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18회 - 2018

민경환 / 평론 / 바로크 놀이터의 겨울

서이제 / 소설 / 셀룰로이드 필름을 위한 선

선정 개요

[심사 경위]

올해로 18회째를 맞는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에는 시 부문 521명, 소설 부문 458명, 문학평론 부문 34명이 응모해주었다. 『문학과사회』 편집동인 강동호, 금정연, 김신식, 조연정, 황예인이 응모작 전체를 검토하며 예심을 진행하였고, 시 부문 12명, 소설 부문 5명, 문학평론 부문 6명을 본심에 올려 2주간의 검토 기간을 거친 후에 최종 수상작을 뽑는 논의를 이어갔다. 본심에는 『문학과사회』 편집동인 외에 우찬제, 이광호, 김형중, 이수형 평론가가 함께했다.
본심에 오른 소설 부문 응모자는 서호준, 이정연, 한주연, 김사강, 서이제이다. 최종 수상작을 선정하기 위한 1차 토의에서 김사강의 「장식과 무게」와 서이제의 「셀룰로이드 필름을 위한 선」이 고른 지지를 받았다. 이 두 작품으로 수상작의 범위를 좁히는 과정은 비교적 빠르게 진행되었으나 둘 중 한 편을 최종 선정작으로 선택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김사강 소설의 세련된 진지함과 서이제 소설이 지닌 가독성 중 어느 한쪽을 포기하기가 꽤 어려웠던 것이다. 결국 서이제의 작품을 수상작으로 선정하기로 한 것은 그간의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의 전통에 비추어볼 때 어쩌면 조금 ‘다른’ 선택으로 비춰질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러한 선택을 하게 된 심사자 각자의 이유는 조금씩 다를 것이다. 영화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몽타주 구성으로 풀어낸 「셀룰로이드 필름을 위한 선」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혹여 상투적으로 보일 수 있는 ‘영화’와 ‘소설’의 만남을 매끄럽게 풀어낸 솜씨가 매력으로 느껴진 소설이다. ‘예술하는 젊은 세대’의 감성을 호들갑스럽지 않게 전달하고 있는 점도 흥미로웠다.
문학평론 부문 수상작으로 민경환의 「바로크 놀이터의 겨울」이 결정된 것은 거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지지의 결과다. 그만큼 민경환 글의 매력은 뚜렷해 보였다. 김동환의 「‘퀴어-픽션’에서 ‘퀴어-오토’로—김봉곤식 글쓰기에 대하여」나 정해경의 「감(感)을 둘러싼 비(非)와 불(不)에 대한 시론—황혜경과 김상혁의 시에 나타난 느낌에 대하여」에서도 숙련된 기성 평론가의 글에서 볼 법한 성실성과 판단력, 나아가 그것을 넘어서는 패기까지 읽을 수 있었으나, 상대적으로 민경환의 글이 보여준 문제 설정의 새로움과 이론적 깊이에는 못 미친다고 판단되었다.
시 부문의 본심에 오른 하영수, 조정완, 이혜리, 박규현, 이영은, 전연우, 고실리, 김묘정, 송기수, 이원석, 윤재성, 이서하의 작품 중 심사위원들이 공통적으로 호감을 표한 작품은 고실리, 이혜리, 박규현의 것이다. 그러나 최종 수상작으로 지지할 만큼의 결정적 장점을 이들 작품에서 발견하지는 못했다. 신인문학상이 수상작을 내지 못할 때, 그것이 심사위원들의 능력 부족이나 무책임의 탓으로 보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신인문학상의 경우 그 선택의 판단 기준 중 가장 강력하게 작동하는 것이 바로 이전 수상작이라는 점이다. 문학적 새로움이 해마다 갱신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므로 기존 수상작과 전혀 달라진 무언가를 기대하기는 물론 힘들다. 그러한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그간 문학과사회 신인상의 수상작들이 보여준 가능성과 완성도를 고려했을 때, 올해의 응모작들 중 그에 버금가는 작품을 찾기가 다소 힘들었다고 말할 수밖에는 없겠다.
조만간, 이러한 우리의 판단이 얼마나 섣부른 것이었는지를 부끄럽게 확인시켜줄 문학적 사건들이 생겨나기를 희망한다. 제18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게 된 서이제와 민경환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넨다._심사위원 일동

