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24회 - 2024

구윤재 / 시 / 「모래밭의 나쁜 아이에게」 외 4편

윤단 / 소설 / 「작은 알」

선정 개요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이 올해로 벌써 24회째를 맞았다. 이번 해에는 시 부문에 506명, 소설 부문에 390명, 평론 부문에 25명의 응모자가 소중한 작품을 보내주었다. 작년보다 응모자가 약간 감소하긴 했지만 한국문학을 향한 뜨거운 열기를 확인하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설레는 마음으로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에 작품을 보내셨을 모든 응모자분들께 진심을 담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심사위원들은 각 응모작들을 성실히 읽고 시 부문에 7명, 소설 부문에 5명, 평론 부문에 4명의 작품을 본심에 올렸다.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을 개별적으로 충분히 검토하는 시간을 가진 이후 4월 말 문학과지성사 사옥에 모여 본심을 진행하였다. 시 부문에는 임승유 시인, 소설 부문에는 윤해서·임솔아 작가가 문학과사회 동인과 함께 심사를 위해 수고해주었다. 열띤 논의 끝에 시 부문에는 구윤재 씨의 「모래밭의 나쁜 아이에게」 외 4편을, 소설 부문에는 윤단 씨의 「작은 알」을 제24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의 수상작으로 결정하였다. 아쉽게도 평론 부문에서는 당선작을 내지 못했다. 수상을 하신 두 분께 진심 어린 축하와 반가운 인사의 말을 전한다. 심사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심사평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편하게 앉아 손가락만 움직여도 재미나고 진기한 것들이 끊임없이 쏟아지는 이 좋은 시대에, 인간을 사유하고 언어를 고민하기 위해 세상의 속도를 거스르며 한없이 더딘 시간을 감내했을 모든 응모자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보낸다. _심사위원 일동

심사평

[심사평_시]
각각의 원고에 담긴 질곡과 시간을 모르는 채로 많은 원고를 마주했다. 심사에 참여하게 되어 큰 부담과 떨림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를 놀라게 할 새로운 시를 고대하는 마음도 들었다. 압도되는 경험을 기다리는 것이 모순된 기대임을 알면서도 그런 마음을 다 없앨 수는 없었다.
본심에 오른 7명(구윤재, 김하은, 모연지, 소이랑, 안진, 윤수진, 이순재) 중에 구윤재, 윤수진, 이순재의 시가 마지막까지 경합했다. 그 외에도 내가 주목한 작품들은 김하은과 안진의 시였다.
안진의 시에서는 마음의 경계에 대한 고민이 엿보였다. 대상과 상황을 자기 마음의 경계 안에 가두지 않기 위해 가벼우면서도 반짝이는 면이 있는 언어를 구사하고, 그 언어가 독특하고 젊은 감수성을 보여주는 듯했다. 하지만 다소 단조로운 느낌도 있었고, 축축해지지 않으려 에두르거나 부인하는 말하기가 오히려 감상적으로 느껴진다는 평도 있었다.
일종의 ‘잔혹 시’라고 할 만한 김하은의 시에서는 강한 집중력이 돋보였다. 그의 시에서는 실험실의 차가우면서도 에로틱한 분위기와 네크로필리아의 테마가 전반적으로 지속되고 있는데, 시체에 가하는 집요한 실험은 분리와 접속이라는 시적 형식의 문제와 맞물려 있었다. 안팎의 경계와 언어의 경계를 골똘히 탐구하는 집념을 응원하고 싶었지만, 소재의 파격이 먼저 눈에띄는 탓에 시의 확장성에 우려가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윤수진의 시는 의미화되지 않는 육체의 감각이 울퉁불퉁한 표면을 따라 흘러내리고 뻗어 나가는 시였다. 그의 시는 섹슈얼리티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면서도 자기 고백적인 수준에 머무르거나 증오 혹은 욕망의 대상에 지나치게 집중하지 않고, 시의 모티프를 발랄한 언어의 전개에 어우러지게 했다. 다만 언어의 사용이 감각적인 데 비해, 시에서 활용하는 소재와 도상 들은 익숙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시들의 수준이나 완성도가 조금 들쭉날쭉해 보이기도 했다.
이순재의 시에서는 다양한 캐릭터를 만날 수 있었다. 인명 캐릭터들의 등장은 최근의 시에서 흔한 것이 되었지만, 이순재의 캐릭터들은 전형적이지 않고, 그렇다고 작위적이지도 않으며, 매력적인 다양성과 구체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그리는 관계의 양상은 깊이가 있으면서도 청신했다. 대번에 독자를 사로잡는 강한 작위는 없더라도, 거듭 읽을수록 궁금해지는 면이 있었다. 곧 그의 시를 다시 만날 기회가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구윤재의 시에는 강렬한 이미지나 말을 제시하는 대담함이 있고, 제시한 모티프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 추진력이 있었다. 그는 시를 쓰는 과정 자체가 허구적 상황의 전개가 되는 현장성 있는 언어를 구사한다. 시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소용돌이는 사변적 상상력과 익숙한 시공간을 뒤섞는다. 그렇게 언어가 움직이는 와중에 아이들이 불쑥 튀어나와 말하거나 움직이고, 다시 언어의 뒤로 숨기도 한다. 그 숨바꼭질 같은 활달함이 읽는 사람을 즐겁게 했다. 경합하는 작품들 가운데 한 작가의 것만을 고르는 일이 쉽지 않았으나, 당선자의 대담하면서도 탄탄한 언어에 결국 설득되었다. 당선자에게는 진심 어린 축하를, 아쉽게 손을 들어주지 못한 응모자들에게는 응원의 인사를 전한다. 이희우(『문학과사회』 편집동인)

