽은 책 중 가장 슬픈 전원시다. _살만 루슈디(작가)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마법과 같은” 경이로운 책._『인디펜던트』
이 작품에는 대단한 위엄, 연민, 솔직함이 담겨 있다. 이것들은 나이폴이 언제나 그렇듯 아름다운 문체로 쓰여 있다. 이 작품은 철학적이며, 땅의 냄새가 난다. 나이폴은 오히려 이러한 특징으로 작품의 품위를 높인다. _『옵저버』
1. 잭의 정원
2. 여행
3. 담쟁이덩굴
4. 까마귀
5. 고별식
옮긴이 해설 _ 탄생과 죽음의 정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