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19회 - 2019

이원석 / 소설 / 없는 사람

김지연 / 시 / 애도 캠프 외

선정 개요

[심사 경위]

올해로 19회째를 맞는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에는 시 부문 608명, 소설 부문 534명, 문학 평론 부문 28명이 응모해주었다. 문학에 대한 항간의 불길한 소문과 우려에도 불구하고, 예년에 비해 더욱 증가한 응모자 수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아마도 그것은 기성 문학의 건재를 확인시켜주는 긍정적인 신호라기보다, 문학의 관습적 영토의 한계를 새롭게 확장하려는 의지와 열정이 도처에서 생성 중임을 보여주는 불화의 징후일 것이다. 과거의 낡은 언어들과 치열하게 대결하는, 아직 호명되지 못한 미래의 문학적 움직임에 성실히 응답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에 참여하는 우리 모두의 의무이자 기쁨이라는 것을 고백한다. 이번 심사에서는 『문학과사회』 편집동인(강동호, 김신식, 김형중, 조연정)을 포함하여 시 부문에서는 강성은, 하재연 시인이, 소설 부문에서는 윤성희, 최제훈 소설가와 김나영 평론가가, 평론 부문에서 우찬제, 이광호, 이수형 평론가가 함께해주었다. 4월 12일에 일괄적으로 전 부문의 예심을 진행했으며, 본심에 오른 응모작들을 대상으로 2주간의 검토 기간 끝에 4월 26일 최종 수상작을 뽑는 자리를 가졌다. 그 결과 시 부문에서는 김지연 씨가, 소설 부문에서는 이원석 씨가 당선자로 선정되었으며, 아쉽게도 평론 부문에서는 당선자를 내지 못했다. 두 분 당선자에게는 아낌없는 축하를 보내며, ‘문학이라는 텅 빈 이름의 이름’을 갱신하고 확장하는 모험에 동참해준 모든 응모자께 다시 한번 감사와 응원의 말을 전한다._심사위원 일동

심사평

[심사평_시]
시 본심에 오른 18명의 응모자들(강동호, 김동균, 김이지, 김지연, 박다래, 석조원, 신수형, 양윤화, 유재원, 이경태, 이선, 이예진, 이원석, 이유담, 이현주, 전명환, 정혜정, 조은서)의 작품들 중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김동균, 김이지, 김지연, 양윤화, 이원석의 시였다. 이원석의 「기계세상의 아코나리움」 외 아홉 편은 ‘기계적 상상력’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법한 독특한 시적 세계관을 선보이는 것이 특징이었다. 마치 인간의 본질은 ‘기계’라는 듯, 인공적 소재들을 모티프로 인간의 휴머니즘적 근간을 새롭게 해체·재구성해버리는 이원석의 텍스트들은 항간에 유행하고 있는 ‘포스트휴먼’에 관한 담론들을 환기시키기도 했다. 당대적인 것을 시적인 것의 뇌관으로 삼는 이원석의 응모작들은 매우 흥미로웠지만, 그러한 당대성을 시적으로 포착하는 과정에서 충분히 자신의 언어를 장악하고 있는지는 다소 의문이었다. 김이지의 「무실」 외 아홉 편은 말이 의미를 표상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까지 비약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긴장감 있게 연출하고 있었다. 가령 “무실이란 무엇인가, 생각한다”라는 문장을 중심으로 계속해서 개진되는 언어의 드라마는, 무의미에 대한 사유가 역설적이게도 언어적 의미를 생산적으로 촉발시킬 수 있는 근거지일 수 있음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다. 다만, 표제작이 발휘하고 있는 긴장과 매력이 다른 시편들에까지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은 아쉬웠다. 김동균의 「꽃집에 대해서」 외 아홉 편은 언뜻 보면 안정적이고 고요한 세계를 잔잔하게 그려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변하지 않는 무중력의 시공간을 향한 염원을 투명하고도 명료하게 묘사하는 힘이 남달랐다. 특별한 시적 사건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 아닌데도, 그가 그려내는 시적 풍경에 고이는 미묘한 슬픔에 오랫동안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전반적으로 시편들의 수준이 고르다는 점 또한 장점으로 지적되었으나, 반대로 과감성과 신선함이 부족해 보인다는 평도 제기되었다. 양윤화의 「2119년 3월 8일에게」 외 아홉 편은 유머러스한 어조로 자신이 속한 세대의 자의식을 유쾌한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가령, 추락에 대한 상상력을 토대로 자기 성찰을 감행하는 「미술 시간」, 냉소적인 자기 인식을 상쾌하고도 활달하게 전개시키는 「복제들」, 실패라는 단어를 토대로 모종의 선언적 리듬을 엉뚱하지만 명쾌하게 창출하는 「아보카도 선언문」 등이 주목할 만했다. 다만, 세대 감각을 농축한 자기 진술들과 발랄한 언어들이 기존의 젊은 시인들의 그것과 어딘지 모르게 비슷하다는 점, 그리고 시들 사이의 편차와 간극이 너무 뚜렷하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지적되었다. 한편, 김지연의 「애도 캠프」 외 아홉 편에 대해 심사위원들 모두가 고른 지지를 보냈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만큼 그의 시적인 기량이 원숙했고, 유려하게 개진되는 말들의 섬세한 리듬이 독보적으로 아름답게 느껴졌다. 김지연의 시는 망각과 소멸, 그리고 죽음의 계기들을 투명하게 응시하고 있었는데, 그러한 집요한 응시 속에서 절망과 고독이라는 익숙한 나르시시즘적 감정으로 쉽게 도피하지도 않는다. 그는 타인에게 가닿을 수 없는 인간의 한계에 관해 사색하면서도, 그러한 한계를 소통의 장벽으로 서둘러 결론 내리지도 않는다. 숙명과 같은 고독과 외로움 속에서도, 내 안에서 끊임없이 소생하는 타자의 감각 앞에 개방되려 할 때마다 김지연의 시는 특유의 따뜻한 분위기와 선한 정서를 생성시킨다. 일종의 ‘공동체적 감각’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정서이다. 앞으로 씌어질 그의 시가 그것을 분명하게 확인시켜줄 것이니, 이 자리에서는 우선 말의 감각을 신뢰하면서 “인간의 무게”를 감당하고자 하는 김지연의 단단한 의지와 다정한 시적 상상력에 응원의 인사를 보낸다._강동호(『문학과사회』 편집동인)

