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20회 - 2020
장미도 / 시 / 프랙털 외
구소현 / 소설 / 요술 궁전
김보경 / 평론 / 인간의 가장자리로 걷기: 여성, 동물, 기계
[심사 경위]
올해로 20회째를 맞는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에는 시 부문 576명, 소설 부문 501명, 평론 부문 34명이 작품들을 보내주었다. 새로운 감각과 사유를 통해 ‘문학’이라는 이름의 외연을 창조적으로 확장시킬 수 있는 미래의 텍스트를 찾기 위해, 올해 역시 많은 분이 심사 자리에 참여해주었다. 시 부문에는 오은, 임승유 시인과 김나영 평론가가, 소설 부문에는 손보미, 정용준, 천운영 소설가가, 그리고 평론 부문에는 우찬제 평론가가 『문학과사회』 편집 동인(강동호, 김형중, 조연정, 조효원)과 함께 투고작들을 읽어나가며 한국 문학의 현재를 되짚고, 미래를 예감해보는 시간을 나눌 수 있었다.
우선 4월 10일에 전 부문 예심을 진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코로나 사태라는 전례 없는 상황을 고려하여 일부 심사위원들의 경우 비대면 방식으로 예심을 진행했다. 이후 본심에 오른 작품들(시 부문 16명, 소설 부문 11명, 평론 부문 4명)을 대상으로 2주 동안의 검토 기간을 거쳐 최종적으로 4월 24일에 당선작을 선정하는 자리를 가졌다. 그 결과 시 부문에 장미도 씨, 소설 부문에 구소현 씨, 그리고 평론 부문에 김보경 씨를 당선자로 선정하며, 실로 오랜만에 전 부문에서 신인을 배출하는 기쁨을 얻게 되었다. 세 분의 당선자에게는 각별한 축하의 인사를 전하며, 소중한 원고를 보내준 모든 응모자께 깊은 감사와 응원의 말씀을 드린다._심사위원 일동
[심사평_시]
제20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시 부문 본심에 오른 총 16명의 응모자들(권루스, 김나우, 김보배, 김초롬, 김태형, 나헌, 박다래, 백선율, 백인기, 신원경, 윤재성, 이아영, 이혜리, 장미도, 최민지, 차현준)의 작품들 중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김나우, 나헌, 윤재성, 장미도의 시였다.
김나우의 「Sunset Shake」 외 9편의 시에서는 발랄한 아이디어와 상상력으로 시적 상황을 진척시킬 수 있는 재주가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었다. “이 열차를 위한 선로는 없다네/모든 움직임이 탈선이지”라는 문장처럼 거침없이 진행되는 장면 전개나 예상치 못한 소재들의 결합을 통해 형성되는 시적 긴장감은 분명 개성적이었다. 하지만 탈선의 해방감을 오랫동안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시적 세계관의 중심축이 잘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 그래서 종종 시가 무질서한 느낌을 준다는 점이 아쉬웠다.
나헌의 「Bälgetreter」 외 12편의 시는 강렬한 예술적 자의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언어적 세계를 조금씩 축성해나가는 과정이 돋보였다. 나헌의 작품들은 자기만의 언어로 쌓은 단단한 성채를 연상케 했는데, 특히 텍스트 곳곳에서 마주칠 수 있는 과감하고도 선언적인 문장들이 내뿜는 나르시시즘적 마력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밀도 높은 예술적 자의식이 다소 부담스럽게 강요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시가 대체적으로 익숙한 형태의 관습적 자폐성으로 귀결된다는 점이 문제적이었다.
윤재성의 「원정」 외 9편의 시는 당선작과 함께 개인적으로 가장 주목한 작품이었다. 시적 이미지들을 미니멀하게 운용하는 능력이나,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재치 있고 유머러스한 표현들은 윤재성의 시적 재능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었다. 자신의 시가 가닿을 수 있는 언어적 반경을 고찰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인상적이었고, 그것을 통해 그의 시적 자의식과 세대 의식이 형성되는 과정을 엿볼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하지만 그의 시적 재능이 지나치게 메타 시적인 층위에 집중되어 있다는 다른 심사위원의 지적이 있었고, 형식적으로나 스타일적으로 다양성과 개성이 부족해 보인다는 평가가 제기되었다.
당선작으로 결정된 장미도의 「FRACTAL」 외 9편은 다채로운 시적 이미지들을 통해 삶과 정서를 섬세하게 형상화하는 능력이 돋보였다. 이러한 능력의 토대가 되는 것은 「젤리의 사생활」과 「사이에 선」에서 선보이고 있듯, 언어적 이미지들의 파생적 운동을 통해 제시되는 삶에 대한 깊은 통찰과 관찰력일 것이다. 물론 응모작들 사이에 시적인 편차가 존재할 뿐만 아니라, 신인으로서 으레 기대되는 신선함이 다소 부족해 보이는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해야 하는 일보다 할 수 있는 말을 하자 그것이 언젠가 해야 하는 일이 되도록”(「Δ델타 Δ의 방」)이라는 문장이 환기하고 있듯, 장미도의 섬세하고도 예민한 관찰력이 언어에 대한 성찰적 자의식과 긴밀하게 관련 있다는 점은 심사위원들의 신뢰의 근거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당선자에게 아낌없는 축하의 인사를 건넨다._강동호(『문학과사회』 편집동인)
응모된 작품들에서 꿈, 편지, 그리고 그 매개를 통해 전달되는 죽음의 메시지가 반복해 읽혔다. 절친한 사람이거나 절연하고 싶은 사람에게 ‘나에게 이러이러한 일이 있었단다’ 하고 말하고자 하는 욕망이 주를 이루는 이야기들이었다. 어째서 모든 삶은 고통스럽고 그 고통은 누군가에게 이야기함으로써 일말의 위안과 희망을 얻게 되는지. 나에게 주어진 숙제처럼 응모작들에 둘러싸여 답하지 못할 그 물음을 오래 붙잡고 있었다. 그러고 나자 ‘그런데 왜 이 이야기를 하필 시로 써야 했을까’ 하는 물음이 뒤따랐고, 이 물음에 어느 정도 답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작품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단발성의 기분이나 일시적인 마음의 양상, 편지나 일기장 위에 적고 나면 이내 후회하고 마는 상념들. 그런 이야기는 매력적이었지만 어딘가 충분하지 않았다. 자기 안에 머무르는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의 삶 속으로 이끌고 들어가보려는 의지가 엿보이지 않았기 때문일까. 그것은 공동체의 삶에 대한 상상력의 부족으로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에 지나치게 함몰된 나머지 그 밖의 것에는 무심해짐으로써 한편으로는 누구보다 진솔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뿐인 이야기들이 말이다. 나의 고통을 들여다보는 일은 너무나 고통스럽다는 동어반복적인 진술을 돌파하고 난 이후에 어떤 말을 할 수 있을지가 궁금한 이야기들이 많았다는 점이 아쉬웠다.