시를 읽고 쓰면서 점점 드는 생각은 시는 목소리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시를 쓰는 입장에서는 물론이고 읽는 입장에서도 발화자에 집중하게 된다. 누가 말하고 있는가. 왜 그렇게 말해야만 하는가. 목소리에 힘이 생기는 순간은 어떤 식으로 발생하는가. 이런 질문을 손에 쥐고 신인문학상 응모작들을 읽어나갔다. 발화 위치에 대한 고민을 바탕으로 목소리를 만들어나가는 시에 자연스레 눈길이 갔고 최종적으로 모연지, 황성하, 이순재, 윤수진, 구윤재에게 주목했다.
모연지의 시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불화하는 접점, 그곳에서 터져 나오는 목소리를 직접적으로 발화하고 있어 그 용기에 마음이 기울었다. “내 얼굴은 상영을 포기한 스크린//검열 없이 사랑할 수 있어”와 같이 발화 위치를 선언하는 목소리를 응원하는 한편 선언적 발화가 선언 이상의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어떤 움직임이 필요할지도 함께 고민했다. 무리 속 화자가 어느 순간 이탈하면서 스스로를 직시할 때 시에 긴장감이 생성되고 있었다는 점을 언급하고 싶다.
“나에게도 aunt가 있었지”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황성하의 「거리의 aunt」에 나타난 활달한 감각도 인상적이었다. 우리에게는 aunt가 있었고 또 우리가 aunt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하는 과정에 동참하면서 즐거웠다. 다만 관계를 숙고할 때 쉽게 결론에 다다르려는 성급함은 고민해볼 지점으로 여겨졌다.
이순재의 시에서는 발화가 화자의 내면에서 흘러나온다기보다는 관계 그 자체가 목소리가 된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바람이 분다」의 경우, 등장인물들과 개의 관계가 연쇄적으로 확장되고 시점이 뒤섞이면서 각자의 발화가 묘하게 스며들었다. 시편마다 개성적인 공간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 그만큼 등장인물들의 관계가 다채롭게 진행된다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심사 마지막까지 손에서 쉽게 내려놓지 못했는데, 「볼펜을 튕기는 사람들」에 부기한 주석이 지나치게 설명적이었다는 점과 「끌려 당겨」처럼 독백으로 시상이 전개되는 경우에 시적 긴장이 맥없이 풀어진다는 점이 심사자들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윤수진의 시들은 응모작 대부분이 높은시적 완성도를 갖추고 있었다. 앞선 문장을 살짝 변주해 반복할 때마다 감각을 갱신하며 심도 있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감각적 이미지로부터 정서를 끌어낼 때 섬세하게 진행되기도 하고 거칠게 진행되기도 하는데 모두 고개가 끄덕여졌다. “모른다 이 주체할 수 없는 리드미컬함”이라 스스로 고백할 정도로 때론 목소리가 목소리를 집어삼키고 주체할 수 없이 흘러넘치는 순간도 있었는데 이 부분에서 고민이 생겼다. 그렇게 도달한 목소리를 새롭다 해야 할지, 퇴행이라 해야 할지 판단하기 어려웠고 심사자들의 의견도 분분했다. 윤수진의 “주체할 수 없는 리드미컬함”이 더 많은 이에게 공명할 수 있기를 바라며, 그 기회가 곧 오기를 응원하고 싶다.
구윤재의 시를 읽어나가면서는 조마조마한 마음보다 기대하는 마음이 더 컸다. 발화자가 미리 상상한 내용이나 툭 던진 질문이 그다음 문장을 발생시키는 진행 방식이 작위적이지 않고 흥미로웠다. 그다음은, 그다음은 기대하면서 따라 읽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시작점에서 한껏 멀어진 결말에 이르러서는 여기까지 데려와줘서 고맙다는 말을 건네고 싶어졌다. 시 속으로 끌어들인 인물들을 끝까지 책임지는 한편 시 쓰는 행위가 언어의 길항작용임을 이해하고 있는 태도에 신뢰가 갔다. 수상자를 정하기까지 오랜 논의가 있었지만 막상 구윤재의 시에 마음을 모았을 때는 그게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다. 당선자의 시에서 앞으로 만나게 될 인물들과 그로부터 흘러나올 단단한 목소리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임승유(시인)

