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22회 - 2022
차현준 / 시 / 「당귀 방」 외
주이현 / 소설 / 「녹지 않는 슈가 크래프트와 블루의 도시」
최다영 / 평론 / 「지옥에 깃든 응시, 공백을 확장하는 시(詩)—김복희론」
문학과사회 신인상은 올해로 22회째를 맞았다. 역대 당선자들을 한 명 한 명 떠올려보는 것만으로도, 그간 이 상이 한국 문학의 폭과 깊이를 확장하는 데 어떠한 역할을 해왔는지를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런 만큼 매년 심사를 진행하는 마음가짐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2년 넘게 지속되어온 코로나19 사태는 물론 갈수록 혼탁해지는 국내외의 정치·사회적 현실 속에서도, 올해의 투고자들이 보여준 문학에 대한 열정은 이전과 변함없이 대단했다. 올해 신인상 심사에는 시 부문 508명, 소설 부문 443명, 평론 부문 32명의 응모자가 소중한 작품들을 보내주었다.
4월 초부터 예심을 진행하여 시 부문 8명, 소설 부문 7명, 평론 부문 10명의 응모자가 보내온 작품들이 본심 대상에 올랐다. 본심에 오른 작품들에 대해서는 2주간의 개별 심사 과정을 거친 후에 4월 28~29일 양일에 걸쳐 최종심을 문학과지성사 사옥에서 진행했다. 그 결과, 시 부문에는 차현준 씨의 「당귀 방」외 4편, 소설 부문에는 주이현 씨의 「녹지 않는 슈가 크래프트와 블루의 도시」, 평론 부문에는 최다영 씨의 「지옥에 깃든 응시, 공백을 확장하는 시(詩)–김복희론」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재작년과 작년에 이어 올해도 전 부문에서 당선작을 내게 되어 무척 기쁘게 생각한다. 심사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각 부문의 심사평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세 분의 당선자에게 진심 어린 축하의 인사를 건넨다. 소중한 작품을 보내주신 응모자 모든 분들께 감사하는 마음도 잊지 않겠다. 모두 즐거운 작업을 이어나가시면 좋겠다. 각자의 문학 하는 보람을 반갑게 공유할 수 있는 기회가 머지않아 생길 것이라고 믿는다. _심사위원 일동
[심사평_시]
2022년 문학과사회 신인상 시 부문에는 예년과 마찬가지로 508명의 많은 응모자가 작품을 보내주었다. 어떤 분야에서든 물질적이고도 가시적인 효용만이 점점 더 중시되는 작금의 상황 속에서, 어찌 보면 가장 비효율적인 노동이라고 할 수 있는 글쓰기 작업에 여전히 이처럼 많은 사람이 자신의 열정을 투자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일은 어쩐지 감동적이다. 그래서일까. 좀더 신중한 자세로 심사에 임해야 한다는 생각을 매년 하게 된다. 올해는 8명이 예심을 통과해 본심에 올랐다. 의례적으로 하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언어를 다루는 기술이 한층 더 높아졌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강채현, 김도현, 김예진, 이영은, 이정화, 은세임, 정해은, 차현준의 작품을 꼼꼼하게 읽으며 본심을 진행했다.
본심을 위한 개별 심사를 진행하면서 내가 주목했던 작품은 이영은의 「생동」, 이정화의 「열쇠」, 은세임의 「여름 채집」, 차현준의 「당귀 방」이었다. 이영은의 작품 중 「해시태그 동시대성」 같은 시가 드러내는 근미래적 상상력 혹은 일종의 ‘허망함’의 정서가 개인적으로는 흥미로웠다. 그러나 대체로 세련된 언어들의 조직이 어떤 분명한 감정으로 응집되지는 않는다는 점이 못내 아쉽기도 했다. 이정화의 작품 중 「정원에 공」 같은 시가 보여주는 간결하고 탄력 있는 배치들이 매력적이었지만, 보내준 응모작 중 그러한 작품을 많이 볼 수 없다는 점은 아쉬웠다. 충분히 완성도 있는 작품들을 써낸 응모자이지만 자신만의 개성에 대해서 좀더 고민해본다면 만족할 만한 결실을 얻게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심사위원들이 고르게 지지한 작품은 은세임과 차현준의 것이었다. 다른 응모자의 시들이 기술적으로 화려한 반면 어쩐지 읽자마자 휘발되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면, 은세임의 시들은 다소 소박한 문장들의 전개 속에서 분명한 인상과 함께 오랜 여운을 남긴다는 점이 차별화되었다. 「여름 채집」 두 편과 「탄생」 같은 시는, 은세임의 문장을 빌리자면 어쩐지 “음악의 전개를 눈으로 보는 것 같”(「말이 되는 이야기」)은 느낌을 주는 시들이었다. 그만큼 문장들의 전개가 자연스럽고 매끄러웠으며 묘한 여운을 남겼다. “이마에 축축하고 찬 것이 떨어져/정신이 들었다.//아무 꿈도 꾸지 않았는데//울기라도 한 듯/눈이 젖어 있어//모든 것이 깨끗하게 보였다”로 끝나는 「여름 채집」은 개인적으로 이번 심사에서 만난 시들 중 가장 인상적인 한 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익숙한 깨달음이 전해지는 문장들이 섞여 있는 몇 편의 시가 다소 아쉽게 느껴지기도 했다.
은세임의 시와 함께 마지막까지 당선작으로 고민한 시는 차현준의 것이었다. 차현준의 시는 응모작 중 가장 뚜렷한 개성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당귀 방」 「루꼴라」 등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식물 연작은 최신의 트렌드, 혹은 젊은 감성을 다양하게 담아내고 있는 시이다. 그것은 단순히 식물 키우기나 게임적 상상력 등으로만 단순화할 수 없는, 이른바 ‘공간’에 관한 것이다. 차현준의 시를 읽으며 심사위원들이 가장 주목한 지점은 공간을 창출해내는 그의 능력이었다. 공간을 창출한다는 것은 추상적인 것을 구체화하는 과정이기도 하고 자기의 영역을 만들어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나아가 누가 어떤 공간을 소유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최근의 한국 사회에서는 매우 예민한 정치·사회적 질문으로 확장되기도 한다. 차현준의 식물 연작은 이처럼 많은 것을 환기하는 시가 되고 있다.
은세임과 차현준의 작품을 두고 심사위원들은 오랫동안 숙고하였다. 논의를 잠시 쉬어갈 때 다른 두 심사위원이 들려준 반려식물에 관한 얘기들은 마치 심사의 일부인 듯 흥미롭기도 했다. 하늘이 너무 맑았던 그날의 심사장에는 왠지 모르게 싱그러운 분위기가 가득했다. 물론 은세임과 차현준의 시 덕분이었을 것이다. 심사위원들은 이 둘에게 다른 방식의 애정을 느꼈기에 한 명의 당선자를 결정하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이 심사가 다름 아닌 바로 신인상 심사라는 사실에 다시 한번 집중하기로 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차현준의 「당귀 방」이 좀더 ‘새로운 시’이자 ‘다른 시’, 그리고 ‘젊은 시’일 것이라는 판단에 마음을 모을 수 있었다. 차현준을 22회 문학과사회 신인상 수상자로 결정한 것은 앞으로 그가 쓸 시를 통해 우리가 새롭게 알게 될 것, 다르게 느끼게 될 것이 더 많겠다는 판단 때문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차현준의 다음 시를 기다리고자 한다.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조연정(『문학과사회』 편집동인)
이번 신인상 응모작 원고들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 중 하나는, 시에서 반영하고 만들어내는 자족적 세계의 가능성이란 어느 만큼일까,와 같은 질문이었다. 전반적으로 고르고 안정되며 수준 높은 언어의 장소에 도달한 작품들이 상당수였다. 그곳에서 그려내고 있는 관계나 세계의 양상이 실재에 속하든 판타지를 그려내든, 외부로부터 침해받고 싶지 않다는 욕망을 강하게 드러내는 작품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세계의 변동과 변경 가능성이 갈수록 축소되고, 특히 폐색적 공기가 짙어진 팬데믹 이후의 상황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문학적 반응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과 함께, 이 반응의 구체성이 가장 개성적으로 드러나 있는 작품을 구별해내기 위해 노력했다.