본심에 오른 작품들 중에서 오래 손에 쥐고 있었던 것은 윤재성의 「원정」 외 9편, 차현준의 「거기에 무성한 측백나무와 아카시아에 대해」 외 9편, 나헌의 「Bälgetreter」 외 12편, 장미도의 「FRACTAL」 외 9편이다. 윤재성의 시는 단문들의 리드미컬한 연쇄를 통해서 선명한 장면을 연출하는 능력이 돋보였다. 하지만 이 장면이 어떤 의미 있는 이야기로 이어질 수 있는지, 어떻게 다른 삶으로 건너갈 수 있게 해주는지에 대한 골몰이 부족해보였다. 차현준의 시는 꽤 긴 길이인데도 불구하고 특유의 긴장감을 조성하여 한 편 한 편이 시로서 완결성을 갖추고 있어 보였다. 하지만 묶인 작품들 가운데 감각적인 진술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일화 같은 가벼운 상상력에 머무는 듯한 작품들이 더러 있다는 점이 아쉬웠다. 나헌의 시는 일필휘지의 솜씨를 보여주는 작품들이었다. 암호처럼 쉽게 풀리지 않는 말들, 요철처럼 도드라지는 말들의 연속으로도 안정적인 서정의 풍경을 연출해내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그럼에도 해독의 어려움은 이 이야기를 옆사람에게 추천하는 일 또한 어렵게 만들었다.
장미도의 시에서 눈에 띄었던 점은 무엇보다도 선(線)과 경계에 관한 독특한 관찰이었다. 나와 너를 가르는 모종의 경계들에 관한 시선은 지금껏 다른 많은 좋은 작품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이것과 저것을 구분하는 일의 불온함, 혹은 그런 잣대를 만들고 바라보는 일들의 폭력성에 대해서 더 이상 다르게 말할 방도가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던 참에 「FRACTAL」 외 9편이 보여준 장면들은 말 그대로 참신했다. 「FRACTAL」에서 음악과 기억의 흐름이 상반되게 흐르며 만들어내는 긴장은 너무나 잔잔하고도 분명해서 충격적이었다. 이 상충의 장면은 “밤이 오면 산은 하늘보다 어두워진다”는 것, 개미가 “앞면에서 앞면의 이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바라보는 차분한 시선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에서 믿음이 갔다. 어떤 작품이 요즘의 독자에게 유쾌한 이질감과 생소함, 그로부터 이 세상을 조금 다르게 볼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할 수 있다면 그것은 강렬한 호소나 파괴적인 충돌의 표현으로가 아니라 이처럼 섬세하고도 분명한 확인의 기록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은 어떤 강렬한 해체보다도 더욱 힘센 시선과 목소리일지도 모른다. 자신을 소진하지 않으면서도 단단한 바위를 뚫는 낙숫물처럼, 그 한 방울의 섬세한 분명함처럼 말이다.
응모해주신 모든 분의 환한 밤과 검은 낮을 기억하며 아낌없는 응원을 보낸다. 우리는 어쩌면 이미 항상 이어져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당선자에게 깊고 기쁜 응원과 인사를 보낸다._김나영(문학평론가)
나를 잘게 쪼개도 내가 남는다
김혜순의 『여성, 시하다』(문학과지성사, 2017)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심사에 임하기 전에 곱씹고 들어갔다.
시인이란 어떤 존재들인가. 그는 현실 속을 달려가는 사람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외줄을 타는 사람이다. [……] 시는 유리보다 투명하게 한 인간의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비추는 매체다. 모방하면 모방을 비추고, 눈 감으면 눈 감은 그를 비추고, 폼 잡으면 폼을 비춘다. [……] 시에는 이 짧은 문장 안에 ‘나’라는 허구를 몽땅 구겨 넣어야 하는 이행이 필요하다. 그러기에 시는 표현의 발명이고, 미학적 현상이다. 부재의 설계도 내지는 투시도를 넘어선 부재의 건축이다. (pp. 123~24)
‘현실이라는 외줄’ 위에 서서 시인은 딴생각을 한다. 자꾸 딴청을 피우려고 한다. 여기가 아닌 어딘가를 상상하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지는 “한 인간의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비추려고 한다. 구석에 웅크리고 있어도, 가면을 쓰거나 베일 뒤에 가려져도 나는 다름 아닌 나이기 때문이다. “‘나’라는 허구를 몽땅 구겨 넣어야 하는 이행” 속에서 나는 발생하고 확장된다. ‘나를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나를 무엇을 통해 표현할 것인가’가 백지 위에 적힌다. 동시에 그것은 쌓이기 시작한다. 신인은 백지를 처음 바닥에 까는 자일 거다. 그것을 어디에 깔지, 어떻게 깔지가 중요할 것이다.
위의 문장은 다음의 문장으로 이어진다. “시는 무엇에 쓸모가 있을까. 세상 모든 것들이 지닌 생과 사의 무게를 슬쩍하여 무중력으로 만드는 것이다.” 쓸모없음에서 출발해서 “생과 사의 무게를 슬쩍하”는 일, 잠시 우주가 되는 일, 신인은 우주에 첫발을 내디딘 사람일 것이다. 여기가 우주인지 몰라 자기도 모르게 기울어지기도 하면서, 그런데 이 느낌이 왠지 싫지 않아서 자꾸 빙빙 돌기도 하면서.
「원정」 외 9편을 응모한 윤재성의 시는 맴도는 시였다. 어딘가를 맴돌아 출발 지점으로 다시 돌아오는 시, 이것을 복귀나 귀환이라고 칭할 수도 있을 것이다. “너희가 돌아와 들려주었다”(「원정」)라는 구절에서처럼 보았거나 본 것 같은 매혹적인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결구가 주는 분명함과는 달리 갸웃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여기와 거기는 모두 미지(未知)의 상태라 세계의 형상을 그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환기(喚起)가 설득에 가닿으려면 붙박고 있는 공간은 선명해야 한다.
「Sunset Shake」 외 9편을 응모한 김나우의 시는 휘도는 시였다. 그는 지구든 마음속이든 어디든 뱅글뱅글 돌 수 있었다. 문장과 문장을 가로지르는 자유분방함과 차원을 넘나드는 상상력이 아니면 휘도는 일은 금세 시들해질지도 모른다. 그의 시에서 아지랑이가 걷어차이고 경계가 둥둥 떠오르는 것은 예삿일이다. 이 예삿일을 어떤 경지에 다다르게 만드는 것은 구심력일 텐데, 종종 원심력이 훨씬 더 강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소화하지 못하고 이탈하는 경우가 있었다.
「Bälgetreter」 외 12편을 응모한 나헌의 시는 외도는 시였다. ‘오르간의 송풍(送風)용 풀무를 밟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표제작 제목처럼,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연주를, 외돌기를 그만두지 않을 것 같았다. 외따로 돌지만 시선을 거둘 수 없게 만드는 매혹이 있었다. 반복되면서 변주되는 문장들은 묘한 리듬감을 형성하며 시의 매력을 더한층 돋보이게 해주었다. 그러나 문장과 문장 사이의 긴장이 시와 시 사이의 그것으로 연결되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패턴을 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부수면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의지도 필요하다.
