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7회 - 2007

최제훈 / 소설 / 퀴르발 남작의 성(城)

최원준 / 시 / 동전식별의 원리 외

선정 개요

『문학과사회』는 지난 2002년 이후 한국 문학에 새로운 공기를 주입하는 신인들을 적극적으로 발굴하기 위해, ‘신인문학상’ 제도를 만들어 시행해왔다. 그동안 소설가 정이현·한유주·박혜상, 시인 하재연·최하연, 비평가 이수형·허윤진·김대산 등 개성적인 신인을 배출하여 한국 문학에 새로운 호흡을 불어넣었다. 지난 몇 년간 이들의 활동은 2000년대 한국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구체화하는 것이었다.
이번 제7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공모에도 의욕적인 작품들이 적지 않게 투고되어 심사에 어려움을 겪었다.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에 문학적 열정을 보여준 응모자들의 관심에 응답하기 위해서, 『문학과사회』 편집동인들이 참여한 심사는 모두 3차례에 걸쳐서 엄정하게 진행되었다. 1차 독회에서 본심에서 거론될 만한 작품들을 골라내는 작업을 했고, 2차 독회에서 집중적으로 거론될 만한 두세 편의 작품으로 압축했으며, 3차 독회에서 각 장르별 수상작을 결정했다.
시 부문에서는 개성적인 발성법과 미학을 보여준 작품들이 있었지만, 최근 젊은 시단의 요설화 경향을 모방하는 작품들이 적지 않아 아쉬움을 남겼다. 고심 끝에 절제된 언어와 유니크한 화법으로 주목 받은 최원준의 시들을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소설 부문에서는 흥미로운 발상과 가독성을 갖춘 작품들이 눈에 띄었으나, 화법의 새로움이 납득할 만한 미적 구성에 이르고 있는 작품은 드물었다. 당선작인 최제훈의 「퀴르발 남작의 성(城)」은 그 발상과 서술 능력에서 한국 소설의 의미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고 판단되었다. 평론 부문에도 의욕적인 투고작들이 적지 않았다. 동시대의 새로운 인문적 지식과 문화 담론을 동원하면서 활달한 문체를 구현한 투고작들이 제법 있었으나, 텍스트에 밀착된 내재 분석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 글이 없어서 아쉽게도 당선작을 결정하지 못했다. 다시 한 번 신인문학상에 뜨거운 관심을 가져준 모든 투고자들과 독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심사평