최종적으로 주목한 대상은 강채현, 이정화, 정해은, 차현준의 작품이었다.
강채현의 「토마토 소바」 외 작품들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108」이나 「Long take」에 나타나는 서로 다른 세계의 교차 또는 실재와 판타지의 중첩이 풍기는 묘한 냄새들이 좋았다. 다만, 화자의 시점이나 드러나는 인물들 간의 관계가 평평하다는 느낌도 있었는데, 화자의 시야가 좀더 다채로운 방식으로 중구난방 뻗어나가며 타인들을 만난다면 어떨까 상상을 해보며 읽게 되었던 것 같다.
이정화의 「열쇠」 외 작품들은, 유려한 진술과 상쾌한 장면의 도약이 인상적이었다. 「껍질 요리」와 같은 작품에서 만들어내는 독특한 시적 분위기의 매력은 다시 보아도 새롭다. 「연극 연습」과 같은 작품에 나타나는 서늘함도 좋았는데, 반어적 표현이 갖는 정서의 반경이 이미 짐작된다는 점이 조금 아쉬웠다.
정해은의 「김성미 산부인과」 외 작품들이 그 행보를 응원해주고 싶은 작품이라는 데는 모든 심사위원들이 동의하였다. 모티프와 시적 서사가 아주 새롭지는 않음에도, 최근의 시들에서는 쉽사리 발견하기 어려운 발화 형식의 선명함이 뚜렷했다. 표제작과 「스노우볼」 같은 작품에 나타나는 장소의 이미지에는 독자의 애정을 자아내는 요소들이 있다. 끝까지 이 작품들을 손에서 놓지 못하며 아쉬워했던 것은, 화자가 세계와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가닿는 따뜻한 센티멘털이 반복적으로 재현되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를 불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종적으로 차현준의 「당귀 방」 외 작품들을 수상작으로 결정하였다. 이 작품들에 나타나는 식물과 관련된 장소들은 생활 세계의 느낌을 갖고 있으면서도, 또한 가상적 리얼리티를 창출해내는 것 같기도 하다. 집요한 진술을 통해 만들어내는 공간의 구축과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삶의 양태에 결국은 설득될 수밖에 없었다. 차현준의 작품에 나타나는, 식물을 돌보는 노동과 행위를 수행하며 끊임없이 어떤 풍경을 상상하는 화자는 이 세계 안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열패감에 맞서고 있다. 최소함의 극대화 같은 이 태도는, 지금 이 시대에서 시를 읽고 쓰고 건네고자 하는 우리를 연상시킨다. 그의 시를 읽다 보면 이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나’가 조금쯤은 더 행복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되는데, 그것이 아마 차현준의 시가 갖는 설득력의 한 힘이 아닐까 한다.
당선자에게 깊은 축하와 지지를 보낸다. 결국은 쓴다는 것으로써, 축소되어가는 우리 존재의 사그라듦에 맞서고 있는 응모자 여러분께도 우정과 응원의 마음을 전한다. 하재연(시인)
올해 응모된 작품은 전체적으로 수준이 높아 허수가 적었으며, 시적 구성과 문장의 숙련이 상당한 작품이 많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한편 그러한 작품들의 거개가 시가 시작한 자리에서 멀리 나아가지 않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세계를 개진하는 대신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확인하는 작품이 많았다고도 할 수 있을 텐데, 어쩌면 이러한 경향이 작금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했다. 삶이 펼쳐지지 못한다면 시 또한 펼쳐지지 못하리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삶의 난국을 뚫고 그다음의 세계를 상상하는 시, 멀리 나아가지 못하더라도 지면을 박차고 도약할 힘을 비축하고 있는 시를 찾고자 했다. 문학이란 삶보다 앞서 나아갈 수는 없는 것일지언정, 삶이 도달할 자리를 미리 상상하고 예비하며 더 나은 삶을 준비하는 일일 수는 있기 때문이다.
김도현의 「섬광」 외 9편은 사물의 감각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시편들이 매력적이었다. 넘쳐나는 사물들과 행위들을 통해 풍부한 결을 갖추는 것은 좋았지만, 그 풍부함이 낭비되고 있다는 인상 또한 있었다. 시를 추동하는 분명한 동력이 있다기보다는 문장이 문장을 끌어가고 있어, 하나의 행, 하나의 연을 보면 아름답고 매력적이었지만 그것들이 좀처럼 잘 쌓이지 않아 끓는점에 도달하지 못하여 아쉬움을 남겼다.
김예진의 「녹영」 외 9편은 감각과 감성이 잘 어우러진 섬세한 문장들이 미더웠다. 유리컵에 심은 콩 하나를 두고도 풍부하게 확장되고 이어지는 이미지들의 전개는 투고자의 감각이 얼마나 세련되고 잘 벼려진 것인지 보여주었으나, 마음을 드러내기 위해 지나치게 많이 투자된 행과 연은 오히려 시의 긴장을 떨어뜨리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저 풍부한 확장과 전개의 시편들이 모두 내면을 설명하는 데 환원된다는 사실 또한 아쉬움을 남겼다. 시는 낯선 것들과의 마주침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은세임의 「여름 채집」 외 10편은 가장 고른 완성도를 보였다. 선명한 언어를 통해 그려지는 선명한 이미지들과 더불어 잘 배치된 행과 연은 투고자의 시적 숙련이 상당함을 짐작게 했다. 타자를 발견하고,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며 세계를 자유롭게 펼치는 이 작품들에서 시란 세계를 감각하는 작업임을 새삼스럽게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동어반복적이며 회귀적인 말하기가 상기시키는 ‘비어 있음’은 어쩌면 이 시들이 다음으로 나아갈 힘을 충분히 마련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았다. 시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시를 통해 세계를 뚫고 나가려는 의욕이 부족한 것이 아쉬웠다.
마지막까지 고민이 되었던 것은 정해은의 「김성미 산부인과」 외 9편과 차현준의 「당귀 방」 외 10편이었다. 「김성미 산부인과」 외 9편은 표제작의 강렬함이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다. 자신의 탄생을 재구성하고자 하는 이 시적 기획은 다른 투고작들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흥미로운 시도였으며, 많은 힘을 들이지 않아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문장들은 투고자의 시를 계속 읽고 싶어지게 했다. 그러나 시가 공통적으로 도달하는 저 따뜻하고 다정한 위로의 세계가 다소 감상적이라 시적 긴장을 해친다는 점, 그리고 잘된 시와 그렇지 못한 시의 격차가 적지 않다는 사실이 마지막까지 아쉬움을 남겼다.
당선작은 「당귀 방」 외 10편으로 결정되었다. 세계를 감각하고 탐지하려는 의욕이 넘치는 점이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다. 식물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또 퍼져가는 것처럼 시의 언어 또한 그렇게 세계를 자꾸 더 그리고, 또 만지려 하고 있었다. 넘쳐흐르는 언어를 따라 읽으며 이 과도함의 연유를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마저 있었으나, 저 맹렬한 언어의 전진에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빽빽하게 들어찬 당귀들 사이에서 향을 맡고, 그것들을 헤아리고 또 만지며 계속 세계와 접촉하려는 시적 태도는 다른 투고작들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전위적인 힘이었다. 어디로든 당도하려는 이 호기로움이야말로 오늘의 시에 필요한 저력이 아닐까 싶었다. 또한 이 감각과 언어의 과잉이 하나의 스타일에 이르려 하고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반가웠다. 예술이란 결국 스타일의 문제이며, 그 어떤 아름다움과 선함조차 적절한 스타일을 갖추지 못한다면 그 빛이 바랠 따름이다. 우리는 이 새로운 스타일의 탄생을 기꺼이 맞이하기로 하였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당귀 방」 외 10편이 보여주는 저 낯설고 거친 힘이 우리를 지금껏 보지 못한 먼 곳으로 데려다주기를 기대한다.
