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21회 - 2021
차호지 / 시 / 창문 외
이서아 / 소설 / 악단
이희우 / 평론 / 옷의 딜레마: 경쟁하는 세계들—이수명론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이 올해로 21회째를 맞았다. 코로나19 사태가 이번 신인상에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었던 터라 불안과 염려 속에 심사를 시작했다. 투고작 전체를 수합해보니, 시 부문에 634명, 소설 부문에 517명, 평론 부문에 34명의 예비 시인, 작가, 평론가 들이 작품을 보내왔다. 코로나19 사태의 장기화에도 불구하고 평년보다 많은 양이었다. 작품 수준도 전체적으로 고른 편이었다. 불안과 염려는 기대로 바뀌었다.
심사위원들은 신인상 상패에 새겨지게 될 글귀에 걸맞게, 오로지 “문학의 이름으로” 향후 한국 문학을 이끌어나갈 새로운 감각과 사유를 갖춘 ‘미래 텍스트’를 찾고자 최선을 다했다. 예심은 4월 9일에 진행되었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일부 심사는 비대면으로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예심 결과 각각 시 부문 10명, 소설 부문 12명, 평론 부문 8명의 응모자가 보내온 작품들이 본심 대상에 올랐다.
이후 본심에 오른 작품들에 대한 2주간의 개별 심사 과정을 거쳤고, 최종심은 4월 23일 문학과지성사 사옥에서 진행했다. 긴 심사 결과, 시 부문에 차호지 씨(「창문」 외), 소설 부문에 이서아 씨(「악단」), 평론 부문에 이희우 씨(「옷의 딜레마」)를 당선자로 선정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전 부문에서 당선작을 낸 기쁨은 말할 수 없이 컸다. 자세한 내용은 각 부문 심사평을 참조하기 바란다.
세 분의 당선자에게는 당연히 각별한 축하의 말을 전해야겠으나, 그보다 먼저 다른 모든 투고자께 감사와 응원의 말을 전한다. 심사위원 일동
[심사평_시]
2021년 문학과사회 신인상 시 부문에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634명이라는 많은 응모자가 작품을 보내주었다. 본심에 오른 10명(가람, 고이초, 공미솔, 곽동우, 김가은, 양윤화, 여세실, 이나안, 이나은, 차호지)의 작품들 중에서 눈길을 끌었던 것은 차호지, 가람, 양윤화, 이나안의 작품이다. 양윤화의 작품에서 종종 만나게 되는 소박한 문장들이 개인적으로 인상적으로 느껴졌었다. 그러나 한 편의 시 안에서 그러한 문장들이 응집력 있게 조직되지는 못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기도 했다. 이나안의 「살모사」 같은 작품에서 재현되는 선명한 감각도 매력적으로 읽히기는 했다. 하지만 보내준 작품들 중에서 비슷한 강도의 매력을 느끼게 해준 작품을 많이 찾을 수 없어 이나안을 당선자로 추천하기는 망설여졌다. 심사위원들이 고르게 지지한 작품은 차호지와 가람의 것이다.
가람의 시들은 보내준 작품들 사이 큰 편차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응모자의 숙련된 솜씨를 충분히 확인하게 해주는 시들이었다. 「양파를 반으로 잘라도 양과 파로 나뉘지 않았다」는 이미지 자체도 색다르게 느껴질 뿐만 아니라 시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흥미롭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외의 다른 작품들에서는 숙련된 문장들 사이로 가끔씩 상투적인 문장이 끼어들고 있다는 점이 가장 아쉽게 느껴진 부분이기도 했다.
차호지의 작품들은 본심에서 검토한 여러 응모자의 작품 중 가장 개성적인 작법을 구사하는 것으로 읽혔다. 각각의 작품마다, 좁은 공간에서 혹은 한정된 시야로 혹은 제한된 관계 안에서 특정한 장면을 만들어내거나 사유를 확장해나가는 모습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문장을 화려하게 꾸미거나 색다른 이미지를 고안하지 않더라도 각각의 시편을 독창적이고 새롭게 읽히도록 만드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판단했다.
가람과 차호지의 작품을 두고 당선작을 결정하기 위해 심사위원들이 오랫동안 숙고하면서 대화를 나눴다. 작품의 완성도가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이었지만 신인상이니만큼 얼마나 뚜렷한 개성을 보여주고 있는가가 당선작을 가름 짓는 더 결정적인 기준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심사자들은 차호지의 작품에 좀더 애착을 느꼈다. 자신만의 뚜렷한 시 세계를 만들어나가고 있다는 점은 분명 차호지의 장점이 되겠지만 이러한 개성적 작법이 앞으로 자신의 시 세계를 새롭게 확장시키는 데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차호지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왠지 모를 뚝심은 그런 우려를 기우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게 되리라 확신해본다.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조연정(『문학과사회』 편집동인)
신인상 응모작 원고들을 읽는 것은,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시의 움직임을 가장 가까이 느낄 수 있기에 기쁘고 두근거리는 일이다. 최근 들어 접하기 어려웠던 누군가의 가쁘고 열기 어린 호흡을 지척에서 느낄 수 있게 해준 모든 응모자께 고마움을 전한다. 전반적으로 시의 언어를 다루는 기술적이고 형식적인 측면의 수준이 높아졌다는 인상을 받았고, 일관된 스타일을 추구하는 기획과 시도 들도 꽤 많았다. 다만 가늠하기 어렵게 새로울 미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시들을 찾는 것이 신인상의 가장 큰 목적이기에, 그 부분에 더 집중하여 원고들을 읽어보았다.
