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23회 - 2023
신원경 / 시 / 「축소 모형」 외
양송이 / 시 / 「넌 어디든 네가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어」 외
현재 / 평론 / 「…, 희붐」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은 올해 23번째를 맞이하였다. 매년 봄 신인문학상 앞으로 보내진 응모 원고들이 이 상의 자리와 의미를 내내 지켜주었을 것이다. 이번 해에는 시 부문에 652명, 소설 부문에 523명, 평론 부문에 32명의 필자가 소중한 글을 보내주었다. 응모해주신 모든 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매끈하고 의뭉스러운 언어가 도처에 난무하는 때 응모작들의 깊은 언어를 만날 수 있어 귀한 시간이었다. 원고 수합이 마무리된 4월 초 예심을 시작하여 심사위원들이 원고를 고르게 나누어 읽었다. 종이 무게만큼의 숙고 끝에 모은 본심 추천작은 시 부문 12명, 소설 부문 10명, 평론 부문 9명의 응모작들이었다. 본심은 4월 26일과 28일 두 날에 걸쳐 문학과지성사 사옥에서 진행되었다. 추천작 한 편 한 편에 대하여 논의를 이어간 끝에, 시 부문에는 신원경 씨의 「축소모형」 외 4편과 양송이 씨의 「넌 어디든 네가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어」 외 4편이 공동으로 당선되었다. 올해 소설 부문은 아쉽게도 당선작 없음으로 결정되었다. 평론 부문에는 현재 씨의 「…, 희붐」이 당선작으로 선정되었다. 수상하신 세 분께 진심을 담아 축하 인사를 드린다. 각 부문의 심사평에서 심사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글을 보내주신 모든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와 응원의 마음을 건넨다. 거듭 다시 시작될 쓰기의 시간에 외로움보다는 온기와 용기가 크고 나란한 힘으로 곁에 있기를 바란다. _심사위원
[심사평_시]
수상자로 두 분을 선정했다. 수상자가 둘인 것도 이례적이긴 할 테지만, 끝까지 손에서 놓치 못한 작품들은 더 있었다. 이제 막 시작하려는 이들의 어려움을 헤아려보았다. 으레 요청되곤 하는 새로움이란 뭘까. 시로써 시도할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은 이미 다양한 방식으로 탐구되었고 시대의 공기는 점점 상상력을 옥죄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지금의 신인에게 필요한 덕목은 한 끗의 고유함, 한 끗의 신선함, 한 끗의 확장, 한 끗의 모험일지도 모른다. 한 끗을 발판으로 더 넓은 데로, 더 먼 데로, 더 깊은 데로 나아가는 것은 이후의 몫일 것이다. 그 ‘한 끗’의 개성을 지닌 작품들이 많아 선뜻 한 사람만을 수상자로 호명하기가 어려웠다.
응모작들을 전반적으로 살피면서 눈여겨본 점은 장르의 해체가 가속화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시는 시로서 어디까지 길어질 수 있는지, 산문으로서의 서사와 다른 시적 서사는 어떤 방식으로 가능할지, 장르의 경계를 허물면서도 허물어지지 않는 무엇이 끝내 시의 이름으로 남을지를 가늠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해체를 위한 해체에 머물지 않고 시의 확장에 도전하는 작품들이 특히 주목을 끌었다.
이소명의 시들은 이런 경향을 가장 강렬하게 보여주었다. 흐트러지기 쉬운 긴 흐름을 끝까지 붙잡고 가는 응집력, 뜨거운 정념, 빛나는 구절과 찰진 비속어가 웅장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냈다. 다만 최근의 시들에서 잦은 빈도로 출현하는 어휘와 모티프의 기시감이 못내 아쉬웠다.
봉주연과 윤초롬의 시들은 다른 방식으로 흥미로웠다. 봉주연의 시들은 미묘한 방향 감각을 보여주는 구절들이 돋보였다. 장면의 레이어를 만드는 방식이 정교해진다면 이 작품들만의 고유한 특성이 한결 더 잘 드러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윤초롬의 시들은 시의 길이와 무관하게 미니멀한 운동성이 눈길을 끌었다. 속도감 있는 문장으로 모종의 어긋남이 발생하는 움직임을 선명하고 정묘하게 포착한 시들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움직임의 진폭에 비해 다소 다변이라는 인상을 받지 않았다면 심사자들의 고민은 계속 깊어졌을 것이다.
신원경의 시들은 응모작 전반의 완성도가 편차 없이 높았다. 생활에 기반한 모티프를 확장하고 변주하며 세계의 겹을 더해가는 상상의 흐름이 미더웠다. 그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시가 출발했던 장소의 이면에 도달해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가족이 등장하는 「예상 밖 외출」 「공터의 사랑」 「가풍」은 특히 인상 깊었다. 보편적인 정서로부터 절묘하게 어긋난 지점에 부모와 일가친척, 아이들의 자리가 마련되어 담담하면서도 특별한 울림을 불러일으켰다.
양송이의 시들을 읽으면서 설렜다. 경쾌하고 활달한 전개는 예측 가능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았다. 「넌 어디든 네가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어」는 로컬리티의 시적 현대성이란 이런 걸까 생각해보게끔 했다. 표준말로 표준말의 외부를, 서울을 배경으로 서울의 바깥을 환기시켰다. 익숙한 괴담처럼 시작하는 「(유령) 숙모」가 귀신의 내력을 구성하는 방식은 자유분방하고 유머러스하면서도 생활 세계의 그늘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 그늘이 시에 입체감을 부여했다. 그의 시는 행간이 좁은데도 불구하고 공백을 품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수다 속의 공백이 주는 긴장감을 계속 만나고 싶었다.