심사평

[심사평_시]

시가 ‘자신’을 찾는 과정이라고 말하는 진부한 지식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시는 ‘나’를 찾게 해주지 않으며, ‘우리’를 위로하지도 않는다. 시는 차라리 ‘나와 우리’라고 믿었던 것들이 얼마나 상투적인 언어와 사고의 기반 위에 있는가를 드러내고 그 파열의 틈을 만들어낸다. 시를 쓰거나 시를 읽는 행위를 통해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나와 우리’의 세계로부터 파열하고 이탈하는 감각의 경험일 것이다. ‘문학과사회 신인상’ 투고작을 읽는 과정은 그 이탈의 강렬함을 만나는 일이기도 했다.
주목해서 읽은 시들은 「나의 가정용 사람들」 외, 「거위 소녀」 외, 「큐브」 외, 「놀이」 외, 「코마」 외, 「Toylism」 외 등의 작품들이었다. 이런 작품들은 상상력과 화법의 참신함과 밀도 등에서 인상적이고 수긍할 만한 지점에 도달해 있었다. 하지만 신인상 심사는 문학 제도의 메커니즘이 그러한 것처럼, 일정한 수준 이상의 작품군들을 선별하는 과정이 아니라, ‘한편’ 혹은 ‘한 명’에 대한 ‘불평등’하고 두려운 문학적 선택의 과정이다. 이번에 신인상 시 부문의 수상자를 뽑지 못한 것은 그 ‘한 편’과 ‘한 명’에 대한 문학적 확신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투고자의 문제가 아니라, 심사위원의 문제에 속할 것이다.
2000년대 이후 새로운 시가 등장했다는 ‘풍문’이 있었다. 그 풍문의 실제와 내부를 다 읽기도 전에, 시의 언어 바깥으로부터 ‘문학장’에 대한 혹독한 비판이 일어났다. ‘그 이후’ 무엇이 살아남고 무엇이 가능한가 하는 것을 아직은 알 수 없다. 어떤 문학적 권위도 인정하기 힘들어진 이 철저한 폐허 위에서 무엇이 시작될 수 있는가를 가늠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편’에 대한 확신의 문제에 무기력했다는 것을 고백한다. 투고해준 모든 분들에게 이 터무니없는 고백으로 고맙고 미안한 마음을 대신한다. 이광호(문학평론가)