본심에 오른 응모작들은 언어와 스타일 그리고 시적 에너지 어느 측면에서든 각자의 강점을 하나 이상씩은 가진 작품들이었다. 그중에서 내가 최종적으로 주목한 작품은 가람, 김가은, 고이초, 차호지의 것이었다. 김가은의 「안녕, 고양이」 외 작품들은 동시대의 감각을 구현하면서도, 경쾌하고 발랄한 에너지로 독자를 기분 좋게 만드는 강점을 지니고 있다. 「양치기 네드」 같은 작품에서 말과 소재를 천진하게 접속시키는 시인의 기량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시의 곳곳에서 발견되는 사소한 귀여움들이 이후에도 우후죽순 자라나서, 더 이상 사소하지만은 않은 세계의 그늘들까지 거느리기를 고대한다. 고이초의 「실제 정서」 외 작품들은 특별했다. 독특한 발상과 전개의 방식이 돌올하였으며, 시를 가로지르는 묘한 부조화의 정서가 매력적이었다. 「실제 정서」 「구원과 증인」 같은 작품에 펼쳐지는 현실과 상상, 정서와 관념 사이의 기이한 줄다리기에 눈이 오래 머물렀다. 다만 때로 드러나는 관념적 풍경의 묘사가 어떻게 시인의 내면에서 뻗어 나와 독자들의 공감각을 획득할지 이후의 행보가 궁금해진다.
가람의 「양파를 반으로 잘라도 양과 파로 나뉘지 않았다」 외 작품들은 끝까지 심사위원들을 번민에 빠져들게 했다. 「양파를 반으로 잘라도 양과 파로 나뉘지 않았다」 「인물화」가 보여주는 뛰어난 문장들과 시적 사유의 힘, 현재진행형으로 보이는 소재 구성의 능력에 큰 지지를 보낸다. 가람의 시들은 최근의 시적 스타일과 경향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경우로 생각되는데, 이러한 특징이 한편으로는 최종적인 결정을 망설이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몇 작품에서 드러나는 센티멘털한 정서의 처소가, 앞쪽에 배치된 시들과 같이 현실의 이미지를 확장하는 가능성의 영역과 접속할 수 있기를 바라며 아쉬움의 마음을 내려놓지 못했다.
최종적으로 당선작으로 결정된 차호지의 「창문」 외 작품들은 독특하게 일관된 개성을 보여준다. 독자들은, 환상과 실재를 넘나들며 구축해가는 이 작품들의 공간성을 지각하며 그 구조가 또렷해질수록 현실의 의미는 몽롱해지는 신기한 읽기의 경험을 선사받게 될 것이다. 마치 이상의 시를 처음 읽었을 때와 같이, 진짜와 가짜 사이 현실과 모조 사이의 이상한 틈을 벌렸다 닫았다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발생된다. 「캉기」와 같은 시에서 “진짜” 캉기 씨와 “정말” 캉기 씨와 ‘지금은 없는’ 캉기 씨가 반복적으로 명명될 때, ‘가까워지는 것’과 ‘멀어지는 것’,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이야기하는 것’과 ‘드리워지는 것’ 사이의 평행우주, 즉 삶과 죽음의 가능성은 그 거리를 있는 힘껏 벌린다. 문장의 심플함과 반복된 형식의 단순성에도 불구하고 차호지의 작품들에 손을 들어준 것은 이 가능성의 힘을 믿어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당선자에게 깊은 축하와 응원의 마음을 함께 보낸다. 하재연(시인)
예심에서 작품을 검토하며 눈에 띈 것은 인용을 활용하는 작품들이 상당히 많다는 점이었다. 문학 안팎의 여러 텍스트를 참조하며 진행되는 시들이 많았는데, 그 인용이 오히려 시의 운신을 좁히는 경우가 많아 아쉽게 느껴졌다. 또한 시가 무엇인지 묻는 시, 시의 쓸모에 대해 고민하며 자조하는 시들이 많다는 것도 특기할 점이었다. 문학이 한없이 왜소해진 이 시대를 실감하게 하는 경향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이 심사 과정에서 기대한 것은 여러모로 정체된 작금의 분위기를 쇄신할 새로운 목소리였다. 내가 주목한 것은 고이초, 이나안, 가람, 차호지의 작품이었다.
고이초의 「실제 정서」 외 작품들은 언어의 활달함이 돋보였고, 행과 연의 망설임 없는 도약이 상쾌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남자/숲에서 딱따구리처럼 머리를 찧고 있다//그런데/벌떼가//해맑게 달리는 거 보소 신 내린 듯 종일 뛰네”로 이어지는 이 큰 보폭의 문장들에 눈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큰 보폭의 도약은 때로 무리한 비약이 되는 경우가 많았고, 앞에 제시한 이미지와 의미가 뒤에 가서는 증발해버리는 경우가 많아 아쉬웠다. 이 손에 남지 않는 미끄러움과 경쾌함이 장점이었지만 동시에 큰 약점이기도 했다. 작품 전체를 통어할 집중력을 갖춰줄 것을 권하고 싶다.