올해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시 부문에도 적지 않은 수의 응모자가 작품을 보내주었다. 언제부터인가 응모자의 숫자에 유독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시를 쓰고자 하는 응모자 수의 변화가 어쩌면 열렬히 시를 읽고 있는 독자 수의 변화를 어느 정도는 짐작게 한다고도 생각했기 때문이다. 올해는 응모자 수가 조금 줄어 아쉽기는 했지만, 예심과 본심의 과정을 거치며 이런 아쉬움이 기대와 안심으로 바뀌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여전히 우리 곁에는 시인이 될 만한 사람들, 그리고 시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로 충분한 듯하다.
본심에 올라온 응모작 중 관심 있게 읽었던 것은 구윤재, 소이랑, 이순재의 작품들이었다. 구윤재의 시가 만들어내는 선명한 이미지들에 호감이 갔다. 감각적으로 뚜렷한 이미지들이 갖는 매력을 오랜만에 확인하게 되는 작품들이었다. 구윤재의 시를 읽으며 누군가에 대한, 어떤 시절에 대한, 미지의 시간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감정이 결국 선명한 감각의 기억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새삼 확인하게 되었다.
상대적으로 소이랑의 작품들은 관념적으로 읽혔다. 그러면서도 한 편 한 편의 작품들이 각각 특색 있게 새롭기도 하다는 점이 놀라웠다. 「장미는 여전히도 장미」 같은 시는 ‘장미’처럼 흔하디흔한 시적 소재를 활용하면서도, 그리고 그 단어를 반복적으로 호출하면서도, 어떤 문장도 익숙하게 읽히지 않도록 배치했다는 점이 꽤 흥미로웠다. 자신만의 시적 문법을 잘 다듬어나갈 충분한 잠재력을 갖춘 응모자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이순재의 작품들을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각 작품마다 다양한 인물들을 등장시키는 시적 기획이 굉장히 새롭다고 볼 수는 없지만 어쩌면 익숙할 수 있는 그러한 기획을 작위성이 별로 느껴지지 않게끔 추진해나가는 능력이 높이 평가되었다. 작품성만을 놓고 보았을 때 당선작으로도 손색이 없다고 느낄 정도였지만 얼핏 익숙해 보일 수도 있는 시적 기획이 결정을 망설이게 만들기도 했다.
본심을 진행하면서 심사위원들이 가장 많이 나눴던 말은 개성 혹은 새로움에 관한 것이었다. 남다른 시적 재능을 갖췄다고 확신하게 되는 응모자가 여럿 있었지만 한편으로 그들의 작품은 선배 시인의 독특한 분위기나 특정 작품들과 오버랩되어 읽히는 경우도 있었다. 때로는 어떤 문장이, 때로는 작품의 전반적인 분위기나 시적 전략이 특정 시인의 이름을 떠올리게 했다. 이는 해마다의 심사에서 맞닥뜨리는 상황이기도 한데, 사실 기시감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어떤 느낌에 불과할지 모른다. 어쩌면 응모자들의 작품 속에서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장면과 문장들이 더 재빨리 눈에 띄기 때문에 생겨나는 효과인지도. 이제 막 시인으로서의 첫발을 내디딘 위의 응모자들이 자신만의 독창적인 시 세계를 흥미롭게 개척하기를 바란다. 이후의 작업들이 응모자들의 초기작들을 전혀 새롭게 다시 읽게 해줄 훌륭한 준거가 되어줄 것이라 믿는다. 이는 물론 시인만의 몫이 아니라 독자인 우리의 몫이기도 하다. 구윤재 씨의 당선을 충분히 기쁜 마음으로 축하드린다. 조연정(『문학과사회』 편집동인)

가득히 도착한 시편들 사이에 앉아 다양한 언어와 세계와 사람 들이 시 쓰는 마음 하나로 모인 이 계절을 실감했다. 시를 읽는 이편의 마음으로 응모작들을 가까이 만날 수 있어 반갑고 기뻤다. 나는 시를 쓰는 일을 블록 놀이에 빗대어 생각해보곤 한다. 블록 조각을 대하는 손길과 쌓거나 잇는 마음, 공간을 만드는 방식과 사람 모형을 배치하는 자리, 배경을 생각하는 시야 같은 것은 사람마다 크게 다르고, 다름이 시를 제각각 살아있게 한다. 그 각각의 놀이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시선 역시 개별적이라는 점에서, 시를 읽는 일도 같은 놀이에 빗대어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놀이들의 연장선상에서 나는 시 너머의 사람이 만들어내는 시간과 공간의 성격에 초점을 두어 시를 읽고, 어떤 이유로 그러한 선택을 했을까를 많이 질문했다. 선택의 이유가 확장되고 연결될 수 있을 세계를 가만히 헤아려보면서, 10편 내외의 응모 원고 다음을 기다리게 되는 시편들에 마음을 기울였다.
소이랑의 「장미는 장미 여전히도 장미」 외 9편은 사물이나 상태를 지시하는 단어가 그 내용의 자리를 납작하게 눌러 그저 호칭을 위한 기호로 기능하게 되는 장면을 거듭 그려낸다. 픽토그램의 기능을 역으로 수행하는 언어들 속에서 시는 자신을 규정하는 언어를 찾아 밀착해버리는 부푼 자의식들을 전면화한다. 이 시편들에서 밀착된 촉감은 과장된 것이지만, 걷거나 달리거나 멈춰 있는 중인 보행자 신호 속 사람 모양처럼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힘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 힘은 감각을 매개하는 제도의 문법과 무관하지 않고, 그래서 이 시편들 속 인물 혹은 단어들은 그들이 기탁해 있는 언어의 세계에 대해 질문하게 만들기도 한다. 노골적인 세계에서 노골적인 방법은 외려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기도 할 것이다. 그런 현장을 마주하는 기쁨과 함께, 그리하여 무엇을 드러내고자 하는가를 더 자세히 묻고 싶었다.
이순재의 「바람이 분다」 외 9편에는 대화나 독백이 아닌 부분에서조차 구체적인 사람이 말하고 있는 것같이 느껴지는 현장성이 있다. 뭉텅뭉텅 시간을 뛰어넘으면서 모든 장면을 현재화하는 힘이 열 편을 연결하고, 그 방법적 일관성 속에서 시의 개별적인 장소성이 역으로 부각되기도 한다. 묶음일 때 드러나는 강점이 분명하여 비슷한 묶음을 기대하게 되는데, 그것이 어쩌면 시 한 편 한 편에 있어서는 강점이 되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전면화된 방법 자체를 상대화하는 시선도 더불어 궁금했다.
안진의 「순심」 외 10편은 순수하게 비어 있는 것을 상상해내고 그 공간을 감각으로 충만히 채워 꾸며가려는 작업으로 읽혔다. 고통과 슬픔의 흔적으로부터 멀어지고픈 마음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 이 시편들은, 선명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면서 언어의 채도와 명도까지 높이는 힘을 분명 가지고 있다. 그 감각적 배부름 속에서 시 쓰기 행위의 의미를 읽어내기도 했는데, 그래서 역으로 아직 가득 채워지지 않은, 비어 있는 지점들을 더 궁금해하게 되기도 했다. 관계성 속에서 감각을 펼쳐낼 때 이 시편들의 힘이 더 확장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모연지의 「이제까지의 미래」 외 9편은 한기와 온기가 뒤섞인 구체적 공간에 기대어 시간을 견디는 방법을 꾸준하게 그려낸다. 늘 구체적인 이름과 함께인 그 공간들은 우리 모두 이름 불리며 여기 있다는 사실과 그것을 쉬이 잊어 타인을 부를 줄 모르게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가감 없이 마주하는 장소이다. 바로 그곳으로부터 시작되는 언어가 공간을 이동하거나 확장할 때 어떤 힘을 더해가게 될지 물으며 더불어 내다보고 싶었다.
당선작 「접시 되살리기」 외 9편은 무언가 있던 자리에서 부재 이전의 기억을 끌어안거나, 그저 없는 것을 결핍된 것으로 상상하고 그리워하는 일을 반복한다. 그 반복에서 거듭 읽히는 것은 소외되고 싶지 않은 마음과 소외된 채로 있는 것을 그렇게 내버려두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떨어져 있는 것들을 둥글게 뭉치고 붙여 시는 환영 같은 장면을 만들고, 그 이미지에 기대어 시간을 흐르는 동시에 고이게 만든다. 내일이 눈앞이 하얘지는 빛 속처럼 불투명한 공백으로 여겨질 때, 시는 채우는 방식으로 텅 비어가는 슬픔과 두려움에 가까이 닿는다. 그러나 이 시편들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슬픔 자체이기보다 둥근 반복을 투명하게 지켜보는 오랜 시선이다. 고이는 마음이 아니라 그런 마음에 대한 고민이 시를 쓰는 동력이라면, 그 안에서 언어는 드러나는 것보다 더 큰 몸체의 육중한 무게를 굴리는 중일 것이다. 그 무게의 소리에 천천히 귀 기울이는 마음으로, 구윤재의 「접시 되살리기」 외 9편에 기쁘게 손을 얹는다. 다정과 응원을 담아 당선자에게 축하 인사를 드린다.
비 내리는 소리를 듣다 보면 빗방울 하나하나가 어딘가 표면에 닿아 만들고 있을 무수한 소리를 생각하게 된다. 10편 내외의 응모작 안에는 시를 읽고 써온 오랜 시간과 그동안 쓰고 지운 글자들이 촘촘히 소리를 모으며 담겨 있을 것이다. 그 소리들의 켜를 다시 반가이 만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서로 다른 깊이와 질감의 언어로 도착해주신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와 응원의 마음을 전한다. 홍성희(『문학과사회』 편집동인)