본심에 오른 12명(고실리, 김묘정, 박규현, 송기수, 윤재성, 이서하, 이원석, 이영은, 이혜리, 전연우, 조정완, 하영수) 가운데 내가 주목한 것은 4명의 시였다. 이 4명의 시에 대한 감상을 간략하게 말하는 것으로 심사평을 대신하고자 한다.
고실리의 「Toylism」 외 9편은 필연적 목적지인 죽음을 앞둔 인간의 삶을 반복이라는 관점으로 형상화하고 있었다. 그의 시는 인간의 유한한 삶을 견디게 하는 어떤 ‘기능’에 관한 고민들로 채워져 있었는데, 죽음이라는 유한한 조건 속에서도 인간이 진실해질 수 있는 실천적 알고리즘을 사유하는 진지한 상상력이 돋보였다. 다만, 그가 고민하는 알고리즘이 곧 시를 조형하는 방법적 알고리즘과 동일시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그래서인지 생각보다 평이하고 유사한 성격의 시적 진술들로 시가 귀결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전연우의 「유기몽」 외 9편은 권태로운 삶에 대한 응시 속에서, 권태 그 자체가 시적 행동의 수준으로 비약할 수 있는 가능성들을 다양한 장면을 통해 연출하고 있었다. “세계의 종말을 맞이하는 자세” 속에서 새로운 삶의 지평을 모색하는 그의 시는 인상적이었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과 관련하여 익숙한 이미지와 시적 진술들이 자주 동원된다는 점이 한계처럼 느껴졌다. 이혜리의 「코마」 외 9편은 타자와의 근본적 간극에 주목하고 있었는데, 그러한 간극을 시적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게 느껴졌다. 그의 시들은 너와 나 사이의 간격을 성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히려 그 간격을 매개로 표현될 수 있는 새로운 관계를 독특한 상상들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상상이 손쉽게 타자의 경계를 침범하는 순간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시적 상상력이 통제를 잃는 순간 직면할 수밖에 없는 윤리적 고민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그의 시에서 그에 대한 고민과 물음을 찾아내는 데 나는 성공하지 못했다. 박규현의 「나의 가정용 사람들」 외 9편은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규정해오는 언어들의 폭력성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그 자신이 느껴왔던 언어적 고통을 날것의 언어로 되돌려주는 공격적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의 시는 세상의 언어들을 의심하고, 그 의심하는 과정 자체를 시로 만들어냄으로써 특유의 시적인 동력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날것의 언어가 그 자체로 공감을 얻기 위해 필요로 하는 자기통제의 원칙, 즉 시적 형식의 정당성과 관련한 의문이 들었다. 날것의 언어가 지닌 정당성은 언어에 대한 의심이 필연적으로 직면하는 딜레마, 다시 말해 의심 자체도 언어적으로 가능하다는 자의식 속에서 그 형식적 실마리를 얻는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 언급한 시들은 분명 자기만의 치열한 고민 속에서 씌어진 것이었지만, 아쉽게도 우리는 그 안에서 한 명의 시인을 발견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아쉽지만 심사자들의 기준치와 의심의 장벽을 산산조각 내는 새로운 시인과의 만남을 고대하며, 다음 해를 기약하고자 한다. 강동호(『문학과사회』 편집동인)

[심사평_소설]