「김초롬」 외 9편을 응모한 김초롬의 생생한 목소리를 기억할 것 같다. 발화(發話)가 발화(發火)하다가 발화(發花)가 되는 순간이 인상적이었다. 「거기에 무성한 측백나무와 아카시아에 대해」 외 9편을 응모한 차현준은 문장마다 숨통을 틔울 줄 알았다. 앞으로도 그가 문장의 이랑과 고랑을 오가며 경작을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마지막 바다에서」 외 9편을 응모한 이혜리가 들려주는 말에 귀 기울이던 시간도 잊을 수 없다. 물결이 숨결이 되고 빗줄기가 빛줄기가 되는 문장을 계속 써주었으면 좋겠다.
장미도의 「FRACTAL」 외 9편은 감도는 시였다. 다 읽고 나면 사라지지 않고 자꾸 아른거리는 게 있었다. “스스로 물속에 뛰어든 개미가 있을까”(「FRACTAL」)라는 질문이 턴테이블 위에서 빙글빙글 도는 장면을 상상했다.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 문제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시를 쓰는 것은 아니다. 시를 쓰면서 더 많은 질문이 만들어질 것이다. 개중 어떤 것은 생각지도 못한 질문일 것이다. “젤리는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젤리는 불쑥 끼어들”(「젤리의 사생활」)기를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 질문에서 발산해서 질문으로 수렴하는 과정을 반복할 것이다.
‘프랙털fractal’이라는 개념은 임의의 어떤 부분이 전체의 형태와 닮은 도형을 가리키는 수학적 용어다. 턴테이블 위의 엘피반은 끊임없이 돌면서 자기 자신에게 가까워진다. 구름이 피어오르면서 ‘그 구름’이 되듯이, 문장이 문장을 끌어당기면서 ‘그 문장’에 가까워지듯이. 그래서 시를 쓰는 일은 나를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다. 장미도가 앞으로 시를 쓰면서 ‘나도 몰랐던 나’를 마주하는 일이 많았으면 좋겠다. 나와 닮은 모습이 나타나 화들짝 놀라기도 하면서, 김혜순 시인이 말한 것처럼 “‘나’라는 허구를 몽땅 구겨 넣”으면서, 한 발 한 발 자발적으로 나에 가까워지면서.
나를 잘게 쪼개도 내가 남는다. 나는 남는다. 백지 위에서 본격적으로 “부재의 건축”을 시작할 당선자에게 축하 인사를 전한다. 아울러 응모해주신 모든 분께 고맙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 읽으면서 정말 좋은 자극을 받았다. 덕분에 실로 오랜만에 시가 쓰고 싶어졌다._오은(시인)
내내 지켜내고 싶었던 태도는 수평적 시선을 유지하자는 것이었다. 대면하고 있는 세계의 성질이 어떠하든 쓰는 이의 시선으로 작품을 끝까지 따라 읽으며, 그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시적 지점과 슬쩍 풀어놓는 순간에 손에 쥐게 되는 세계를 함께 경험하고자 했다. 결국 닿아야 하는 지점까지 밀고 나가면 즐거웠고 그보다 더 나아간다 싶을 때는 경탄의 마음으로 응원했다. 다만 스스로의 감정이나 인식의 무게를 견디기보다 시어가 기존의 의미로만 소모되고 있을 때는 아쉬웠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이르기까지 응모작들을 따라 읽는 과정에서 차현준, 김초롬, 이혜리, 윤재성, 장미도의 작업에 시선이 갔고 마음이 머물렀다.
차현준은 소박할 정도로 평이한 소재와 상황을 다채롭게 운용하는 방식으로 시적 지점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거기에 무성한 측백나무와 아카시아에 대해」 「밭고랑」 「제자리」 등에서 흥미로웠던 건 직진의 언어다. 망설임 없이 지속되는 호흡을, 그가 펼쳐내는 바로 그 속도에 맞춰 따라 읽는 즐거움이 있었다. 이혜리는 「내가 알고 있는 모든 마지막 바다에서」 「내일 양떼 목장에 비가 온다고 해」 등의 작품에서 장면을 낙차가 있는 시·공간으로 분할시켜나가는 유려한 시적 전개를 보여주었다. 「라임이 있는 정물을 그리는 너의 초상」의 정물에서 발생하는 고요한 꿈틀거림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집중력과 감각도 좋았다. 김초롬은 「김초롬」이라는 표제작에서도 드러나듯 스스로를 텍스트 삼아 도처에서 압박해오는 관음증적 시선과 목소리를 스스로 발화하는 방식으로 비틀어 보여주고 있었다. 날것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불편함은 그의 개성으로 읽혔으며, 설득력 있게 확장하기 위한 모색을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윤재성과 장미도는 여럿에게 고른 주목을 받은 경우였고 본심에서 논의의 대상이었다. 윤재성의 「원정」 외 9편이 지닌 장점은 분명했다. 간결한 구조, 문장과 문장 간의 여백에서 발생하는 긴장, 축적된 긴장을 한번에 틀어쥐며 정념을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결구가 매력적이었다. 또한 감정의 주체를 대상화하는 중층의 시선을 통해 감정을 지연시키는 효과를 능숙하게 다루는 점도 눈에 띄었다. 시를 반복해서 읽고 싶게 만드는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그가 능숙함에 기댈 때 시적 긴장이 감소하고 있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었다. 장미도의 「FRACTAL」 외 9편은 공간을 물질화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운동성이 매력적이었다. 접촉하고 이동하고 휘어지는 가운데서 만들어지는 질감들이 그에 상응하는 정서와 섞여들 때의 묘한 활력이 그의 시를 끝까지 읽게 만들었다. 읽는 이를 단숨에 사로잡는 건 아니지만 그가 단단하게 구축해놓은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서서히 빠져들게 되는 경험은 귀한 것이었다. “수평선 깊숙한 곳에서부터 탄생한 혀로”(「레이스와」) 그려내는 그의 세계에 기꺼이 손을 내밀 수 있어 기쁘다. 무엇보다 시인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고 싶다._임승유(시인)
[심사평_소설]