[심사평_소설]
올해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소설 부문에 응모된 작품들을 일별하면서, 한국 소설의 동시대적 흐름과 관련하여 유의미한 전환기에 진입한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서사의 대상과 방식에 있어 특정한 경향성이 뚜렷하게 감지되었던 한동안의 분위기와 달리, 이번 응모작들을 통해 어떤 분명한 트렌드를 포착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설적 상상력의 스펙트럼이 그만큼 넓어졌다고 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의제 설정이라는 소설의 중요한 기능과 관련하여 확고한 중심과 방향이 부재하게 된 상황을 보여준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꼭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그것은 한국 소설이 새로운 동시대성과 호흡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과도기적 혼란, 혹은 중심의 부재 같은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이 향후 만나게 될 새로운 서사적 동시대성을 예감케 할 수 있는 징후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본심작들을 집중적으로 읽어나갔다.
본심에 오른 응모작들 가운데 세 사람의 작품이 기억에 오래 남았다. 우선 김아홉의 「뱅뱅」 외 1편은 본심작들 가운데 가장 트렌디한 작품이었다. 미래에 대한 전망을 상실한 인물들이 영원히 끝나지 않는 현재를 살아가며 대화를 이어가는 블랙코미디적 우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특별한 사건성이 발견되지 않는 이 텍스트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작품 특유의 허무와 권태 속에서 오늘날 청년 세대의 동시대적 내면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의 트렌디한 면모는 다른 한편으로 응모작만의 독창적 매력의 결여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서사적 장면을 구성하는 역량과 재능은 분명해 보였지만, 응모자만의 개성적 시각을 확인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서주희의 「호텔」 외 1편은 소설적 글쓰기에 대한 실험적 자의식이 돋보이는 메타적인 작품이었다. 인상적인 것은 응모작이 메타소설들에서 종종 결여되곤 하는 가독성과 흡인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다. 미스터리 서사를 활용한 이야기 구성, 그리고 무엇보다 특유의 단단하고 담백한 문체를 통해 구축되는 장면들이 매력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전체적인 분위기가 다소 작위적인 데가 있으며, 소설이 시도하는 메타적 사유가 그다지 새롭지 않다는 지적이 있었다. 응모작 두 편이 연작처럼 구성되어 있는 것도 다소 아쉬운 선택처럼 보였다. 상호텍스트적 독서의 즐거움을 선사할 수는 있었으나, 응모작들 각각이 한 편의 개별 텍스트로읽힐 수 있는 힘이 충분하지 않다는 의문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당선작으로 결정된 윤단의 「작은 알」 외 1편은 단편소설의 정석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안정적이고 섬세한 문체를 통해 소설의 인물이 겪는 고통과 트라우마를 진지하게 조명하고 있었다. 특히 내밀한 불행 속에서 삶에 대한 불가사의한 의지를 재발견하는 인물의 변화가 선사하는 감동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물론 신인에게 관습적으로 기대되는 파격과 새로움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었고, 뛰어난 완성도만큼 지나치게 안정적인 것 아닌가 하는 물음이 제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삶에 대한 태도에 있어 주인공이 보여준 방향 전환을 해석하는 문제에 관해 심사위원들 사이에 작은 격론이 있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그것은 윤단의 소설이 충분히 이해되거나 설명될 수 없는 인간의 근원적 힘에 대한 깊은 성찰과 탐구의 결과임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심사위원들 전부가 흔쾌히 분명한 신뢰와 응원을 보내줄 수 있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강동호(『문학과사회』 편집동인)