■ 시

기계들의 진화 뒤에 감춰진 살의殺意

최원준 시들의 장점은 시적 발상과 언어적 표현이 하나의 몸체로 어우러져 매우 밀도 높은 시적 긴장감을 빚어낸다는 데 있다. 수사는 화려하지만 정작 시의 내면은 공허해 보이는 시들이나 시적 발상과 표현 사이의 응집력이 상대적으로 느슨해 보이는 다른 시들과는 달리 그의 시들에서는 냉철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표정한 어법을 가장하면서 집요하고도 예리하게 대상들 뒤에 숨겨져 있는 사회적 의미를 포착해내는 솜씨가 매우 인상적이다. 때로 그것은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로 예리하게 대상의 급소를 공략하는 사냥꾼의 솜씨를 떠올리게도 한다. 특히 기계문명이 만들어낸 현대 사회의 물품들을 소재로 기계문명 뒤에 감춰진 살의나 폭력성의 징후들을 날카롭게 포착해내는 「동전식별의 원리」 「기계, 2035」 「통조림」 등의 시들은 현대적인 삶 주변의 대상들로부터 섬뜩할 정도로 강렬한 비유적 의미들을 끌어내는 시인의 능력이 이미 범상치 않은 수준에 와 있음을 잘 보여준다. 예컨대 「동전식별의 원리」는 자판기의 동전식별의 원리와 한 남자의 아파트 투신자살이라는 사건을 병치시키는 방식을 통해, 현대 사회의 기능적인 시스템에 의해 관리되고 축출되는 인간의 삶에 대한 시인의 예리한 시적 인식을 담아내고 있다. 쓸모없는 동전이 동전식별기를 통과한 후 자판기 내부의 어둠 속을 낙하하여 자판기의 바깥으로 내뱉어지듯, 작품은 “적절한 양의 은행 잔고를 함유하고 있지 않은” 그래서 사회적 기능이 마비되어버린 한 남자가 죽음을 통해 세상 바깥으로 축출되는 과정을 마치 슬로비디오를 접하듯 느린 화면으로 재생하면서, 그가 느끼는 죽음의 공포를 극대화한다.
「기계, 2035」에서 시인은 기계의 원리를 인간의 기능적 삶에 대한 비유적 장치로 사용하던 방식을 넘어 기계가 아예 인간의 기능을 대신해버린 가상의 미래를 제시한다. CCTV가 인간의 진술을 대신하고 컴퓨터들이 파업을 벌이고 로봇이 사건의 취재를 담당하는 세계에서, 기계는 문틈에 인간의 팔을 문 채 질주하는 지하철처럼 이미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돌이킬 수 없는 파괴력으로 진화해 있다. 이 시에서 우리가 느끼는 공포감은 기능적 능력이라는 차원에서 기계의 진화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는 인간이 결국은 미래의 어느 순간 기계에 의해 퇴출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위기감과 통해 있다. 이 시에서도 예의 분절된 느린 화면으로 죽음의 공포를 극대화하는 이 시인 특유의 하드보일드한 어법은 화면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아무런 감정없이 기계적으로 읽어내는 CCTV의 진술방식, 더 나아가서는 기계에 점령당해버린 세계의 공포를 매우 실감나게 재생한다. 「통조림」에서도 시인은 “매끈하고 반짝이는” 통조림에서 살의와 죽음의 공포를 읽어낸다. 통조림이 품고 있는 살의는 통조림을 따는 순간 날카롭게 휘어진 이빨로 시인의 손을 베기도 하고, “온 힘을 다해 그물 밖으로 나가기 위해 파닥거리던 참치”를 “피 한 방울 남지 않은 살”로 “밀봉된 시간” 속에 가둬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 시가 갖는 진정한 의미는 시인이 통조림의 살의라는 모티프를 통해 통조림에 베인 손가락의 통증을 참치가 통조림 안에서 감내해왔을 고통의 시간과 겹쳐놓는다는 데 있다. 통조림을 따는 순간 나의 손에 새겨진 상처는 참치가 밀봉된 시간의 문을 열고 “제 고통을 그대로 내 몸에 새겨놓”은 흔적이 되고, 이를 통해 시인은 통조림의 살의, 혹은 통조림의 예리한 이빨에 베인 나의 상처가 기실은 통조림을 따는 순간이 아니라, 참치가, 아니 “마샬 군도 부근에 내리쬐던 태양빛”이 통조림이라는 밀폐된 어둠의 공간 안에 갇혀버리던 바로 그 순간 이미 시작되었던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밖에도 최원준은 「그녀는 미소를 바른다」 「네모 고양이」 「진실 혹은 거짓」 「카페 러시아」 등의 시들을 통해 기능이 인간을 대신해버린, 혹은 거짓이 진실의 기능을 대신하는 삶의 다양한 양태들을 조명한다. 「그녀는 미소를 바른다」 또한 이미 기계가 되어버린 한 여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시인이 보여주는 세계는 이처럼 우울하지만 신선하고 개성적인 발상과 어법으로 현대 사회의 왜곡된 이면을 집요하게 응시하는 한 시인의 탄생을 알리는 마음은 즐겁다. 오늘의 탄생이 내일의 훌륭한 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기를 바라면서 축하의 인사를 전한다.
박혜경(문학평론가, 인하대 연구교수, 『문학과사회』 편집동인.)