「셀룰로이드 필름을 위한 선」(중편), 「아니」와 「탁자의 기분」, 「잠잠한 소란」과 「해왕성엔 다이아몬드 비가」, 「장식과 무게」와 「선다우너」, 「피라밋 아케이드」와 「혁대와 직물」, 이렇게 총 5명의 투고자가 보내온 9편의 작품이 본심 심사 대상에 올라왔다. 작년(2017) 본심 대상작 편수가 30편이었으니, 예년에 비하자면 많지 않은 편수였다. 심사가 쉬워지려나 싶은 마음에 서둘러 읽어보니 사정은 그와 달랐다. 예심이 좀 박했나 싶을 정도로 수준이 고르고 다들 장점을 갖춘 작품이었다. 적은 편수에도 불구하고 신인상 심사 때마다 도지는 ‘선택 장애’를 유독 심하게 앓아야 했다. 9편의 작품 중 끝까지 선택을 망설이게 한 세 작품은 「혁대와 직물」 「장식과 무게」 「셀룰로이드 필름을 위한 선」이었다.
「혁대와 직물」은 메타픽션이다. 그리고 여행(행군?)소설이자 루카치가 말한 이른바 ‘탐색담’이기도 했다. 작중 인물들의 행군과 그에 대해 써가는 문장들의 진행을 구분 불가능하게 겹쳐놓고는, 거기에 ‘인생의 의미를 되찾기 위해’라는 소설 장르 특유의 ‘탐색’ 테마를 다시 겹쳐놓는다. 중간중간 끼어드는 여담은 그 탐색 과정을 더디게 하고, 결국엔 작품을 탐색의 실패에 관한 탐색담으로 만들어놓는다. 루카치적이면서도 반루카치적인 소설이라고 하면 적절할까? 그러나 약점이 없지 않았는데, 종종 재치 있고 발랄한 여담과 서사적 일탈이 글쓰기에 대한 깊은 메타적 성찰을 방해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었다. 메타픽션의 성패는 글 쓰는 행위 자체에 대한 작가의 자의식이 얼마나 깊은 데까지 미치는지에 달려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만 했다.
「장식과 무게」에 대한 미련은 지금도 남아 있다. 만약 ‘등단’의 관문에도 뒷문 같은 게 있다면 그 뒷문으로라도 들이고 싶은 작품이었다. 우선 문장이 유려했다. 그럼에도 수사보다는 작가의 내면을 거쳐 나온 문장들인지라 들뜨지 않고 차분했다. 구성도 안정적이었고, 그래서 뭐랄까 ‘고급스럽다’라거나 ‘고전적이다’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은 작품이었다. 다만 어떤 기시감을 떨쳐버리기 힘들다는 점이 흠이라면 흠이었는데, 기억들의 조합을 통해 타인의 정체를 완성해간다는 (혹은 완성해내지 못한다는) 서사의 낯익음 탓이었다. 관습적인 소설이었다는 말이 아니다. 신인에게 기대하는 바는 얼마간의 실패를 감수한 모험일 때가 많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오랜 ‘선택 장애’를 앓은 후에, 「셀룰로이드 필름을 위한 선」을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데 한 표를 보탰다. 이 작품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형식’이다. 이 작품은 영화 만드는 사람들의 얼마간은 찌질하고, 얼마간은 숭고하고, 또 얼마간은 유머러스한 이야기에 걸맞은 형식을 찾아내는 데 성공한 작품이었다. 문장과 문단의 이러저러한 배치를 통해 몽타주, 매치컷, 시점 쇼트 등 영화적 기법을 언어적으로 구현해보려는 고심의 흔적이 역력했다. 투고자가 혹시 영화 만드는 이들의 세계에 속해 있거나 한때 속해 있었지 않나 싶을 만큼, 상황이나 대사가 실감 난다는 점도 장점이었다. 그러나 아예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었는데, 1990년대 중·후반에도 영화적 기법들을 문학적으로 차용한 사례는 많았고, 멀리는 박태원의 시절부터 그런 시도가 있어왔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결정한 것은, 무엇보다도 ‘가독성’ 때문이었다. 비평가인 심사위원들에게 잘 읽히더라라는 의미의 가독성이 아니다. 벤야민의 말처럼 감각이 세계를 변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변화가 인간의 감각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셀룰로이드 필름을 위한 선」이 막연하게나마 예감하게 하는 것이 그 점이다. 오래 지나지 않아 우리가 맞이하게 될(혹은 이미 맞이하고 있는) 감각의변화에 대해 (이제는 작가가 된 ) 이 작품의 투고자가 가진 예민한 촉수는 이미 적응을 마친 듯하다는 믿음이 어렵게 ‘선택 장애’를 극복하게 했다. 김형중(문학평론가)

이번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소설 부문 본심에서는 모두 5명의 응모자가 투고한 작품과 마주했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응모작이 소수였던 만큼 각각의 작품이 지닌 장점이 비교적 분명히 눈에 들어왔다.
「잠잠한 소란」 외 1편에서는 미성년에 가까운 젊은이가 느낄 법한 현실의 단면을 예민하게 포착한 작가의 시선이 두드러졌다. 나어린 청춘의 감각이 지닌 소설적 의미에 대해서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약간은 상투적이라고 느껴질 위험성이 상존한다는 점에 대해서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아니」 외 1편은 서사가 지닌 전통적 선조성 대신 어떤 이미지나 장면에 대한 상념과 연상으로 이루어진 소설인바, 어느 부분에서는 잠언으로 읽히기도 하는 단상들에서 간단치 않은 작가 의식을 감지할 수 있었다.
심사 과정에서 당선을 염두에 두었던 작품은 「장식과 무게」와 「셀룰로이드 필름을 위한 선」이었다. 이모의 실종이라는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장식과 무게」는 기억과 애도에 관한 소설이다. 현대인의 정체성 혹은 정신생활에 기억이나 애도보다 더 중요한 요소를 찾기란 쉽지 않으며, 같은 이유로 기억과 애도는 현대소설에서 가장 익숙한 주제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주 보아왔던 주제이긴 하나 「장식과 무게」를 이루고 있는 관념적이면서도 진지한 문장은 새삼 눈을 크게 뜨게 한다. 제목의 전언처럼, 소설에서는 스타일이 중한 법이기 때문이다.
논의 끝에 당선작으로 결정된 「셀룰로이드 필름을 위한 선」은 「장식과 무게」와 전혀 분위기가 다른 소설이다. 「장식과 무게」와 비교하면 「셀룰로이드 필름을 위한 선」은 덜 진지하고 덜 관념적인데, 개인적으로 생각하건대 그것이 바로 당선의 이유일 것이다. 「셀룰로이드 필름을 위한 선」은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한 주인공 주변의 삶을 쫓고 있다. 삶 속 예술(영화)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힙스터인데, 주인공의 입에서 나온 “힙스터 찐따”라는 말이 암시하기도 하듯 힙스터란 대단하기는커녕 그 많던 스노브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런데 우리 중 스노브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 진지하지만도 않고 관념적이지만도 않다는 점이 스노브이면서 스노브를 조소하는 아이러니를 가능하게 했거니와, 그로부터 「셀룰로이드 필름을 위한 선」의 소설적 재미와 가능성을 찾을 수 있게 했다. 응모자들에게 감사와 격려를, 당선자에게는 특히 축하와 기대를 전한다. 이수형(문학평론가)