응모작들을 살피며 이렇게 많은 사람이 소설을 쓰고 싶어 하고, 쓰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앞으로도 우리는 여러 번 문학의 쓸모에 대해 물을 테지만, 여전히 이 세계 안에서 문학으로 연결되고 싶어 하는 이가 많다는 것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나는 그 쓸모를 말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손끝을 스쳐 간 소설들에서 여러 가능성을 보았으나, 그중에서 내가 오래 머물렀던 작품은 「파라솔과 팽이」 「뱅뱅」 「작은 알」이었다.
「파라솔과 팽이」는 시력이 좋지 않은 한 인물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소설을 읽어가며 파라솔과 팽이의 모양새가 구분되지 않는 건 단지 인물의 시력 탓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현실에서는 의도적인 움직임으로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의 교묘한 눈속임을 펼치는 이들도 있지 않은가. 그렇지만 선명하게 보기 위해서는 보는 방식을 바꾸어야 하며, 길들이는 데에 적지 않은 시간이 들기도 한다. 또한 이 사실이 누군가에게는 흐릿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것보다 더욱 적응이 필요한 일이라 지금처럼 그대로 삶을 지속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걸 이 소설을 통해 문득알았다. 몇 번의 오해와 착각이 있을지언정 나름대로의 소신으로 끝까지 밀고 나가는 인물에게 마음이 갔다. 다만 주인공의 시야와 같이 치밀하지 못한 흐릿함이 소설 군데군데에 묻어 있어 아쉬움을 남겼다. 다소 갑작스럽게 끝나버린 결말부 역시 이 소설을 끝까지 지지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였다.
「뱅뱅」은 복합 쇼핑몰 안을 목적 없이 돌아다니는 두 인물을 통해 그들이 감각하는 이 세계의 양태를 잘 표현한 작품이었다. 반복적으로 쇼핑몰을 오르내리는 것 말고는 딱히 하는 일이 없는 이들의 행동은 생활의 답답함을 해소해보려는 시도일 것이다. 처음에는 두 인물이 아직 어른이 되지 않은, 고등학생이라는 점에서 염세적인 태도를 비롯한 깊이 있는 고민들이 조금은 이른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이내 생각이 바뀌었다. 해야 하는 일과 할 수 있는 일 사이에서 갈등하는 어른들이 어느 날 갑자기 그 모습이 된 것이 아니듯, 이 소설의 인물들 역시 천천히 어른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쇼핑몰 안을 맴도는 이들의 모습처럼 이 소설도 오랫동안 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러나 작가만의 인장처럼 느껴지는 뚜렷한 개성을 끝내 발견하지는 못했다.
「작은 알」은 삶의 이유를 찾을 수 없던 한 인물이 묵묵히 자신의 시간을 견디면서 끝내 ‘살아 있음’을 감각하는 이야기다. 생명의 위협이 되었던 큰 사고를 겪었지만, 여전히 생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권태로운 일상을 반복하던 인물이 마침내 스스로 어떤 ‘깨어짐’을 경험하는 결말은 큰 감동을 주었다. 동시에 이 소설을 당선작으로 지지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이 소설의 작가는 한 사람이 자신을 포기하지 않기를 마지막까지 바라며, 그를 살릴 수 있는 이라는 확신이 생겼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다소 도식적으로 읽히는 부분들에 고민을 하기도 했으나 잠시의 주저일 뿐 결정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무엇보다 「작은 알」이 윤단의 다음 소설을 읽고 싶게 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당선작으로 손색이 없었다. 이것이 이제 막 시작한 한 명의 작가에게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는 기쁜 소식이기를. 알알이 가득 찬 마음으로 축하를 건넨다. 소유정(『문학과사회』 편집동인)

한 사람을, 하나의 세계를 발굴하고, 가능하게 하는 능력을 타고난 사람들을 뭐라 부를 수 있을까. 보내주신 많은 원고를 읽는 일은 기쁘고도 어려웠다. 스스로 얼마나 편견 없는, 아집 없는 독자일 수 있을까. 다른 분들의 원고를 읽을 때마다 두려움을 느낀다. 어쩌면 내가 아직 가본 적 없는 세계로, 전혀 다른 맥락의 시작을 가능하게 할 원고를 내 아둔함 때문에 못 알아보고 놓치는 것은 아닌가.
탁월한 필력으로 순수한 독자의 기쁨을 누리게 해주신 작가들께, 우정이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것, 그것이 누군가를 조금 더 살게 하기도 한다는 것을 다양한 관계들을 통해 감각하게 한 작가들께, 여러 예술 장르를 경유하여 자신만의 고유한 세계를 펼쳐 보여준 작가들께, 끔찍하고, 슬프고, 지리멸렬한 사람들을, 아름답고, 너절하고, 막막한 세계를 마주하게 해준 모든 작가들께 먼저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이 소설들이 미래에 더 많은 독자를 만날 날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이 글을 시작한다.
서주희의 「호텔」과 「열쇠」는 연작소설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스타일이 빛나는 드문 소설이어서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서사 장르 중 ‘소설’을 통과할 때만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을 선사해준 소설에 믿음을, 작가의 다른 소설들에 기대를 갖기에 충분했다. “끝없이 갈라지는” 미로 앞에 섰을 때의 기분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느낄 수 있었으므로 이 세계를 끝내 응원하고 싶은 마음을 내려놓기가 어려웠다.  
김아홉의 「뱅뱅」과 「바다의 전망」의 인물들이 나눠 안은 정답 없음의 순간들은 지금, 여기의 가차 없는 매일을 정확하게 겨냥한다. 희망도 전망도 없는, 모든 가치가 하나로 수렴되는 세계. 더는 흐르지도 끓어넘치지도 않는 식어버린 묵 같은 상태에 가까운 시간 속에서 가까스로 내딛는 한 걸음. 작가가 발견한 지속의 자세에 오래 마음이 머물렀다. 눈을 들면 어디에나 ‘살아있는’ 그들이 있으리라는 것을 안다. 오래지 않아 다른 지면을 통해 만나게 되지 않을까.
윤단의 「작은 알」은 ‘있다’는 것과 ‘죽어간다’는 것, 때로는 죽어가는 것이 유일한 삶의 방식일 수도 있다는 것을, 죽어가기를 멈추지 않는 고통의 면면들을 통해 세밀하게 들여다본다. 고통은 얼마나 쉽게 단순화되는가. 끔찍하게도 계속해서 발명되는 것은 고통이 아닌가. 작은 알이 섣불리 답하지 않고 끝내 품고 있는 질문들에 마음이 묵직하게 움직였다는 사실을 기꺼이 고백한다. 좋은 소설들이 언제나 그러하듯, 윤단의 소설이 다른 방향의 움직임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진심으로 축하의 인사를 전한다.        
타고난 사람들. 글쓰기를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각자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예감하고, 돌을 고르고, 쓰기를 이어가는 사람들. 호명할 수 있는 이름을 여전히 모르겠다. 부르는 말. 하나의 이름에 갇히지 않는 사람들. 해독 불능. 우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수많은 세계를 짓고, 허물고, 머뭇거리고, 들여다보는 일을 함께하자는 말밖에는 전할 말이 없어 송구하다. 윤해서(소설가)