신인상 작품 심사를 하며 가장 즐거운 지점은 다음 세대 시인들이 가져올 미래를 가늠해보는 데 있다. 2020년대는 또 어떤 시인들이 우리를 알 수 없는 곳에 데려다 놓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시를 읽었다. 응모작들 중에는 수준 이상의 시들이 많았다. 대부분의 시가 시적 질서 안에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것 역시 오랜 숙련의 시간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나 시의 아름다움은 새로운 질서가 다시 무화되는 그곳에 있다. 동시대 시인들이 주고받는 섬세한 움직임이 느껴졌으나 다음 세대를 가늠하기는 어려웠다. 페미니즘을 전면적으로 부각시킨 다수의 작품도 눈에 띄었다. 문단_내_성폭력운동을 연상케 하는 고발적 성격의 시도 있었다.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여러 증상이 반영된 시도 많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시에서는 현실적 풍경을 넘어서는 시인의 사유와 미학적 관점이 우선한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한다. 본심에 오른 시들 중에 내가 주목한 것은 양윤화, 이경태, 김지연의 시였다. 양윤화는 이미 개성적이고 확고한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다. 냉소적이면서 활달한 시적 전개가 돋보여 읽는 즐거움이 있었다. 하지만 작품들에 편차가 있었다. 그리고 맨 앞에 위치한 시를 다른 시로 바꾸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내내 남는다. 이경태가 제시한 세계는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열 편 모두 연작시처럼 느껴졌고 하나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 개성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하나의 세계만 담고 있다는 것과 우화적이라는 점이 도리어 단점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시인이 가진 가능성이 축소되어 보이는 이유였다. 그러나 두 분의 시가 나는 좋았다. 곧 다시 지면에서 만나기를 고대한다. 김지연의 미덕은 빛과 온기가 물질처럼 꿈틀거리며 살아 움직이는 문장의 힘이었다. 열 편 모두 일정한 감각을 유지하며 시가 가진 가능성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저력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단숨에 심사위원 모두의 마음을 얻었다. 당선자에게 축하의 말을 건넨다._강성은(시인)

신인을 뽑는 자리에서 흔히 나누게 되는 말들이 있다. 응모작들의 수준이 상향 평준화되었다는 느낌을 공유하며 기성 시인들의 작품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응모작들이라는 말을 주고받곤 한다. 이번 심사에서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고 그런 만큼 당선자를 한 명만 선정해야 한다는 사실에 아쉬움, 안타까움, 곤란함, 미안함 등등의 감정이 뒤섞였다. 그런데 응모작들의 수준이 기성 시인의 작품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는 평가는 사실 양가적인 것인데, 그것은 응모작들의 화법이 기술적으로는 훌륭하게 정돈되어 있지만, 자신만의 독특한 화법을 폭발적으로 드러내지는 못하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고 기성 시인의 영향으로부터 완벽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신인상의 수상자를 정할 때 드는 마지막 고민은 항상 동일하게 반복되는 것 같다. 작품의 완성도냐 새로운 감각이냐라는 구도 안에서 판단이 망설여지는 것이다.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 중 심사위원들이 공통적으로 눈여겨본 작품은 김동균, 김이지, 김지연, 박다래, 양윤화, 이경태, 이예진의 시였다. 이 중 당선작을 정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토론을 거듭했던 작품은 김동균, 양윤화, 김지연의 것이었다. 「꽃집에 대해서」를 포함한 김동균의 시는 특유의 리듬감과 생경한 공간의 감각이 흥미롭게 느껴진 작품이다. 「2119년 3월 8일에게」를 포함한 양윤화의 시는 보내온 열 편의 시에 다소간 편차가 느껴진다는 점에서 심사위원들을 주저하게 했는데, 개인적으로는 문장의 조합이 기발하게 느껴지는 대목들에 관심이 많이 갔다. 결국 한 명의 당선자를 정해야 한다는 면에서 모든 심사는 어느 정도 상대 평가일 수밖에 없을 텐데, 그런 점에서 심사위원들은 별다른 이견 없이 김지연의 「애도 캠프」 외 아홉 편을 수상작으로 결정할 수 있었다. 김지연의 시들은 작품 전반을 둘러싸고 있는 ‘빛’의 감각들이 어떤 온기로 전달되는, 감각의 선명한 묘사가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그 선하고 따뜻한 감각들을 어떻게 수용해야 할지 의구심이 들기도 했지만, 그만큼 감각을 전달하는 시적 기능이 뛰어난 시라는 반증처럼 읽혔다. 개인적으로는, “둥글고 깨끗한 무릎에게 세상 빛을 다 쬐어주고 싶은 마음”의 순정함을 의심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당선자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넨다.
예심을 진행하면서 이번 해 유독 여러 계층의 다양한 응모자의 작품을 읽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 인상적으로 느껴졌다. 연필로 손수 그린 그림과 함께 동시를 적어 보낸 어느 초등학생 응모자도, 불가항력으로 튀어나온 자신의 목소리를 꾹꾹 눌러 담은 어느 노년의 응모자도, 시를 쓴다는 것의 의미를 새삼 생각하게 했다. 그들의 쓰기가, 그리고 우리의 읽기가 멈추지 않기를 바란다._조연정(『문학과사회』 편집동인)

즐겁고 설레는 마음으로 응모작들을 읽었다. 나름의 깊이와 폭을 지닌 훌륭한 원고들이 많았다. 동시대에 함께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 응모작들을 읽는 것만으로도 나 자신이 응원을 받는 기분이 드는 한편, 다른 이들 앞에 시를 내보낼 때의 그 가난하고 헐벗은 마음이 떠올랐다. 보이지 않는 얼굴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싶다. 좋은 작품들이 많았지만 특히 김지연, 김동균, 양윤화, 신수형, 박다래, 김이지, 강동호의 작품들에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이 응모작들은 자신만의 리듬과 언어의 결을 잘 다듬어 보여주고 있었다. 신수형의 「파울」 외 작품들은, 미스터리한 분위기에서 시작해 뾰족하게 집중되는 하나의 초점으로 향해 가는 호흡의 긴장된 전개를 따라 읽어갈 수 있었다. 「더빙」이나 「지구행」 등이 구성하는 무대와 공간의 오롯함은 앞으로의 작품들을 기대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박다래의 「존 스몰츠」가 보여주는 사물과 모티프 들은 매력적이다. 「존 스몰츠」의 흥미진진한 유려함이나 「자연사 박물관」의 간결한 호흡 양쪽을 자유로이 운용하는 솜씨가 뛰어났다. 김이지의 「무실」은 미세한 감각의 묘사에서 시작해 방사형처럼 이어지는 말들이 어디에 가닿고 있는지 궁금하게 하는 시적 풍부함을 지니고 있다. 강동호의 「당신의 스웨터」 등의 경쾌한 어조가 지니는 거품 놀이와 같은 천진함이 마음에 든다. 이 외에 유재원의 「동시다발 1」 외 작품들, 이원석의 「기계세상의 아코나리움」 외 작품들의 개성적인 스타일도 흥미롭게 읽었다. 최종적으로 다른 심사자들과 오래 논의한 작품들은 김지연의 「애도 캠프」, 김동균의 「꽃집에 대해서」, 양윤화의 「2119년 3월 8일에게」였다. 「꽃집에 대해서」 외의 작품들이 지닌 자연스럽고 리드미컬한 호흡, 간결하면서도 명료한 공간의 분위기, 전반적으로 고른 작품의 수준은 몇 번을 다시 읽어도 빛나는 강점이다. 「2119년 3월 8일에게」 외의 원고들은 씩씩한 어조와 읽는 이를 즐겁게 만드는 엉뚱함을 지니고 있다. 이 힘센 호흡이 앞으로도 쭉 이어졌으면 좋겠다. 다른 많은 작품의 강점에도 불구하고, 김지연의 「애도 캠프」 외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세계의 뚜렷함과 아름다움은 독보적이었다. 상한 세계의 속살을 만지고 있는 듯한 구체적인 감각, 인간이라는 형태를 지닌 우리가 공유하는 슬픈 아름다움, 이 지구의 수많은 너와 나 들 사이에서 명멸하는 마음의 파편들을 쓰다듬는 손길과 목소리. 더없이 섬세하고 부드러운 호흡으로 이어지는 그의 시들을 읽다 보면, 투명한 눈물이 묻어나는 것 같다. 빛 가운데 있는 죽음과 시작을 함께 바라볼 수 있는 그의 중층의 시선은, 무엇이든 망가뜨리고야 마는 이곳의 시간들에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맞서는 용기를 보여준다. 다시 새로 시작되는 빛 앞에 한 걸음 내딛는, 시인에게 축하를 보낸다._하재연(시인)