신원경과 양송이의 작품을 오래 검토한 끝에 우리는 한 분만을 선택할 수는 없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두 분의 작품을 앞으로도 즐겁게 따라 읽게 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안타깝게 관문을 통과하지 못한 응모자들의 작품은 여전히 눈에 밟힌다. 깊은 응원과 격려를 보낸다. 이 마음이 전해졌으면 좋겠다. 신해욱(시인)
신인문학상 심사를 하면서 발견하고 싶었던 것은 기꺼이 문학적 모험을 떠나는 어떤 용기였다. 미지의 장소에 도착해 있는 미지의 얼굴을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예심과 본심을 진행할수록 어쩌면 이것은 신인에게는 조금 혹독한 기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문학적 모험이란 문학의 형식과 내용을 깊이 숙련한 이후에야 나설 수 있는 또 다른 언어적 변주 혹은 변용에 다름 아닐 것이기에. 그럼에도 그렇기에 어떤 미친 새로움, 기성 시인들과는 완전히 다른 목소리를 읽고 싶었다. 등단하려는 욕구와는 다른, 그것보다 앞서는, 개인적인 슬픔과 고통을 토로하는 자기 고백적 차원을 넘어 이 세계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의심하고 부정하고 질문하면서 인간의 삶에 대한 보편성을 확보하는 것, 그렇게 자신만의 어떤 진실에 육박하려는 의지와 태도가 깊이 배어 있는 시편들을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숙련도가 높은 응모작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심사위원 모두가 함께 의견을 모을 만한 단 하나의 작품과 작가를 선정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현대 시의 포화 상태 속에서 시적 갱신의 길의 어려움을 새삼 절감한 시간이기도 했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열네 명의 응모자(구윤재, 박상미, 변호이, 봉주연, 신원경, 양송이, 윤초롬, 이소명, 이예니, 이정화, 이하정, 윤보황, 조성배, 한영원) 중에서 다시 돌아가 작품을 들여다보게 했던 응모자는 박상미, 신원경, 양송이였다.
「건축」 외 9편을 응모한 박상미는 보내온 원고의 서체와 편집만 보아도 이미 출간이 익숙한 작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응모작 「건축」과 「청강」 등에서도 드러나듯이 풍부한 문학적 레퍼런스에 자신만의 언어적 사유를 녹여내어 한 편의 글로써 잘 축조해낼 줄 안다. 한 편의 시를 쓴다는 것은 언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내장한다는 점에서, 문체의 배후에는 문장의 스타일을 넘어 작가 그 자신의 가장 깊은 정신의 핵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에서, 메타시/메타언어에 대한 박상미의 오랜 숙고가 느껴져 반가웠다. 기존의 시와 소설의 영향이 직접적으로 드러나고, 진술의 패턴이 반복됨으로써 시적 리듬 혹은 밀도가 느슨하게 느껴지기도 했으나 등단 여부, 그리고 장르적 구분과 무관하게 이미 자기 세계를 가진 개성적인 한 사람의 작가이다. 어느 지면에서든 곧 만나게 되리라는 기대와 함께 앞으로 써나갈 글들을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게 한다.
「넌 어디든 네가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어」 외 10편을 보내온 양송이의 목소리는 귀한 지점이 있었다. 비슷비슷하게 잘 숙련된 시편들 속에서 양송이의 응모작들은 다소 날것인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부분들도 있었으나 자신의 자리를 예민하게 감각하여 문득 특별한 방점이 찍히는 시공으로 환기시키는 힘이 있었다. 아주 작은 이야기라 할지라도 자신만의 이야기를 전달하려는 간절한 마음 같은 것들, 자신이 놓인 일상적인 장면들을 전개해나가는 과정에서 돌연 이전과 다른 사건으로 축소/확장시켜 감각할 수 있도록 언어화하는 능력이야말로 시인의 자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앞으로 구축할 독자적인 시적 공간, 그 속에서 조용하고도 활달하게 흐르는 고유한 목소리를 계속해서 따라 읽고 싶어지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축소 모형」 외 11편을 보내온 신원경은 응모한 작품들 사이 큰 편차 없이 고른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어 오랜 시간 습작을 해온 응모자로 느껴졌다. 시적 언어의 운용을 누구보다도 잘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의 사건 혹은 사물 속에서 이 세계를 중층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믿음직했다. 또한 너무나도 사소해서 미처 인지할 수 없는 기척과 기미 들을 잘 포착해내어 그것들만의 이름과 자리를 마련해주는 섬세한 감정과 감각이 돋보였다. 잘 짜여진 시편들이 어딘가 기존의 시인들의 문법을 연상시킨다는 점이나, 숙련된 시편들 뒤로 자신만의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희박하게 들린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기도 했지만 내면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자신만의 목소리가 모여 있는 자리를 발견해낸다면, 한 권의 시집을 묶어낼 만한 충분한 역량이 느껴졌기에 양송이와 함께 공동 당선작으로 선정하는 것에 기쁜 마음으로 동의했다.
시를 읽고 쓴다는 것은 가슴 깊이 아픈 일이다. 그저 기쁠 때조차도 뒤늦게 아픈 일이다. 신인문학상 응모작들을 읽으면서 아프고 슬프고 아름다운 시인들을 많이 만났다. 비록 본심에 올릴 수 없는 시편들이었음에도 어떤 시편들 앞에서는 울고 있는 그 마음 그대로 그 문장 속에서 오래도록 함께 머물러 있기도 했다. 이것이 시가 아니면 무엇을 시라고 부를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시의 마음을 가지고 써 내려가는 당신들을 시인이 아닌 다른 어떤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그저 무언가 마음을 다해 쓴 뒤에 그것을 어딘가에 전하고 싶었을 뿐인 그 마음들은 이런 심사평 같은 것은 읽지도 않을 것이기에.
찾으려 하지만 찾을 수 없는, 내내 찾아오지 않는, 바로 그 문장을 기다리면서 당신의 두 손은 오늘도 백지 위에서 주저하며 머뭇거리며 흔들리고 있을 것이다. 무수한 착각과 착란과 회의와 의심 속에서 아주 작은 문장 부호조차 썼다 지웠다 반복하면서 오늘도 순간순간 시를 쓰고 시를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이미 쓴 당신들의 시편을 읽으면서 매일매일 조금씩 조금씩 더 더 멀리로 나아가고 있는 당신들의 세계를 미리 가서 보았다고 믿는다. 보이지 않지만 이미 도착해 있는 미지의 시인들께 깊은 사랑과 우정의 마음을 전한다. 이제니(시인)
신인문학상 심사에서는 무엇보다도 ‘발견’의 가치에 초점을 두게 된다. 작품의 전체적인 완성도나 수준이 물론 중요하게 고려되지만,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목소리를 찾는 일에 더 고심하게 된다는 말이다. 방대한 양의 기존 작품들을 학습하여 얼핏 그럴듯한 작품을 만들어 보여주는 인공지능 글쓰기까지 등장한 시대에, 뚜렷하게 개성 있는, 그리고 확연히 새로운 목소리를 만나는 일이 과연 쉽게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이번 심사에서도 전반적으로 안정되고 고른 수준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지만, 신인상에 걸맞은 응모작을 골라내는 일이 마냥 쉽지는 않았다. 이미 기성 시인이라 해도 될 법한 숙련된 솜씨를 보여주는 응모자도 없지 않았다. 반가운 마음도 컸지만 그럴수록 이 심사가 한국 문단의 외연을 확장할 새로운 시인을 발굴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집중했던 것 같다.