■ 소설

신비적 이상주의에 대한 저항, 이산離散되는 글쓰기의 미래

‘지금’ 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보여주고 있는 일련의 글쓰기는 무한한 상상력을 담을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소설을 갈망하고 있고, 이를 위한 기본적인 조건을 이미 갖춘 듯이 보인다. 이들의 실험적인 글쓰기는 소설의 외피를 벗겨내고 흠집 내면서 소설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한 심도 있는 고민과 질문으로 확산되고 있다. 더러는 이에 대해 고귀한 문학적 전통의 훼손을 언급하는 이도 있을 것이며, 아직도 미완으로 남아 있는 근대문학의 의무와 책무를 들먹이며 질타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적 차원에서 급진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논자들의 감수성은 열린 상상력의 후미진 곳, 황당하고, 비이성적이며, 도무지 정론의 소설이라 불릴 수 없는 너절하고 난삽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작가의 욕망을 타고 흐르고 있다. 이에 대한 본격적인 담론이 이미 형성이 되었으니, ‘근대 문학’ 이전 혹은 이후를 묻는 질문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더욱 심화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본격소설과 대중소설의 경계를 거스르면서 근대소설 이전의 소설적인 것의 욕망을 지향하고자 하는 움직임, 소설이란 형식 자체를 제도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이야기성에 매몰차게 몰입하려는 작가들의 욕구, 더욱더 소설의 시원을 그리워하며 미학적 장인의식의 소신을 끝까지 견지하려는 작가들의 욕망 같은 것이다. 아마도 한국 문학사 전체를 통틀어 본다면 반 휴머니즘을 지향하면서, 안과 밖을 횡단하는 새로운 문학, 트랜스 리터러처trans-literature의 태동기가 바로 ‘지금’이 아닐까.
그런 와중에 (게다가) 또 이런 소설의 등장은 어떤가? 공적 영역에서 형성된 소설과 이접하면서 소문과 풍문, 기사와 같은 도저히 소설이라 지칭할 수 없는 온갖 종류의 이야기로 엮어 한 편의 소설이라고 내놓는 경우 말이다. 가히 혼종소설의 극단이며 잡종적 상상력의 실험적 구현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소설. 최제훈의 「퀴르발 남작의 성(城)」은 장르 밖으로 밀려난 것들만을 유기적으로 조합하여 만들어낸 ‘기계 소설’이다. 다른 부속들 각자의 위치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지만 그 자율성에 의해서 제3의 텍스트가 만들어진다. 바로 최제훈의 소설은 계보학적 상상력을 바탕에 깔고 이루어진 새로운 서사 형식의 발견, 바로 그것이다. 이야기의 다양한 형태들을 연속적으로 배열해놓고, 냉소적으로 웃으면서 원래 소설이란 이런 난삽한 것들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라고 말하는 아찔한 풍광을 떠올려보라. 어떤 소설적 장치도 존재하지 않는 서사의 형태를 모아놓았으나, 전체를 조합해보면 이야기가 구성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순차적이고 연대기적인 기술, 배치도 가능하다. 게다가 근대소설이 지향했던 국가 만들기와 이데올로기 담론 속으로 이야기가 어떻게 굴절되어 들어가는가의 과정까지도 보여주고 있는 이야기도 있으니, 어찌 소설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단 그 모든 것이 우리가 경험한 공적 영역에서 소설이라고 치부될 수 없었던 것, 배제되었던 것의 부활일뿐이라는 것이 핵심적인 사실이다.
최제훈의 「퀴르발 남작의 성」은 그런 측면에서 기존의 이기호, 박민규, 박형서 등의 소설과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다른 외피를 입고 있는 소설이다. 작가는 진실의 논리를 끝까지 굴절시키거나 더 이상 관심이 없다는 태도로 일관하면서, 오로지 이야기하고자 하는 자의 욕망의 연속성만을 자율적으로 조합하고 있다. 그의 소설은 철저하게 유사성의 원칙에 의한 ‘돌려 읽기’라는 실험적인 형식을 통해, 끊임없이 굴절되는 진실의 유희를 극단적인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 과정에서 원전, 정전은 스스로 내파하며, 이야기를 만들려고 했던 전혀 다른 주체의 욕망을 통해서만 분명하게 드러난다. 따라서 「퀴르발 남작의 성」은 소설이란 빈 공간 안에서 ‘나는 말한다’가 아니라 ‘나는 다음을 말한다’라는 발화적 형식을 취하면서, 소설 외부에서 소설의 빈 공간을 드러내고자 하는 전략적 의도에 의해서 씌어졌다고도 할 수 있겠다. 발화의 주체가 뚜렷하지 않은 가운데 반인본주의적인 공간 속의 작가는, 항간의 소문, 개인과 개인이 소통하면서 떠드는 소음과 전해 내려오는 풍문, 진실이라는 판타지를 실어 나르는 뉴스 기사 등을 두서없이 나열한 듯 보이지만 엄밀하게 따져보면 그 안에 이야기의 탄생과 확대 재생산, 유통, 소비되는 과정, 심지어는 국가적 아이덴티티를 만드는 공적 영역으로 수렴되는 담론까지 어느 것 하나 빼놓지 않고 있다. 이 배열이 갖는 전위성에 대해서는 좀더 긴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몇 가지만 간단하게 언급해보자.