[심사평_소설]

응모된 소설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지금, 여기’라는 시공간은 대체로 상하좌우로 명백하게 구분되었으나 그 구분이 무색하게 인간으로서 가질 만한 자연스러운 감정과 감각을 유발하는 요소들을 여과 없이 통과시키고 뒤섞어버리는 그러한 자리였다. 가령 층간 소음처럼, 확실히 분리된 두 공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분리에 전제된, 마땅히 보장받아야 할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데에서 발생하는 일들. 분리되었지만 분리되지 않은 것들. 그 속에서 적응하든 체념하든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여러 삶의 방식들이 자주 눈에 띄었고, 이것은 아마도 개인의 삶이 누릴 자유만큼 타인과 공존하는 방식에 깃든 윤리를 중요하게 여기게 된 시대에 대한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대체로 재미있는 이야기는 문장이나 구성의 측면이 아쉬웠고, 그 반대의 경우도 종종 있었다. 때문에 소설을 읽어나가는 와중에 ‘한 편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힘’과 ‘이야기를 가능하게 하는 상상력’ 가운데 어떤 것이 중요할까를 거듭 자문하게 되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둘 중 어느 것도 포기하지 않는 쪽의 손을 들어주었다. 기발한 상상력이 있어도 한국어 문장을 구사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경우, 이야기를 구성하고 끌고 나가는 형식이 안정적이지만 이야기 전반에 긴장이나 흥미가 떨어지는 경우를 제외하고 남은 몇 편의 소설만을 두고 또 오래 고심했다.
유의서의 「곰과 그의 문」은 폭설로 산장에 고립된 사람들이 자신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곰을 사냥하려는 공동의 계획을 짜고 그것을 실행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이야기지만, 결국 지루한 삶으로 돌아가기를 포기하고 불안한 잠 속으로 자처해서 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몰입하게 하는 힘이 있고 문장도 안정적이지만 소설의 특이한 형식, 각주나 괄호의 활용 등이 이 이야기의 전반적인 주제와 자연스럽게 맞물려 어떤 의미 있는 효과를 내는지 잘 모르겠다는 점이 아쉬웠다. 이런 경우 형식적 시도가 특별하고 새롭게 보인다기보다 오히려 진부한 실험처럼 보이고, 이야기 자체의 흥미를 이런 식으로 보완하려 하는 게 아니었나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한다. 재미있는 이야기 한 편을 구상해서 들려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특별한 능력인 것 같다. 자신이 가진 이 힘을 믿고 이야기를 이야기로써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있기를 응원해본다.
문선의의 「이상식욕」은 이곳과 저곳이 절반으로 나누어진 공간, 치매에 걸려 먹을 것을 탐하는 아버지와 그를 간병하는 화자의 위태로운 공존이 속도감 있게 묘사되는 이야기다. 음식을 해서 먹이는 일이 누군가를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는 것, 그 이전에 어떤 식재료를 어떠한 방식으로 공수하는가에 따라 먹을 것에 전제된 죽음이 잔혹하게 여겨지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는 것. 이야기를 구성하는 그 단순한 이분법 이상은 없다는 점이 아쉽다. 탄탄한 문장력, 치밀한 관찰과 묘사력에 비해 아버지에 대한 미움을 왜 이런 식으로 드러내는지, 그 전에 그런 증오는 어디에서 기원하는지가 설득력 있게 와닿지 않았다. 이 이분법을 초월하거나 무화하게 만드는 한두 문장을 기다려본다. 그 작은 변화가 이 이야기뿐만 아니라 소설이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을 크게 바꿔놓을 것이라 믿는다.
끝까지 고민하게 한 이세희의 「만우(萬愚)」는 흡인력이 가장 강력한 소설이었다. ‘유조’라는 한 인물의 이야기를 ‘나’의 목소리를 통해 들려주는데, 그 과정에 특별히 과격한 사건이 개입하지 않는데도 인물의 말과 행동에 집중하게 하는 힘이 이 소설에는 있다. 하지만 사건과 인물을 형상화해내는 필력과는 무관하게 이 사건의 내용과 인물의 성격, 혹은 인물 간의 관계가 형성되는 방식에 어느 정도의 개연성이 있을까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어딘가에는 이런 인물들이 이런 방식으로 만나고 대화하고 관계를 쌓고 헤어지겠지만, 이러한 양상이 하나의 전형으로서 독자에게 설득력을 지니고 독자 개인에게 유의미한 이야기로 남을 수 있는가가 물음표로 남는다. ‘나’는 왜 유조의 이야기를 녹취하는가, 진짜 거짓을 말하는 유조의 실제 삶은 어떻게 추측할 수 있고, 추측으로만 가능한 각자의 삶은 결국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쉽게 매듭지어지지 않는 질문을 남기는 이야기를 나쁘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 이야기가 단편소설의 형식을 입고 있을 때 문제는 달라지는 듯하다. 말하고 듣는, 이야기를 이루는 기본적인 행위를 통해서 누군가의 경험에 기입된 여백, 혹은 끝내 이야기될 수 없는 이야기를 들려주려 했던 필자의 능력과 노력에 마음을 담아 박수를 보내며,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를 더 들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원석의 「없는 사람」은 앞서 좋은 소설의 조건으로 삼은 두 가지를 고루 갖춘 이야기였다. 전반적으로 정확하고 매끄러운 문장을 구사하며, 이야기 구성 역시 탄탄했고, 무엇보다도 소설의 주제를 관통하는 기발한 사건에 관한 상상력이 돋보였다. ‘나는 너를 아는가’, 혹은 ‘너는 나를 아는가’와 같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갖게 되는 거의 근본적인 물음과 관계를 만들고 지우게 하는 데 소용되는 본질적인 질문에 더해서, 시기성을 짙게 띄는(직장 내 젠더 폭력 같은) 사회적 문제까지 무리 없이 다루는 솜씨를 보여주는 소설이기도 했다. 물론 이 소설을 구성하는 두 개의 큰 이야기(자살을 예고하는 목소리와의 통화, 직장 내 갈등이나 연인 간의 다툼 같은 보다 구체적인 문제에 관한 갈등)가 좀더 긴밀하게 맞물려서 둘이지만 하나 같은 이야기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소설의 제목인 “없는 사람”이 가리키는 것은 (실제로 관심을 두지 않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이기도 하고 (뻔히 있는 사람을 없는 사람 취급하는) ‘무시’이기도 하고 ‘무지’(소설에서는 거듭 “알 수 없다”는 말이 반복된다)이기도 하다. 없는 사람은 다시금, 우리가 매일 만나는 그 모든 (대강 알거나 아예 모르는 이유로) ‘모르는 사람’에 대한 변명, 혹은 별명이기도 하다. 이같이 다양한 층위에서의 함의들을 충분히 드러내면서도 적절히 감추며 완결된 한 편의 이야기를 완성도 있게 써냈다는 점에서 이 소설 자체보다는 이 소설 다음의 이야기와 작가에게 기대를 품을 수밖에 없었다.
당선의 기쁨과 함께 가볍지만은 않을, 작가로서의 발걸음을 내디딜 당선자에게 큰 축하를 드린다. 오랜 시간 자신과 대면하며 쉽지 않게 써냈을 이야기를 기꺼이 들려준 모든 응모자분께는 깊은 감사와 응원을 함께 드리고 싶다._김나영(문학평론가)