본심에서 주목해서 읽은 작품은 이하정, 양송이, 신원경의 시이다. 이하정의 시는 시편마다의 독특함이 눈에 띄어 단조롭지 않게 읽힌다는 것이 큰 장점으로 여겨졌다. 말을 다루는 작업을 하며 오히려 “하고 싶은 말이 없다는 것을 들킬까 봐/너무 많은 말들을 발명했습니다”라고 말하는 진중함도 인상 깊었다. 언어의 응집력이라는 차원에서 한 편 한 편의 완성도에 좀더 집중한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양송이의 시 역시 비슷한 미덕을 지녔다. 「넌 어디든 네가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어」와 「중간에서 만나요」 같은 시는 좀처럼 극복하기 어려운 어떤 ‘물리적 거리’ 혹은 ‘공간의 차이’에 대해 말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장면에서 느껴지는 자신감있는 여유가 매력적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신원경의 시가 바로 앞서 말한 기성 시인에 버금가는 숙련된 솜씨를 보여주는 응모작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흡사 삶과 죽음의 경계처럼 결코 메워질 수 없는 간극을 쓸쓸히 보여주는 신원경의 시들은 체념과 슬픔의 정서보다는 어쩐지 다정한 온기를 더 많이 자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어쩌면 우리에게 더 필요한 정서는 이러한 온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소중히 읽게 되었던 것 같다.
마지막까지 심사위원들은 양송이와 신원경의 시를 손에서 놓지 못했다. 오랜 고민 끝에 양송이의 「넌 어디든 네가 원하는 곳으로 살 수 있어」와 신원경의 「축소 모형」을 공동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몇 번의 전례를 상기해보면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의 공동 수상자들은 수상자가 두 명이었어야만 하는 불가피한 이유를 충분히 증명하는 형태로 작품 활동을 이어나갔던 듯하다. 이번 두 명의 당선자에게도 주저함 없이 두 배의 축하 인사를 건네고 싶다. 당선자들도 수상의 기쁨을 충분히 만끽하시길 바란다. 조연정(『문학과사회』 편집동인)
[심사평_소설]
본심에 오른 10명의 응모자가 보내준 작품들은 전반적으로 수준이 고르면서 저마다의 개성적인 문제의식으로 세상과 치열하게 대결하는 서사적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일상에 잠재되어 있는 불안의 징조들을 섬세하게 묘파하는 작품에서부터 SF적 감각을 바탕으로 독특한 세계관을 구축하는 작품에 이르기까지, 그 자체로 우리 소설의 서사적 상상력의 저변이 확대되고 있음을 유감없이 증명했다. 그 가운데 내가 인상적으로 읽은 작품들에 대한 감상으로 심사평을 대신하고자 한다.
조아라의 「원점에서의 낮과 밤」 외 1편은 유려하고 섬세한 문체를 바탕으로 문학적 재현과 증언의 가능성을 진지하게 탐문하는 작품이었다. 특히 표제작의 경우 지나간 시간과 타인의 삶을 복원하기 위한 예술적 실천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으며, 그것을 끈질기게 탐구하는 서사의 흐름이 작지 않은 울림과 감동을 선사했다. 다만 작품이 제기하는 예술적 난제를 해결하는 결말 대목에서 손쉬운 타협으로 여겨지는 모종의 낭만주의적 비약이 발생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함께 응모한 다른 작품과 표제작 사이의 편차가 크다는 점이 아쉬웠다.
채유선의 「영 틀린 말은 아니지만」 외 2편은 본심작들 가운데 가장 안정적이고 완성도가 높았다. 생동감 넘치는 등장인물, 세련된 장면 구성 능력, 거기에 담겨 있는 윤리적 메시지까지 기성 작가들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응모자의 역량을 확인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응모자의 개별 작품들이 독자를 설득하는 데에는 성공할 수 있겠지만, 자신의 이름을 하나의 고유명으로 각인시키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 같았다. 기성 작가들을 상회하는 어떤 독자적 상상력과 서사적 세계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김아나의 「승무패」 외 2편은 검토작 가운데 가장 문제적인 작품들처럼 읽혔다. 다소 거칠고 때로는 위악적으로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세계를 향한 파괴적 충동으로 이끌어가는 서사의 힘과 에너지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특히 「승무패」는 불법 도박과 마약 배달로 살아가는 악플러의 자멸적인 내면 풍경을 추적함으로써, 부조리한 세계와 함께 산화되기를 바라는 듯한 서술자의 태도 역시 문학사회학적 측면에서 많은 논의거리를 던져주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이 작품에 표명된 우려가 적은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승무패」가 선보이는 파괴적 폭력성에 대한 천착이 악에 대한 탐구와 탐닉의 경계 어딘가에 위태롭게 서 있다는 의혹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그 역시 우리 시대의 서사가 보여줄 수 있는 사회학적 징후이자 응모자가 앞으로 고민해야 할 가능성의 미래라고 생각했지만, 다수의 심사위원을 설득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거듭되는 논의에도 불구하고 의견이 좁혀지지 못해 결국 당선작 없음이라는 아쉬운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지만, 지금 내려진 결과를 무색게 하는 놀라운 작품으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응모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강동호(『문학과사회』 편집동인)
본심에 오른 작품 중 흥미롭게 읽은 작품은 고선우의 「카나트」와 김아나의 「승무패」였다. 두 작가가 함께 보내온 다른 소설들도 고루 살펴보았다.
우선 「카나트」의 경우 특히 시간을 다루는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서사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시간을 다루는 일인데, 서로 다른 시간대를 중첩시켰다는 데 의의를 느꼈다. 반복되는 노동자 계층의 역사를 표현하는 데 적합한 형식이었다. 시간을 다루고자 하는 작가의 욕망과 재능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뿐만 아니라, 진술과 묘사의 밸런스가 좋아서 작가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이야기에 진입할 수 있었다. 물에 대한 상징이 관습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지만, 이 점은 작가가 관습적 상징을 이해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면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었다. 관습 자체가 문제가 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소설을 다 읽고 났을 때 첫 페이지에서 던진 화두가 문장을 통해 얼마나 확장되었는가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작가의 생각에 의해 소설이 설계되고 많은 부분 통제되었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오히려 그 점이 내게는 아쉬움으로 남았다. 쓰기로 하여금 사유를 확장시켜나가고, 조금 더 유연하게 흐를 수 있는 소설이 되기를 바랐다.