투고해주신 모든 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이 글을 끝맺고 싶다. 세계의 전망이 그 어느 때보다 불투명한 요즘, 우리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밝고 맑은 상상이 절실하다. 여러분이 전해주신 그 전망의 기록을 읽으며 우리가 앞으로 잘해나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졌다. 우리의 문학이 우리의 삶에 작은 빛이 될 수 있기를,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를 지켜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될 것이다. 황인찬(시인)
[심사평_소설]
본심에서 최종 단계에 집중 논의된 두 작품은 윤단의 「남은 여름」과 주이현의 「녹지 않는 슈가 크래프트와 블루의 도시」였다. 앞선 두 편을 포함하여 개인적으로는 권유림의 「완전무결 꽃구경」까지를 관심 있게 보았다. 비록 동의를 얻지 못하고 일찍 논외의 대상이 되긴 했으나, 이 애도의 서사에는 이상한 개성이 있었다. 단편 안에서 장면 배분이 효율적이지 않고 어수선하게 돌출되는 곳이 많았는데 그럼에도 이런 전개가 이 소설에 어울린다는 느낌이었다. 정돈되지 않은 서사의 파편 사이로 툭툭 던져지는 문장들은 화살표를 클릭하면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는 인스타 카드 뉴스를 보는 느낌을 주기도 했으며, 이 점은 함께 응모한 표제작 격의 다른 작품에서도 드러났다. 자신이 가진 감성의 크기나 농도 그리고 분위기에 비해, 전체적인 서사 흐름을 만드는 일은 이제 시작 단계로 보인다. 나는 이 작가가 다소 중구난방으로 정신 사납게 구사한 문장들이, 설득력 있게 배치된 장면들과 만난다면 어느 순간 괜찮은 시너지를 낼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고, 그때는 이 작가를 알아줄 누군가–어딘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남긴다.
윤단의 「남은 여름」 또한 느린, 혹은 늦은 애도의 서사로 읽었다. 곳곳에 포진된 소설적인 함의와 디테일이 정교하며, 일시적인 연대감 비슷한 무언가를 공유하게 되나 그것이 근본적인 갈등 해소로 귀결되지는 않는 인물 간 관계도 긴장감 있었다. 소설의 전체 분위기와 화자의 화법은 고요하고 무력한데, 별다른 액션을 취하지도 않은 채 옆에 잠깐 머물다 갈 뿐인 인물과의 상호작용으로 이만한 긴장을 도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며, 소설 쓰기에 매우 숙련되었고 여러모로 준비된 작가라는 느낌을 주었다. 지금의 정주 불가능한 세대에 만연한 정서—분노나 슬픔 등 분명한 표정을 가진 정서가 아니라 다만 이 상태가 자연스럽게 체화되어버린—를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장면들이 오래도록 눈에 밟힐 것 같다. 창문의 커튼을 고칠 마음을 먹고 실제로 고치기까지 걸린 시간이라든지, 그 자리에 있던 것이 갑작스레 없어졌는데 ‘왜’보다는 ‘드디어’ 올 게 왔다고 여기는 부분들이. 소설의 내용 노출 없이 심사평을 쓰기가 어려운 까닭에, 이 소설의 주요 축을 형성하는 한 인물의 묘사에 대한 장점은 굳이 열거하지 않기로 한다. 요지는 완성형에 가까운 소설을 쓰신 분이고 우리는 곧 어디선가 만나게 되리라 믿는다.
주이현의 「녹지 않는 슈가 크래프트와 블루의 도시」는 마지막까지 접전을 벌인 끝에 최종 당선작으로 결정되었다. 일단 P시의 설정과 소개 문구는 전형적인 아포칼립스 세계관으로 보일 만큼 낯익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안에서 인물들이 움직이고 말하는 방식과 전개가 진부하게 느껴지지 않은 이유의 상당 부분은 뛰어난 표현력에 있겠다. 만약 이 소설이 좀더 구체적이고 선명하며 시선을 사로잡는 사건이 추가되어 (경)장편소설 공모전의 테이블에 올라와 있었다면, 반대로 상당 부분 덜어내고 밀도를 조율한 단편소설이었다면, 확신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좀더 수월했을지 모르고, 그렇지 않았기에 의미 있다. 완성도 높은 문장으로 묘사한 도시의 융해나 다 망한 아이스크림이나 냉장고의 시럽 들이 대체로 관계의 무너짐에 대한 은유로 작용하면서 소설의 전체 흐름은 루즈하며, 이는 소설을 지배하는 주요 정서인 무기력 내지 염세적인 태도와 결합하여 자칫 독자의 인내심을 시험에 들게 하는 요인이 된다. 이같이 준수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인내력 측정기 같은 글쓰기를 선호하는 편이라 그 지루함이 별반 신경 쓰이지는 않았고, 그래서 작가의 다음 소설이 궁금해졌다. 다만 앞으로의 오랜 레이스에 체력 안배를 위해서, 꼭 필요한 요소와 장면만 선별하여 압축하는 센스를 장착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래저래 작가가 현재 누려야 할 기쁨에 값하지 않는 얘기를 늘어놓은 것 같지만, 원래 인간은 지나치게 매력적인 보험 앞에선 깨알 같은 약관을 찾아 자세히 들여다보게 마련인 걸로 이해해주었으면 한다.
코로나 확진 폭증과 함께 다른 해보다 유독 어려웠던 조건 속에서 응모해주신 많은 분께 감사드린다. 그렇게 모인 원고들 가운데 본심에서 검토할 작품을 선별하는 동안, 이 지면에 미처 언급하지 못한 많은 작품이 저마다 장점과 개성을 지니고 있어서 고민을 거듭했다. 그 고민은 분명 행복에 가까울 것이다. 구병모(소설가)
본심에 오른 7명의 응모자 중에서 집중적으로 논의가 된 것은 강병훈, 윤단, 정새미, 주이현의 작품이었다.
강병훈의 「파 드 되」는 몰입도 높은 스토리, 수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아름다움에 대한 철학적 사유가 돋보이는 지적인 작품이다. 그러나 인물 사이의 갈등 구도가 기시감을 준다는 점, 아름다움에 대한 수학적 사유가 결과적으로는 피상적인 수준에서 머물고 있다는 점, 다시 말해 소설에서 동원되는 다양한 정보들이 인물의 캐릭터성을 구축하기 위한 재료로 소비되고 있다는 점이 아쉽게 느껴졌다. 정새미의 「작은 사람 달리기」는 우화적이면서도 기발한 상상력으로 인간을 낯설게 바라볼 수 있게 만드는 미덕이 있는 작품이었다. 비현실적인 상황을 제시하면서도, 독자로 하여금 스토리를 자연스럽게 따라갈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응모자의 재능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전체적으로 소품처럼 느껴진다는 점, 흔히 신인에게 기대되는 어떤 새로움과 패기가 충분하게 발휘되지 못했다는 지적이 있었다.