이나안의 「살모사」 외 작품들은 시를 오래 수련한 이의 작품이라는 인상을 주어 신뢰가 갔다. 특히 산문시에서 그 안정감 있는 문장이 빛났으며, 사건 없는 사건, 세계 없는 세계라고 할 만한 시적 태도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운문형의 시에서 그 세계의 연약함이 고스란히 노출되어 아쉬움을 남겼다. 특유의 밍숭맹숭함이 산문시에서는 유려한 문장과 함께 나름의 호흡을 만들어내며 어우러졌는데, 행갈이를 하며 여백을 만들자 인식의 앙상함이 드러난 형국이었다. 운문시의 경우 오히려 더 짧고 간명한 형태로 단단한 시를 만들었다면 그 특장이 잘 살아나지 않았을까 한다.
마지막까지 논의된 것은 가람과 차호지의 시였다. 가람의 「양파를 반으로 갈라도 양과 파로 나뉘지 않았다」 외 작품들은 표제작의 압도적인 흡입력이 눈길을 끌었다. 언어는 여유롭고 세계는 자유로운데, 세계에 대한 선명한 태도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장점은 다른 작품에서도 고르게 나타나고 있어 그 수준도 비교적 고른 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러 편의 시가 결말부에서 약점을 노출한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인식의 영역에서는 그토록 자유롭고 가볍던 문장들이 정서적인 부분을 드러낼 때는 너무 거칠고 투박했으며, 결국 그것이 시 전체의 인상을 바꾸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논의 결과 차호지의 「창문」 외 작품들이 당선작으로 결정되었다. 읽을수록 눈이 가고 이상하게 마음이 끌리는 시였다. 일견 심심한 시처럼 보이다가도 그 심심해 보이는 문장들이 서로 맞물리며 묘한 긴장을 쌓아가고 있었다. 「창문」은 확신할 수 없는 세계에서 끊임없이 확인하려는 자의 질문이 누적되며 시를 만들어가는, 독특한 매력을 갖고 있었다. 세계는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직진해나갈 뿐이고, 사물은 거기서 멋대로 미끄러지고 벗어날 뿐이다. 이와 같은 태도는 다른 작품들에서도 일관되었다. 「모험」에서 책은 자꾸 흘러내리다, 어느새 집에 간다는 생각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도망이 되어 있으며, 「캉기」에서는 수많은 캉기 씨를 떠올리거나 발견하다 어느 순간 타자라는 관념 자체가 가볍게 흔들리고야 만다.
이 가벼운 흔들림과 착오가 만들어내는 산뜻한 힘에 우리는 기대를 걸어보기로 했다. 시란 무거운 현실을 들어 올리는 가벼운 힘이므로, 차호지의 시가 그런 힘을 발휘해줄 것이라 믿을 수 있었다. 앞으로도 마음껏 망설이고, 갈팡질팡하며 시를 써주시기를 바란다. 그 흔들림에서 시의 힘이 비롯되고, 현실을 뒤집을 힘이 비롯될 수 있을 것이다.
당선자에게 축하와 응원을 전하며, 또한 작품을 투고하기 위해 오래 고민하신 모든 분께 감사와 격려를 보낸다. 그 고민의 시간은 결국 어떤 식으로든 멋진 결실로 돌아올 것이다. 황인찬(시인)
[심사평_소설]
본심에 오른 12인의 작품 가운데 「게거품」 「불과 직물의 노래」 「음악의 해부」를 개인적으로 관심 있게 읽는 동안, 유독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에 한해 응모자들이 소위 ‘문지 스타일’에 집착하거나 최소한 그것을 염두에 두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그렇게 일컫기도 조심스럽고 섣불리 범주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달리 부를 이름이 없을 만큼 명백한 분위기가 존재했으며, 개인적으로는 그걸 좋아해서 즐겁게 읽었는데, 서사의 해체와 난만한 고유명사와 수많은 주의(主義) 및 사조(思潮)에의 천착, 예술인으로서의 포즈 같은 요소들이 초현실적인 감각을 불러일으키기는 하나 그 전위의 양상은 대체로 기존 작가들이 걸어간 길에 떨어진 나뭇잎들을 줍는 것처럼 보였다.
황정언의 「게거품」은 이 짧지 않은 객담(客談)이 객담(喀痰) 되기를 스스로 지향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던 한편, 작품 자체에 집중하기보다는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를 자꾸만 상상해보게 만드는 소설이었고,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이 자신에게 잘 맞는 주파수를 가졌는지에 대한 의문이 남게 되었다. 조혜림의 「불과 직물의 노래」는 사실 작가가 함께 보내온 다른 작품이 더 인상적이어서 그쪽에 대해 말해보자면, 소음이든 노래든 연주든 간에 음악–소리와 관련된 소설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단지 음표를 읽을 줄 안다고 해서 연주할 수는 없는 악보와 마찬가지로, 글을 읽을 수 있다고 하여 선뜻 해독하기는 어려운 이 문장들의 실험이 가닿고자 하는 목적지가 잘 보이지 않았다. 송시연의 「음악의 해부」는 이중에서는 어찌 보면 정석이라고 할 만한 서사적 충실성을 지닌 작품이었다. 소재와 내용의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구체적인 언급을 최대한 피하고 한 가지만 꼽아보자면, 인물의 행동 및 감정과 판단 그리고 현실 인식 들이 갑작스럽게 단도직입적이면서도 단정적으로 투척되는 부분들이 곳곳에 산적해 있는데 그것들이 세련미를 다소 떨어뜨렸다.