「승무패」는 마음에 많이 남는 작품이었다. 최근 우리가 경험했던 많은 사건을 떠오르게 했고, 그런 점에서 동시대와 호흡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마약, 스포츠 도박, 악플과 같은 자극적인 소재를 도구적으로 사용한 건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었지만, 소재만으로 흥미로운 이야기가 완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를 주안점으로 두진 않았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였다. 장면전환에 능하다는 인상을 받았고, 그로 하여금 읽기의 속도와 흐름을 만들어간 점이 좋았다. 섬세한 묘사나 수려한 문장보다는 담백한 문장으로 서사를 시원시원하게 앞으로 치고 나가는 힘이 있었다. 쿨했다. 그것이 지금껏 문학에서 기대하던 바는 아닐지 몰라도, 나는 그게 좋았다.
이 소설은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부도덕한 화자의 진술을 따라가야 한다는 점에서 불편함을 야기할 수 있지만, 오히려 그 점이 이 소설의 화두가 된다고 생각했다. 내게는 미디어에 대한 불신이 어떻게 세계의 폭력에 무감해지도록 만드는지를 시사하는 소설로 이해되었다. 미디어로 비극을 목격하는 시대에 타자의 고통과 유명인의 삶은 늘 하나의 이미지로서 소비될 위험에 놓인다는 것. 그리고 과연 그 문제로부터 완전히 무결하거나 자유로워지는 게 가능한지를 물으며, 그 모순들을 투명하게 긍정하고 있다고 느꼈다. 판단을 유보하게 만드는 문제적인 지점들도 있었으나, 그럼에도 응원하고 싶은 작품이었다. 세계의 악과 폭력을 소설로 다룰 때 벌어지는 문제들, 그 위험과 한계를 알면서도 ‘한번 써보겠다’는 용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두 작품 모두 흥미롭게 읽었지만, 함께 보내온 소설들을 종합해보았을 때는 확신이 들지 않아 오래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혹여나 내가 미처 살피지 못한 부분이 있을까 원고를 다시 살펴보았고, 심사위원들과 오랜 대화를 나눴으나 명쾌한 결론에 이르지 못했다. 심사가 끝나갈 무렵, 테이블 위에 놓인 원고 더미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이대로 심사가 끝나는 건가, 혹시라도 많은 응모자에게 허탈감을 안겨주거나 그들의 사기를 꺾는 건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끝내 어렵게 당선자 없음에 동의한 이유는 기대와 믿음 때문이었다. 좋은 날 더 좋은 작품들로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용기 내어 쓰기로 하여금, 다음 만남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란다. 더불어, 응모해주신 많은 창작자에게 감사드린다. 긴 말을 했지만, 사실 그 어떤 말도 결국에는 쓰는 행위의 숭고함을 뛰어넘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계속 써주시기를 바란다. 서이제(소설가)
바야흐로, 웹툰과 웹소설이 기술의 세례를 받아 영화와 드라마의 갑옷을 걸치고 문학과 예술의 ‘본토’를, 사실상, 점령했다. 그렇다. 식상한 진단이다. 또한 이미 오래된 기정사실이다. 그러나 진위 다툼의 여지가 거의 없는 이 진술은 누군가에게 일종의 복음일 수 있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더없이 끔찍한 악몽일 수 있다. 하지만, 혹은 그리고, 끝없이 회의하는 사람들, 부득이 되묻고 다시 되묻는 회색 집단이 있다. 이들은 복음을 전파하는 자들과 악몽에 시달리는 자들 사이에서 방황한다. 제 방황(의 정당성)을 믿지 못한 채로 어정쩡하게 배회한다. 웹툰적 상상력과 웹소설적 문장력으로 점철된 수많은 작품들 사이에서, 영화적 클리셰와 드라마적 문법을 어떻게든 피해보려는 거친 몸짓들을 뚫고, 가까스로, 마치 복권처럼, 어떤 방황의 기록들을 발견한다. 매년 반복되는 일이지만, 매번 안타깝고 까마득한, 그래서 복잡한 심경을 갖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예년보다 짙어진 방황의 기록들을 올해는 조금 더 많이 발견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어떤 작품도 충분히 파고들지 못한 듯 보였다. 궁구의 방향은 제각기 달랐지만, 무의식적 순응과 초-의식적 야망 간의 느닷없는 그리고 불균형한 타협이라는 점에서는 모두 비슷했다. 그래서 한 작품이 다른 작품들을 너끈히 압도하거나 앞지르는 장면을 우리는 발견할 수 없었다. ‘당선작 없음’이라는 씁쓸한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이 순탄치 않았음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마지막까지 심사위원들을 고심하게 만든 「승무패」의 저자 김아나 씨, 시대의 분위기에 구애되지 않은 이색적인 시도와 그에 맞춤한 탄탄한 문장력으로 잠시나마 당선의 가능성이 점쳐졌던 「카나트」와 「데카르트의 고양이」를 응모해준 고선우 씨에게 특별히 심심한 위로와 진심 어린 격려의 인사를 동시에 보낸다. 부디 방황의 시도와 기록이 끊이지 않기를, 내년에는 더 깊고 진한 이야기들을 더 많이 만날 수 있기를 고대한다. 조효원(『문학과사회』 편집동인)
본심에 오른 작품 모두 각자 고르게 장점을 두루 가지고 있었다. 문장 면에서는 사실 따로 말할 것도 없이 이미 자신만의 균형이 잡힌 작품이 많았고, 서사나 구성 또한 기성 작가들 못지않은 작품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굳이 교집합이라고 할만한 점을 꼽자면, 외국 체험이나 경험, 환상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 무언가로 정의 내리기 어려운 불가해한 사랑의 감정을 다룬 작품들이 많았고, 비인간과 인간의 경계에서 인간의 세계나 관계를 이야기한 작품들도 눈에 띄었다. 판타지와 SF에 대한 관심 또한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듯했다. 더불어 윤리적 감각에 대한 비대칭도 개인적으로는 눈에 띄었는데, 이런 비대칭은 앞으로 한동안 계속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런 작품들 사이에서 다시 작품을 추렸을 때 최종적으로 내 앞에 놓인 것은 세 작품이었다.
「조각과 굴」 「승무패」 「카나트」. (분명 어디선가 또 마주칠 작품들이라 생각해서 작품 자체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려고 한다.)