마지막까지 우리를 고민하게 만든 작품은 윤단의 「남은 여름」과 주이현의 「녹지 않는 슈가 크래프트와 블루의 도시」였다. 공교롭게도 두 작품 모두 현재의 청년 세대를 관통하고 있는 근본적인 권태와 무기력을 배면으로 깔고 있었는데, 그것이 형상화되는 방식과 스타일이 상반된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남은 여름」은 단단하고 안정적인 문장은 물론이거니와 여러 번 읽을수록 인물과 이야기의 다층적인 결을 발견할 수 있는 섬세함이 인상적이었다. 겉으로는 말을 아끼는 소설처럼 보이지만, 곳곳에서 많은 여운을 남기는 여백의 장면들 또한 매력적이었다. 뛰어난 소설일수록 스스로가 말하는 대신, 독자로 하여금 많은 말을 남기게 만든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함께 보낸 작품 역시 응모자의 탄탄한 소설적 역량에 대한 신뢰를 갖게 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반면 「녹지 않는 슈가 크래프트와 블루의 도시」는 제목만큼 낯설고 그 의미를 쉽게 파악하기 어려운 작품이었다. 정체가 불분명한 인물들이 익명의 도시에서 살아가며 직면하는 원인 모를 재난은 현 세대를 가로지르는 어떤 근본적인 권태와 무기력의 형상화처럼 읽힌다. 서사의 사건성에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한 편의 긴 부조리극처럼 인물들 사이의 관계가 점차적으로 파탄에 이르는 과정을 미학적이면서도 실험적인 문체를 통해 조명하고 있다는 점이 독특하게 다가왔다. 중편 분량의 긴 텍스트임에도 불구하고, 나아가 이야기의 의미가 쉽게 해독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독자를 끝까지 붙잡아둘 수 있을 만큼 주이현의 독특한 글쓰기는 아름답게 이질적이었다.
심사위원들은 두 작품 모두 당선작으로 손색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렇다면 두 작품이 선보이고 있는 매력과 개성 중 어떤 것을 중시할 것인가라는 선택의 문제만 남은 셈이었다. 삶의 미세한 결을 정교하게 드러내는 완성도 높은 단편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미지의 낯섦에서 뻗어나갈 비정형의 에너지에 내기를 걸 것인가. 오랜 논의를 거듭하는 끝에 최종적으로 우리는 주이현이 보여준 가능성에 손을 들어주었다. 어쩌면 이러한 선택은 새로운 소설적 글쓰기의 출현을 바라는 심사위원들의 희망이 반영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그리고 소중한 원고를 보내준 모든 응모자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강동호(『문학과사회』 편집동인)
소설을 쓰는 사람으로서, 작가의 탄생을 지켜볼 수 있는 신인상 심사 현장에 앉는 일을 영광으로 여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맥락이 조금씩 바뀌고 시대상을 예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진단할 수 있다 할지언정 감히 올해의 경향은 어떻고 ‘요즘’ 작품들은 어떻다는 둥 함부로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어떤 작품이든 쓰는 이에게는 응당 작품이며, 그런 점에서 등단 여부와 관계없이 쓰는 이는 이미 작가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또한 심사위원의 자격을 얻어 유념하게 되는 지점은 당장 완벽하고 아름다운 작품에 매혹되기보다는 때론 모멸감을 견디며 지속해야 하는 업으로서의 글쓰기를 함께할 동료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본격적인 심사평에 앞서 이러한 감상을 밝혀두는 이유는 앞으로 논하게 될 작품들 외에도 수많은 작품이 아름답다고 느꼈으며, 낙선의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어떤 작품은 여러 심사위원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다. 사실상 심사평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나는 이런 유의 이야기가 진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역시 소설을 쓰는 사람으로서 항상 좋은 소설의 조건에 대해 생각한다. 흔히 ‘테크니션’이라 불리는 소설의 기술자들, 다양한 변주와 화려한 문법을 구사하는 작가의 역량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어떤 작가든 또한 어떻게 하면 새롭게 말할 수 있을지 고민할 것이다. 우리가 속한 시대에서야 비로소 해석될 수 있는 예민한 감각을 벼려낼 것이고 작품이 갖는 독특한 정치성에 대해 유념할 것이다. 작품을 쓰는 이는 누구든 중층적인 차원에서 쓰는 행위와 그 결과를 생각한다. 그러므로 방황 끝에 자신이 믿고 있는 세계로 돌아오는 일, 내겐 어떤 이야기든 예사로 읽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앞서 말한, 당장 누구든 사로잡을 만한 아름다운 작품을 응모한 동시에 현장의 생산자로서 신뢰를 주는 작가를 손꼽으라면 망설이지 않을 수 있다. 이번 심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주목한 작품은 「남은 여름」이다. 이 작품이 갖는 (감히 말하자면) 체념에 가까워 보이는 무기력한 정조에 대해서 심사위원들은 꽤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재독을 거듭할수록 납득이 되는 인물의 행위와 동기 유발의 과정, 언뜻 생동하지 않는 세계처럼 주변을 묘사하지만 자세히 보면 디테일이 살아 있지 않은 구석이 하나도 없는 배경에 나는 매료되었다. 이 작품의 작가는 집요하게 세상을 관찰하며, 인간의 조건이 어떻게 가능한지 지독하게 고민하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노동과 계절을 경유하는 한 사람이 머릿속에 오래 남았다. 함께 응모한 「점점한 일들」이란 작품 역시 좋았다. 두 작품의 스타일이 언뜻 상이하다는 점이 나로서는 어떤 방식의 이야기든 자유롭게 꾸려나갈 수 있는 분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다만 작가에 대한 신뢰와는 별개로 심사장에서 주요하게 논의되었던 부분은 이 작품이 갖고 있는 독특하게 무기력한 정조였는데, 이야기에 힘이 없는 것도 아니고 소설의 인물들이 다 포기한 상태가 결코 아님에도(단언컨대 다 포기한 인물은 결코 어느 소설에도 등장하지 않을 것이다) 이토록 나직한 체념의 정서는 무엇일까 생각하게 되었다. 어쩌면 후기 자본주의의 남은 잔상일까?(이렇게 말하는 건 정말 너무나 쉽다.) 한편 젊은 세대만이 갖는 감각일까?(정말이지 이런 말도 너무나 조심스럽다.) 의문부호를 사용하긴 했지만 그것이 작품이나 작가에 대한 불경한 의심만은 결코 아니었음을 밝혀둔다. 나는 이 작가의 이야기를 더 읽고 싶었다.
독특한 체념의 정서라고 내 식대로 요약하자면 어떤 의미에서는 너무나 해방적이고, 비틀어 생각하면 단순했던 「작은 사람 달리기」 와 당선작인 「녹지 않는 슈가 크래프트와 블루의 도시」 역시 비슷한 데가 있다. 「녹지 않는 슈가 크래프트와 블루의 도시」가 당선작이 되는 과정을 그 현장에서 지켜볼 수 있어서 감사했다. 신인상 응모작에서 보기 드문 중편 분량의 이 작품은 놀랍게도 특별하게 강력한 사건이나 서사의 묘미를 주는 리듬감 같은 것도 딱히 없다. 등장인물들은 서로를 구별 지으며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지도 않고, 재난 이후의 도시인 배경과 남은 시간을 견디며 살아가는 인물들의 행동에 작가가 대단한 필연성을 부여하는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재독을 하고 나면 작가가 만들어낸 결코 대체될 수 없는 세계가 보인다. 반드시 재독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양한 분량으로 소설 쓰기를 시도해본 나조차도 269매라는 원고의 길이에 편견을 가졌는지도 모르겠다. 얼른 중심 사건을 찾아내려 들고, 손쉽게 유혹적인 문장을 발견하려 하는 버릇을 내려놓고 읽어보니 왜 이렇게 길게 이야기를 했어야만 했는지, 부족한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심사 현장에서 이 작품이 긴 시간 동안 천천히 다수의 지지를 획득하는 장면을 목격한바, 소설 읽기에 나도 모르는 못된 습관 같은 게 들었던 것이 아니었나, 작가의 ‘자기 세계’에 대한 이 집요한 믿음에 겸허해져야 한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늪까지 메꿔가며 지은 도시’임에도 그저 부실하기 짝이 없는 어떤 터전을 작가는 묘사했지만, 이 소설이라는 도시는 단단하다. 지층이 튼튼하고 사람도 건물도 분명히 발 딛고 서 있다. 소설이라는 인공 도시 역시 결국 인간이 조성한 허구의 공간이지만 때론 그 어떤 실재보다 분명한 것처럼.