내가 마음에 둔 작품은 「작은 알」과 「뱅뱅」이었다. 「뱅뱅」은 포스트아포칼립스 시대의 청춘 드로잉이라고나 할까, 학교 대신 쇼핑몰에 들어와 하릴없이 뱅뱅 맴도는 두 사람의 하루를 무심하고 담담하게 보여준다. 함께 자퇴하기로 한 것 외 별다른 공통점이 없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궁금한 것은 왜 학교를 그만두는지가 아닌 왜 여태 버텨온 건지, 왜 아직도 여기 있는지 같은 것들이다. 뭘 해도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인 두 사람의 모습은 미래를 상상할 수 없는 오늘날의 지배적인 정동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는, 이미 몇 해간 많이 제출된 바 있는 ‘출구 없음’의 ‘사실적시’에 머무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고, 그로 인해 서사적 한계도 분명해 보였다.
「작은 알」은 안정적인 문장과 적절하게 조율된 호흡과 리듬이 돋보였다. 분위기를 만들 줄 알고, 그 분위기로 주제를 견인하는 솜씨가 탁월하다고 생각했다. 한 번 죽음의 위기를 겪었던 주인공이 살아있음에 의문을 품은 채 주변을 둘러보는 시선이 정교했고, 그 숙고의 과정을 통해 가까스로 도달한 결론 역시 설득력이 있었다. 살아야 하는지, 살아야 한다면 어떤 대가를 지불하며 삶을 지탱해야 하는지, 어쩌면 가장 관념적이면서도 가장 현실적인 문제를 눈, 알갱이, 포도알 등 촉각적인 이미지에 기대어 구체적으로 풀어나가는 솜씨에 매료되었다. 앞으로 쓸 소설들이 무척 기대되었고, 당선작으로 지지하기에 전혀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이소(『문학과사회』 편집동인)

본심에서 만난 소설들을 읽는 동안 몹시 즐거웠다. 모든 작품이 매우 개성이 넘쳤다. 스타일 이나 방향성 같은 것이 저마다 남달랐다. 나는 한 작품에만 마음을 두었다기보다 이 작품들을 연이어 읽을 때에만 느낄 수 있는 넓은 스펙트럼에 매료되었다. 출판계는 불황이라는데 작가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이토록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를 구축해나가고 있다는 것이, 그 고군분투가 새삼 감격스러웠다. 신인상은 미래의 작가를 찾는 일이라고 말해지곤 한다. 나는 이번 심사를 통해 미래의 모습을 어느 정도 엿본 것 같다. 낙선된 작품들을 손에서 놓으면서 가까운 미래에 다시 만날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계속 소설을 써보시라 권유하는 일이 과연 그 사람의 미래를 진정 위하는 일일까 싶지만은, 나는 한 명의 독자로서 좋은 소설을 계속 읽고 싶고, 내가 손에서 놓게 된 작품들을 쓴 작가들이 계속 소설을 써줬으면 좋겠다.
김아홉의 「뱅뱅」은 부조리극과 그 표피가 닮아있었다. 쇼핑몰 안을 뱅뱅 도는 두 인물의 모습은 절망감이나 무력감 따위의 단어를 쉽게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뱅뱅」의 놀라운 점은 이 절망의 정서가 수동태가 아닌 능동태라는 것이다. 이 인물들은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혹은 청춘 특유의 방황으로 인해 절망에 몰려 있거나 희망이 없다는 무력감으로 배회를 지속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단호한 의지로 배회를 선택했고 작가 또한 소설 속 인물들과 배회의 궤적에 동행하고 있었다. 그게 참 좋았다. 절망감이나 무력감의 정동으로 이 소설을 설명해서는 안 된다. 공동체 속에서 우리가 부대낄 때에 나는 항상 다른 질문이 필요하다고 느껴왔다. 이 소설은 그걸 하고 있었다.
송호정의 「여름 장미 말라가고」는 힘이 엄청 셌다. 중편소설의 분량이었으나 몰입력이 상당했다. 나는 이 작품에 설득당했다.
서주희의 「호텔」은 같은 작가의 다른 작품 「열쇠」와 연작소설로 파악되었다. 경계 짓기와 경계 지우기의 시도를 간곡하고 끝없이 건조하게 해나간다. 궁지에서 더 좁은 궁지로 끝없이 나아간다. 작가들이 흔히 다루는 서사를 애써 피해 가려는 이 작가의 태도를 응원하고 싶다.
윤단의 「작은 알」은 현실감이 압도적이었다. 절망으로 채색된 하루하루의 고된 시간들을 기가 막히게 보여준다. 이런 삶이라면 죽어버린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이지만, 어떤 작은 순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전환을 빚어내는 솜씨에 깜짝 놀랐다. 「작은 알」은 심사 초기부터 심사위원 전원의 추천을 받은 유일한 작품이었다. 각기 다른 안목과 개성을 가진 이들을 모두 설득한 작품이라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가. 나는 윤단의 「작은 알」보다 같은 작가의 다른 작품 「남은 여름」이 당선작이 되었으면 하고 바랐다. “사람은 죽었다”라는 문장을 “사람은 있었다”라는 문장으로 바꾸기까지, 그 사이의 공간을 한없이 채워나가는 집념, 아무것도 안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너무나 끈질기게 허공에다 하나의 윤곽을 그려나가는 이 모호한 집요함이 너무 귀했다. 앞으로 읽게 될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이 몹시 기대된다. 임솔아(소설가)