최종심에서 집중적으로 검토된 작품은 강연옥의 「언캐니」와 이서아의 「악단」이었다. 「언캐니」 외 1편은 시원시원하게 잘 읽히면서 냉소적인 어투가 돋보였다. 그런데 이 거침없고 가벼운 성적 대화와 연애의 장면들이 충분히 의도된 연출이라고 가정하더라도, 작품의 전체적인 문제의식이나 표현 방식에 당선이라는 형태로 지지를 보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물음표가 떠올랐다. 다루는 소재와 인물의 사고가 유사한 두 편이 마치 한 편처럼 느껴지기도 한 까닭에, 향후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에 대한 약간의 회의도 함께였다.
공감과 위로 내지 다정한 연대가 일종의 당위를 이루는 듯싶은 최근의 한국 문학 흐름 안에서, 당선작인 「악단」은 오랜만에 만나보는 파괴적인 에너지가 행간에 끓어오르고 있었다. 파괴가 반드시 파격을 동반하지는 않는 법이라, 응모자가 함께 보내온 「붉은 춤」을 먼저 읽으면서는 인물 묘사가 전형적이고 사건 전개가 살짝 진부한가 싶기도 했지만, 「악단」은 분명 장조인데도 음산한 노래와 히스테릭한 언어가 인물들과 만나 일으키는 화학반응이 유효타를 냈고, 최종적으로는 바통을 이어받을 만한 손아귀의 악력을 지닌 작품으로 생각되었다. 당선자께 축하를 전하며, 응모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린다. 구병모(소설가)
제21회 문학과사회 신인상 소설 부문 본심에 오른 12명(강연옥, 문미미, 백설이, 손화수, 송시연, 이상하, 이서아, 조나영, 조혜림, 최연, 최희라, 황정언)의 작품 중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강연옥, 조혜림, 이서아의 소설이었다.
강연옥의 「언캐니」 외 1편은 뛰어난 문장력과 독자를 끌어당기는 몰입도 높은 목소리가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냉소적이면서 위악적인 화자가 등장하는 그의 작품들은 ‘신뢰할 수 없는 화자’가 발휘할 수 있는 마력을 유감없이 활용하고 있었으며, 인간의 욕망이 지닌 통속성을 가감 없이 노출하고 있었다. 한 사람의 내면을 적나라하게 전경화하는 그의 작품을 읽으며, 독자는 이 소설의 중심 소재 중 하나인 ‘거울’을 보듯 자기 자신의 통속성 또한 뼈저리게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야기가 다소 도식적으로 전개되는 측면이 있으며, 화자의 목소리가 발휘하는 매력이 독백적이고 갑갑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점이 아쉽게 느껴졌다.
조혜림의 「불과 직물의 노래」 외 1편은 언어에 대한 밀도 높은 탐구 의지와 탐미적인 자의식으로 가득한 작품이었다. 강연옥의 작품과 대조적으로, 조혜림 작품의 화자는 철저하게 익명화되어 있는데, 기원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의 중얼거림만으로 전개되는 그의 텍스트가 과연 어떤 새로운 소설적 공간을 창안할 수 있을지, 읽는 내내 기대와 우려가 동시에 들었다. 세계 바깥으로 탈출하려는 익명의 목소리가 마침내 맞게 되는 운명을 이미지화한 「10악기를 위한 대위법」을 읽으며, 나는 이야기에 종속되지 않는 소설적 공간이 일시적으로 개시되는 순간을 본 것 같았다. 하지만 「불과 직물의 노래」에서는 익명적 중얼거림이 형성하는 서사적 궤적을 따라가는 데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는 점을 고백해야겠다. 문학은 언어를 통한, 언어에 대한 탐구라는 자기–지시적 구조 안에서 자신의 잠재성을 보존하고, 활성화할 수 있다고 믿는 편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지난한 탐구의 길로 독자를 유혹할 수 있는 좀더 유연한 방법은 없을까? 이 질문을 응모자와 나 자신에게 동시에 던진다.
이서아의 「악단」 외 1편은 그로테스크한 에너지와 파괴적 상상력이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나는 학교에 불을 지르기로 결심했다”라는 문장에서부터 시작되는 이서아의 소설은, 한동안 한국 문학에서 자취를 감췄던, ‘질주하는 아이’ ‘무서운 아이’의 귀환을 선언하는 것처럼 보였다. 백민석이나 김사과의 등장을 떠올리게 하는 이서아의 ‘무서운, 무서워하는 아이’는 기성 질서를 상징하는 ‘학교’를 불태우고 ‘선생들’로부터 탈출을 자행한다. 그와 같은 목표를 향해 가속 페달을 밟는 이서아의 통제 불가능한 아이들은 위반과 탈주의 상상력이라는 한국 문학의 오래된 이단적 계보 안에 속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다만 주목할 만한 것은, 이 소설이 보여주는 파괴의 향연이 위반과 탈주의 향락과 관련 있다기보다는 어떤 이중의 실패로 구조화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소설의 ‘나’가 학교에 분명 불을 지르기로 결심했지만, 선생들을 죽이려고 하지는 않았으며, 무엇보다 산을 불태울 생각이 없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그러나 소설은 마치 탈구된 신체처럼 ‘나’를 애초에 원하지 않았던 결말로 ‘데굴데굴’ 굴려간다. 그렇다면 ‘나’는 계획에 성공한 것인가, 아니면 실패한 것인가. 이러한 양자택일의 질문을 무화시키는 이서아의 통제 불가능성에서 ‘새로운 아이의 출현’을 예감하는 것은 다소 과장된 해석일 수 있다. 다만 이서아의 발화(發火)하는 글쓰기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소설의 새로운 영토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당선을 축하하며, 소중한 작품들을 보내준 모든 응모자께 감사의 말을 전한다. 강동호(『문학과사회』 편집동인)
뜻밖에 소설 쓰기가 내 일이 아닌 것 같다고 느낄 때가 종종 있다. 얼마 전에 소설 쓰는 동료가 내게 이렇게 말한 적 있었다. “언니는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머리로 다 지어내?” 그 말은 꽤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렇게 가끔은 기상천외한 상상을 하고 그것을 그럴듯한 이야기로 만들어내기 위해 공부하고 노력하긴 하는데, 정말이지 아무것도 못 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고, 요즘은 그런 순간이 꽤 많이 찾아온다. 특별한 이야기는커녕 잡담조차 하지 못할 것 같을 때, 그렇게 머릿속이 텅 비어버릴 때, 심사를 위해 이렇게 많은 원고를 읽으면 본래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질투심에 사로잡힌다. 우리 각자에게, 이토록이나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다니. 소설가는 소설을 쓰고자 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역할이라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실감한다. 누군가는 선에 들고 누군가는 선에 들지 않는 이 엄정한 선택과 배제의 과정에서도, 우리에게 뭔가 꾸며내 말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 생동한다는 것이 다행이다. 정말로 다행이다.