예년에 비해 질병과 노인을 다룬 소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노인에 대한 소설이 많이 제출되었다고? 예상 가능한 반응을 떠올려본다. 좀더 설명하자면, 나는 출품자가 구사하는 문장을 비롯, 애착을 보이는 시대상·인물상 등으로 유추 가능한, 장년이 직접 쓴 소설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노인은 다양한 모습으로 재현되었다. 우연한 계기로 모인 이들의 ‘사연 공동체’ 속 일원이었고, 전망 부재의 사회 가운데 그래도 청년들이 기대고 싶은 미적 가치를 은은히 지켜나가는 존재였다. 혐오의 동학을 강조하고자 으레 설정되는 볼썽사나운 꼰대상(像)에만 갇혀 있지 않았다.
전술한 심사 체험을 곱씹는 가운데 세 편의 본심 후보작을 주목해보았다. 후보작의 특색을 영화나 드라마에 빗대어 설명하고 싶은데, 언급하는 작품을 응모자들이 참고했다고 지적함은 아니다. 유의서의 「곰과 그의 문」은 코엔 형제 영화의 분위기가 떠올랐다. 무기력함에서 비어져 나오는 공격성, 거기서 연유한 쓴 유머, ‘인생은 연명(延命)일 뿐이다’ 모드로 살아가는 데 익숙한 인물들이 벌이는 촌극이다. 실체 없는 대상을 향한 불안감, 실체 없는 대상이 예상을 깨고 자신을 드러냈을 때 느끼는 기이한 안도감, 자신이 마주한 대상이 정녕 실체를 드러냈는지 모르겠다는 혼란이 뒤섞인 지점이 매력적이었다. 다만 폭설과 곰으로 지목되는 위협체에 에워싸인 캐릭터들을 삶의 지루함과 기이한 평화로움에 신물 난 존재로 표현하면서, 소설 속 부작용이 제법 보였다. 심어놓은 각주와 처리 기법은 인물들의 심리를 두텁게 제공하는 효과보단, 이 소설이 강조하는 바를 눈여겨봐달라는 데 머물러 아쉬웠다.
이세희의 「만우(萬愚)」는 지상파 미니시리즈라기보단, ‘드라마 스페셜’, 아니 좀더 적당한 비유를 찾자면 ‘시청률은 아쉽지만 감수성과 안목 좋은 이들 사이에서 자주 추천되는 JTBC·TVN 드라마’를 본 듯했다(요즘 세대의 시청 패턴을 감안할 때 이는 작품에 대한 평가 절하가 아님을 밝힌다). 층간 소음을 매개로 유조와 규, 규의 여자친구가 벌이는 감정의 화음에 무척 신뢰감이 드는 작품이었다. 연애감(戀愛感)을 중심으로 희소한 감정을 찾아내는 데, 예측 가능한 감정 해석을 두고 의표를 찌르는 해석본을 내놓는 데 애를 많이 써온 듯한 응모자의 흔적이 끌렸다. 하지만 유조라는 주요 캐릭터를 주조해나가고자 가미된 재료가 장황해 보였다. 소설을 끌고 나가는 이의 시점 변동은 응모자가 둔 회심의 한 수로 보였지만, 결국 작품의 안정성을 뒤흔들고 말았다는 동료 심사자들의 지적도 수긍할 만했다. 인물의 인상적인 ‘감정 활극’이 작품명의 운명에 귀속되어야 함을 응모자가 의식하고 종용하는 말미도 아쉬움으로 남았다.
수상작은 이원석의 「없는 사람」이다. 인과로 납득 가능한 세계와 인과로 해명될 수 없는 세계 간의 충돌, ‘인과로 납득 가능한 세계라는 인간의 오판(誤判)’ 사이를 오가는 소설이었다. 단편에 어울리는 규격을 의식한 소설 속 안정적인 설계도가 심사자들의 호평을 낳았다. 위협적인 목소리의 침입과 그로 인해 점점 망해가는 주인공의 하루는 영화 「폰 부스」 「더 테러 라이브」 등에서 종종 접했던 설정이지만, 심사 내내 ‘없는 사람’을 둘러싼 다양한 해석을 이끄는 소설의 매력, 재담꾼의 기질을 지나칠 수 없었다._김신식(『문학과사회』 편집동인)