올해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소설 부문 응모자는 총 501명이었다. 여러 편을 보내온 응모자도 있었으니 심사 대상 작품 수는 천 편이 훌쩍 넘었다. 2주 넘는 예심 기간을 거친 결과, 다섯 심사위원이 본심에 올린 응모자는 총 11분, 작품 수로는 21편이었다. 위로와 격려 삼아 그 목록을 여기 적는다. 함윤이의 「우리의 적들이 산을 오를 때」 외 1편, 고하나의 「자라는 놀이터」 외 1편, 김순신의 「여간해선 베이컨샌드위치를 먹지 않는다는 것」 외 1편, 정해준의 「램프 구간」외 1편, 여주완의 「근로하는 자세」 외 2편, 이서아의 「검은 말」 외 1편, 윤성윤의 「밖이 안을 보는 방식」 외 1편, 이슬기의 「사각사각」 외 1편, 구소현의 「요술 궁전」 외 1편, 조인영의 「백인 예수를 위한 블루스」 외 1편, 문선의의 「감정은 수용성」 외 1편이 그 작품들이다. 개인적으로는 「요술 궁전」 「감정은 수용성」 「검은 말」 「백인 예수를 위한 블루스」 이렇게 네 편에 눈이 갔다. 그러나 「백인 예수를 위한 블루스」는 본심 과정에서 끝까지 논의된 네 작품에 들지 못했다. 재기발랄하고 실험적인 예술가 소설로서 손색이 없었으나, 직전 세대 몇몇 작가가 이룬 성과를 넘어설 만큼은 아니라는 의견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요술 궁전」 「검은 말」 「램프 구간」 「감정은 수용성」 이렇게 네 작품을 두고 심사는 길어졌다. 「램프 구간」은 고단한 삶의 한 단면을 마치 단편영화처럼 깔끔하게 담아낸 구성력이 돋보였다. 그러나 소품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었다. 「감정은 수용성」은 죽은 언니의 ‘세탁기’라는 소재 하나로 묘하게 애틋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솜씨가 남달랐다. 그러나 ‘부재하는 타자’의 삶을 재구성하는 서사가 지나치게 낯익었다. 결국 심사가 길어진 것은 「요술 궁전」과 「검은 말」 두 작품 때문이었다. 전혀 결함이 없는 작품들이라고 할 수는 없었으나 각 작품이 가진 매력이 워낙에 남달라서, 나에게는 두 작품 중 하나를 고르는 일이 마치 무슨 엄청난 내기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검은 말」은 아주 실험적인 작품이었는데, 그 실험이 인위적이라기보다는 작자의 기질로부터 자연스레 흘러나온 것처럼 읽혔다. 그러다 보니 작품 속에 내장된 에너지가 굉장했다. 작가의 신체와 문장이 분리 불가능하게 결합되어 있는 글쓰기랄까? 그러나 바로 그 같은 특징이 고스란히 이 작품의 한계로 작용하기도 했는데, 나로서는 그 강력한 내부 에너지가 얼마간 형이상학적인 사유나, 혹은 얼마간 정치적인 발언 쪽으로 외향하기를 바랐다. 물론 「요술 궁전」 외 1편(「수수께끼를 푸는 방식」)도 결함이 없지는 않았다. ‘타인의 고통과 자기 윤리’라는 주제는 현재 한국 문학장의 트렌드다. 두 작품은 익숙하게도 그 자장 안에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는 언어적인 섬세함이 남달랐다. 장애를 가진 두 주인공이 나누는 대화는 소소했으나, 그 대화 속에서 오고 가는 감정의 지출 비용이 어마어마했다. 고통과 분노, 사랑과 연민, 절망과 인내가 뒤섞인 그들의 대화를 읽는 일은 몹시 불편했는데, 그 불편함이 나는 좋았다. 「검은 말」과 「요술 궁전」 사이에서의 오랜 망설임 끝에, 후자 편에 손을 들었던 것도 실은 그 불편함 때문이었다. 부디 이 작가가 오래오래 독자들을 불편하게 해주기를 바란다는 말로 축하를 대신한다. 그리고 다른 응모자들에게는 미안함과 위로를 함께 전한다._김형중(『문학과사회』 편집동인)
신인상 심사에서 소설을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하게 다뤄져야 하는 덕목은 무엇일까? 본심에 올릴 작품을 추리는 동안, 꽤 여러 번의 결정을 내렸다가 번복하기를 반복했기 때문에 유독 그런 고민을 많이 했다. 다른 심사위원들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예심 때 읽었던 소설 중에서는 이른바 문지 스타일이라고 할 만한 소설도 다수 있었다. 물론 이런 식으로, ‘문지 스타일’이라는 표현을 쉽게 쓰는 것이 어떤 오해를 불러일으킬까 봐 걱정도 되지만, 여하튼 실험성이 강한 소설들—사유가 중심이 되는 소설이라든지, 이야기의 구조를 파괴한다든지, 형식의 특이함을 강조한 소설이라든지—이 있었다.
그중에서 내 마음을 끈 것은 「검은 말」이었다. 검은 말– 총으로 이어지는 이미지의 매끈함, 제목부터 시작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에너지를 느끼게 하는 작품이었다. 장면과 장면이 딱히 유기적으로 연결되거나 인과성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 전체를 계속해서 끌고 가는 작가의 기묘한 힘이 느껴졌다. 어떤 장면, 대사, 이미지, 도형은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말 그대로 검은 말처럼 전속력으로 나아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장점이 때때로는 단점으로 작용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마치 눈가리개를 한 말의 시선이 오로지 앞으로만 가게 되는 이치랄까. 때때로는 작가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어 한다는 인상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언제나 단점이 될까? 적어도 신인상 심사에서는 단점이 될 수도 있다.
당선작으로 뽑힌 「요술 궁전」은 조용하지만 이상한 방식으로 독한 소설이었다. 처음에 내게는 장점이 잘 잡히지 않았다. 나는 이 소설이 인물들을 설명하는 데에 너무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러 번 다시 읽어본 후에, 나는 이 작가가 왜 이렇게 인물들에 대해 끊임없이 말하는 데 집중하는지 알 것 같았다(사실 여러 번 반복해서 읽었을 때 어떤 감정들을 새롭게 느낄 수 있게 만드는 것도 이 소설의 장점이다. 어떤 소설들은 처음에는 굉장히 잘 쓴 듯 보이지만, 여러 번 읽는 동안 그 좋은 느낌이 사라진다). 이것은 이 작가가 가지고 있는 어떤 ‘용기’와 관련된 것이었다. 자신이 그리고 싶은 세계를 확실하게 알고 있다는 듯한 신뢰감과 그것을 위해서라면(어떤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쓰고 싶은 걸 끝까지 밀고 나가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개인적으로 같이 보내온 다른 작품 「수수께끼를 푸는 방식」도 무척 흥미로웠다. 심사위원들 사이에서 이 소설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는데, 다른 심사위원이 단점으로 지적했던 어떤 부분이 내게는 오히려 장점으로, 그러니까 신인 작가가 부릴 수 있는, 혹은 부려야 하는 용기라고 생각되었다.