본심에서 만난 황정언의 「게거품」 역시 ‘너’라는 호명 대상에게 끝도 없이 이야기하고 있다. 독자들이 알거나, 몰라도 상관없는 수많은 고유명사가 나열되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양식적이고 매력 있다. 하지만 트위스트가 없는 단조의 이야기는 서사의 매력을 반감시켰고, 그런 감상을 고전적인 것이라 치부할 만한 색다른 방법론을 이 작품이 제시했느냐 하면, 그 부분에 대해서는 그다지 자신이 없다.
조혜림의 두 작품 중에서 「10악기를 위한 대위법」은 기나긴 시간 동안 본심에서 논의되었다. 기괴하고 복잡한 선율의 결합이 불길이 치솟는 낙후된 다운타운의 풍경과 만나며 매우 독특한 정조를 자아내는 작품이다. 갈래도 없고 계열도 없는 소리의 향연이 인상 깊었다. 인간을 괴롭히거나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모두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소리의 결합이라는 사실이 작품을 읽고 난 후에도 꽤 오래 여운으로 남았다. 함께 응모한 「불과 직물의 노래」 역시 작중에서 표현한 대로 텍스처가 만져지는 작품이다. 소설이 물리적 경험을 선사한다면 바로 이런 작품이 그 실천이 아닐까 싶다.
이상하의 「네 오른손이 비었을 때」를 읽고 참 잘 씌어진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비숙련 노동자들의 생활과 관계 맺음에 대한 실존적인 고민을 잠깐 따뜻해지거나 계속 차갑기만 한 양손의 아날로지를 통해 더할 나위 없이 매끈하게 표현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심에서 오래 논의되었고, 소설적인 순간을 드러내는 기술과 작품의 만듦새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는 응모자라는 생각이 들었으므로, 곧 다른 지면을 통해 만나 뵙게 되리라 기대한다.
강연옥의 「언캐니」에 대해서는 참으로 아쉽고도 끝내 마음이 쓰인다. “나는 예쁘다는 것에 대해 좀 안다”는 말이 주는 압도적인 매력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예쁘지 않았기 때문에 예쁘다는 것을 알 수밖에 없다는 차연에 가까운 사색, 그리고 별달리 파격적이거나 전위적이거나 한 것이 여성의 욕망, 특히 여성애의 욕망은 아니라는 지당하고도 마땅한 이야기. 사실 모두가 이야기하지만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은 지점을 소설화했다는 점, 그리고 여성 퀴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특별히 용기를 내지도 않은 것 같다는(나의 적극적인 오독일 수도 있겠다) 부분이 끝내 마음을 사로잡았지만, 여성 퀴어의 탄생이 정상성의 체제 안에서 반동적인 방식으로 돌연 발생했을지도 모른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는 서사라는 우려에 동의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부디 계속 쓰고 싶은 그 이야기를 써주시기를 바란다.
당선작은 이서아의 「악단」이었다. 함께 응모한 「붉은 춤」 역시 그렇지만, 나는 이 작품들을 ‘죽이고 싶은’ 화자의 이야기로 읽었다. 나는 늘 소설은 죽고 싶거나 죽이고 싶거나, 거칠게 요약하면 그 둘 중 하나이리라고 생각한다. 도덕이나 윤리가 이데올로기라는 걸 보여주는 벌거벗은 화자의 목소리는 어느 시대에나 필요하다고 느낀다. 아름다움이라는 것조차 양식화되고 굴절된 이데올로기라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는 또한 그 자체로 아름답다. 본심에서 논의된바 두 작품의 화자가 모두 ‘아이’이며, 화자를 둘러싼 배경이 관습적으로 그려진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의 변형이라는 점이 우려될 만하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이미 힘센 정념을 이만큼 부려놓는 작가라면 앞으로 어떤 작품을 선보이게 될지 충분히 기대가 되고도 남는다.