534명이 투고한 1천 편 넘는 소설 원고를 검토하면서 유독 눈에 띈 것은 ‘생로병사’에 관한 작품들이 많다는 점이다. 가난과, 직장과, 연애와, 병과, 누군가의 죽음. 세태를 읽게 하는 변화였다. 이른바 ‘생명정치’의 시대이니까. 우리는 모두 생물학적 단위 집단(인구)으로 환원되어 관리되는 ‘조에’들이니까. 가치 판단의 여부를 떠나 이제 먹고사는 일이 소설에서도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그 만큼 미학적 실험이나, 형이상학적 탐구에 바쳐진 작품들을 찾기도 힘들었다.
본심에 오른 열 명의 투고자들이 보내온 작품들 중 흥미롭게 읽은 것은 네 편이었다. 「이상식욕」 「만우(萬愚)」 「저주받은 가보를 위한 송가집」 「없는 사람」. 문선의의 「이상식욕」은 쥐나 청설모를 잡아 요리를 해 아버지에게 먹이는 병리적인 화자의 의식 세계를 다룬 작품이다. 일단 ‘부친 살해’라는 오래된, 그러나 여전히 효과적인 모티프 주변으로 모든 문장이 결집해 있는 밀도 높은 작품이었다. 문장을 중심을 향해 집중시키는 저력이 대단했다. 그러나 실은 그 점이 곧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소설이 단순하다 싶을 정도로 하나의 모티프에 집중되어 있어서 편집증적인 문장들 너머, 말하자면 현실 세계와의 접점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었다. 함께 투고한 「갈라테이아」도 마찬가지였다.
「이상식욕」이 편집증적 글쓰기의 장단점을 동시에 보여준 작품이라면, 이세희의 「만우(萬愚)」는 그 대척점에 서 있는 작품으로 읽혔다. 분열증적 글쓰기의 장단점을 동시에 보여준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본심에 오른 투고작들 중 가장 감각적이고 내밀한 문장들로 씌어진 작품이었다. 많은 문장이 감탄을 자아낼 만큼 인물들의 내면을 세심하고도 세련되게 표현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좋은 문장들이 파편 상태를 벗어나 어떤 중심(설사 부재하는 중심이라 하더라도)을 향해 배치되게 하려는 시도가 부족했다. 최소한의 상황 설정이 있다고는 하나, 지금 어떤 맥락에서 발화가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파악하기 힘들었는데, 만약 이것이 작자의 의도였다면 그것은 문학적 모험이라기보다 실수에 가까웠다.
신종원의 「저주받은 가보를 위한 송가집」은 이른바 ‘잘 빚어진 항아리’ 같은 작품이었다. 작품에 어떤 우연도 개입하기 힘들 만큼 철저하게 배치된 상상력과 구성, 그리고 문체가 돋보이는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잘 빚어진 항아리가 흔히 그렇듯, 작품이 아름다운 만큼 인위적이라는 느낌도 강했다. 마치 아름다운 항아리를 만드는 것만이 목적이어서 그 안에 나의 무엇을 담을지에 대한 고려를 잊어버린 장인의 작품 같았다. 작가의 숨결이나 세계관, 혹은 그의 현실 인식 같은 것이 보이지 않는 작품이란 생각을 끝내 떨치기 힘들었다.
결국 다른 심사위원들과의 오랜 논의 끝에, 이원석의 「없는 사람」을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데 동의했다. 평이하지만 정확한 문장들 속에, ‘이해와 오해’ 사이의 윤리적 갈등, 살아남는다는 일과 ‘비겁함’ 사이의 피치 못할 이율배반 같은 진지한 주제들을 슬쩍슬쩍 끼워 넣는 솜씨가 남달랐다. 이른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감각도 없지 않았는데, 이 주제에 접근하는 태도 또한 가볍지 않고 신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상황 설정이 독창적이었다. 적지 않은 사유의 지점들을 경과해온 이의 작품이라는 믿음을 주기에 충분했다. 투고자 모두에게 감사와 격려의 말을, 그리고 당선자에게는 축하의 말을 전한다._김형중(『문학과사회』 편집동인)

투고된 작품들을 읽는 동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가 너무 많거나, 혹은 ‘나’가 너무 없다고. 끊임없이 ‘나’를 설명하려는 인물들을 보면서 나는 듣는 사람은 생각하지 않고 끊임없이 수다를 떠는 사람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그런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는 날은 피로할 것이다. 그와 반대로 이야기에 전혀 개입하지 않는 ‘나’도 있었다. 몇 년을 만났는데도 자신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 친구. 그런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는 날은 공허할 것이다. ‘나’를 작은 돌멩이로 생각해보면 어떨까? 그 돌멩이를 호수에 던지고 그 파장을 조금만 더 지켜보면 어떨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본심에 올라온 소설 중에서 내가 흥미롭게 읽은 소설은 「곰과 그의 문」 「이상식욕」 「만우(萬愚)」 「없는 사람」이었다. 「곰과 그의 문」을 쓴 작가 유의서는 좋은 감각을 지니고 있다. 문장의 리듬도 좋지만 무엇보다 그 문장으로 소설의 분위기를 근사하게 만들 줄도 안다. 하지만 다 읽고 나니 건물의 가장자리를 맴돌다 만 것 같았다. 문을 열고 들어간 기분이 들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거기 인물이 있어야 할 텐데 상징과 은유만 있는 것 같다. 그게 작가의 의도인 것 같기도 한데 그것이 효과적인지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문선의의 「이상식욕」은 집요한 소설이다. 소설의 내용도 그렇지만 문장 또한 그렇다. 공들인 소설이고 또 잘 쓴 소설이다. 그런데 문제는 다 읽고 난 뒤 울림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작품을 만날 때마다 나는 조금 난처하다. 어떻게 말해야 도움이 될지 잘 모르겠기 때문이다. 기껏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다. 인물과 조금만 더 대화를 나눠보라고.
이세희의 「만우(萬愚)」는 「이상식욕」과 정반대의 소설이다. 이 소설은 이야기를 파고들지 않는다. 오히려 흩뜨려놓는다. 그래서 이야기의 간극이 넓고 텅 빈 공간에서 이야기의 울림을 만들어놓는다. 그런 지점이 매력적이었다. 본심에 올라온 소설 중에서 가장 많이 내 마음을 흔든 작품이기도 했다. 장점이 많은 소설이었는데도 당선작으로 밀기에는 망설여지는 부분이 있었다. 이 이야기를 전달하는 ‘나’라는 인물의 역할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그것 때문에 이 소설은 너무 많은 것이 감춰진 듯했다. 그것 때문에 나는 이 소설을 읽고 또 읽고 또 읽었다. 그럼에도 그것이 의도적인 것인지 아니면 작가 스스로 해결하지 못해 감춘 척하는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어떤 의심도 들었다. 작가가 정교한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흩뜨려놓은 것이 아니라 이런 방식으로밖에 쓰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게다가 같이 투고된 다른 소설이 그 의심을 해결해주지 못했다.
수상작이 된 이원석의 「없는 사람」은 질문하는 소설이다. 이 소설은 두 개의 이야기가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 느슨한 연결 고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소설의 분위기가 달라지는데 그것이 이 소설의 장점이자 단점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이야기의 서사의 결은 다르다. 하지만 작가는 그 이야기들에 공통된 단어들을 사용하는데 몇 가지만 보자면 이런 말들이다. 이해와 오해/배려와 무례/비겁함. 나는 이런 단어들 때문에 이 소설의 매력이 반감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은 두 개의 이야기가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이야기들은 어느 지점에서 합쳐질 수 없는 운명이라 그걸 묶을 수 있는 것은 주인공의 마음뿐인데, 작가 또한 그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너무 드러내놓고 표현한 것은 아닌가 하고. 그래서 소설의 마지막에 두 이야기를 포괄할 수 있는 더 큰 장면으로 가지 못하고 주인공이 감정을 폭발하면서 끝낼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닌가 하고. 이런 아쉬움 때문에 당선작으로 밀기까지 주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걸 반대로 읽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리고 반대로 생각해보자 저 단어들이 메아리처럼 느껴졌다. 주인공은 자기 자신을 모르는 사람이다. 두 개의 사건을 겪고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니 저 단어들이 메아리가 되어 계속 주인공의 머릿속에 맴돌아야 하고 결국 폭발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러니 결국 이 소설은 “나쁩니까? 내가 역겹거나, 비겁합니까?” 하고 질문하면서 끝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 읽자 “없는 사람”이라는 제목이 두 개의 이야기를 감싸고 있는 커다란 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상을 축하드린다._윤성희(소설가)