당선자에게는 아낌없는 축하를 보낸다. 본심에 올라와서 여러 번 언급되었지만, 아쉽게 떨어진 작품의 작가들도 계속해서 용기를 내주시기를 바란다._손보미(소설가)
오래전에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에 응모했는데 떨어졌다. 한 번 떨어진 건 아니고 몇 해에 걸쳐 반복적으로 떨어졌다. 마지막 응모했을 때는 생애 처음으로 최종심에 올랐는데, 떨어졌다. 심지어 그해는 당선자도 없었다. 최종심에 올랐다는 기쁨 반 그럼에도 불구하고 떨어졌다는 실망 반으로 심사평을 읽어봤더니 칭찬 일색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고 저쩌고 하더니 결과적으로 떨어뜨렸다. 심사를 하면서 계속 그 생각을 했다. 애써 쓴 원고들을 대충 읽지 말자. ‘취향이 아니다’ ‘어렵다’ ‘난해하다’ ‘익숙하다’ ‘문장 뭐지?’ 등의 사적인 인상으로 선입견과 편견을 갖지 말자. 무엇보다 아무리 합의가 어렵더라도 이 많은 원고 중에서 한 편을 뽑는 선택을 결코 다음으로 미루지 말자.
본심에 오른 작품들은 기본적으로 잘 쓴 소설이었고 작가의 개성과 매력이 문장과 장면마다 스며 있었다. 특히 인상 깊게 본 소설들에 대해 언급해보면 「우리의 적들이 산을 오를 때」가 시작이 좋았다. 인물들도 개성이 있었고 그들의 행동에 의문점이 계속 발생해서 서사적인 기대도 높아졌다. 그런데 중심 서사가 본격적으로 펼쳐지면서 매끄럽지 않다는 인상을 받았다. 시간과 공간이 변하면서 다른 소설을 읽는 기분을 느꼈고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앞부분과 뒷부분의 뉘앙스와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인상을 받았다. 소재도 모티프도 좋았으나 완성도 측면에서 아쉬움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자라는 놀이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철봉 장면이 바로 떠오를 만큼 진술과 묘사가 매력적이었다. 전개되면서 예상을 빗나간 소재들이 하나로 뒤섞이며 낯설고 동시에 새롭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전개되는 내내 묘한 분위기가 있었는데 그 자체로 서사의 새로움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각각의 요소가 유기적으로 연결되거나 자연스럽게 흡수되는 것 같지 않았다. 뭐랄까, 옷감도 좋고 디자인도 좋지만 마감이 좋지 않아 계속 바느질 자국이 보이는 옷을 입고 있는 기분이랄까. 근사했으나 편하지 않았다. 「램프 구간」은 좋은 소설이었다. 남편과 아내의 소소한 이야기를 느닷없는 해프닝이 일어나는 소설적 공간에서 펼쳐냈는데 단편소설 특유의 장점을 살려 잘 다뤘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작은 이야기 속에 사회문제와 현실 인식이 적절하게 들어 있어 읽고 난 후에 계속 곱씹어 생각해볼 부분도 있었다. 그런데 서사가 해프닝 이상으로 느껴지지 않았고 읽을 때는 좋게 느껴졌던 소소함이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분량에 비해 작고 적다고 느껴졌다.
최종심에서 깊게 다룬 작품은 「검은 말」과 「요술 궁전」이다. 두 작품은 상반된 매력으로 다른 방식의 소설적 재미를 갖추고 있었다. 「검은 말」은 소설이 여전히 더 나아갈 곳이 있으며 동시에 여전히 유효하고 유용한 언어예술이라는 것을 깨닫게 했다. 작가의 지문이 분명하게 찍혀 있는 문장들. 음성이 없는데도 기이하게 문장에서 들려오는 작가의 목소리. 그리고 기존의 서사를 초월하고 능가하는 자의적인 진술과 서사 진행이 탁월했다. 「요술 궁전」은 이야기와 이야기가 한 이야기 안에 겹쳐지고 쌓여 또 다른 이야기로 합쳐지는 재미를 맛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 일반적으로 이런 구성에서 쉽게 메타적인 방식과 형식에 빠져 매여 있기 마련인데 균형 감각이 좋았고 이야기와 소설적 상황에도 충실해서 다 떠나서 그냥 하나의 서사로도 무리 없이 읽히는 능숙함과 장점이 있었다. 두 작품은 심사위원들의 말과 논점에 따라 이렇게도 보였고 저렇게도 보였다. 무엇이 더 잘 썼고 무엇을 더 좋다고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경향과 스타일, 익숙함과 새로움, 상투와 실험, 같은 단어들을 사용하며 논의를 이어나갔다. 결과적으로 「요술 궁전」을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마지막까지 결정을 유보하며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각자의 판단과 선택을 의심했지만 결정을 번복하지는 않았다. 「요술 궁전」의 작가에게 축하의 인사를 전한다. 앞으로 더 좋은 소설 더 많은 소설로 좋은 의미의 놀라움을 안겨주는 작가가 되길 기대하고 부탁한다. 동시에 「검은 말」의 작가에는 계속 써줄 것을 부탁하고 싶다. 계속 읽고 싶다. 더 많은 글과 강하고 풍성한 언어가 더 멀리 가는 모습을 목격하고 싶다. 그러니 부디 쓰기를 멈추지 말았으면._정용준(소설가)
이제 현실보다 초현실적인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일까? 응모작들을 살펴보는 내내 이 물음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바꿔 말하자면, 오늘날 상상력은 문학과 미학의 영역에서 더는 유효한 (혹은 유용한) 기준으로 작용할 수 없게 된 듯 보인다. 하기야 게임의 핍진감이 영화의 설득력을 훨씬 상회하고, 증강 현실이 실물 경제와 흥정을 벌이게 된 마당에 기껏 자음과 모음의 조합에 기댈 수밖에 없는 상상력에 어떤 거창하고 압도적인 초현실을 창조해내기를 요구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무망한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사정을 십분 감안한다고 해도, 상당수의 응모작이 거침없이 보여준 소박하고 안이한 현실감각, 그리고 그 감각에 기대어 주구장창 늘어놓은 지극히 주관적인 감정들과 한없이 구구한 사연들 앞에서 나는 어떤 섬뜩한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바야흐로 초현실의 상실이라는 (역설적인) 현실이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눈앞에 펼쳐진 듯했기 때문이다. 문학적 상상력의 가치와 쓸모, 예술적 투쟁의 의미와 이상, 이런 표현들은 이제 어느 외진 도시의 작은 박물관에 딸린 허름한 창고에 조용히 처박히는 편이 오히려 더 어울리지 않겠는가 하는 비관적인 생각마저 들었다. 과거의 예언자들, 즉 현재로부터 버림받은 역사학자들만이 멀고 가까운 미래에 그곳을 찾을 것이다, 각기 다른 무망한 바람들을 안고서.