최근에 과학적 상식을 다룬 대중 강의를 듣다가 진화의 취지에 들어맞지 않는 발전 혹은 지속을 시대착오라는 말로 부른다는 이야기를 접했다. 10년 전만 해도 기겁했던 ‘콘텐츠’라는 단어가 이제는 누구에게나 자연스럽고 나조차도 때로 손쉽게 쓴다는 사실에 나는 가끔 놀란다. 그 시절 비판했던 문화적 우세종은 지금 일일이 예시를 들기도 어려울 만큼 일상에 만연해 있고, 무엇보다 그 변화에 사람들은 놀라지 않는다. 거칠게 이야기하면 어쩌면 요즘 같은 시대에 소설이란 시대착오인가, 생각할 때도 있다. 그러나 도무지 저런 게 왜 아직도 살아남았나 싶은 오리너구리나 넙치도 끝내 그런 방식으로 여기 남았다는 사실을 붙들고 매달리려고 한다. 박민정(소설가)
그렇지 않았던 적이 거의 없지만,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오늘날, 문학은 전화에 휩싸여 있다. 이 거대한 불길 속에서, 놀랍게도, 어떤 작가들은 전의를 불태우고 있는 듯 보인다. 아마도, 바람직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런가 하면 적잖은 수의 작가가 도통 이유를 알 수 없는 오뇌(懊惱)와 번민으로 신음하고 있다. 즉, 그들은 싸울 수 없고 싸우고 싶지 않으며 다만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심경은 탈영병의 그것과 같지 않다. 그들은 여전히, 그 어느 때보다 지금, 총알 같은, 아니 정말이지 대포알 같은, 글을 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정녕 싸움이 아닐까?)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정치 때문에, 웹소설 때문에, 인스타 때문에, 넷플릭스 때문에, 문단 권력(들) 때문에,라고 말할 수 있고 더 나아가 틀림없이 이 모든 것들이 합력하여 하나의 거대하고 음험한 원인을 이룬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사실은 알 수 없다. 알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다. 목하 문학이 왜 이토록 격심한 전란 중에 있는지, 대관절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이 전쟁 상황에서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은 말하자면 작은 참호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제대로 휴식을 취할 수는 없지만 잠깐이나마 한숨을 돌리며 화기와 정신력을 재장전/재정비할 수 있는 공간. 올해 이 좁은 참호로 비집고 들어온 작품은 주이현 씨의 「녹지 않는 슈가 크래프트와 블루의 도시」다. 세상과 웹소설의 쾌속에 정면으로 맞서는 이 느린 소설은 묵시록과 사소설 사이에 걸쳐진 길고 가늘고 위태로운 줄 위에서 일종의 곡예를 펼치는 듯 보인다. 독자 측의 노동을 요구하는 것이 정녕 이 시대의 성스러운 불문율을 깨뜨리는 일이라면, 이 소설은 바로 그 과업에 도전하는 작품이다. 그녀가 이 과업을 천직으로 삼아 ‘10분 요약’될 수 없는 글쓰기를 꾸준히 치열하게 이어가길 기원한다. 마지막까지 이 작품과 경합을 벌였던 작품은 윤단 씨의 「남은 여름」이다. 폭력적으로 연속적인 현실의 1차원적 평면에 거의 비가시적으로 존재하는 상흔을 예리하게 포착하여 사뭇 덤덤하고 아주 심심한 문체로 잘 묘파해낸 작품이다. 심사위원 다수가 그의 근미래 등단을 점친 만큼, 더욱 투지를 발휘하여 집필을 속개하시기를 바란다. 어쩌면 참으로 위대한 작가는 참호 따위는 전혀 필요로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참호를 거친 뒤에야 비로소 그가 불멸의 작품을 쏘게 될 가능성 역시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현실의 혼란과 문학의 유폐를 절감하면서 그래도, 기어이, 글쓰기에 천착하려는 모든 손끝에게 긴한 안부를 전한다. 조효원(『문학과사회』 편집동인)
인쇄된 응모작들을 하나하나 손에 쥐고 읽으면서 이 모든 종이들이 곳곳의 구체적인 주소들로부터 발신되었다는 것을 새삼 기억했다. 주소를 생각하다 보면 각진 공간을 떠올리게 되었고, 그 공간 안에서 소설들이 씌어진 긴 시간을 막연히 그려보게 되었다. 마무리된 형태만을 나는 만나는 것이지만, 이야기를 풀어내는 일에 마음을 다하는 종이 너머 한참의 시간들을 나 역시 하나의 주소에서, 오랜 시간 응원하는 마음으로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심사에 처음 참여하게 되었다.
본심에서 만난 7명 응모자의 소설은 모두 서로 다른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 가운데 내가 가장 가까운 마음으로 읽은 것은 주이현, 윤단, 강병훈의 소설이었다. 강병훈의 「파 드 되」와 「길가메시」는 하나의 단어를 마음에 품으며 그 단어 하나를 향해 삶을 꾸려온 사람들을 그린다. 그들에게 단어를 좇는 모든 순간은 거듭하여 용기 내 스스로를 끌어당기는 시간이어왔다는 것을 회고와 증언의 방식으로 기록하면서, 그의 소설은 생의 폐쇄성을 관계성 속에서 다시 바라보고자 한다. 그 시선이 다만 한 생을 둘러싼 관계들의 범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수학과 고고학 같은 학문의 세계를 매개로 하여 거시적이고 통시적인 감각을 확보한다는 점이 나에게는 특히 의미 있게 다가왔다. 다만 폐쇄성과 관계성이 일견 양자택일적으로 다루어진다는 점이 개인적으로 아쉬웠다. 미시와 거시를 하나의 구체 속에서 그려내는 그의 소설적 방법이 시간을 분절하는 구조에 기대지 않으면서 고유의 고민을 이어갈 시간을 응원하고 싶다.
윤단의 「남은 여름」과 「점점한 일들」은 마지막까지 마음이 가는 소설이었다. 그의 인물들은 계절의 복판을 걷거나, 계속해서 하나의 그림을 그리거나, 자신의 방식으로 세계의 리듬을 읽어내면서 철저히 각자의 몫인 시간을 견딘다. 그 묵묵한 시간을 채우는 것이 내게는 모두 언어로 읽혔고, 윤단의 소설이 인물들을 서사를 위한 배역이 아니라 고유한 언어를 만들고 발화하며 살아가는 매일의 모습들로 보여준다는 점이 참 좋았다. 문학은 결국 타인의 언어를 들여다보는 일임을 덕분으로 오래 기억하면서, 언젠가 꼭 지면에서 만날 수 있기를 내내 바랄 것이다.