[심사평_평론]
평론에 대한 관심이 꾸준하게 이어진다는 것은 작품이나 작가를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과 작품을 경유하여 세계의 문법에 관해 논하려는 마음이 더 적극적인 대화의 장을 향해 손을 뻗고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올해 평론 부문 응모작 가운데에는 담론과 작품을 밀착시켜 작가론 자체를 담론적 맥락에 위치시키고자 하는 시도가 많이 보였다. 특히 미적 감각과 정치적 움직임이 세계 인식이라는 차원에서 서로 분리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질 때 평론은 깊이 읽고 치밀하게 논하는 힘을 찾아갈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이고자 했다는 점이 좋았다. 그러나 주어진 이론적 틀 안에서 작품을 읽는 시선이 경직되거나 문제의식을 확장하기보다 작가의 의도를 해석하는 자리에 머무는 글이 많아 아쉬움이 크기도 했다. 논의의 성실함에 스스로의 논의 구도를 상대화하여 파악하는 예리함을 더하여, 논쟁적이면서도 설득력 있게 이야기를 펼쳐갈 글을 더 기다리게 되었다.
아쉬움 속에서 마지막까지 논의한 응모작은 「구부러진 문학의 미래 가늠하기—정지돈론」과 「인간의 자리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편이었다. 정지돈에 대한 작가론을 시도한 응모작이 여러 편 있었는데, 「구부러진 문학의 미래 가늠하기—정지돈론」은 작가론을 문학론과 비평론으로 연결하여 문제의식을 탄탄히 확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눈에 띄었다. 이 글은 정지돈이 자신의 작업에 대한 비평의 시선을 적극 마주하면서 그 시선 자체를 새로운 방법론으로 전유해왔음을 논증하는 동시에, 정지돈이 그려가고 있고 또 실제로 예상되는 ‘문학의 미래’와 상대되는 위치에서 비평의 미래는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을까를 묻는다. ‘읽기’와 ‘해석하기’를 근간으로 하는 ‘비평’의 방법이 유효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인지, 그 조건이 변화할 때 비평은 어떤 방법을 선택하며 나아갈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작가론의 연장선상에서뿐 아니라 메타비평적 관점에서도 묵직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비평의 미래에 대한 이러한 논의가 정지돈을 읽고 해석하는 비평적 작업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은 이 글 자체가 논의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어떤 외부를 상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질문하게 한다. 더불어 정지돈에 대한 비평적 평가가 ‘한가한’ 태도를 유지해왔음을 지적할 때 정지돈의 방법을 적극 의미화하고 비평적 방법으로 연결시키고자 한 작업은 배제함으로써 비평장 자체를 납작하게 독해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논의의 틀 자체가 충분히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가를 되묻게 만들기도 한다. 맥락을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하고 분석하는 가운데, 작가의 방법론에 기대는 대신 필자 스스로의 문제의식을 적극 개진한다면, 이 글이 가진 차곡차곡한 책임감과 진정성이 훨씬 분명하게 전달될 것이라 기대한다.
「인간의 자리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팬데믹이 인간에게 일깨워준 것이 무엇인가를 상기하면서 비인간 담론의 지극히 인간적인 관점과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비인간 담론에 기대할 수 있는 효과가 무엇인가를 살핀다. 김혜순, 김보영, 서이제의 작품이 비인간 담론의 어떤 양상과 가능성을 보여주는지를 차별적으로 검토하여 연결하면서, 이 글은 비인간 담론이 나아가는 방향은 반복되는 부정을 통한 긍정이라고 정리한다. 이 글의 강점은 담론과 작품을 연결하는 데 있어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태도일 것이다. 하지만 담론에 대한 논의나 작품 해석에 있어 필자만의 시선이 두드러진다고 판단하기는 어려웠다. 비인간 담론의 윤리적 의의와 방법적 전망에 대한 논의는 최근 비평장 안에서 익숙하게 반복되고 있기도 하다. 지금은 외려 그러한 반복의 한계를 솔직하게 상대하는 작업이 필요한 시기라는 생각이 든다.
본심에 오른 4편 가운데 「감은 눈의 센티먼트—김복희론」과 「물질의 흐름과 주체라는 유령—심지아론」은 충실한 작가론으로, 텍스트를 읽는 성실함이 부각되는 글이었다. 다만 두 편 모두 특정 개념이나 담론틀을 적용하여 작품을 해석해나가기보다 작품을 통해 언어적 틀을 확장시켜가는 힘을 발휘했다면 각자의 장점이 더욱 부각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앞으로를 기대하고 응원하는 방향으로 마음을 모은 결과, 올해 평론 부문에서는 당선작을 내지 않게 되었다. 비평적 작업에 대한 의지가 꼼꼼한 독해와 성실한 이론적 작업에 더하여 문학과 비평, 그것들이 위치한 세계에 관해 구체적이고 치열하게 논구하는 적극성을 가질 수 있기를 바라게 된다. 그러한 글들이 도착할 수 있도록 비평장 역시 거듭 쇄신되어갈 것이다. 응모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마음과 함께 단단한 응원을 전한다. 홍성희(대표 집필), 강동호, 소유정, 이소, 이희우, 조연정

구윤재

수상자: 구윤재

장르: 시

작품: 「모래밭의 나쁜 아이에게」 외 4편

수상 소감:

아이들이 달린다.