벌써 3년째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심사하고 있다. 해마다 응모작의 경향이 조금씩 달라진다는 게 재미있다. 작년에는 메타픽션이라고 부를 만한 작품들이 눈에 띄었다면 올해는 좀더 전통적인 형식과 내용을 가진 작품들이 많았다. 복고풍이라는 느낌마저 들었다. 문예지에 발표되는 기성작가의 작품들에서는 공통된 경향 같은 것을 찾기가 쉽지 않고 찾을 생각도 들지 않는데 심사에서는 유독 그런 것을 보게 되는 이유가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작품을 읽어야 하기 때문인지 작가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는 탓에 나도 모르게 작품들을 묶어서 생각하게 되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문득 궁금해졌다. 특기할 만한 점은 개가 나오는 소설이 굉장히 많았다는 사실이다. 덕분에 심사는 즐거웠지만 개의 등장 유무는 당락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는 것을 밝혀둔다.
예심에서 내가 주목한 작품은 김사강의 「장식과 무게」였다. 기억의 문제를 다루는 소설이다. 물론 대부분의 소설은 기억의 문제를 다루지만 실종된 이모에 대한 기억을 ‘페르굴라 pergula’라는 상징을 통해 쌓아 올리는 솜씨가 인상적이었다. 단단하고 빈틈없는 문장에서는 신인상 응모작이라기보다는 기성작가의 작품을 읽는 듯한 느낌도 받았다. 본심에서는 김사강의 작품과 더불어 서호준의 「혁대와 직물」과 서이제의 「셀룰로이드 필름을 위한 선」이 눈에 띄었다. 서호준의 작품은 일종의 메타픽션이라고 해야 할까, 어딘가 말이 안 되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면서도 시종 가벼움을 잃지 않는 문장들의 연쇄가 매력적이었다. 분명 요령부득한 이야기(들)인데 그것이 어디로 흘러가는지(혹은 흘러가지 않는지) 계속해서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비슷한 전략을 취한 소설들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김사강의 작품을 ‘정통소설’, 서호준의 작품을 ‘메타픽션’이라고 한다면 서이제의 작품은 ‘트렌디한 청춘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편임에도 불구하고 한달음에 읽게 만드는 힘이 있는 작품이었다. 단순히 문장 단위의 가독성이 아니라 장면을 구상하고 이어 붙이는 데 능한 작가라는 인상을 받았다. 달리 말하면 편집의 묘가 있었다. 이렇듯 세 작품이 보여주는 매력이 제각각이었기에 심사위원들은 오랜 시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해야겠지만 의외로 심사는 싱겁게 끝났다. 사정은 이렇다. 먼저 ‘2018년’ ‘신인문학상’에 ‘정통소설’을 뽑아야 하는 이유를 납득하지(납득시키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메타픽션을 뽑기에는(‘메타픽션’이라는 단어 자체가 풍기는 느낌 그대로) 뭔가 애매……하다는 것. 그리하여 심사위원들은 서이제의 「셀룰로이드 필름을 위한 선」을 수상작으로 선정하는 것에 빠짐없이 동의했고 박수를 친 다음 저녁을 먹으러 갔다. 나머지 작품들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실제로 조심스럽게 공동 수상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서이제의 작품이 보여주는 새로운 활기에 거는 기대가 더 크다.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금정연(『문학과사회』 편집동인)