타고난 이야기꾼이 선택할 수 있는 분야가 이전보다 다양해졌고 그중 소설의 지분은 급속히 줄어들고 있는 게 아닐까. 예심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향유할 수 있는 문화가 다양해지는 것이야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그 여파로 소설의 다양성이 위축되는 것 같아 다소 아쉬운 마음이었다. 그럼에도 본심에는 역시 자신만의 색채를 갈고닦은 다채로운 작품이 올라왔다.
신종원의 「저주받은 가보를 위한 송가집」은 소설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박물관에 조명을 받으며 전시된 낡은 바이올린과 맞은편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전시 지킴이 노인. 이 한 장면에서 수백 년의 시간을 오르내리는 유장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꼼꼼한 자료 조사로 ‘그럴듯함’을 덧입히는 공력에 신뢰가 갔다. 다만 이 상상력이 좀더 유의미한 장소에 정박하지 못한 게 아쉬웠다. 때론 항해 자체를 즐기는 것도 좋겠지만 함께 보낸 「밴시의 푸가」에 대해서도 같은 평을 할 수밖에 없었기에 응원하는 목소리에 끝까지 힘을 싣지 못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두 편 모두 음악을 모티프로 내세운 만큼 이미지를 정확하게 표현하려는 욕심을 조금 줄이고 문장에 강약의 리듬을 싣는다면 더욱 가독성 있고 유기적인 작품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세희의 「만우(萬愚)」는 소설의 요소요소를 따지기 전에 읽는 자체로 독자를 매혹시키는 감각적인 작품이었다. 이런 예민한 촉수는 습작만으로 단련시키기엔 한계가 있기에 작가에겐 매우 귀중한 자질이다. 하지만 한 편을 뽑는 경쟁의 자리인 만큼 소설의 요소요소를 따져 매혹을 분석해야 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의아했던 건 ‘나’의 직업이 무엇인지, 왜 ‘유조’를 인터뷰하고 있는 건지, 그녀는 어떤 환자인지 같은 기본적인 정보가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작가가 무엇을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로 인해 소설의 짜임새가 어그러지면서 전체적으로 공허해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정보의 감춤과 드러냄, 소설의 짜임새에 대한 전략적인 고민이 뒷받침된다면 타고난 감각이 더욱 빛을 발하지 않을까 싶다.
이동현의 「머저리들의 긴 겨울」은 심사와 무관하게 취향을 저격하는 작품이었다. 능청스럽게 이어지는 B급 정서 가득한 상황과 대사 들의 향연에 ‘도대체 이 소설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같은 문제의식은 잠시 제쳐두었다. 가벼운 터치로 인물을 그려내고 장면을 구성하는 솜씨가 흥미로웠으며 심지어 함께 보낸 「세인트」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소설임에도 나름의 완성도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채 몇 장을 넘기기도 전에 당선권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기계적인 노력만으로도 충분히 개선시킬 수 있는 문장들을 날것 그대로 보낸 패기 때문이었다. 이 불균형은 거의 미스터리하게 보일 정도였다. 부디 작가가 조속히 이 미스터리를 해소하고 엉뚱하고 유쾌한 이야기들로 한국 문학을 풍성하게 하는 데 일조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원석의 「없는 사람」은 가장 안정된 문장과 짜임새를 보여준 작품이었다. 배려와 무례, ‘피씨함’과 개인의 영역이라는 시의적절한 질문을 던지는 방식 역시 맵시 있었다. 다소 헐거워 보였던 병행되는 두 서사 사이의 균형이 강조된 ‘비겁함’이 서사에 충분히 스며들었는가 하는 문제도 토의 과정에서 다양한 해석 가능성을 주고받으면서 수긍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고민을 거듭했던 이유는 ‘신인상’이라는 타이틀이 주는 무게 탓이었다. (함께 보내온 「수시」를 포함해서) 등장인물들의 매력이 너무 줄거리 안에 갇혀 있는 게 아닌가, 혹여 이 안정감이 무난함이라는 한계가 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만지작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의구심을 접어둘 수 있었던 건 제기되는 단점에 의견이 일치했던 여타 작품들과 달리 풍부한 함의로 생산적인 토론의 장을 제공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소설에서 화두를 던지는 것만큼 근사한 미덕이 또 있겠는가.
당선자에게 진심 어린 축하를 전한다. 아울러 534분의 응모자 모두에게 고생 많으셨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 가시적인 성과가 없을지라도 글을 쓰면서 보낸 시간은 헛되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믿는다._최제훈(소설가)

[심사평_평론]