대부분 비겁하고, 때론 광인이라는 평가를 받을지언정 이야기를 떠들어야 하는 숙명에 사로잡힌 소설가의 고독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는 일. 작가의 새로운 시작에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었다. 응모해주신 모든 작가께 격려를 드린다. 박민정(소설가)
부질없는 바람이었을까, ‘작품’을 기다린 것은. 그럴지도 모르겠다. 모든 당위가 예외 없이 정권(=재산권) (재)창출이라는 일차원적 탐욕 아래 완전히 복속돼버린 현실에서, 그야말로 마이너 중의 마이너인 문학에 어떤 기대를 건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차라리 그것은 불가피한 어리석음이라 해야 할 듯하다. 스스로 호흡할 수 없게 된 환자에게 빠른 산소 공급이 절실하듯, 문화 전체의 정신적 질식사가 예견된 듯 보이는 상황에서 최후의 바람ruach인 문학에게 기대를 걸지 않는다면 달리 무슨 수가 있을 것인가. ‘작품’의 출현과 존속은 정신–문화의 생명 연장을 위해 가장 필수적인 일이다. 이 사실을 모르거나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사람은 궁극의 도의적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올해 문학과사회 신인상 심사에서 애석하게도 나는 ‘작품’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품을 한 편도 만나지 못했다. 적어도 내게 배당된 투고 작품들을 검토한 한에서는 그랬다. 이는 나의 단견(短見)과 망집(妄執)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작품들의 본원적/시대적 한계 때문일 수도 있다. 나로서는 이에 대해 최종 판단을 내릴 수 없다. 다만 시간의 판정을 기다릴 뿐이다. 긴 논의 끝에 최종 후보군에 오른 작품들은, 말하자면, 가능성의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들이라 할 수 있다. 환자 입장에서는 어쨌든 고마운 일이다. 마지막까지 당선작과 경합한 것은 이상하의 「듣지 않을래」 「네 오른손이 비었을 때」인데, 이 두 작품 중 특히 후자는 차가움에 가까운 차분한 상상력으로 주체 안팎의 현실 속 보이지 않는 균열을 고스란히 그려낸 것으로 보이며, 그래서 심사위원들의 공통된 호응을 이끌어냈다. 당선작인 이서아의 「악단」은 동화와 누아르의 독특한 결합을 보여준 작품이다. 오랜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맺은 데 대해 크게 축하드린다. 어디에도 없지만 모든 순간에 서슬 퍼렇게 존재하는 독자의 눈과 판단력에 맞서 꿋꿋이 자신만의 문학 세계를 구축해나갈 수 있기를 기원한다. 아울러, 하지만 가장 절실한 심정으로, 당선의 행운을 누리지 못한 수많은 예비 작가와 작품에 미리 조심스러운 안부를 전하며 뜨거운 응원을 보낸다. 조효원(『문학과사회』 편집동인)
[심사평_평론]
올해 문학과사회 신인상 평론 부문에는 전체적으로 밀도 높은 응모작들이 적지 않았다. 비평의 영향력이 점차 줄어드는 시점에, 동시대 문학에 대한 예리하고 흥미로운 해석과 진단을 제시하는 도전적인 글들을 만난다는 것은 언제나 기쁘고 놀라운 일이다.
여러 좋은 글 가운데 심사위원들은 1차 예심을 통해 본격적인 심사 대상으로 총 8명(김미정, 김수현, 김울, 김은석, 남궁훈, 양진호, 이세현, 이희우)의 글을 선정했다. 그리고 최종적인 토론 과정에서는 김은석, 이세현, 이희우의 평론이 지닌 미덕과 한계에 관해 좀더 집중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했다.
김은석의 「열림의 존재론—신해욱의 시에 대하여」는 신해욱의 시에 대한 깔끔한 해석이 돋보이는 글이었다. 기존 신해욱론들을 향한 대결 의식이 인상적이었으며, 특히 ‘열림’이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신해욱의 시에서 나타나는 존재론적 해체의 양상을 조명하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뛰어난 가독성과 무리 없는 논리 전개를 자랑하는 김은석의 비평은, 투고작 중 가장 모범적이고 정석적인 문학평론으로 여겨질 법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 텍스트의 한계이기도 했는데, 신인 평론가로서 김은석만이 선보일 수 있는 독창적인 시선과 사유가 다소 부족해 보였다. 특히 해당 비평이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과거의 신해욱론과 본인의 신해욱론이 결과적으로 크게 구별되지 않는다는 점이 결정적인 아쉬움으로 작용했다.
반면 이세현의 「더 인간적으로—김사과론」 외 1편은 패기 넘치는 자유로움이 눈에 띄는 글이었다. 좀처럼 에두르지 않고 텍스트에 대한 평가와 분석으로 직행하는 전개 방식이 매력적이었고, 무엇보다 작품을 분석하는 비평 주체의 즐거움과 자유로움이 뚜렷하게 느껴지는 글이었다. 오한기의 작품 세계를 분석한 「지배–해방–운동」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인상적인 글이었으나, 때로 자신이 즐기는 자유로움에 지나치게 몰입한 나머지, 비평이 의식해야 할 최소한의 자기 객관화가 실천되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아울러 분석 텍스트를 조명하는 과정에서 활용하는 이론적 개념들이 정교하지 못하고, 그 논리들이 다소 투박하다는 점도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작품을 분석하는 데 이론이 활용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으나, 적어도 그것을 자신의 언어로 충분히 체화할 필요가 있다는 조언을 드리고 싶다.