주이현의 「녹지 않는 슈가 크래프트와 블루의 도시」는 느리고 고요한 문장을 따라가며 하나의 세계를 차곡차곡 마주해가는 느낌이 처음부터 좋았던 소설이다. 인물들이 만들어온 생의 궤적, 그들 사이의 관계, 그들이 하는 일, 그 모든 것이 동시에 길항하는 일상의 시간이 천천히 연결되어가는 동안, 소설 곳곳에 편재하는 이미지들과 말 조각들이 잃어버렸다 찾은 퍼즐 조각처럼 번뜩 떠오르곤 했다. 그러나 주이현의 소설은 조각들을 모아 하나의 큰 그림을 맞춰가게 하기보다, 프랙털처럼 작은 조각들에서 세계 전체의 모습을 바라보게 한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소설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일상의 바깥으로 돌출되기보다 일상 전체를 다시 기억하게 하고, 일상은 언제고 발생하는 사건의 조짐들을 돌기처럼 오돌도돌 끌어안은 채로 그려진다. 한참을 ‘지루하게’ 이어지는 듯 보이지만 말해지지 않는 불안의 기운을 감지하는 동시에 발생하지 않는 파국에 대해 줄곧 생각하게 하는 이 소설이, 우리가 ‘아직도’ 어디에 있는가를 돌이켜보게 하며 그러므로 조용한 힘을 가진다고 나는 믿는다. 자꾸만 편을 들고 싶었던 마음으로, 앞으로 주이현이 써나갈 소설들을 마음 다해 기다리며,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홍성희(『문학과사회』 편집동인)
[심사평_평론]
평론 부문의 본심에 오른 5명(권명원, 문성효, 이은란, 정재훈, 최다영)의 응모작 가운데 내가 주목한 글은 권명원의 「일상을 넘어 자라는 육체들—이민하론」, 문성효의 「샴은 무지개를 보며 웃는다—강혜빈론」, 최다영의 「지옥에 깃든 응시, 공백을 확장하는 시(詩)—김복희론」이었다. 권명원의 평론은 분석 대상이 되는 이민하 시 텍스트에 대한 섬세하고 폭넓은 접근이 돋보이는 글이었다. 여러모로 시 비평의 정석에 해당하는 글이었는데, 다만 아쉽게도 지금 이민하에 대한 자신의 분석이 독자에게 읽혀야 하는지에 대한 비평적 자의식이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한편 문성효의 글은 강혜빈의 시에 나타난 퀴어적 상상력에 주목하고 있었다. 강혜빈에 대한 기존의 해석을 비판하면서 시작하는 이 글의 강점은 전체적으로 유려하게 자신의 논지를 이끌고 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목표로 했던 것처럼 강혜빈 시에 대한 기왕의 비평과 자신의 해석 사이의 차별성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고 보기 어렵고, 무엇보다 시 텍스트 해석이 다소 단순하고 평면적이라는 점이 한계로 지적될 법했다.
어쩌면 이번 평론 부문 심사는 최다영의 글을 당선작으로 선정할 것인가 여부를 논의하는 과정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글은 김복희 시에 대한 입체적이고 정교한 분석이 돋보였다. 시 텍스트를 자신이 의존하는 담론의 소재로 활용하는 것을 지양하고, 안정적이고 정확한 문장을 바탕으로 텍스트의 언어적 구조를 세부적으로 분석한다는 점에서 최다영의 글은 시 비평이 갖춰야 할 어떤 모범적인 태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판단된다. 물론 그가 김복희 시를 조명하는 데 활용하는 ‘공백’이라는 개념이 효과적으로 새로운지에 대한 지적이 있었고, 지나치게 신중한 태도로 인해 신인에게 기대되는 비평적 도전 의식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것 같다는 아쉬움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최다영의 글이 보여주는 신중함은 시 텍스트를 특정한 담론을 증명하는 도구로 활용하는 대신, 최대한 정직하게 시에 도달하려는 비평적 태도의 근원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점에서 신뢰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비평적 글쓰기는 타인의 텍스트를 분석한 결과이지만, 그 과정 속에서 자신이 말할 수 있는 바를 정직하게 정립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최다영의 글은 잘 보여주고 있다. 그가 성실하게 써나갈 미래의 글들을 기대하며, 당선자에게 아낌없는 축하의 말을 건넨다. 강동호(『문학과사회』 편집동인)
올해 평론 부문 응모자는 32명으로, 해마다 그 수가 조금씩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10여 년 전쯤 언젠가 한 자릿수에 머물던 때도 있었다는 점을 기억하면, 이러한 꾸준한 변화가 흥미롭기도 하고 물론 다행스럽기도 하다. 평론가 지망생의 수가 줄지 않고 아주 조금씩이나마 계속 늘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 ‘비평하고 싶은 작품은 여전히 많지만, 기존의 비평에만 만족할 수 없다’는 신호로 받아들여도 나쁠 것은 없다. 평론 심사를 할 때마다 유독 더 긴장이 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번 심사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주목해 읽은 글은, 권명원의 「일상을 넘어 자라는 육체들—이민하론」, 이은란의 「‘감응의 페티시즘fetishism’을 위한 제언」, 최다영의 「지옥에 깃든 응시, 공백을 확장하는 시(詩)—김복희론」이었다.
권명원의 글은 이민하의 시에 대한 기존 평들의 한계를 적절하게 지적하며 글을 시작하고 있다. 시를 꼼꼼하게 분석하고 있는 점, 문장도 어느 정도 안정적이고 논리 전개가 자연스럽다는 점이 이 글의 장점으로 여겨졌다. 이민하 시에 대한 기존의 평들을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가 충분히 달성되지는 못했다는 점이 다소 아쉽기는 했다. 이은란의 글은 황인찬, 김소형, 하재연, 이혜미, 에밀리 정민 윤 등 다양한 시인들을 폭넓게 읽으며 이들의 시를 ‘감응의 페티시즘’이라는 관점으로 해석해보는 글이다. 최근 한국 문단에서는 ‘인간중심적 관점을 극복하려는’ 시도가 활발한바, 이 글은 이러한 흐름을 적극적으로 공유하는 글이다. 그러나 개별 시인 각각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이 이루어지 않은 점, 덧붙여 개별 시인들에 대한 기존의 논의가 참조되지 않아 해석의 새로움이 확인되지 못한 점은 아쉬웠다.
만장일치에 가까운 고른 지지로 최다영의 글을 당선작으로 결정할 수 있었다. 이 글은 김복희의 시에 나타난 ‘타자와의 관계성’을 ‘공백의 실천’이라는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일단은 텍스트에 대한 꼼꼼한 분석이 돋보이며 ‘공백’이라는 주제와 관련한 깊이 있는 사유의 전개가 신뢰를 주었다. 스스로 밝히고 있듯, 이 글은 흔히 현장비평이 범하게 될 오류, 즉 새로운 담론의 형성에 집중하다 보니 “이미 만들어진 기대를 (작품에) 투사할 위험”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보다는 “치밀한 텍스트 독해”를 우선적으로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했다. 자극적인 것만이 잘 보여지고 또 그만큼 빠르게 잊히는 세상에서, 문학을 읽는 일만은 다른 속도와 자세를 지녀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하는 글이었다. 기쁜 마음으로 당선을 축하드린다. 조연정(『문학과사회』 편집동인)
여러 고민할 것 없이 곧장 주해의 형식에 기댈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니까 대상은 이미 정해져 있으므로 다만 그것을 짐짓 자세하게 분석하거나 멋진 수사로 한껏 치장하면 된다는 점에서, 비평은 쉽다. 한없이 쉬운 장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 ‘낮은 진입 장벽’은 함정으로 작용한다. 그러니까 밑도 끝도 없이 쉽게 씌어지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뜻이다. 사실을 적시하자면, 비평은 거의 불가능에 육박하는 글쓰기 형식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가령 독일 초기 낭만주의자들과 이들을 본받은 비평가 발터 벤야민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할 듯하다. 글쓰기의 심연으로 제 실존을 내던지는 작가(혹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작품 자체)의 고민과 성찰에 필적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면, 차라리 비평을 단념하는 편이 낫다. 본심에 올라온 5편의 글 가운데 최다영 씨의 「지옥에 깃든 응시, 공백을 확장하는 시(詩)—김복희론」을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데에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다만 개별적인 작품 분석과 구별되는 차원의 ‘전체에 대한 통찰’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은 모든 심사위원이 한결같이 지적한 사항이라는 점을 적어둔다. 당선자의 향후 비평 활동이 어떤 지평을 열어가게 될지 독자 제현의 ‘많은 관심(과 응원)을 부탁’드린다. 조효원(『문학과사회』 편집동인)