예컨대 모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강사의 강의 진행과정, 작가 미셸 페로와 출판사 편집장, 영화감독 나카자와 사토시, 블로그 글, 영화배우 제시카 헤이워드와 제작자 토마스 브라우닝, 뉴스 프로그램, 인문학부 학생의 리포트, 제작자 토마스 브라우닝과 영화감독 에드워드 피셔, 『저널 아메리칸』의 제임스 허스트 기자, 자네트 페로 할머니와 손주들에게 ‘퀴르발 남작의 성’은 각기 다른 이야기의 욕망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제작된다. 얼핏 보면 이 소설은 소위 이야기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보여주는, 다시 말해 이야기의 제작과정을 보여주는 한 권의 제작 노트이기도 한 것이다. 이를 기초로 하여 ‘퀴르발 남작의 성’을 다른(차이) 입장에서 어떻게 사유하고 받아들이는가를 그저 보여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사문학’이란 형식의 틀이 갖춰지기 이전, 그 밖에서 들끓었을 법한 이야기의 욕망과 공적담론으로 환원되는 이야기의 권력화 과정까지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사실 ‘퀴르발 남작의 성’을 매개로 하여 등장하는 수많은 에피소드들은 이야기의 원시성을 갈망하는 작가적 욕망에 의해서 구축된 유희 텍스트의 몸통이다. 그 압권 중에 하나는 ‘1953년 6월 9일, 미국 『저널 아메리칸』, 제임스 기자의 기사문’일 터. 퀴르발 남작의 성이 보기에는 풍족하고 화려하지만 알고 보면 독재자에 의해서 운영되는 공산주의 체제를 상징하고 있다는 것, 남작이 즐겨 입는 붉은 조끼는 새삼 거론할 것도 없이 그것의 직접적인 상징이라는 것. 이즈음에 이르면 저널의 권위는 우스꽝스러워지며, 진실을 보도한다는 명분 또한 만들어진 상징에 불과한 것임이 드러난다. 각자 존재했을 때는 잘 드러나지 않았던 거짓 정체성은 다른 이야기들과의 차이 속에서 보다 분명하게 허물을 벗어놓는 법이다.
이렇게 작가가 취한 고도의 전략은 전통적인 소설의 독법, 그러니까 스토리를 유추·해석하고 이를 통해 전체적인 통찰을 하고자 하는 독자의 욕망을 여지없이 배반하며, 심지어 추리소설 혹은 문제소설로 접근하여 소설에 내재되어 있는 수수께끼를 풀어봐야겠다고 작심한 문학 애호가들을 난감하게 한다. 재미있는 것은 원전에 대해서도 영화에 대해서도 아무런 신빙성을 느끼지 못하겠고 단지 우리가 어린 시절 들었을 법한 할머니의 전래동화 이야기, 그러니까 자네트 페로 할머니가 손주들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가 더 리얼하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영화, 뉴스 기사나 신문기사가 인위적으로 조작된 이른바 상상 텍스트라면, 이보다 더 원시적인 형태로 존재하는 전래동화나 황당하다고 느껴지는 상상력의 산물이 오히려 집단적인 상상을 거부하는 이야기가 어떻게 향유되는가를 더 잘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떻게 ‘이야기적인 것’이 유희적인 텍스트인 채로 끝까지 남아 있는가를 제3의 탈주선을 통해 작가는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내러티브의 질서, 자기 원인적인 명제, 절대적 내재주의를 거부하는 가운데, 모든 것을 이야기로 환원해놓고 동일한 선상에서 진리에 접근해보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적인 탐색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이 소설을 통해서 최제훈은 이렇게 되묻고 있는 듯하다. 이야기의 진실이란 보는 시각과 관점, 혹은 해석하는 자의 욕망에 의지하는 지극히 자의적인 입장에서 재구축된 것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 그러니 어차피 여기에 내재되어 있는 허구적인 요소만이 떠다니는 마당에 실증적인 결과물이 가시적으로 눈에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경험적인 진리일 수 있을까 라고 말이다.
작가는 용감하게도 자신의 쓰기 욕망과 독자의 해석 욕망이 철저하게 나란히 존재할 수 있도록 모든 상상력의 가능성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놓고 있다. 이 소설을 수수께끼라고 생각하면서 읽는 독자는 탐정 역할의 작가를 따라가면서, 너무도 논리적인 필연성 속에 존재하는 우연성과 마주하게 될 것이고, 이미지와 존재의 유동성을 믿는 독자라면 이 소설을 통해 서로 관련된 사건들이 전혀 연관성이 없는 채로 서로 겉돌고 밀어낼 때, 어떤 의미로도 규정할 수 없는 미궁 속 유희를 즐기게 될 것이다. 또한 서사학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이야기에 내재하는 필연적인 효과가 아닌 서술에 의해서만 서로 연결되어 있는 서사적 순환의 미학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문학은 보편주의로 환원되는 순수한 결과물이 결코 아니라는 것, 들끓는 욕망과 말‘들’이 만들어내는 소음 속에서 진실의 논리를 굴절시키며, 관계와 연관성을 탐구하고자 하는 ‘쓰기’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신비적 이상주의 자체가 무화되는 과정 속에서 이질적으로 분열하고 산포되는 그의 글쓰기의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 주목하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최성실(문학평론가, 경원대 연구교수, 『문학과사회』 편집동인.)