이희우의 「옷의 딜레마: 경쟁하는 세계들—이수명론」은 독특하면서도 도전적인 글이었다. 이수명이라는 난해한 텍스트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기존 비평들이 제시한 독법의 피상성을 지적하는 가운데, 이희우는 2010년대에 발간된 이수명의 시집들을 읽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놀라운 점은 이희우의 글이 단순히 이수명의 시에 대한 정교한 해석에 머물지 않고, 당대 예술이 처해 있는 동시대적 딜레마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를 천착하는 지점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희우의 글은 평범한 작품론으로만 읽히지 않는데, 그것은 이수명 텍스트를 통해 전개되는 동시대성에 대한 그의 문제의식이 높은 확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희우가 제시하는 과감한 분석과 결론에 모두 동의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울러 분석의 타당성을 증명하기 위해 시인의 시론을 다소 빈번하게 활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희우의 평론에는 생각과 관점의 차이를 모종의 해석적 대화의 매개로 전환시킬 수 있게 만드는 힘이 있다는 점이다. 그러한 힘의 근원은 무엇보다 시 텍스트에 대한 이희우의 디테일 하면서도 창의적인 분석력일 것이다. 이희우의 예리한 해석은, 그가 분석하고 있는 대상을 다시 읽고 싶도록 독자를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한편 그의 비평은 분석 대상으로서의 작품에 온전히 종속되지 않으면서, 비평 또한 독립적 텍스트로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까지도 보여준다. 작품과 비평이 동등하게 공존해야 한다는 것은 비평의 오래된 목표이지만, 이러한 목표가 구체적으로 실현된 경우는 그리 흔치 않다. 사정이 그러하기에 심사자들이 이희우의 평론을 당선작으로 선택하는 데 조금의 망설임도 느끼지 않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좋은 글을 만날 때 나는 한 사람의 동료 비평가로서, 비평을 쓰는 일에 대한 보람과 자부심을 동시에 느낀다.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강동호(대표 집필), 김형중, 조효원
수상자: 차호지
장르: 시
작품: 창문 외
수상 소감:
당선 소식을 들었을 때는 토마토스튜를 끓이고 있었다. 아마 양파인가 당근인가를 자르고 있었을 것이다. 칼을 도마에 두고 바닥에 앉아 다리를 모은 자세로 전화를 받았다. 옆에는 친구가 있었고 내가 기뻐해야 할 만큼 친구는 기뻐했다. 통화 후에는 스튜를 마저 끓였다. 그리고 저번에 끓이고 남은 국과 얼린 밥을 데워 먹었다. 부산한 소리에 일어난 고양이도 기지개를 켠 후 제 자리에 가서 밥을 먹었다.
스튜는 그 주의 일요일이 되어서야 처음 맛을 보았다. 너무 졸아들어 있어 물을 넣고 다시 끓였다. 빵을 잘라 같이 먹었다. 오래 끓인 스튜는 아주 맛이 있었다.
나는 여자친구와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다. 우리는 일어나 차를 나눠 마시고 밥을 차려 먹고 청소와 빨래를 하고 책을 읽고 영상을 보고 누워서 잠에도 들었다가 일을 하러 나간다. 나갔다가 들어오면 꼬리를 부풀린 고양이가 마중 나와 앞발로 바지를 긁는다.
언젠가 기회가 생긴다면 말하고 싶었다. 나는 어느 시점에서 보아도 소중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고. 우리 이외 누구에 의해서도 침해되어서는 안 되는 일상을 살고 있다고. 그것을 설명하거나 이해시킬 의무가 나에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해를 바라면서 쓰고 있다고.
그동안 많은 쓰는 사람들을 봐왔다.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 사람들. 누구보다도 선연히, 용기를 가지고, 내가 미처 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분투하는 사람들. 지면은 누구에게나 부족하고. 그러므로 감사한 마음에 앞서 그 좁은 자리를 비집고 들어가 앉았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임솔아, 김소연 선생님과 시를 읽어주신 심사위원분들에게 감사드린다.
다가올 여름에는 모두가 건강했으면 좋겠다.
수상자: 이서아
장르: 소설
작품: 악단
수상 소감:
그러고 보면, 코로나 이전의 지구는 꽤 매력적인 지옥이었다.
그 지옥에 대한 추억이 많다: 서울의 불꽃 축제와 초록 자전거들, 이태원의 칵테일, 강릉 바다의 너울성 파도와 제주의 노을, 안산의 심야 택시, 사하라 사막의 황금빛 모래, 영국의 인디 록밴드 공연, 런던 길거리의 주홍 여우들.
어쨌거나 지구는 늘 지옥이었다. 나무는 절단당하고, 사람들은 초콜릿으로 폭식하며, 온 도시에 은빛 건물과 쨍한 스크린이 가득하다. 터널은 산의 몸통을 뚫고, 하늘에서는 설탕 비가 내리며, 스크린은 내 눈에 불빛 총알을 쏜다—
주문 기계 Kiosk는 나한테 이리 외치더라: 빨리 나를 이용해. 다른 손님이 기다리잖아. 이 머저리 인간아!
곧 우리 몸에는 붉은 피 대신 쇳물이 흐를 것이다. 아니면 Kiosk의 피가 붉겠지.
하지만 Kiosk는 죄가 없다. Kiosk도 그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건 아니다.
아, 불쌍한 Kiosk.
불쌍한 나.
우리는 조금씩 성실하게 심장을 잃어버리고, 거리에서는 포탄처럼 폭죽이 터진다.
참 즐겁고 끔찍해.