본심에서 함께 검토한 5명의 평론 중 최다영의 「지옥에 깃든 응시, 공백을 확장하는 시(詩)—김복희론」 외 1편과 정재훈의 「슬픈 사람들의 이동법—황정은론」을 더 관심을 기울여 읽게 되었다. 문학 텍스트를 꼼꼼히 읽는 지적인 작업과 애정을 다해 읽는 마음의 일 가운데 어느 한쪽으로 힘이 쏠리면 의욕만이 앞서는 글을 쓰게 될 수 있는데, 최다영과 정재훈은 두 일을 하나의 일처럼 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글들과 다르게 느껴졌다. 정재훈의 「슬픈 사람들의 이동법—황정은론」은 특히 힘의 균형감이 좋은 글이었다. 이 글은 필자 자신이 세계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과 황정은의 소설이 세계를 관통해가는 방식을 겹쳐놓으며 글을 이어가는데, 필자와 작품이 서로를 동원하거나 도구화하지 않은 채로 나란히 물음을 짊어지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말하고자 하는 것에 휘둘리지 않으며 스스로의 언어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는 힘이 이 글을 안정적으로 신뢰하게 해주었고, 필자의 더 많은 글을 만나보고 싶게 했다. 정재훈이 자신의 세계와 작품의 세계를 겹쳐 만나는 일과 더불어 같은 작품을 읽은 다른 사람들의 세계와도 만나면서 자신의 시각을 좀더 예각화해갈 수 있다면, 그의 글이 가진 강점이 더 빛이 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최다영의 「지옥에 깃든 응시, 공백을 확장하는 시(詩)—김복희론」과 「네버랜드 탈출기—김희준론」은 비평장의 지형을 파악하고 자신의 글이 서 있고자 하는 위치를 분명하게 설정하는 것으로 시작된다는 점에서 정재훈과는 다른 종류의 신뢰감을 주었다. 김복희론에서는 구성상 자신의 글이 기존의 논의와 차별화된다고 여기는 지점까지 성실히 나아간 다음 선행 비평들에 대한 문제의식을 글의 말미에 덧붙이는데, 그만큼 자기 글이 의도한 바에 도달했다는 확신과 자신감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구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자신감은 시를 꼼꼼히 읽어내는 치밀함과 느낀 것을 부러 포장하지 않는 솔직함, 그리고 언어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 책임감에 대하여 필자 자신이 스스로를 신뢰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 테다. 성실한 독자이면서 동시에 확신에 찬 필자일 수 있다는 것은 최다영이 가지는 강점이자 그의 글이 가지는 힘이 될 것이다. 응모해주신 모든 분들과 함께 문학을 읽는 시간의 귀함을 나누며,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홍성희(『문학과사회』 편집동인)
수상자: 차현준
장르: 시
작품: 「당귀 방」 외
수상 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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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반씩 나눠 가진 원 사이로 차오른 표면에다 우리의 이름을 띄워놓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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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이름을 꽤 좋아한다. 차 현 준,이라는 모양을 보고 있자면 하나의 원을 중심으로 온갖 획수가 사방으로 뻗어나간 형국을 이루고 있다.
2020년이 되던 순간에 나는 쿠바에 있었다. 만기된 군 적금과 아르바이트 일당을 모아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 계획을 짜서 이름대로 쭉쭉 뻗어나갔다. 한 해의 마지막 날 그곳에서 액운 인형을 태우고 있었다. 여러 지역을 다니며 겪었던 수많은, 찬란한 쿠바의 노을과 바다와 거리를 잊을 수 없다.
시는 이름도 풍경도 아닌 채로, 나를 구석구석 드나들었다. 나보다 자유로워 보였다. 시가 다녀간 곳을 살펴본 덕에 내가 지닌 원 속으로 시를 따라 손을 넣어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앉아 있을 때는 원 뒤로 넓은 공간을 한없이 가질 수 있고, 누워 있을 때는 원 아래로 깊어진 깊이를 가질 수 있다.
내가 원 속에서 곱씹어본 말들을 원 밖으로 꺼내고 펼치게 되어 얼떨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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괄호에다 띄워놓고 싶은 목록이 많다.
아픈 손가락으로 남고 싶지 않아 더 사랑할 가족들에게. 내 원 안으로 끝까지 흰빛으로 뛰어갈 반려기쁨에게.
시를 잘 쓰는 일보다 사랑하는 일을 먼저 일깨워주신 박상수 선생님과 늘 같이 있고 싶어요. 정확한 상상력을 위해 집요하게 살펴주신 서대경 선생님, 선생님께 배운 자세를 잊지 않겠습니다. 시를 세심히 살펴주신 조연정, 하재연, 황인찬 심사위원님께 충만한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아는 모든 작품과 책과 작가 들에게.
은희 같던 제게 기꺼이 김영지 선생님이 되어주신 장수영 선생님, 차고은 선생님, 우선하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도연, 재연, 승우, 지은, 주명, 승민, 병호, 영균, 민진과 지냈던 열여섯 살. 형구, 효근, 승법, 지안, 도경, 동진, 경민, 도현, 민욱과 머물렀던 기숙사. 지영, 재림, 혜정에게 받은 케이크. 종섭, 동민, 경훈, 민수, 상인, 상윤, 준녕, 규형, 동준과 살았던 충주. 의진, 수연 누나, 도희, 경민이 가고 싶은 방향으로 나아갔으면. 지현, 세빈, 민주가 걸어나갈 각자의 방향. 명성이 지켜주던 묵묵한 신뢰. 용환과 있었던 2학년 7반. 병준에게 포옹처럼 배운 포용. 준화, 서원이 형과 일하다 듣던 음악. 쿠바에 있을 때 정성껏 살펴주신 Jorge, Anita, Maria, Obed. 보고 싶어요. 잘됐으면 좋겠는 한결, 형욱, 수민, 윤지, 예린, 예진에게. 내 시를 믿어준 태의에게는 기쁜 일들이 많이 찾아가기를. 내 시를 같이 고민해준 민성이 형, 보영 님, 서진 님, 연우 님, 호철 님. 감사합니다.
꿈을 꾸는 것보다 잘 자길 바라는 현실적인 사려를 건넬 줄 아는 이지은과 사계 내내 밤이 찾아와도 숨지 않고 목소리를 들려준 김태연과 확실한 게 없어도 누군가의 마음에 꽃을 띄워놓는 백예린에게는 내가 만든 문장들을 아름답게 불러주고 싶다.
왕가위와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보여준 세상. 민희진이 구축해놓은 세계와 숨결. 혜원, 은숙, 재하가 살고 있을 것만 같은 그 마을. 태희, 혜주, 지영이 씩씩하게 걸어가 가닿을 미래. 절망하던 미아를 이끌어준 세바스찬의 리듬으로 살아나가기. 조엘, 클레멘타인과 함께 가보고 싶은 몬토크. 순자가 틔워놓은 미나리.
다음과 같은 음반들이 원 속에서 오래도록 울려 퍼졌으면 좋겠다.
혁오– 『사랑으로』, Taylor Swift – 『folklore』, 자우림 – 『영원한 사랑』, 언니네 이발관 – 『홀로 있는 사람들』, The Volunteers– 『The Volunteers』, Lorde – 『Pure Heroine』 『Melodrama』, dosii – 『반향』, 이소라 – 『이소라 7집』, 엄정화 – 『The Cloud Dream of the Nine』, 아이유 – 『Love poem』, f(x) – 『4 walls』, 백예린 – 『Our love is great』 『tellusboutyourself』, AKMU – 『NEXT EPISODE』, Red Velvet – 『Perfect Velvet』 『The Red Summer』, 유아 – 『Bon Voyage』, 윤하 – 『END THEORY』, 태연 – 『INVU』
더 말하지 못한 이름들은 언젠가 괄호에 띄워놓을 수 있을 것이다.
*
나는 나의 자리에서 열심히 잘 써 나아갈 테니 때때로 서로 오가며 내가 선보인 것들에 관해 함께 얘기해볼 시간이 풍부하게 만들어지기를. 우리가 이 세상에다 더 우아하고 근사하게, 화내고 울더라도 결국엔 웃고 즐기기를. 그러다 표정들도 악몽 없는 잠을 잘 자기를.