「조각과 굴」은 사실 맨 처음 나를 사로잡은 작품이었는데, 문장을 따라 읽다 보면 그려지는 장면들이 퍽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신기한 건 이 작품 안에서는 독자가 소극적이게 된다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어떤 독해의 어려움보다는 조각나 있는 듯 이어지는 문장이 마치 작가가 본인의 꿈속을 소개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건축이 되지 못한 조각에 대한 감각과 지상이 아닌 지하에 있는 굴에 대한 감각, 박물관과 화자가 있는 작은 방들을 연결시키는 지점 또한 희미하지만 내겐 좋은 느낌으로 남겨졌다. 말미에 가서는, 이 모든 것들이 조금 더 선명했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했으나, 최종적으로는 과연 이런 작품에서 반드시 하나의 지점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게 중요할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처럼 어떤 이미지만으로도 사람을 잡아끌어 끝까지 읽게 하는 매력은 이 작가만의 커다란 장점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그런가 하면 「승무패」는 이와는 다른 측면에서 폭발적인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다. 서사에 진입하는 속도가 굉장히 빠르고 숨기는 것 없이 보여주는 장면들은 이 소설의 강점으로 느껴졌다. 어떤 인물을 지나치게 축축하게 그리지도, 또 너무 건조하게 그리지도 않음으로써 캐릭터 설정의 밸런스 또한 좋았다. 소설이야말로 가장 동시대성을 가진 장르라고 생각하는 나에게 이 소설은 마약이나 악플과 같은 주요 소재를 화자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유명인과 연결시키고, 또 그 유명인을 아무 상관 없을 것 같은 화자의 인생에 (어쩔 수 없이) 개입시킴으로써 시대성과 시대, 이 시대의 어떤 연결성에 대한 생각을 떠올려볼 수 있도록 해준 점 또한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조금 개입의 여지가 있었다면 좋았을까, 이런 질문을 해보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점이 단점을 충분히 커버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카나트」는 아주 잘 짜여진 직조물을 보는 기분이었다. 인간과 자연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물(수분)의 소실과 인간(성)의 소실. 황폐화되어가는 대지와 메말라가는 인간의 기억. 그렇게 종말이 가까워진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이며, 그 물을 두고 계급이 갈라지는 것까지,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구조물처럼 잘 설계되어 있었고 독자 입장에서는 그렇게 직조된 서사를 따라 읽는 것이 전혀 지루하지 않을 만큼 문장 또한 굉장히 안정적이었다. 물론 황폐화된 세계에서 소실된 자연의 모습과 비인간으로 대체되며 사라지는 인간의 기억과 같은 소재들이 얼핏 2000년대 초반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물질화되고 자본화된 사회를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본 SF를 읽는 느낌을 주기도 했지만, 나에겐 이마저도 흥미롭게 느껴졌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느끼는 사회문제를 SF 세계관에서 적극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렇듯 이 세 작품, 그리고 본심에 언급된 모든 작품들이 너무나 장점이 많았고 그에 따라 논의할 지점이 많았으나 아쉽게도 한 작품으로 의견을 다 좁히진 못했다. 나 개인으로 봤을 땐 작품의 문제가 아닌 아마도 소설에 대한 조예가 부족한 내 시선의 한계이기도 할 것이리라 생각된다. 다만 마지막까지 내 마음속에서 머물렀던 말은, 심사 당시 나왔던 “우리는 문학에서 악을 탐닉하는 것이 아니라 탐구해야 한다”라는 말과 “소설에서라면 분노 자체가 아니라 그 너머의 무언가를 찾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래도 이것에 대한 답을 찾으려 했던 것 같다. 응모해주신 분들과 본심에 오른 분들 모두에게 커다란 박수와 응원을 보내고 싶다. 한정현(소설가)
예심을 위해 응모작들을 읽으면서, 이토록 많은 이야기가 어딘가로부터 발신되어 무사히 잘 도착한 것이 새삼 기뻤다. 시작되지 못한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을지, 시작되었으나 마침표를 기다리고 있는 글들은 또 얼마나 무수할지를 막연히 생각하다 보면 글을 닫는 용기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오늘 이곳의 문학장이 더 많은 용기가 찾아올 수 있는 공간이기를 바라게 되었다.
본심에서 함께 읽은 응모작들은 모두 각자의 장점을 선명하게 가지고 있었다. 서사의 세계를 직조해내는 서로 다른 방법들이 꼭 자신의 자리를 만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 가운데 최근 독자로서 혹은 필자로서 내가 가지고 있는 고민들을 겹쳐 읽을 수 있는 작품들을 조금 더 가까운 마음으로 응원하게 되었다.
「영 틀린 말은 아니지만」 외 2편은 선명한 메시지를 긴장감 있게, 입체적으로 그려내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공기가 빵빵하게 채워진 고무보트로 파도가 거센 망망대해를 가로질러 끝내 어딘가에 도착하는 듯한 이 소설들의 힘이 그 스스로 도착지를 잘 찾아갈 것이라 믿는다. 「이름을 부르는 이름들」 외 1편은 단수를 복수로 만들어 연결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는 글이었다. 낙관도 비관도 하지 않고 섣불리 추측하지 않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온기의 자리를 마련해가는 일에 응모자의 진심이 놓여 있는 것 같았다. 그 진심의 곁에 설 수 있어 좋았다. 「원점에서의 낮과 밤」 외 1편은 이미 지나간 언어의 세계와 비로소 정말 헤어지게 되는 때, 움켜쥘 수 있는 언어 없이 비어 있는 자리를 오래 들여다보는 일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었다. 공백 아닌 공백의 이미지가 어떤 서사의 세계로 더 이어질지 궁금해하는 마음으로 응원하고 싶다.
마지막까지 지지하고 싶었던 응모작은 「조각과 굴」 외 1편이었다. 두 편은 모두 예술, 문학, 비평, 판단, 기억 그리고 사람에 대해 여러 질문을 만들고, 아주 구체적인 이미지에 초점을 맞추어 질문의 프레임 안을 채운 다음, 개연성 없이, 비약적으로 공간을 이동하는 방식을 취한다. 꿈과 여행이라는 서로 다른 시공간적 이동성을 소설의 배경이자 조건으로 설정하면서 두 편은 모두, 결국 살아가는 일이 어떤 방식으로 이동하는, 혹은 이동해야 하는 일인가를 담담히 묻는다. 그 물음은 내내 우리가 처해온 고립의 상태를 마주 보아야 한다는 전언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결국 직시를 강조하는 소설이 선명하고 채도 높은 이미지를 만들고 난 뒤 그것을 두고 다음으로 옮겨가는 방식은 그래서 더 흥미로웠다. 도착을 전제하지 않으면서 계속될 소설의 이동 궤적에서 언젠가 반드시 다시 마주치게 되기를 바라고 기대한다.