하지만 나는 여전히 문학의 존재 양식은 오직 팔림프세스트palimpsest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는 믿음을 간직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혹시 다음 작품들에서 오랫동안 무분별한 덧쓰기에 의해 지워져버린 어떤 희망의 기호를 어렵사리 일별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작품들이란 구소현의 「요술 궁전」, 김순신의 「여간해선 베이컨샌드위치를 먹지 않는다는 것」, 이서아의 「검은 말」, 정해준의 「램프 구간」이다. 역순에 따라 간단한 감상평을 적기로 한다. 「램프 구간」은 가벼운 리얼리티를 감각적으로 살린 장점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서사의 전개가 빠르고 문체 역시 그에 걸맞게 경쾌한 리듬을 구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장점이 본격적인 긴박감을 선사해주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익숙한 일상 세계에 대한 묘사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현실의 질서 자체에 내재한 어긋남discrepancy을 충분히 보여줄 수 있을 텐데, 이 작품은 그 지점에 대한 성찰과 고려를 담아내지는 못한 듯 보인다. 다음으로, 「검은 말」은 당선작과 끝까지 경합을 벌였던 작품이다. ‘진실된 총’이라는 불가능한 사물을 창조해낸 뒤 언어의 차원에서 그것을 삭제하지만, 이러한 언어적(=문학적) 삭제 행위는 근본적으로 불충분하고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통찰을 세련된 언어 감각으로 풀어내고 있다. 하지만 배경의 설정과 인물 간의 구도가 다소 산만하고 파편적이며, 자신이 직접 창조한 상징에 대한 서사적 처리가 미숙하다는 단점을 노정했으며, 무엇보다 서사 자체가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전개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여간해선 베이컨샌드위치를 먹지 않는다는 것」은 응모작들 가운데 가장 안정감 있는 문장 구사력을 보여준 작품이다. 하지만 깔밋한 한국어 감각의 소유자임을 짐작게 한 문체상의 장점은 장황한 서사 전개가 주는 지루함과 평면적인 인물상에 의해 쉬이 반감되고 말았다. 더 압축적인 사건 전개 방식을 택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당선작인 「요술 궁전」은 도입부가 다소 진부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간결한 문장과 건조한 어투에 의해 차분히 직조된 서사는 식상한 도입부를 곧장 잊게 만들 만큼 묵직하게 매력적이었다. 작품을 읽어나가면서, 마치 칠흑 같은 어둠이 새벽안개와 손을 맞잡고 온 세상을 휘감고 있는 양 우중눅눅한 느낌에 깊이 젖어들었다. 결말의 타당성을 두고 심사위원들 간에 약간의 설왕설래가 있었으나, 이것이 「요술 궁전」을 당선작으로 뽑는 것에 대한 이견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선우와 환의 산책이 그러했듯이, 작가의 미래 역시 ‘생각보다는 춥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당선자에게는 축하와 응원의 말을 전하며, 이로써 다음을 기약하게 된 수많은 미래의 작가들에게는 건투를 기원한다._조효원(『문학과사회』 편집동인)
심사의 즐거움이 있다면(노동에 가까운 예심 과정과 단 한 편을 선택해야 하는 압박감에 불구하고) 소설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이 현재 무엇에 골몰하고 있는지 엿볼 수 있다는 것. 무엇을 읽고 무엇에 목말라하며 무엇을 향해 가닿고 싶은지. 그렇게 엿본 어떤 세계가 대단히 특별한 신세계여서가 아니라, 보통의 시간에 가만히 차오르는 물음의 세계일 때, 그 세계가 참으로 소중하고 어여쁘게 느껴지면서 고마운 마음까지 드는데, 그게 바로 심사의 즐거움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또 심사를 마치고 난 후에, 당선작이 아니라 다른 작품에 유독 마음이 쓰일 때가 있다. 심사 과정에 아쉬움이 남았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저 마음이 자꾸 쓰인다는 것. 마음이 쓰인다는 건 뭘까. 어쩐지 다독여주고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일까? 비록 지금은 어설프고 울퉁불퉁한 면이 많지만, 당신이 구축해나가고 있는 세계가 퍽 아름다우니, 제발 여기서 소설 쓰기를 멈추지는 말아달라 부탁하고 싶은 마음일까? 우리는 구소현의 「요술 궁전」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사랑의 양가감정에 대해 곰곰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었고, 함께 보내준 작품과 더불어 이어질 세계가 궁금해지는 작가였다. 그의 작품은 이제 지면에서 볼 수 있으니 안심. 그러니 이번 심사평만큼은 최종 선택을 받지 못했으나 유독 마음이 쓰이는 몇몇 작품에 대해서 더 많은 얘기를 해주고 싶다. 그들이 계속 소설을 써주기를 바라면서. 정해준의 「램프 구간」은 답을 주는 소설이 아니라 질문을 완성해나가는 소설이다. 복직을 앞둔 남자에게 새 출발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에서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한 물건은 무엇인가로 이어지다가, 그 무엇을 선택하기 위한 기준에 대해, 그러고 난 후의 삶에 대해 고민한다. 새 출발을 위해 가지고 나온 것이 출입문을 자유자재로 통과할 수 있는 사원증이 아니라 자신에 대해 좋은 문구가 씌어져 있는 롤링 페이퍼임을 알게 되었을 때,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마지막 질문을 완성한다. 설렘을 주는 것은 무엇인가. 질문의 연쇄가 물 흘러가듯 자연스럽고 섬세하게 흐른다. 질문을 제대로 던질 줄 안다는 것. 좋은 소설에 닿기 위한 정직한 자질을 가졌다. 그 힘으로 당신의 램프 구간도 묵묵히 걸어 나가 주기를. 여주완의 「근로하는 자세」 「바를 정」 역시 노동과 일,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일관된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은 안쓰럽기 그지없는 한 인물의 고군분투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다만 한 개인의 좌절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던져진 파문이 뒤늦게 타인에게 도착할 때 진가가 발휘된다. 문선의의 「감정은 수용성」은 특히 마음이 많이 쓰인 작품이었는데, 공간과 사물에 대한 탁월한 인식도 그렇고, 적절한 유머 감각과 적당한 감정 조절과 뛰어난 균형 감각이 특히 돋보였다. 갑작스러운 언니의 죽음 앞에서, 누군가의 실수로 죽은 아기 앞에서, 처절하게 절규하는 대신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드는 방식을 통해 애도를 완성하기란 쉽지 않은 일일 터. 무심한 듯 던져진 문장에서 은근한 아픔이 느껴졌달까. 그리하여 도착한 질문은 서늘하면서도 따뜻한 기운으로 서서히 스며들며 곱씹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참으로 소중한 자질이라 여겨졌다. 부디 멈추지 마시길._천운영(소설가)
[심사평_평론]
일정한 수준을 지닌 비평 응모작들이 예년에 비해 많이 늘어났다는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전반적으로 비평이 위축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상황을, 새로운 기운들이 역전시켜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젊은 글들을 읽었다. 동시대 작가들을 대상으로 한 작가론이나 작품론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우리 시대 문학의 징후를 예리하게 파고든 응모작들도 적지 않아 전반적으로 긴장감 넘치는 심사 독서의 풍경을 연출했다.