수상자: 주이현
장르: 소설
작품: 「녹지 않는 슈가 크래프트와 블루의 도시」
수상 소감:
전화를 받았을 땐 이번 학기 수업에 막 소설을 제출한 참이었고, 혈관 속에선 간밤에 물처럼 들이켠 알록달록한 괴물 친구들의 달콤한 피가 끈질기게 흘러 다니고 있었다. 1년 만에 쓴 소설이 망해버렸다는 생각에 방탕자의 마음이 되어선, 더러운 옷을 입고 식탁 위에 함부로 누운 채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것들이 입 모아 노래하는 모습을 은밀히 곁눈질하는 중이었으니, 아무튼 뭐든 고운 마음으로 믿어볼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결국 그날 새벽이 될 때까지도 나는 내가 보이스 피싱을 당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는 의심을 떨쳐내지 못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간이고 쓸개고 남김없이 떼어 주게 될 것이 분명하다는 확신까지도. 그럼에도 손가락은, 입은 움직여서, 소중한 사람들에게 겨우 소식을 전할 수 있었다. 한바탕 주변에 소란이 일고 나서야 거실과 빈방들을 오가며, 온몸에 땀이 흥건해지도록 춤을 춰 댔다. 나의 너구리(같은 고양이)가 그런 나를 내내 한심한 눈빛으로 쳐다봐주었다. 문득 정신이 들면 침대 위에 뛰어들어 머리를 싸매고선 파도처럼 밀려드는 걱정들을 견뎠다. 그러곤 다시 일어나 집 안을 쿵쿵 뛰어다녔다. 뭐가 어떻게 되든 죽기야 하겠냐고. 나는 아직 스물세 살이고. 치사량 직전의 카페인과 설탕도 나를 죽이진 못했으니.
금요일 저녁엔 학교 친구들과 진탕 술을 퍼마셨다. 제로 콜라와 포도젤리, 싸구려 색소 맛이 나는 지렁이들을 섞어 만든 역사 깊은 축하주를 두 바퀴 만에 끝장냈고, 오렌지 캐러멜의 향기가 나는 튤립과 블루 레터링이 새겨진 하트 케이크를 가슴 앞에 안아 든 채 사진도 여러 장 찍었다. 은근히 심기를 건드리던 옆 테이블의 머저리들에겐 실컷 엿을 날려주었고, 일대 골목을 마구 뛰어다니며 죽음의 술래잡기를 했다. 누군가 담배 필터에 불을 붙여 빨아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는데, 누구였을까? 확실한 건, 당선 소감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그날 마신 술이 다 깨지 않았다는 점뿐이다. 그런고로, 이 감질나는 술기운이 전부 달아나버리기 전에 글을 마쳐야겠다. 늘 곁을 지켜주는 나의 소중한 친구들 졔, 쥬, 우리의 과거와 미래를 전부 사랑해. 너희가 날 키운다. 가족이 돼주라. 이 길에 발을 들이게 해준 안산의 구윤재 씨, 금방 보러 갈게 기다려줘. 벌써 3년째 함께 글을 읽고 써주는 다원 언니, 앞으로도 함께합시다. 책 기다리고 있어요. 이 소설을 낼 수 있도록 용기를 주었던 ‘정어리들’—괴상하고 귀여운 것을 사랑하는 데에 늘 진심인 지윤과 수빈, 심부름을 잘하고 보기보다 반항적인 호정 혹은 희지, 우리의 모자란 사회성을 보충해주는 힙스터 선배님 서현, 물만두와 군만두의 사이를 오가는, 장차 궁수가 될 예리, 대신 기뻐해주느라 오뚝이가 되어버린 윤수, 그리고 두 번이나 진심 어린 마음을 건네준, 누구보다 글의 다정함을 사랑하는 강은—모두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우리 사라지지 맙시다. (글 씁시다.)
혹여 폐가 될까 성함을 적진 못하였지만, 수업을 통해 뵌 세 분의 소설 교수님과 한 분의 시 교수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수업 안팎으로 지나가듯 건네주신 작은 이야기들도 제 기억 속엔 깊숙이, 진하게 남아 있습니다. 소설을 읽어주시고, 부족한 제게 큰 기회를 주신 문학과지성사의 심사위원분들 모두에게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이상한 나를 믿어주는 가족들 늘 고맙고 사랑합니다. 엄마, 아빠, 덕분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동생아, 잘 살아 돌아오렴. 우리 너구리,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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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곧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것들을 주워 모으고 있다고 느끼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혼자가 아님을 발견할 때, 주머니를 뒤집어 떨어진 것들을 달게 깨어 먹곤 합니다.
감사히 쓰고 말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수상자: 최다영
장르: 평론
작품: 「지옥에 깃든 응시, 공백을 확장하는 시(詩)—김복희론」
수상 소감:
김복희 시인과 세 번의 만남이 있었다.
합정의 어느 지하에서 그가 「머리가 셋 달린 개」를 처음으로 낭독했다.
그때 나는 내 안의 지옥을 봤다. 울렁거리는 찬란한 지옥을. 그 시절 나는 어디를 가든 나만의 작은 시 노트를 들고 다녔는데 시인은 그걸 알아보고 정답게 웃었다.
가을에는 문래에서 시 전시가 있었다. 여러 시인의 신작 시를 채집하기 위해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가 새하얀 빗금을 그리며 작고 고요한 공간을 가득 채웠다. 오후의 늦볕이 같은 각도로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시인은 조용히 들어와 어느 순간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친구가 되겠지요. 새 모양 도장 위에서 새 인간이 그렇게 입을 움직였다.
시집과 칵테일을 함께 파는 바에 갔을 때는 이미 다른 이가 나를 대신해 앉아 있었다. 그들은 마치 주문을 외우듯 고개를 숙이고 작은 목소리로 시를 읽었다.
그 장면을 오래 보고 있었다.
나중에 시인의 맞은편에 의자가 놓이고 그가 시를 읽어달라고 했을 때,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런 순간을 미리 알고 기다려 오기라도 한 것처럼 천천히 시집을 펼쳤다. 그리고 내가 쓴 시를 들려주듯 2년 전 그 시를 읽기 시작했다. 나의 목소리에 유심히 귀 기울이는 시인을 보며 우리가 무언가를 주고받은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름을 묻는 시인에게 나는 세 번 모두 다른 이름을 말했다. 그는 나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 깊은 안도감을 주었다.
이 평론을 당선작으로 결정하기까지 고민과 염려가 많으셨을 줄을 안다. 믿고 선정해주신 심사위원분들께 먼저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비평을 읽고 쓰는 즐거움을 알려주신 모든 선배 평론가분들께도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때로는 그들의 눈으로 볼 때 작품들이 더 빛나고 아름다웠다. 그가 쌓았을 시간만큼 어떤 대상을 향한 애정과 옳다고 믿는 삶의 신념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분명 나는 예리한 안목으로 대상과 그 안팎의 연결점을 구상하는 감각과 이를 논리적인 언어로 구축해나가는 명쾌함에서 비평의 매력을 처음 느꼈지만, 어느 시점부터는 비평의 태도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하고 배울 수 있었다. 자신과 다른 의견에 더욱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대화와 비판을 통해 존중을 표하는 모습에 늘 감동받았다. 최대한 많은 이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면서 자신의 몫으로 책임을 확장하고 연대하는 태도를 또한 배웠다.
나 역시 겸손하게 대화하는 비평을 이어나가고 싶다.
무언가를 말하기에 앞서 성실히 읽는 독자로서의 위치를 어느 때든 잊지 않을 것이다.
사랑을 보여달라고 한다면?
김복희의 두번째 시집에 사인을 받으면 주어지는 질문이다.
이 평론이 작은 대답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