올해 소설 부문에 당선작이 없는 것이 많은 분에게 실망과 아쉬움을 안겨드릴 것 같아 속상한 마음이다. 의견이 좁혀진 응모작들을 함께 치열하게 살피면서 소설을 쓰는 마음과 시선 그리고 글쓰기의 동력에 관하여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간과 마음을 담아 글을 보내주신 모든 분들이 오늘의 마음의 동력을 내내 간직하고 계속 이야기의 세계를 만들어가셨으면 한다. 그 여정에서 꼭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다린다. 홍성희(『문학과사회』 편집동인)
[심사평_평론]
본격적인 심사평에 앞서, 그 어느 때보다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평론 부문 본심작들을 읽었다는 소회부터 밝히고 싶다. 전반적으로 예년의 수준을 상회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작품과의 대화 속에서 자신의 비평적 문제의식을 예리하게 확장시키는 뛰어난 글들 또한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면 관계상 모든 글에 대해 언급하기 어려우니, 개인적으로 주목한 세 분의 텍스트에 대한 간단한 소감으로 심사평을 대신하고자 한다.
박겨울의 「시간의 토폴로지topology: 친애하는 우주의 편린들」은 진은영의 최근작을 대상으로 역사의 폐허를 애도하는 시적 사유의 가능성을 다루고 있다. 벤야민의 역사철학을 기반으로 자신의 시각을 매끄럽게 전개시키는 능력이 인상적이었고, 무엇보다 진지하게 자신의 입론을 끝까지 밀어붙이면서도 무리한 해석을 보이지 않는 것이 이 글의 미덕이었다. 상대적으로 시 해석이 분석적이라기보다는 해설적인 감이 없지 않지만, 한편으로 그 역시 에세이와 비평의 경계에 서 있는 이 글이 발휘할 수 있는 매력 중 하나로 느껴졌다.
윤옥재의 「무한을 향한 문장의 행위―김유림이 쓰는 김유림」은 김유림의 난해하고 독특한 텍스트를 구조적으로 해명하려는 야심이 돋보이는 글이었다. 기존의 김유림론들과 달리 김유림의 시 세계 전체를 해부할 수 있는 구조적 원리를 제시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상당히 설득력 있는 분석과 결론에 도달하는 점이 강점이었다. 물론 중간중간 논리적 비약이 없지 않고, 소쉬르의 언어학적 사유를 적용하는 지점에서 이론과 해석 사이의 괴리가 드러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텍스트의 발화를 추인하는 것을 넘어, 텍스트의 원리를 장악하려는 시도로부터 응모자의 비범한 비평적 역량을 엿볼 수 있었다.
여러 뛰어난 응모작들이 있었음에도, 개인적으로 당선작을 결정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던 것은 현재의 「…, 희붐」 때문이었다. 존재의 불투명성에 연동되어 있는 시적 언어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그의 글은 표면적으로는 강보원의 시를 분석하고 있지만, 그 자체로 하나의 단독적인 시론으로 읽히기에 부족함이 없다. 분석 대상으로서의 작품과 별개로 평론 역시 하나의 독자적인 작품이어야 한다는 것은 오래된 이상이지만, 그것이 구현되는 사례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의 「…, 희붐」은 ‘작품으로서의 평론’이라는 이상에 정확히 부합하는 텍스트로, 그의 끈질기고 철저한 사유와 아름답고 깊이 있는 문체를 따라가는 독자라면 어느새 그 글에 압도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심사자들이 이런 나의 생각에 완벽히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을 당선작으로 강하게 주장했던 것은, 그를 동료 비평가로 환영하고 싶었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그의 다음 글을 읽어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강동호(『문학과사회』 편집동인)
본심에 오른 평론 중에 주목해 읽은 글은 박겨울과 윤옥재, 그리고 현재의 글이다. 진은영의 근작 시집을 분석하는 박겨울의 글은 시집 안팎을 넘나드는 시선으로 설득력 있게 논의를 전개하며 시인의 시작 의도에도 가깝게 다가간 듯 보이는 글이었다. 다만, 이미 무수히 많이 발표된 진은영에 대한 평문 사이에서 자신의 글이 위치하는 맥락을 좀더 적극적으로 드러냈다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느껴지기는 했다. 윤옥재의 김유림론은 글의 표현을 빌리자면 “언어에 존재론적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문장의 행위를 최대화하고 이를 실존적 놀이의 무대로 삼는 기획을 중단 없이 밀고 가려는” 김유림 시의 구조적 특징을 충실히 분석해낸 글이다. 김유림 시의 언어가 작동하는 원리에 초점을 두는 이 글의 위와 같은 접근이, 시 일반에 대한 설명과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에 대해 좀더 설득력있는 분석을 내놓았다면 보다 의미 있는 글이 되었을 듯하다. 현재의 글은 능수능란했다. 다루는 대상에 대한 이해는 물론, 이론에 대한 천착 그리고 문장에 이르기까지 특별히 어색한 부분을 찾을 수 없이 유려하게 읽히는 글이었다.