비평 심사장의 마지막 책상 위에는 4명의 응모자들이 쓴 5편이 놓여 있었다. 유지안의 「환멸의 끝—임솔아가 그리는 세계」는 임솔아의 문학을 환멸의 상상력으로 해석하려 했는데, 번뜩이는 기지와 도전적 시도가 돋보이나 조금 큰 그물로 대상을 논의하다 보니 임솔아 문학만의 개성적 특징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주었다. 홍이수의 「다성성의 미래와 사실주의의 현재—정지돈 작품에 대한 몇 개의 주석」은 폭넓은 독서 경험을 가로지르며 정지돈 소설을 매개로 하여 동시대 사실주의 문학의 역할과 의미를 성찰한 글이다. 독서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축조되는 정지돈 소설처럼 이 글 또한 아카이브의 성격이 강한데, 그것이 장점이자 약점이 되었다. 비평이 독서 과시의 장이 될 수만은 없음을 생각하게 한다. 한 편의 글로서 유기적 구성이 약하고 문장의 가독성도 다소 떨어지는 편이다.
김보경의 「인간의 가장자리로 걷기—여성, 동물, 기계」는 표제가 이미 시사하는 것처럼 매우 도전적인 평문이다. 우리 시대 현대시의 새로운 풍경을 여성, 동물, 기계 등 세 맥락에서 예리한 징후 독법으로 풀어냈다. 논점들이 흥미롭고 그 비평적 에너지가 어지간한 편이다. 다만 셋 다 중요한 맥락이지만 그 어느 하나에 초점을 맞추어 더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점, 각주가 다소 난삽한 느낌을 준다는 점 등이 안타까웠다. 반면 「괴물의 진화론—내 안으로 돌아오는 타자들」과 「다시 만나는 세계—여성 성장 서사의 의미」 등 2편으로 최종심에 오른 예비 비평가 황유지는 문학적 교양이나 작품 감식한, 문장력, 자연스러운 논리의 전개 등 여러 면에서 원숙한 경지를 보였다. 기성 비평가의 글 못지않은 일정한 성취를 두 편 모두에서 거두었다. 그렇지만 비평적 논점의 참신성이나 혁신성은 다소 덜한 느낌이었다.
우리 심사 독자들은 마지막 순간에 뒤의 두 응모자를 놓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원숙한 안정감과 다소 거친 도전성 사이에서 골몰하다가 거친 원석의 이면에 아주 탁월한 비평적 개성이 숨어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에 기대기로 합의했다. 당선자에게 기꺼운 축하의 인사를 보낸다. 이번에 기회를 양보한 다른 응모자들에게도 조만간 의미 있는 비평의 장이 역동적으로 열릴 수 있기를 빈다._우찬제(문학평론가)
최근 몇 년간 비평 부문의 응모작은 그 양에 있어서나 글의 밀도에 있어서나 지속적인 갱신을 이뤄내고 있다. 기존의 문학잡지에서 비평에 할애하는 지면이 점차 축소되고 있는 상황이나, 각종 매체를 활용한 새로운 형태의 비평 행위가 가능해진 현실에 비추어본다면, 다분히 관습적인 형식과 분량을 요구하는 신인상 공모에 이처럼 응모작이 점차 늘고 있다는 점은 여러모로 시사적이다. 다양한 진단이 가능하겠지만, 무엇보다도 글을 통해 세상일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려는 욕망이 전혀 줄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확인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번 심사에서도 이러한 욕망들을 확인하며 뿌듯함을 느꼈다.
본심에서 중점적으로 검토한 글은 김보경의 「인간의 가장자리로 걷기: 여성, 동물, 기계」, 유지안의 「환멸의 끝—임솔아가 그리는 세계」, 홍이수의 「다성성의 미래와 사실주의의 현재—정지돈 작품에 관한 몇 개의 주석」, 황유지의 「괴물의 진화론—내 안으로 돌아오는 타자들」이다. 유지안 글의 섬세한 문제 설정은 호감과 신뢰를 느낄 만한 것이었으나 결론에 이르는 과정에서 설득력이 다소 떨어지는 점은 못내 아쉬웠다. 정지돈의 작품을 경유하여 우리 시대의 문학, 아니 예술의 존재에 대해 해명하는 홍이수의 글은 예술철학에 관한 탄탄한 사유가 돋보였으나, 작품을 인용하고 소개하는 방식이나 글을 전개하는 방식이 다소 불친절하여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한계를 드러냈다.
당선작을 결정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논의했던 글은 황유지의 「괴물의 진화론: 내 안으로 돌아오는 타자들」과 김보경의 「인간의 가장자리로 걷기—여성, 동물, 기계」이다. 황유지의 글이 보여준 미덕은 다양하다. 최근작들을 두루 쫓아 읽고 있다는 성실성을 확인시켜주었으며, 논리적 전개가 명료하고 문장이 정확하여 글의 가독성이 높았다. 비평문이 갖춰야 할 이 같은 기본기가 유난히 눈에 띄는 글이었다. 다만 ‘주체’ ‘타자’ ‘괴물’ ‘윤리’ 등의 이론적 개념어들이 최근 한국 문단의 새로운 경향이나 한국 사회의 특수성에 대한 관심을 예리하게 보여주기에는 다소 역부족이라는 판단은 들었다.
당선작은 김보경의 「인간의 가장자리로 걷기—여성, 동물, 기계」이다. 흔히 ‘자아에서 주체로의 이동’으로 정리되곤 했던 2000년대 시에 대한 기존의 평가들을 문제 삼는 이 글은, 최근 페미니즘비평이 한국 문단에 환기했듯, 비평적 행위에 있어 ‘상황적 지식’의 생산이 얼마나 중요한 원칙인지를 다시금 일깨운다. 동시대의 작품들에서 ‘동물’과 ‘기계’가 다뤄지는 방식을 ‘인간의 위치성에 대한 되물음’으로 분석하는 장면들도 수긍할 만했다. 작금의 한국 문학비평은 문학이 현실 사회와 접속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물론, 문단이라는 제도를 작동시켜온 기존의 관습에 대해서까지 적극적으로 질문하고 있는바, 최근 한국 문학비평이 보이고 있는 이러한 전복적 사유의 일면을 김보경의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서로 배우고 함께 대화할 수 있는 비평가 동료를 새롭게 만나게 되어 기쁘다는 말을 당선자에게 전하고 싶다.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_조연정(『문학과사회』 편집동인)
수상자: 장미도
장르: 시
작품: 프랙털 외
수상 소감:
슈거 비치에는 분홍색 파라솔이 있다. 호수는 너무 커서 바다처럼 보이지만 바다가 될 수 없다. 지금, 여기는 만들어졌다. 알 수 없는 믿음으로 구성된 모래는 달지 않고 근처에는 설탕 공장이 있다. 나는 무엇도 아니어서 어디에나 주저앉을 수 있다. 높아졌다 낮아지는 파도를 본다. 그 위에 내려앉는 윤슬을 본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거나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백지 위에 쓴다. 나는 자주 씀의 무용함에 사로잡히다가도 쓰는 사람으로 되돌아왔다. 오랜 시간 동안 나를 믿을 수 없어 시를 믿었다. 몇 번의 겨울과 수많은 밤을 낭비하고 아무도 모르는 계단에서 무릎을 감싸 안았다. 의심하고 질문하는 일은 익숙하지만 믿고 사랑하는 일은 어렵다. 그러나 내가 무너질 때마다, 설령 그것이 시로 인해 무너지는 것일지라도,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여전히 시였다. 쓰는 사람이기에 견딜 수 있었다. 모래는 털어내면 되고 젖은 신발은 벗어 던지면 된다. 나는 맨발로 뚜벅뚜벅 걸어갈 것이다. 나의 길이 당신을 위한 길이었으면 한다. 나의 시가 당신과 함께 날아가기를 바란다. 우리의 발자국이 서로의 용기이기를. 달콤함 뒤의 씁쓸함까지 사랑하기를.