등단 소식을 듣고 나는 어린아이처럼 방방 들떴다. (이건 특급 비밀인데, 그동안 나는 방 안에서 혼자 춤을 추기도 했고, 손수 악보를 그려서 「드디어등단송♪」을 만들어 부르기도 했다. 잠에 들 시간이면 잠은 안 처자고 ‘상금 천만 원으로 할 것들♡’ 목록을 적었으며, 차마 고백할 수 없는 무척 달콤한 상상들도 했다.)
여기저기서 많은 축하도 받았다. 사람들은 내게 과분하리만치 다정했고, 희망찬 미래에 대한 반짝이는 말들을 쏟아내주었다. 나는 그 모든 것이 진심으로 기쁘고 감사했다.
흠……
나는 명랑하게 굴면서 아주 많은 비관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
피와 쇳물.
조만간 잿더미가 될 종이들.
나는 이제 신인 작가이고?
아무튼 나는 웃는 얼굴로 현생을 산다. 현생에서의 나는 정말로 많이 웃고, 많이 떠들고, 헛소리와 농담을 즐겨 하고, 유치한 장난을 왕왕 치며, 맥락 없는 시시콜콜한 대화와 밑도 끝도 없이 낙관적인 찬사를 무척 사랑한다. 어쩌면 그 다정했던 사람들 또한 나와 비슷한 마음으로 내게 축복을 내려주었던 것 아닐까?
이를테면,
“물론 삶은 좆같지! 그러나 오늘만큼은 네가 마음껏 웃길 바란다!”
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이제 나는 이 당선 소감 파일을 메일로 보낼 것이고, 사랑하는 고양이를 쓰다듬어줄 것이며, 소파에 누워 내가 좋아하는 어떤 콜롬비아 작가의 소설을 읽을 것이다…… 나는 그 끝내주는 작품을 읽는 동안 간간히 카카오톡과 와츠앱 답장을 할 것이고, 멜론이나 스포티파이로 음악을 재생할 수도 있으며, 인스타그램 알람을 확인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네이버 검색이나 구글 검색까지? (어휴, 나도 이런 내가 한심해죽겠다!)
그러나 이 지옥에서 이런 방식으로 사는 건 내 죄가 아니다.
그 모든 기계, 총, 칼, 로켓 포탄을 최초로 탄생시킨 건 무덤 인간들이다.
만약 내가 기이하게 여겨진다면, 나를 손가락질할 시간에 무덤을 파헤쳐서 그들을 벌하길 권한다.
수상자: 이희우
장르: 평론
작품: 옷의 딜레마: 경쟁하는 세계들—이수명론
수상 소감:
좋아하는 작품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하지만, 좋아하는 작품에 대해 글을 쓸 생각은 하지 못했다. 스스로 글을 쓰기에는 충분히 세심하지도, 끈기 있지도 못한 사람이라 여겼다. 사실 뭘 해야 할지 잘 몰랐다. 그러나 시를 읽는 일이 내가 갖고 있지 않았던 것, 이를테면 가장 느린 속도를, 문장과 문장 사이를 오래 서성일 수 있는 능력을 줬다. 그 행간에는 정말 중요한 문제, 누군가의 승리나 패배와는 그다지 상관없는 문제가 있다. 내가 시에서 배운 것을 누군가 내 글에서 다시 발견해준다면 좋겠다.
2018년은 내게 특별한 해로 기억에 남아 있다. 그해 방황하던 청강생이었던 나는 이수명 시인의 시 수업을 듣게 되었다. 나는 그 수업을 통해 시를 처음 써보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처음으로 읽어보았다. 몇 학기 동안의 수업이 끝난 이후로 시를 쓰지는 않았지만, 시집을 사고 시를 읽는 일은 습관이 되었다. 수업과 시집을 통해 시를 읽는 일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일깨워주셨던 이수명 시인께 감사드린다.
또 2018년은 (나를 비롯한 몇몇 고민 많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서용순 선생님의 아무 대가 없는 철학 수업이 시작된 해이기도 하다. 나는 처음에는 책에 씌어진 철학자의 말이 싫었고, 그래서 틈만 나면 딴지를 걸었다. 지금 돌이켜보니 그 쓸데없는 ‘딴지’를 듣고 계셨던 서용순 선생님의 인내심이 존경스럽다. 놀라운 인내심으로 우리를 가르쳐주셨던, 글쓰기에 대해서도 애정 어린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던 서용순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과외(課外)’의 무료 수업들이 끝난 이후에 시와 철학은 내 머릿속에서 서로를 밀어내고 침범하면서 제멋대로 뻗어나갔다. 하지만 그 모든 내용은 내 머릿속에서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응원해준 동료들이 없었더라면 내 생각을 한 편의 글로 완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 내 방황의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지지해준 가족이 없었더라면 하루하루 살아갈 용기를 낼 수 없었을 것이다. 가족, 친구들, 동료들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제 글에 세심한 조언을 해주었던 김도, 정소영, 함윤이, 홍우성, 허희 평론가, 조민서 형 감사합니다.
그리고 내 모든 글의 첫번째 독자인 지현에게, 고마움과 사랑을 전한다. 돌이켜보니 내가 방황이라 생각했던 시간 동안 과분한 배움과 사랑이 있었다. 내가 받은 것보다 더 많이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겠다. 나를 살아 있게 해준 문학과 삶의 불확실한 것들에 충실하겠다. 당연한 이야기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겠다. 마지막으로 부족한 글의 가능성을 봐주신, 심사위원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