네 명의 심사위원은 모두 현재가 응모한 두 편의 글 자체의 탁월함에는 쉽게 동의할 수 있었지만, 그의 글을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일을 두고는 그 의견이 팽팽히 갈렸다. 내가 현재의 글들에 흔쾌히 동의할 수 없었던 이유는 여러 가지로 말해볼 수 있지만 여기서는 일단 부분적으로만 언급해보기로 한다. 비평 행위의 의미는 다양할 수 있지만, 수많은 작품 중에서 특정한 작품을 선택하여 그것을 의미화하는 일이, 그렇게 함으로써 공적인 토론을 가능하게 하는 대화의 장을 만들어보는 것이, 그 기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평론가는 자신의 취향에 따라 평론의 대상이 되는 작품을 선택할 수 있지만, 자신의 취향을 객관화하는 과정 속에서 평론가는 일종의 ‘책임’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글을 쓰게 된다. 평론가가 되기로 했다면, 그것은 자신의 취향과 그에 따른 선택을 공적인 지면에 발화하는 행위와 관련하여 어떤 ‘책임’을 고민해보기로 했다는 말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대상의 특징을 정확하게 꿰뚫는 날카로운 시선과 이론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능력 그리고 문장의 탄탄함 등 좋은 평론이 갖춰야 할 미덕을 고루 갖춘 현재의 다른 글을 읽으며 앞으로 위와 같은 각자의 책임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토론할 가능성을 확인하게 된다면, 나는 그의 글을 주저 없이 지지하는 동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될 것이라 믿는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조연정(『문학과사회』 편집동인)
올해는 이례적으로 많은 수의 평론이 투고된 해였다. 응모된 글들의 수준 역시 대체로 평균을 상회하는 양상이어서 놀라움은 배가되었다. 본심에 오른 작품의 수가 예년보다 훨씬 많아진 것은 그러므로 정해진 수순이었다. 그 결과, 심사를 맡은 편집동인들의 고민 역시 평소보다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본심에서 논의된 작품들 가운데 특별히 언급하고 싶은 평론은 우선 이혜미 시인의 작품들을 다룬 「‘서정의 위기’를 수놓는 삭흔의 언어」다. 예사롭지 않은 문장력을 보여준 이 글에서 독자가 가장 먼저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은 주관적 감상을 차분한 태도로 객관화하려는 노력이다. 개념어와 시어를 연결하는 솜씨 역시 대체로 능숙했고, 몇몇 대목에서는 탁월했다. 다만 그 진지한 노력과 촘촘한 분석에도 불구하고 결국 주관적-독백적 감상의 수준을 넘어서는 결론에 도달하지는 못했다는 점에서 당선작으로 선정되기에는 다소 미흡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렇다는 것은, 이 글이 지나친 ‘에세이화’라는 당대의 흐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뜻이다. 반면 당선의 영예를 안은 「…, 희붐」은 발 빠르게 변하는 유행에 오래 저항할 수 있는 탄탄한 기본기를 자랑하는 글이다. 그뿐 아니라 이 글은 (고전적) 이론에 대한 천착과 (동시대) 문학에 대한 사랑이 상호 배타적 관계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별개의 노력이 아니라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 수작이다. 어쩌면, 오랫동안 비평계를 짓눌러온 쇠락의 기운을 얼마간 몰아낼 수 있는 강력한 신인이 등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반가움과 두려움이 섞인 예감을 조심스레 타전해본다. 현재 씨의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더불어 미래의 당선을 기다리는 많은 예비 비평가의 건투를 기원한다. 조효원(『문학과사회』 편집동인)
본심에서 함께 읽은 열 편의 글은 모두 서로 다른 작가들에 주목하고 있었다. 어떤 글은 작품의 언어와 섬세하게 결합하는 방식을, 어떤 글은 최근 비평적으로 주목받은 키워드로 텍스트에 접근하는 방식을, 또 다른 글은 장르의 정의 자체를 꼼꼼하게 파고드는 방식을 택하고 있어 방법론적인 다양성을 확인할 수 있기도 했다. 그런 다름들과 만날 수 있어 좋았다. 기존에 제출된 논의들을 비판적으로 상대하는 적극적인 시선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이 아쉬웠지만, 차근하고 성실한 정리 작업들을 따라가면서 모든 분들이 글쓰기를 꼭 이어가시기를 바라게 되었다.
「시간의 토폴로지topology: 친애하는 우주의 편린들」과 「‘―이후’를 환상하기」는 각각 진은영론과 강성은론으로, ‘정동’과 ‘환상’이라는 개념을 경유하여 시인들이 만든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을 꿰뚫어 보고자 한 평론이다. 핵심 키워드의 정합성을 넘어서 시에 대한 글쓴이의 해석적 세계를 더 풍부하게 보여줄 수 있다면 두 분이 가지고 있는 힘을 더 정확하게 체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정의 위기’를 수놓는 삭흔의 언어」는 ‘서정’과 ‘감응’이라는 관념을 이자적인 관계로 설정하면서 그 구도 안에서 이혜미 시인의 시 세계를 독해한다. 개념과 작품과 해석이 만나는 글쓴이의 방식을 충실히 따라가면서, 한편으로 ‘서정-감응’이 지금 이혜미의 시를 읽는 일에서 중요해지는 이유에 대해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무한을 향한 문장의 행위―김유림이 쓰는 김유림」은 시 분석도, 논의의 구도를 만들고 그 설득력을 마련해가는 일도 꼼꼼하게 해내고 있는 글이다. 이 글이 이야기하는 바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외려 끄덕임을 멈추게 할 만큼 반짝이는 글쓴이만의 색깔을 더 적극적으로 발견할 수 있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쓰이지 않은 더 많은 것들이 궁금해지는 자리에서 응모해주신 분들의 글쓰기의 시간을 마음 다해 믿고, 응원한다.
당선작 「…, 희붐」은 강보원의 시에서 슬픔이 작동하는 방식을 문학에 대한 메타적인 시선과 연결시키고 있다. 논리적인 철저함이 돋보이는 당선자의 글은 텍스트를 성실히 읽는 일과 그 읽기의 시선에 개입되는 비평의 욕망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 더불어 비평의 욕망 바깥에 다른 비평의 욕망을 세우는 일까지를 충실히 수행하면서, 글쓴이가 서 있는 비평적 시선의 자리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당선작과 함께 응모된 「너의 슬픔 따위와는 상관없이」에서 그 자리는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두 응모작을 나란히 읽으면서, 글이 보여주는 논리적 설득력이나 글 자체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강력한 힘과 별개로, 나는 무언가를 “따위”로 만들고, 그것 “따위와는 상관없”는 자리를 만들어내는 방식을 지지할 수 없었다. 글이 가진 장점을 분명하게 알고, 그러한 힘의 필요성을 정확하게 느끼면서도, 그 편을 들지 않기 위해 나는 마지막까지 당선작 없음의 방향을 선택했다. 그럼에도 「…, 희붐」을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데에 최종적으로 동의하게 된 이유는, 나의 신념과 심사자로서 나의 역할이 반드시 일치해야 한다는 생각에 스스로 질문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질문을 이어갈 앞으로의 시간 동안 늘 당선자의 글들과 마주 보고 있을 수 있기를, 그래서 더 많은 질문들을 함께 만들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수상자에게 마음을 담아 축하 인사를 건넨다. 문학평론에 마음을 두고 계신 분들이 보내주실 글들을 더 열린 마음으로 내내 기다릴 것이다. 홍성희(『문학과사회』 편집동인)
수상자: 신원경
장르: 시
작품: 「축소 모형」 외
수상 소감:
이곳에서만은 캄캄한 어둠이라고 설정하면 해가 뜨지 않고, 눈이 쌓이고 있다고 적으면 그치지 않는 눈이 내린다는 게 여전히 즐겁다. 그러나 분명 지켜보고 있는데도 쏜살같이 불길 속으로 흘러갈 때가 있어서 언제나 그것이 가장 어렵다. 내가 만든 세계를 내가 제어할 수 없다는 것.