예심평

_시 부문 투고작들 가운데 최종 심사 대상으로 추려진 원고들은 「소용돌이 공식」 외, 「그러나, 당신과 매우 잘 어울리는 밤」 외, 「소멸에 대해 긍정하는 그룹」 외, 「그는 언제나 피곤해하였다」 외, 「동전식별의 원리」 외 등이었다. 선별된 원고들은 대체로 상당 기간 동안의 습작을 거쳤을 것임을 짐작케 하는 언어적 구성력과 숙련성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 선별된 원고들 대부분이 최근 젊은 시단의 흐름을 반영하듯 도발적이고 과감한 시적 발상을 보여준다거나 파격에 가까운 재기발랄한 언어들을 구사하고 있어 눈길을 끌었다. 무엇보다 수다스러울 정도로 거침없이 쏟아져나오는 다변의 언어들은 이들 원고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었다. 이 역시 압축의 미학 대신 다변의 미학을 시적 언술의 특징적 전략으로 밀고 나가는 최근의 경향을 반영한 현상인 듯하다. 자기동일화된 비유를 통해 대상에 대한 압축된 이미지를 그려나가는 서정시의 어법은 이제 시작(詩作)에 뜻을 둔 젊은 세대에게 더 이상 매력적인 전범으로 여겨지지 못하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선별된 원고들 가운데 「소멸에 대해…」는 예의 그 수다스러움이 쏟아지는 말의 양만큼의 언어적 깊이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이유로, 「소용돌이 공식」은 포즈가 너무 강하다는 이유로, 「그러나, 당신과…」는 글쓴이의 자신감과 언어적 힘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표현의 작위성이 두드러진다는 이유로 제외되었다. 무엇보다 이들 시들이 갖는 공통된 문제점은 언어들을 인위적으로 조립해서 시를 만들어낸다는 의식이 너무 드러나 보인다는 점이다. 이 시들이 구사하는 어법들이 대체로 포즈로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언어적 기교가 시의 문맥 속에서 그만큼의 내적 설득력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남은 두 작품을 놓고 장시간의 심사숙고 끝에 우리는 「동전식별의 원리」 외’를 당선작으로 정하기로 하였다. 「그는 언제나…」는 편집증적인 집요함까지 느껴지는 매우 도발적인 언어 구사와 자동기술법을 연상케 하는 분열적 어법들을 거침없이 쏟아내면서 특이하고도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한 시적 긴장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젊은 시단의 트렌드에 비추어볼 때 이러한 어법이 이제는 우리에게 어느 정도 익숙해진 것이라는 점, 그 때문에 투고된 시들 중 몇 편은 신선도가 다소 떨어져 보인다는 지적이 있었다. 당선작인「동전식별의 원리」 외’에 대해서는 별도의 지면을 통해 상술하기로 한다.