가능성을 발견해주신 문학과지성사와 심사위원 네 분께 먼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남진우 선생님, 신수정 선생님, 편혜영 선생님. 끝없는 용기를 주신 박상수 선생님. 선생님들께 삶을 배웁니다.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겠습니다. 따듯한 한파 재진, 예진, 원경. 앞으로도 우리의 겨울은 춥지 않을 것이다. 예린, 가원 언니. 나보다 나를 믿어준 사람들. 함께 쓰는 사람이고 싶다. 꺼지지 않는 불꽃 아름 언니와 다정한 서영. 미정 언니, 선우 언니, 지원, 보혜, 지형. 수빈 언니. 학교에서 만난 고마운 인연들. 우리 모두 아프지 말자. 일상을 여행으로 만들어주는 혜주, 늘 같은 자리에서 기다려준 희수와 민혜. 김소, 다미, 은지. 어린 나를 키워줘서 고마워. 언제 불러도 애틋한 세실. 지연아. 재현아. 덕분에 터널을 통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랑을 담아 성헌에게.
존경하는 정민영 씨. 세상의 어떤 언어로도 부족한 멋진 사람. 내게 단 하나의 행운이 있다면 그것은 당신의 딸로 태어난 것입니다. 현재,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 재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내가 갈 수 있는 곳보다 더 먼 곳으로 가고 싶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돌을 던지고 퍼져나가는 파동을 응시하겠다. 분명한 목소리로 쓰겠다.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곳에서. 영원한 여름의 바다에서.
수상자: 구소현
장르: 소설
작품: 요술 궁전
수상 소감:
원래 이 소설의 결말은 “둘은 몇 번을 더 크게 다투다 다음 해 헤어진다. 두 사람은 앞으로 다시는 만나지 않는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 믿음을 주는 일이 선우에게 더는 소용없다 느껴졌기 때문이다. 둘은 사는 동안 스스로 목숨을 끊지는 않는다”였다.
소설을 쓴 이유이기도 했다. 나는 제목과 결말을 먼저 생각하고 소설을 쓴다. 살고 싶어서 이 소설을 썼다. 고치기도 많이 고쳤다. 소설을 쓰는 내내 계속 죽고 싶었다. 그래도 다 써야 하니까 살았다.
나는 끝까지 책임지는 게 가장 깊은 사랑이라고 믿는다. 사랑하는 무언가를 위해서라면 너무 하기 싫은 일이라도. 또 너무 살기 싫어도. 좀 해야 한다고. 좀 그래도 살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하는 말이다.
이 소설이 부디 재미있어 읽는 사람들의 기분이 전보다 나아지기를 바란다. 당신이 이 소설을 읽고 조금이라도 즐거운 기분이 든다면, 나는 책임감을 갖고 쓰겠다.
먼저 서하진 선생님을 비롯하여 학교에 계신 선생님들께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조연호 선생님, 조형래 선생님, 이양구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동안 저와 같이 공부했던 모든 선배님, 동기, 후배님 감사합니다.
남숙이, 잔디 언니, 상혁 오빠에게도 감사를 전합니다. 제 글을 읽어주었던 모든 분들에게 정말 감사합니다. 지혜 언니, 무늬 언니, 소정 언니, 은지 언니, 지영 언니, 송이, 소연이, 다운이, 유진이, 혜림이, 은채에게 감사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나의 친구 혜민이에게도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엄마, 아빠, 동생들, 곰돌이에게도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마지막으로 제 소설을 읽고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 다섯 분께도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수상자: 김보경
장르: 평론
작품: 인간의 가장자리로 걷기: 여성, 동물, 기계
수상 소감:
내가 좋아하는 무언가에 대해 공들여 말하는 일이 즐겁다. 하지만 글쓰기는 여전히 어렵고 나는 종종 자기모멸과 싸운다. 그럼에도 좋은 글을 읽고 나면 마음이 달뜨고 울렁거려 밤잠을 설치게 되고 다음 날 아침이면 펜을 든다. 그런 마음이 동력이 되어 글을 계속 쓸 수 있었다. 비록 잘 다듬어지지 않았더라도 이번 당선작에서 그 열도가 조금이나마 전해진다면 좋겠다.
어떤 작품이 왜 좋은지 설명하는 일이 비단 자신의 취향을 비호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공통 감각을 만들어내거나, 다른 관점과 경합함으로써 기존의 미적 가치를 갱신하는 일에 이를 때에 좋은 비평이 탄생한다고 생각한다. 2016년 이후 드러난 문학계의 참담한 현실을 통과하면서도,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해준 것은 다시금 문학이고 비평이었다. 내가 읽은 글들은 상대와 끈질기게 대화하는 법 그리고 좀더 나은 삶과 세상을 구체적으로 꿈꾸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 글들이 내게 가르쳐준 것을 잊지 않겠다. 모멸감에 휘둘리지 않으며 나의 경험과 감수성을 자원 삼아 정직한 글을 쓰고 싶다.
가장 먼저 글을 읽어준 예지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부족한 글에서 가능성을 봐주신 우찬제, 조연정 심사위원께 깊이 감사드린다. 게으른 제자에게 언제나 큰 가르침과 격려를 주시는 신범순, 손유경 선생님께도 진심 다해 감사드린다. 나의 배움터가 되어준 장치, 시론, 또문, 현장문학 스터디원들 그리고 연구실 동료들에게 각별한 애정과 고마움을 전한다. 1동 앞 벤치와 강의실과 술집에서 나눈 대화들이 나를 길러냈다. 나의 곁을 지켜주는 가족들, 오랜 지기들, 나무, 지원에게도 사랑을 전한다. 앞으로도 함께 걷고 느끼고 쓰겠다.
배수아 작가의 구절처럼 말은 삶을 앞서서 간다. 나는 이 말을 예술이 삶보다 더 우월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술로 새로이 펼칠 수 있는 삶의 가능성에 대한 신뢰로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