쓰지 않는 동안에도 인물의 시간은 나의 시간과 동일하게 흘러간다. 시와 무관한 하루를 보내다가 그들 앞에 앉아 정해두었던 미래를 조금 다르게 구성할 때, 인물들은 그 순간을 예감하고 있었을까? 그들이 나를 볼 수 없는 것처럼, 그들도 내가 볼 수 없는 곳에서 소리 없이 자주 웃을까? 쓰는 동안에는 시간을 선회할 수 있지만 삶에서는 어떤 순간으로도 되돌아갈 수 없다. 그러나 파열되어 두 동강 난 몸이 가끔 서로 눈 마주친다는 것. 내 몸에도 커브가 있다는 것. 어제의 신문을 접고 또 접어 그 위에 올라서도 꼭 껴안으면 두 사람이 들어설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는 것. 당신의 손을 종이에 대고 그릴 때, 내가 그려낸 선과 손의 생김새는 전혀 다름을 처음 인식했던 날. 그러한 연속적인 시간에 비하면 시는 파편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지면 안쪽으로 들어서는 찰나에 생성된 빛이 우리의 두 눈을 깜빡이게 한다. 우는 것이 최선인 줄 알았지만 웃을 수도 있고, 오늘은 아니지만 내일 알게 되는 새로운 일이 있다. 그러므로 어제의 문장이 오늘의 나를 기다린다는 사실을 간직하고 싶다. 다른 것들로 가득한 서랍에 넣어두고 다시는 열고 싶지 않다. 확인하지 않아도 그것이 들어 있다는 사실만을 믿으며.
혜정과 은하와 소연. 나의 영원한 식구들이 영영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을 쓰고 싶다가도, 소리 내어 읽으면 쉽게 읽히는 것을 쓰고 싶다. 멀리 있는 유년을 기억하게 만들어주시는 할머니. 오래 건강하세요. 올해에는 오사카로 찾아갈게요. 시의 에테르를 볼 수 있게 해주신 김영미 선생님. 온몸으로 가르쳐주신 박상수, 김유진, 신수정, 편혜영 선생님. 다른 세계는 다름 아닌 과거를 딛고 선 오늘에 있음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보지 못한 미래를 발견해주는 정화, 영은, 예진. 여러분의 첫번째 독자임에 감사하다. 많은 처음을 함께한 단짝 재은이 기다리고 있어 두렵지 않다. 몇 번이고 서늘한 극장에 앉아 나란히 추위를 견뎌주는 영주. 우정의 맛을 음미하게 해 주는 서린, 아현, 시은, 명은, 영주. 파주시 중앙도서관과 공릉천의 끝없이 펼쳐지는 직선로. 그곳에서 먼저 알아보고 손 흔드는 가영이 있어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다. 서영, 영강, 유오, 현주를 영원히 선배라고 부르며 따라가고 싶다. 나를 다르게 봐주는 유진과 승헌, 서영, 수은. 우산 속으로 들어오는 다영. 언제나 신뢰할 수 있는 예지의 두 눈. 동경하는 맑은샘. 천천히 생각하는 은진. 깨지지 않는 수정. 마주하면 긴장하게 되는 예원. 함께 발생하는 아름에게 고맙다. 언제나 가까이에서 눈 마주치는 빛나는 샤이니에게. 오래 마음을 나눈 소현, 기란, 수연, 세연, 예지, 아윤, 이슬, 서진, 지영, 보련과 더 많은 친구들. 이름을 불러 주신 신해욱, 이제니, 조연정 심사위원께 감사드립니다. 냉소는 너무 쉽다는 것을, 슬픔은 발음할수록 칼처럼 벼를 수 있음을. 그러나 날카로운 것을 건넬 때에는 늘 손잡이가 달린 쪽으로 건네야 함을 기억하겠습니다.
수상자: 양송이
장르: 시
작품: 「넌 어디든 네가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어」 외
수상 소감:
오래전부터 늘 그런 게 어려웠다. 목소리를 분명히 하는 것. 분명한 목소리 뒤에서 두런거리는, 말해지지 않은 것들에게 마음이 쓰였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이것도 저것도 다 중요한 것 같고, 나는 온갖 중요한 것들 사이에서 헤매다가 차라리 입을 다물곤 했는데. 어떤 시들은 가끔 다 보여주는 것 같았다. 씌어진 것들 사이에서 씌어지지 않은 것들을 말하기. 그게 좋아서 읽고 쓰기를 계속했다. 그런 걸 나도 해보고 싶어서.
「넌 어디든 네가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어」를 쓸 때 나는 아직 서울에서 변변찮은 이력과 방 들을 전전하고 있었다. 이 시를 쓰면서 떠올린 희미한 얼굴들아, 어떻게 지내니. 너희들이 지금 있는 자리를 알고 싶구나. 난 여기에 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우린 때때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늘 서로를 걱정하고 있지. 항상 같은 곳에 있어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김미라, 백가경 씨에게 특별한 감사를 전한다. 두 사람이 나를, 시를 계속해보자고 불렀다. 비 오는 날, 오랜만에 마주한 얼굴들은 마스크를 끼고 있었고 그래서인지 조금 생경했다. 그때 이미 나는 시에 대해서는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그날 두 사람이 나를 건져 올렸다. 나는 시를 계속 쓰고자 하는 두 사람의 의지에 실려 여기까지 온 셈이다.
끝으로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린다. 당선 소식은 기쁨이기도 했지만 큰 위로이자 안도였다. 누군가 내 시가 여기 있음을 알아주다니. 정말 굉장해.
굉장하고, 마음이 두근거린다.
이제 나는 어디로 가게 될까요? 사실 상관없어요. 흘러간 곳에 있는 것들을 겸손히 살피면서 시를 쓰겠습니다.
기쁘고, 감사합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어요.
수상자: 현재
장르: 평론
작품: 「…, 희붐」
수상 소감:
내 하나뿐인 어미아비에게. 어쩌면 우리 삶은 그저 반복될 뿐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은혜와 바꿔야 할 것들을 바꿀 수 있는 용기를 기도할게요. 한없는 연민과 한없는 경이와 한없는 사랑을 담아서.
누나와 매형 덕분에 이렇게 대책 없이 산다. 너희 사는 것에 비하면 내가 하는 모든 일들 얼마나 초라한지 알려주고 싶다.
언제나 민근을 생각하며 쓴다. 가끔은 내가 아니라 내 머릿속의 민근이 글을 쓰는 것 같다. 사적으로 쓰겠다.
이제껏 홀로 읽고 써온 나는 정지돈으로부터 대부분의 것을 배웠다. 정지돈이라는 이름은 내게 특별하다. 왜냐하면 내게 중요한 다른 많은 이름은 바로 그 이름으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Los suicidas. 내게 메스칼을 권하는 서그러운 아마데오. 나는 쓰는 내가 아니라 내 손을 잡아주는 많은 것을 다만 옮겨 적을 뿐이라는 사실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