_과거에 대한 기억이나 회상에 의한 서사적 구축이란 일견 상투적인 소설일반론에 기댄 것일 수 있겠으나, 한국 소설을 지탱해온 ‘경험’ 서사 전통이란 것이 얼마나 오래되었는가를 상기한다면 오히려 이 상투성의 집요함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반문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신인문학상 심사를 하면서 이제 한국 소설은 경험적 기억과 회상에 의존한 서사적 전통과는 상당히 거리를 둔 채로, 소설이란 통념을 거부하면서 오히려 ‘소설적인 것’이란 무엇인가를 심도 있게 고민하는 자장 안에 놓여 있다는 것, 그리고 미래에 장차 작가를 꿈꾸는 이들에게도 이러한 현상은 창작 방법과 욕구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조짐과 징후를 넘어서 구체적인 현실 속에 현현되는 이런 현상은 문학의 존재이유를 거듭 상기하게 하는 동인이 되고 있다. 기억에 의해서 재구되는 경험보다는, 오히려 문화적 경험의 현재성을 기반으로 유희하는 이미지 서사가 두드러지게 많아졌으며, 스토리보다는 과감한 형식적 파괴를 통해서 자신의 주제의식을 부각시키고자 하는 시도들이 번번이 눈에 들어왔다. 동일한 운동의 메커니즘으로 환원되는 인물의 구현도, 모든 암시들이 기술된 문맥과 호응하는 전통적인 수사적 기법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말 그대로 파열되고 조합되었다가 다시 분열을 거듭하는 상상력의 무한 질주가 펼쳐지고 있다는 강한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그 균열을 따라서 상상력의 힘은 더욱 증폭·가열되어가는 중인 것이다.
임돌의 「이빨 뽑으면 결혼하겠다고 말하세요」 외’는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많은 것들 중에서 특히 믿음·사랑·약속 등 따지고 보면 추상적이고 선험적인 관념에 불과하거나, 혹은 지고지순할 것 같은 보편적 지향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거짓 욕망을 위트 있고 세련된 문체로 다루고 있는 소설이다. 무엇보다 안정된 문체와 노련한 서사 전개 방식이 작가의 가능성을 백분 짐작하게 한다. 진지한 문제를 무겁지 않게 접근하면서 관망하고, 냉소적 태도를 견지하려는 자의식이 모든 소설에서 고르게 나타나는 것도 이 작가의 장점이다. 다소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독자가 판단할 수 있는 여백의 의미까지 지나치게 친절한 태도로 설명하거나 덧붙임으로 인해, 독자의 머릿속에서 무수히 자가증식할 수 있는 상상력의 가능성을 차단하거나 억압하고 있는 문장이 곳곳에서 발견된다는 것이 아쉬웠다.
임태훈의 「벽과 제로」 외’는 일상을 규정하는 사소한 우연과 균열의 의미를 나름대로의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 세밀하게 묘사할 줄 아는 작가의 재능이 잘 드러난 소설이다. 일상적인 대화나 상황에 대한 적절한 어휘 선택이 돋보였다. 다만, 작가적 발상은 참신하고 재미있는데, 사건 전개 과정이 지나치게 단정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좀더 분명하게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어가고 보다 섬세하고 파열적인 내면 서사 기술에 역량을 쏟아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장벽의 「담배를 피우는 코끼리」 외’는 블랙 코미디를 연상시키는 소설이다. 유머와 익살스러운 언사들이 소설의 결을 살려주고 있다.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고 밖으로 쳐내는 서사적 기교가 남달라 보이는 소설이다. 다만 잘 읽히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작가의 목소리가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나 이런 종류의 소설이 끝까지 견뎌야 하는 혹은 타협하지 말아야 하는 냉소적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서정광의 「태양의 샘」(중편)은 예사롭지 않은 관찰력과 흡인력 있는 문장이 다른 소설들과 구별되는 매력적인 소설이다.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만들어진 관념 혹은 유토피아가 거짓이라면, 과연 이토록 진부한 일상을 어떻게 견뎌야 할 것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이 소설의 무게 중심을 떠받치고 있다. 알레고리적인 기법이 빛을 발산하면서 소설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그러나 지나친 확대 해석, 과장된 작가의 포즈가 주제에 걸맞은 소설의 틀을 갖추고 있는가를 오히려 자문하게 하는 역효과를 낳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거듭 자신의 글을 읽어보고 문장과 문맥을 상투적이지 않게 다듬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
고아네스의 「미래의 화폐」 외’는 단순히 시공간의 변화를 차용한 SF소설이 아니다. 고대 문명, 미래의 진부한 시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거듭 회의하면서 단자로서 존재하는 개인의 심리적 불안과 기계적 메커니즘 앞에 무력한 인간의 공포를 다루고 있다. 묵시록 같은 소설 분위기는 인간의 고유성과 근대 휴머니즘 비판 이후에 대한 나름대로의 암시가 되고 있다. 하지만 진지한 주제의식이 단단한 서사적 형식 속에 갇혀 이합되지 못한 채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 아쉬웠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구성력이 좀더 힘을 발휘할 수 있다면 독자의 가독성을 떨어뜨리지 않으면서 설득력 있는 자신의 문체를 갖게 될 것 같다.
박은희의 「투루시니스Truthiness」(중편)는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채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진실로 받아들이려는 성향의 사람들과 이들이 공유하는 사건을 중심으로 하여, ‘진실’이란 자의적인 판단에 의한 고안물일 뿐이라는 묵중한 주제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충분히 고민하면서 자의식에 걸맞은 상황을 선택하려고 노력했다는 흔적이 역력하게 보이는 소설이다. 그러나 인물들의 성격이 상황에 따라서 변하는 모양새가 좀더 현실적인 소재(보여주는 ‘쇼’보다는)와 맞물리면서 전개되었어야 했다. 다소 진부한 면이 있다는 것이다. 작가가 끝까지 인물들과 냉소적인 거리를 유지하려고 했다면 더욱 성공적인 소설 쓰기가 되지 않았을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종류의 소설은 자칫 주입된 주제의식으로 일관되었다는 인상을 주기 쉽다는 사실도 상기했으면 한다.
지현아의 「포르피리아」 외’는 탄탄한 문장력과 치밀한 구성력이 돋보이는 보기 드문 소설이다. 정신분석학적 접근이 가능한 인물들을 통해 심리적 파열, 의식분열의 원인과 이유를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면밀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 강한 인상을 남겼다. 백가흠의 소설에서 보이는 관찰의 집요함이 소설의 긴장감을 끝까지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말 부분으로 치달으면서 오히려 당당하고 처연해야 할 것 같은 인물들의 심리가 갑작스레 무너지거나 단순화되는 대목이 아쉬웠다. 작가의 자의식은 분명한 편이나 이를 기반으로 서사가 집중되지 못했다. 그러나 단단한 문장력의 소유자이니 좀더 노력한다면 얼마든지 더 나은 소설을 쓸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주었다는 것도 덧붙이고 싶다.
조영주의 「오랑우탄이 죽어버렸어」(중편)는 상상력이 발흥된 할머니와의 관계가 언어적 유희라는 또 다른 메타 층위를 형성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소통의 문제에 전착해 들어가는 노련미가 돋보인다. 그러나 간혹 언어적 유희라고는 할 수 없는, 다소 과장되거나 장난스러운 표현과 기교들이 어설퍼 보였다. 단단한 서사 전략은 구조만이 아니라 문장과 문장을 이어가는 호흡에서도 감지될 수 있어야 한다.
임수경의 「연애, CITY4」 외’는 당신과 ‘나’의 관계 탐색에 몰입한 소설이다. 물론 여기에는 소통을 갈망하는 인간의 욕망이 놓여 있고, 한편으로는 친밀감이 극대화되는 사랑의 감정을 통한 자기 인식에의 열망이 공존한다. 나름대로 분명한 자신의 주제의식을 갖고 짜임새 있게 글을 쓰려고 노력한 점이 눈에 띈다. 문장이 다소 어색하고 둔탁한 전개 방식이 감각적인 글쓰기를 저해하는 결정적 요소로 지적되었다.
이효정의 「낙서족」 외’는 이 시대 청소년들의 자화상의 일면을 엿보게 해주는 소설이었다. 이 소설의 장점은 작가가 자신의 소설 배경이 되는 장소에 대한 주도면밀한 관찰에 기초하여 시점 이동을 자연스럽게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여러 번의 습작을 거친 소설 쓰기 과정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해주는 대목이었다. 다소 진부한 소재를 나름대로의 미학적 틀로 수용하고 소화해냈다는 점도 긍정적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작가도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 인물의 단순한 행위(독백이 아닌)를 통해 주제의식을 표면화하고 있다는 것이 걸림돌이 되고 있다. 반복은 차이의 산물이지 동일자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알리바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처럼 제7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투고작들은 고르게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저마다 개성적인 문체로 다양한 문학적 상상력을 펼쳐 보이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우리가 주목한 소설은 최제훈의 단편 「퀴르발 남작의 성(城)」이었다. 당선작에 대해서는 별도의 해설을 참조하기 바란다. 최제훈을 비롯하여, 긴 터널을 빠져나와 심연을 내려다보고자 하는 미래의 작가들에게 격려와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다.