일부 응모작을 제외하면 대개 동시대의 젊은 문학의 풍경에 관심을 집중한 평문들이었다. 세대적으로 가깝거나 취향에 맞아 호흡하기 좋은 대상들을 따라가며 개인적인 문학 향유 방식을 보여준 응모작들이 많았다. 물론 쓸 수 있고, 쓰기 쉬운 글부터 시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겠다. 그러나 그런 경향에 대한 성찰과 반성을 통해 그 너머의 사유와 감각을 보여줌으로써, 동시대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새로운 담론의 지평을 열어나가는 작업이 비평적 글쓰기라고 한다면, 쓰기 어렵더라도 쓰면 좋은 그런 글로 평론 활동을 시작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심사장에서 마지막까지 토의의 대상이 되었던 응모작들은 「사다코는 세헤라자데의 악몽을 꾸는가―강성은론」 「“소설이 잃어버린 한쪽 날개를 찾아서”―김성중론」 「문보영과 일기병 공유단」 「바로­지금­여기, 그리고 그 이후―박민정과 공간 읽기」 「검은 돌의 문장들―임솔아론」 다섯 편이었다. 아이디어는 좋지만, 문장이 서툴거나 사사로운 포즈에 가까운 진술로 인해 논리 구성의 어려움을 보이는 경우, 때로는 불필요해 보이는 각주를 성실하게(?) 붙인 경우, 시 인용의 묘미를 살리지 못하고 거의 전문 인용을 해 시적 판단과 언어의 경제성 측면에서 다소 부족해 보이는 경우 등 여러 사례가 낙점을 머뭇거리게 했다. 또 다루는 논점이나 쟁점이 대상 작가나 작품에서 가장 중핵적인 것인가, 그 논의가 우리 문학 담론의 어떤 측면을 보강해주거나 새롭게 충격하는 것일까, 하는 등등의 의문들도 심사 독자들을 망설이게 했다.
최후의 순간에 「검은 돌의 문장들―임솔아론」을 놓고 숙고를 거듭했다. 감각이 참신하고 문장력도 어지간했고, 비평적 스토리텔링 수준도 상당해 보였다. 그러나 대상 텍스트를 분석하는 부분과 자기 소견을 추론하는 부분, 주장하는 부분 사이의 균열이 아쉬웠다. 추론 부분에서 더 정교하고 다양한 맥락을 구성했더라면, 그리고 본인의 주장을 내세우는 어떤 부분이 덜 논설적이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결국 평론 부문은 당선작을 내지 못했다. 어쩌면 심사 독자의 어두운 눈이 더 큰 허물이었을지도 모른다. 문학에 대한 열정과 의지를 가지고 응모한 모든 예비 비평가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 부디 그 열정대로 비평에의 의지를 계속 발현하여 머지않은 시간 안에 한국 비평의 새로운 탄생을 알리기를 바란다._우찬제(문학평론가)

투고된 비평들 가운데 주목했던 것은 「검은 돌의 문장들―임솔아론」 「문보영과 일기병 공유단」 「사다코는 세헤라자데의 악몽을 꾸는가―강성은론」 「바로­지금­여기, 그리고 그 이후―박민정의 공간 읽기」 「로캉탱의 글쓰기―김엄지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 」 였다. 이 글들은 최근 젊은 한국 문학의 문제적인 텍스트들에 대한 시의적절한 관심과 함께 납득할 수 있는 분석의 과정을 선보이고 있었다. 최근 한국 문학의 현장 한가운데서 텍스트를 쫓아 읽고 있다는 점은 중요한 장점이었다.
비평은 언제나 ‘지금’의 감각 속에서 행해지는 글쓰기여야 할 것이다. ‘지금’의 감각이란 한국 문학의 최근 텍스트에 관심을 가진다는 의미만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한국 문학의 정체성 같은 것은 미리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며, 오늘의 한국 문학을 실제적으로 쓰고 읽는 행위들 속에서 문학의 잠재성이 끊임없이 생성된다는 의미이다. 한국 문학의 역사 역시 완료된 것이 아니라, 지금 발밑에서 진동하는 역사여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글쓰기는 ‘지금’의 글쓰기이며, 모든 읽기는 ‘지금’의 읽기이다.
그중에서도 「검은 돌의 문장들―임솔아론」은 여러 가지 미덕을 가진 비평문이었다. 유력한 최신 이론들에 짓눌린 비평문이 아니라 괴테의 시 「마왕」의 언어를 끌어와 논의를 전개시키는 방법은 상대적으로 참신했다. 텍스트 분석에 있어서도 안정감과 섬세함이 있었고 비평의 문장 또한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이 비평문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의 ‘유일한’ 당선작으로 하기에는 조금 아쉽다는 느낌이 남았다. 그 아쉬움은 아마도 ‘정치적 올바름’과 ‘미학적 전위’ 사이에서 비평적 감각을 유지해야 하는 최근 상황에서의 비평적 글쓰기의 어려움과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앞의 논의로 다시 돌아가서, ‘지금’의 감각이란 동시대의 정치의식과 정치적 무의식을 글쓰기의 감수성으로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비평적 글쓰기가 근본적으로 정치적 행위일 수밖에 없는 것은 ‘정치’를 지향하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에 대한 뜨거운 긴장 속에서 글쓰기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 긴장을 글쓰기의 육체가 감당하지 않으면 비평은 낡고 매력 없는 아카데미즘의 공간에 갇히거나 문학의 파괴력이 정치적 ‘주체’의 정립에서 나온다고 착각하게 된다. 아직도 비평적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고 있는 모든 분에게 ‘지금’의 축복과 저주가 함께하길 바란다._이광호(문학평론가)

2019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평론 부문에는 모두 스물여덟 편의 응모작이 접수되었다. 그중 「“소설이 잃어버린 한쪽 날개를 찾아서”―김성중론」과 「검은 돌의 문장들―임솔아론」을 좀더 주목해서 읽었다. 작품을 대하는 태도에서 성실하고 진지한 것은 물론 작품을 분석하고 의미화하는 관점이나 논리 면에서도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응모작이 여러 편 있었지만, 한 작가 혹은 한 작품에 대한 독서의 충실함에 비해 그 독서를 공시적으로나 통시적으로 연결시키는 시야의 확보라는 측면에서는 다소 미흡함이 엿보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소설이 잃어버린 한쪽 날개를 찾아서”―김성중론」과 「검은 돌의 문장들―임솔아론」 역시 이러한 약점을 충분히 해소해주지는 못했다. 응모하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지속적인 관심을 부탁드린다.
「“소설이 잃어버린 한쪽 날개를 찾아서”―김성중론」은 2000년대 이후 활발해진 다양성의 분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실의 문제에 충실하고자 하는 한국 문학의 경향, 그리고 말하자면 이러한 두 축의 ‘변증법적’ 결합으로서 “현실에 스민 상상”과 “상상 위에 깃든 현실”을 겨누는 과정 속에서 김성중 소설이 놓인 좌표를 찾고자 했다. 문제 제기는 발본적인 데가 있으나, 작품에 관한 구체적인 독서 중에 이러한 문제의식이 충분히, 그리고 정교하게 구현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검은 돌의 문장들―임솔아론」은 글의 시작이 매력적이고, 다음과 같은 문장도 인상적이다. “폭력이 아닌 언어를 상상하는 일이 기만적인 것이라면, 폭력을 극복하는 언어를 약속하는 일 역시도 순진한 허상에 불과한 것이라면, 지금 이곳에서의 최선은 언어들을 모으고, 말이 되지 못했던 것들까지도 언어의 세계로 불러들이고, 그 모든 것들이 나란히 말해지는 공간을 자꾸만 만들어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언어의 수행성, 다성성, 불화 등의 개념을 연상시키는 이러한 주제 의식이 임솔아의 시 작품만을 대상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 아쉬움을 남긴다. 설령 임솔아의 작품만으로 문리를 얻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다른 저자, 다른 담론과의 연계를 형성한다면 평론의 가치는 물론 대상 작품의 가치 역시 좀더 확대되고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_이수형(문학평론가)

이원석

수상자: 이원석

장르: 소설

작품: 없는 사람

수상 소감:

1.
누군가가 한 번이라도 물어봐줬다면 나는 아무것도 쓰지 않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소설을 쓰는 일. 아무도 묻지 않아서 말해본 적 없는 상처들을 종이에 적는 일은 기억이 시작되기도 전에 해버린 신성 모독 같았다. 신이 미웠지만 인간보다는 조금 나아서 믿었던 적이 나에게도 있다. 덕분에 억지로 믿는 일이 너무 힘든 일이라는 것을 남들만큼 빨리 배웠다. 그래서 아무도 믿지 않는 글을 주로 썼다.
지금은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지웠다.