장소를 떠날 때마다 떠난 장소에 나의 부분을 두고 왔다는 생각이 든다. 각각의 장소에서 수많은 내가 여전히 자신의 일을 반복하며 순간순간을 살아내고 있을 것만 같다. 이를테면 강가에서. 빛이 물결을 반죽하는 풍경 속에서. 버드나무가 새를 감추는 천변에서. 빈 벤치에서. 아직은 이름이 없는 나의 사랑하는 고양이를 처음 만났던 골목에서. 점심시간의 분주한 카페에서. 아무도 없는 놀이터에서. 모두가 빠져나간 운동장에서. 육교에서. 파편이 되어 내가 더 이상 나일 수 없는 그 어딘가에서. 그들이 존재하고 있을 것만 같다.

그렇게 아이들이 달린다.

때때로 너무 많은 아이를 두고 왔다는 생각이 든다. 달리면 숨보다 웃음이 먼저 차오르는 아이들에게. 아무도 땅을 외치지 않아서 준비 자세만 반복하던 아이들에게. 이제는 시작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달리는 아이들을 보면 슬프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건 슬픔에 잠기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곁에서 함께 뛰는 것. 차오르는 숨이 웃음으로 바뀌는 순간까지. 무한의 장소까지.

아이들이 달린다.
함께 달렸던, 달리는, 달릴 모든 이에게 감사하다.

윤단

수상자: 윤단

장르: 소설

작품: 「작은 알」

수상 소감:

왜 소설을 쓰는지 묻고 답하는 시간들이 있었다.
나는 소설이 좋아서 쓴다. 훗날에는 좀더 멋지게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는 소설이 좋아서, 너무 좋아서 쓴다고 말한다.
그리고 소설을 좋아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돌이켜보면 소설을 쓰기 전의 나는 어디에서 무얼 하든 상관없는 사람이었다. 직장을 쉽게 옮겨 다녔고 그렇게 또 다른 곳으로 갈 수 있었다. 퇴근하거나 쉬는 날에 집에서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게 좀 신기하다는 생각을 뒤늦게 했다.
소설의 좋음이 나를 살아내게 한다. 걷고 바라보고 질문하고 헤아리고 알 수 없는 뭔가를 쥐고 아끼고 실패하고 그럼에도 굴려보고 매만져보는 그런 것. 삶을 감각하며 살아보는 것. 나는 그게 좋다.
소설을 오래 좋아하며 읽고 쓸 것이다.

*

실은 가장 먼저 사랑하는 이들의 이름을 적었다. 그들에게 고마움을 전하자 내가 쓰고 싶었던 당선 소감을 다 적은 기분이었음을 기록해둔다. 나보다 나를 믿어준 사람들이 있어서, 같이 쓰고 읽고 얘기를 나눈 사람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고 생각한다.

묵묵히 기다려준 엄마, 아빠, 윤성준. 많이 고맙고 사랑해. 나의 행운 유인 언니, 언니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과 다른 삶을 살고 있었겠지. 언니의 마음이 너무 크고 놀라워서, 내가 어떻게 보답할 수 있을까 자주 생각해. 여러모로 부족한 내 곁에 기꺼이 있어주는 소리, 지윤, 휘현, 가현, 송이, 재은, 유정. 당신들의 이름을 여기에 적을 수 있어 몹시 기쁜 마음. 소설로 연결되는 애정이 어떻게 가능한지 알게 해준 추영, 은영, 가람, 본, 민정, 영서, 희승. 나의 다정함은 많은 부분너희로부터 비롯되었어. 고마운 소란 언니 동생들, 연작. 함께 보낸 시간을 잊지 못할 거예요. 많은 배움 주셔서 감사해요. 올해의 멋진 인연. 다솔, 종인, 하늘. 너희의 기쁜 소식도 기다릴게. 이제 없어선 안 될 수경. 너와 너의 소설은 나의 자랑이야. 언제나 사랑가득. 우리가 서로의 용기가 되어주며 오래 함께하리라는 걸 믿고 있어. 사랑하는 지현, 날 잡아주고 일으켜주던 너의 애정과 확신을 얼마나 여러 번 곱씹었는지. 너와 나란히 걷고, 앉아있고, 또다시 일어나 걸었던 수많은 날을 소중히 기억해. 앞으로도 우리는 여러 풍경 속에 같이 있을 거야.
늘 다정함을 건네주시는 권희철 선생님, 안희연 선생님, 김경욱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건네받은 마음과 조언들 귀하게 간직하고 있어요. 유머와 격려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조성기 선생님께도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조경란 선생님. 선생님의 수업을 들으며 소설을 쓰는 사람이 되고자 마음먹었습니다. 소설뿐 아니라 쓰는 마음과 태도를 선생님을 통해 배웠어요. 크나큰 존경과 감사를 전합니다.
마지막으로, 가능성을 봐주시고 손 내밀어주신 문학과지성사와 심사위원님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계속해서 마음을 다해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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