세대를 용어화하는 일은 늘 신나고 갈수록 찝찝하지만, 나는 예전부터 ‘영상 세대’라는 용어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신뢰하지 않았다. 평점 사이트 로튼토마토를 그 어느 나라 사람보다 성실히 챙겨 보고, 기대되는 작품이 있다면 압도적인 예매율을 자랑하는 등 세계적으로 영화를 많이 봐온/보고 있는 세대들로 채워진 곳이 한국 같지만, 나는 그 열기를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 편이다. 사람들은 생각만큼 보지 않는다. 책이든 영화든 텔레비전이든. 그렇다고 바쁘다, 각박하다 같은 원인을 제시하며 나를 비롯한 현대인의 일상을 챙겨보려는 시도는 부질없는 짓이리라. 무엇보다 당신이 듣고 싶은 내용도 아닐 것이다. 영상 세대라는 용어를 믿진 않지만 지금 이 세대가 그 어느 세대보다 ‘분산의 세대’이지 않은가라는 물음표엔 신경을 곤두세운다. 대상을 향한 집중·열중·충성·헌신이라는 가치는 사라진 지 오래다. 우리의 신경과 지각 활동, 일의 형태는 분산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하나에 매여 있을 수 없다. 이를 글 –쓰기의 차원으로 옮겨보자면, 여전히 높은 퀄리티를 자랑하고 말하고자 하는 바란 무엇인지, 그 규격을 의식한 완성도를 보여주는 기록들이 있다. 한편 과연 완성도란 무엇이며 더 나아가 글쓴이가 바라본 사물, 사람, 대상, 세상을 그려내는 충실도란 무엇인지 반문하는 기록들도 늘어나고 있다. 혹자는 후자에 대해 엉성하기 이를 데 없는 글쓰기라며 비난하고 싶겠지만, 나는 다음과 같은 상황을 계속 맞이하는 중이다. 내 눈으로 보고 있는 글자, 글 더미는 그간 평가와 기준에 따르면 어설프고 산만하기 그지없는데 왜 내 눈을 계속 끄는가. 일찍이 세상을 지각하는 구도를 집중과 분산으로 보는 시도가 있어왔지만 내가 다시 분산을 언급하는 이유는 문학, 문학 –쓰기에 개입되는 개인의 신경과 지각 활동, 여기에 수반된 에너지 활용과 피로도 여부가 매해 출품작에서 선명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언급은 물론 응모자와 예비 응모자를 향해 자신이 쓰고 싶어 하는 것들에 대한 애정과 몰입이 왜 이리 부족하냐는 꾸짖음이 아니다.
너무나 하고 싶은 것이 많지만, 동시에 모두 하기 싫은 이 분열·분산이 안착된 세계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문학을 비롯한 모든 매체는 사실 뜨거운 열기도, 차가운 방관도 아닌 ‘미지근한 매체lukewarm media’로 함께하고 있다는 생각, 이 미지근한 매체와 영향을 주고받는 사람들이 선택하고 내보이는 ‘중얼거림’과 ‘떠벌림’이라는 쓰기 행위는 오늘날 문학을 구성하는 데 어떠한 위치와 의미를 차지할까라는 생각. 두 생각이 심사 내내 떠나지 않았다.
선정작 서이제의 「셀룰로이드 필름을 위한 선」은 전술한 고심의 농도를 짙게 해준 작품이었다. 만약 당신이 오랫동안 문학 –창작에 절어 있는 상태라면, 본작을 ‘아, 이런 소설’이라 부르며 쉬이 솎아내는 눈을 가동할지 모르겠다. 심사를 맡은 편집동인 중 영화와 사진, 컨템퍼러리 아트가 가미·인용된 소설을 유독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로 시작하는 유형화의 눈을. 하지만 나는 선정작에서 영상과 문학의 접목 따위를 주안점으로 살피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그런 눈으로 읽었다면 나는 본 작품을 몇 장 읽고 덮었을지 모른다. 나는 선정작을 통해 영상, 영상 세대, 영상문학과 스토리텔링 같은 키워드들을 더욱 신뢰하지 않기로 했다. 외려 수차례 등장하는 영화와 영화판에 대한 이야기 속에서 앞서 언급한 키워드에 관한 의구심을 증폭시킨 선정작은 심사 기간 동안 오늘날 ‘현대인의 신경과 문학 –쓰기’란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표를 늘려나갔다. 김신식(문학과사회 편집동인)