2.
왜 지웠냐면 친구들아, 너희들 얘기를 좀 해보려고 한다. 매일 붙어 다니며 술을 마시던 너희 중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대신 너희는 허락도 받지 않고 나를 마음껏 오해했다. 나는 그 오해가 좋고, 너희가 만든 내가 좋아서, 그대로 살다가 이렇게 됐다. 대충 살던 나를 이렇게 만들었으므로 너희는 내 종교 같은 것이다.
나는 나를 믿는다. 내가 믿는 내 모든 것, 내가 사랑하는 나와 내가 미워하는 나에게는 너희가 있다. 그러니 당연히 나는 나만큼이나 너희를 믿고 사랑한다. 이 말이 하고 싶어 지금껏 타이밍을 노렸는데 아무래도 지금 말해야 그나마 덜 부끄러울 것 같다. 부끄럽지 않도록 기회를 주신 문학과지성사, 그리고 심사위원님들에게 가장 먼저 감사하다.
문학레이블 공전 이리, 유수, 의석, 그리고 수연아. 나는 너희보다 지혜롭고 용감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다영 누나, 성원아, 윤희야. 언제나 고마워, 진심이야. 열소스 국영 형, 보람 누나, 유선 누나, 태희 형. 언제나 든든한 내 친구 예린이. 남가좌동 미슐랭 레인보우스시 박종석 사장님, 은채. 곗돈 모아 술 먹는 태환 형. 열심히 쓰자 수명아. 빛나는 치부 박찬훈, 임자룡, 안준혁, 김성민, 이도현. 한국아동단체협의회 장현이와 선생님들. 통영의 자랑 더 팰리스 탄즈영어 성탄 형과 선우 누나.
그리고 김가원.

3.
그리고 존경하는 선생님들. 기뻐해주신 편혜영 선생님, 신수정 선생님, 남진우 선생님, 이재명 선생님, 모두의 스승 박상수 선생님, 영원한 나의 형광펜 김성중 선생님. 선생님들은 제가 배운 모든 세상입니다.
그리고 가족. 가장 소중한 정순애 씨. 우리 누나 이호정. 아빠 이팔용. 차영 이모, 심이 이모, 순영 이모. 진이 삼촌과 사랑하는 외숙모. 선명한 옥순 이모, 철이 삼촌. 우리 할머니 양영순 씨. 도근 삼촌. 저는 저를 위해 쓰겠지만 당신들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4.
더 자세한 사람이 되겠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비밀을 쓰겠다.
나는 전시된 일기장이다.
나를 견디게 하는 사람들의 견딜 힘이고 싶다.

김지연

수상자: 김지연

장르: 시

작품: 애도 캠프 외

수상 소감:

여름 한낮에 카페 앞에서 혼자 엎드려 주인을 기다리는 검은 개를 봤다. 그날 햇빛은 무엇이든 관통해버릴 것처럼 투명하고 날카로웠다. 그 빛조차 개의 윤곽을 쓰다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처럼 단단한 등을 하고 앉아 있던 검은 개. 개의 검은색은 너무 검어서 지금까지 검다고 말했던 모든 것을 다르게 말해야 할 것 같았다.
1월에는 검은 모래로 이루어진 해변을 보러 갔다. 빛을 반사하며 반짝이는 은빛 입자들은 검은 모래에 박힌 채 희다는 말보다 더 희어진 나머지 은빛이 된 것 같았다. 모래는 검었지만, 모래가 가진 색을 검은색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모래의 검정은 어둠에 가깝지 않았다. 검다는 말이 검어지는 이유는 그것이 모래와 쌍을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우리에게 백사장이라는 단어가 있기 때문에.
글라스하우스 내부에 들어섰을 때, 이 집을 창문뿐인 집이라고 해야 할지 벽뿐인 집이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창문과 유리는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다른 말인가. 벽과 유리는 얼마나 멀고 얼마나 가까운 말인가. 창문과 빛은 어떻게 서로를 통과하는가.
언어는 너무 넓어서 앞과 뒤가, 왼쪽과 오른쪽이, 천장과 바닥이 계속 뒤바뀌는 대기처럼 느껴진다. 요즘은 천국이 있다면 그건 가장 필요한 믿음을 의심 없이 믿을 수 있는 곳, 아침에 일어나면 믿음의 근거가 이불 속에 있는 곳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여긴 천국이 아니고, 어떤 날엔 무자비하게 찾아오는 아침 속에서 눈을 뜨고 이불을 떠나야 한다. 이곳에서 믿음의 근거는 끝에 부딪히면 다시 돌아오는 시선으로부터, 눈앞에 없다면 등 뒤에 있을 거라고 믿는 믿음으로부터 온다. 나에게 시를 쓰는 일은 이런 시선을, 믿음과 마음을 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마음을 믿는 마음을 알려주신 엄마, 아빠, 가족들 고맙고 사랑합니다. 내 용기의 밑천이 되어주는 든든한 파트너 병익, 깊숙이 고맙고 사랑해. 「애도 캠프」의 마지막 연은 갑자기 밀려드는 물속에서 친구들과 손을 잡고 떠오르던 꿈을 꾼 다음 썼다. 내 시를 읽어준 첫번째 사람들, 수진 언니와 희진 언니. 텅 빈 가방을 메고 같은 교복을 입던 시절의 일기장을 기억하며 함께 기뻐해준 영희. 만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곁의 마음으로 응원해준 정은. 쓰는 일의 안부를 물어준 해민. 나의 소중한 무게, 친구들아 고맙고 사랑해. 시를 쓰는 일이 가져오는 마음을 알려주신, 학교 바깥에서 만난 모든 선생님 감사합니다. 은후야, 네 덕분에 세계의 디테일을 새로 배우게 된다. 너에게 튼튼한 미래가 있기를. 덕분인 일들이 많은, 빛나는 샤이니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제 시를 믿어주신 심사위원 네 분께 아득히 큰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늘 부족하겠지만 부족함과 싸우는 대신 부족하기에 강하고 아름다운 일에 대해 고민하겠습니다. 믿음의 근거를 깨끗한 이불 속에 누이는 마음으로, 질문에 답하는 질문으로 계속 쓰겠습니다. 언어에 의해 생산되는 풍경을 믿고, 믿음에 마음을 기대고, 마음을 기댈 수 있는 것만이 유일한 믿음이라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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