_20여 편이 넘는 평론 부문 응모작들은 대개 일정한 수준을 갖추고 있었다. 대부분이 강영숙·김연수·박형서·천운영·한유주 등 2000년대 젊은 작가들을 대상으로 한 작품들이었고, 김기택이나 장정일을 다룬 시 평론도 눈에 들었다. 최근의 비평 지망생들이 동시대의 문학 현상들에 대해 상상히 민감한 비평적 감수성을 보인다는 점이 확연히 드러났다. 문장들도 상당한 수준이고 비평적 문제의식 역시 다채롭고 활달했으나, 평균적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수월성을 보이는 비평문을 발견하기는 어려웠다.
우리가 마지막 심사 테이블에 올려놓았던 작품은 강용훈의 「유랑의 운명을 상연하는 두 가지 방식―『잘 가라, 서커스』와 『리나』에 나타난 공연들에 대하여」, 김영주의 「웬디들, 피터팬을 떠나다―2000년대 등장한 여성 시인들의 행보」, 백연진의 「우리는 도마 위의 물고기다: 한유주론―음란함의 게스투스 2」, 송효정의 「슬픈 표상에 지지 말아야 한다―강영숙론」 등 총 4편이었다. 강용훈의 비평은 독특한 발상과 실험적 스타일이 우선 눈길을 끌었다. 천운영과 강영숙의 소설을 대상으로 하여 서커스와 퍼포먼스 같은 공연 모티프를 주목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문학적 특성을 해명하려는 시도가 돋보였다. 그러나 자신이 주목한 모티프를 중심으로 작품을 심층적으로 해명하는 과정에서 유기성이 다소 떨어져 해석 지평의 심화 확대를 약화시키는 아쉬움이 있었다. 김민정·이민하·김행숙·이영주 등 2000년대 여성 시인들의 시 세계를 다룬 김영주의 글은 수준 있는 문장으로 비평적 안정감을 보였다. 시 텍스트를 인용하는 수법도 수준급이고, 2000년대 시인들에 대한 문제의식도 상당한 편이었다. 그러나 해석의 독자성 측면에서는 아쉬움을 드러냈다.
강영숙론을 투고한 송효정은 좋은 문장과 분석력을 지닌 비평가다. 좀더 독특한 비평적 관점과 아울러 자신이 분석한 내용을 비평적으로 평가하거나 심층적으로 의미화하는 시도를 보였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백연진은 비평적 접근이 그다지 편치 않은 한유주 소설을 대상으로 나름의 비평적 실험을 보였다. 자기 논리가 뚜렷하고 비평적 문제의식도 세련된 편이다. 진지하면서도 폭넓게 읽힐 수 있는 문장을 구사했다는 점도 강점이다. 하지만 비평의 대상인 한유주의 소설 세계를 해명하는 작업보다는 한유주 소설을 매개로 한 자신의 목소리가 상당한 정도로 전경화되었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되었다. 비평적 자아와 대상 사이의 유기적인 대화가 더욱 밀도 있게 이루어졌더라면, 우리는 조금도 주저 없이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밀었을 것이다.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백연진의 작품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망설였다. 매우 아까운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저마다 제 목소리 내기에 급급하거나 혹은 제 목소리 없이 대상에 몰입하는 경향을 넘어서 진정한 비평적 대화 내지 대화성의 비평 정신이 매우 소중하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새로운 비평가를 기다리기로 했다. 꼭 이번이어야 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백연진을 비롯한 최종 후보자들이 머지않은 시기에 의미 있고 패기 넘치는 신예 비평가로 우리 앞에 우뚝 설 것이라 믿어보기로 했다. 그들의 멋진 비평적 복수(?)를 기대한다.