본심에 올라온 다섯 편의 작품들 가운데 나에게 가장 흥미로운 것은 김사강의 「장식과 무게」, 서이제의 「셀룰로이드 필름을 위한 선」, 서호준의 「피라밋 아케이드」 이상 세 편의 소설이었다.
김사강의 「장식과 무게」는 ‘페르굴라’라는 양식을 통해 이모의 생애를 추억하는 이야기이다. 함께 심사를 진행한 동인들은 이미 출간된 단행본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기분이 들 정도로 완성도가 높고 안정적인 수준의 작품이라는 데 의견을 모았다. 일인칭의 화자가 페르굴라의 사전적 정의, 삽화들에 대한 설명, 외형적 특징 등을 차분히 서술해나가면서 이모의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갈 때 우아한 기품이 느껴졌고 당선작이 되어도 좋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이 작품으로 이 작가를 만날 수 있을까? 꼭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피라밋 아케이드」는 심사가 끝난 뒤에도 여러 생각이 들게 하는 작품이었다. 당연하게도 소설 속에는 어떠한 문장이라도 들어올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경험과 상상력이 신뢰할 수 있는, 동시에 보수적인 그물의 역할을 하면서 애초에 들어올 수 없는 문장들을 걸러낸다. 어쩌면 많은 소설들을 읽고 이를 평가하는 역할을 하는 이들이 (나 자신을 포함하여) 가진 그물이야말로 가장 촘촘한 그물코를 자랑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럴 때 어떤 문장 하나가 그 그물을 심하게 흔들고 그물 따위가 무슨 소용인가 돌아보게 만드는 것 같다. 그런 소설을 만날 때면 겨우 문장 하나가 그렇게 만든다는 사실이 늘 놀랍고 심사나 평가를 해야 하는 나 자신의 위치가 새삼 곤혹스러워진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Drop the beat’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작가가 체험하고 수용한 대중문화 (그러니까 <쇼 미더 머니>를 위시한 랩 경연 프로그램들)를 보여주는 것 외에 이 문장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의아한 독자도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용의 측면에서 힙합이나 랩과는 별 관련이 없는 소설을 이러한 문장으로 열었다는 사실 자체가 나에게는 무엇보다 의미 있었다. 그리고 이내 이를 ‘드랍 더 빛’(강조는 인용자)으로 바꾸어 이야기를 이끌어나간다는 점에서 작가가 가진 언어에 대한 감각과 재치를 느낄 수 있었다. 함께 보내준 소설 또한 읽을수록 그물을 초라하게 만들었는데 이 작가의 관심이 흔히 ‘소설적’이라고 이야기되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에 있음을 짐작하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그물코를 뚫고 들어오겠다는 절박함 혹은 간절함 (평가의 자리에 있는 이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태도) 같은 것들이 느껴지지 않았는데, 이것이 오히려 나에게 소설을 안으로 끌고 들어오는 대신 내가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다소 막연하지만 확실한 다짐을 하도록 만들었다. 어떠한 형식이라도(소설이아니라고 해도) 이 작가가 쓴 글이라면 다시 읽고 싶다.
「셀룰로이드 필름을 위한 선」은 잘 읽혔고 흥미로웠다. 흔히들 심사할 때 좋은 작품은 심사 중임을 잊게 만드는 작품이라고 하는데 나에게는 이 소설이 그랬다. 예심에서 처음 만났을 때에는 여러 챕터들이 순서에 맞지 않게 뒤섞여 있는 구성임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정서—일종의 청춘소설이 가지고 있는—를 전달해주어 순서를 바로잡아 다시 한번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본심을 준비하며 순서대로, 또다시 구성대로 읽을 때에는 여러 명의 인물들을 통해 작가가 보여주는 유머가 무엇보다 마음에 들어왔다. 그중에서도 미국에서 태어나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에서 살다가 한국으로 대학을 온 ‘한솔’이라는 인물, 특히 그가 프랑스에서 장 뤽 고다르를 만났던 에피소드(1-5)와 화자인 ‘나’와 긴밀한 관계를 맺는 선배 유미가 “그러니까 너도 소 꿈 꿔”라고 말하는 대목 (5-5) 등에서 기분 좋게 웃을 수 있었다. 정지돈의 영향력을 떠올리게 만든다는 의견들이 있었고 ‘사브레와 홍차’를 언급하는 대목에서 알 수 있듯 작가 역시 그 점을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렇지만 그 점이 당선작이 될 만한 이유를 키우지도, 그렇다고 줄이지도 않았다고 생각한다.
당선은 기쁜 일이다. 서이제에게 당선이라는 소식을 전할 수 있어서 기쁘다. 그렇지만 당선되지 못한 분들, 그중에서도 김사강, 서호준 두 사람이 작품을 통해 심사자인 나에게 준 기쁨에 무엇보다 감사하고 싶다. 이 인사가 당선만큼은 당연히 아니겠지만 두 사람에게도 기쁨이 되었으면 좋겠다. 두 사람을 빠른 시일 안에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황예인(『문학과사회』 편집동인)
[심사평_평론]