최제훈

수상자: 최제훈

장르: 소설

작품: 퀴르발 남작의 성(城)

수상 소감:

퀴르발: 축하하네.
나: 고맙습니다. 남작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퀴르발: 내가 뭐 한 게 있나. 성에 가만히 있었지. 그래, 소감이 어떤가?
나: 좀 헤매기는 했지만, 나를 ‘나’로 비춰주는 거울을 한 조각 찾은 것 같아 기쁩니다. 아직 낯설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도 언제든 비춰볼 수 있게 잘 닦아놔야죠. 좋은 스승님과 동기들을 만난 게 행운이었습니다. 그리고 항상 믿어주는 가족들과 부족한 저에게 소중한 기회를 주신 『문학과사회』에도 고마움을 왕창 전하고 싶네요.
퀴르발: 그래, 많이 부족하긴 하지.
나: ……남작님까지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퀴르발: 앞으로 열심히 하라는 소리야. 그래야 나도 빛을 좀 볼 게 아닌가. 흔들리지 말고 꿋꿋하게 정진하게.
나: 명심하겠습니다.
퀴르발: 내 성으로 가세. 자넬 위해 만찬을 준비했네. 싱싱한 육회와 허벅지 스테이크인데, 먹으면 기운이 부쩍 솟는 게 십 년은 젊어질 걸세.
나: 저,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그냥 먹은 셈 치겠습니다.
퀴르발: 섭섭하군. 정말 안 갈 텐가?

작가 소개:

1973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최원준

수상자: 최원준

장르: 시

작품: 동전식별의 원리 외

수상 소감:

뭐랄까…… 다소 두렵고 설레고 비현실적이고, 여러 가지 복잡한 마음들이 한데 엉켜서 어떤 끝을 잡고 당겨야 감정들이 적절한 언어로 풀어져 나올지 모르겠다. ‘시’ 혹은 ‘詩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그게 도무지 추상화될 구석이 없는 너무나 구체적인, 내 이십대를 관통하는 무엇이라 다만 아리고 고마울 따름이다.
‘씹작생’이라는 조금은 자조적인 느낌의 단어가 몸에 익을 무렵, ‘자학과 허무의 슬랩스틱 코미디’ 골목대장 마빡이는 브라운관에 나와 울었다. 정확히 말한다면, 저편 어느 곳에선가 쏘아낸 전기 신호가 텔레비전 안에서 재구성되어 울고 있는 마빡이의 모습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내가 쓴 문장은 과연 정확한 것일까? ‘습작생’이라는 단어보다 ‘씹작생’이라는 단어가 나와 우리를 표현하는 데 어울렸듯이, 브라운관 안에서 울고 있는 마빡이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다른 형식의 설명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 ‘다른 형식’을 찾는 여행에서 내가 든 나침반이 ‘시’였고, 아직은 바늘 끝이 끊임없이 흔들려 이 여행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정신없이 한 시절을 보내고 나니 죄인이 된 느낌입니다. 별로 생기는 것도 없는 문학을 붙잡고 놓지 못하는 저를 오랫동안 곁에서 보듬어준 부모님과 문창반, 진보, 시천 식구들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항상 격려의 말씀을 해주셨던 최동호 선생님, 시인으로 살아갈 수 있게 문을 열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작가 소개:

1979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현재 <詩川> 동인이다.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