여러 응모작 중에서 동시대의 첨예한 문제의식에 착목하여 나름대로 도전적 비평 담론을 채굴하려 한 글들을 우선 주목했다. 김동환 씨의 「‘퀴어–픽션’에서 ‘퀴어–오토’로—김봉곤식 글쓰기에 대하여」와 「아무것도 아닌 자들이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때 일어나는 일들—박상영론」은 퀴어서사에 대해 기민한 관심을 보여 눈길을 끌었다. 우리 문학에서는 아직 도정의 영역에 속하지만 주목에 값하는 퀴어 테마에 대한 집요한 탐문이 인상적이었음에도, 예의 테마와 그에 호응하는 글쓰기 방식을 관련지어 분석하는 지점에서 도정의 담론에 머문 듯한 아쉬움이 있었다. 민경환의 「바로크 놀이터의 겨울」은 매우 탈주적인 글이다. 비평적 읽기와 쓰기의 에너지가 역동적이다. 어쩌면 비평적 읽기와 쓰기 또한 놀이충동의 일환이었을까. 이런 양상은 양면적 효과를 빚어낸다. 한편으로는 역동적 가능성을 확산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담론 충동이 이론의 무덤에 갇히는 결과를 빚을 수도 있겠다. 정해경의 「감 (感)을 둘러싼 비(非)와 불(不)에 대한 시론—황혜경과 김상혁의 시에 나타난 느낌에 대하여」 등 세 편은 가장 진지하고 문학적인 평문이다. 느낌과 소리, 관념에 접근하는 시적 경로를 잘 아는 것 같다. 그런 감으로 대상 시인들의 시 세계에 더 미시적으로 밀착해 들어가 특징적 변별소를 찾아냈더라면 더 빛났을 것이다. 정해경의 성취도와 민경환의 역동적 가능성을 놓고 견주어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토론 끝에 새로운 세대의 가능성의 공간, 아직 가닿지 않은 그 자리를 응시하며, 당선작을 정하는 데 동의했다. 당선을 축하한다. 우찬제(문학평론가)

문학평론 부문의 응모자는 몇 년간 계속 늘고 있는데, 작년의 19명에 비해 올해 두 배 가까이 응모자의 수가 늘어난 점은 이번 심사에서 가장 고무적인 현상이었다고 할 만하다. 문학과사회 신인상의 평론 부문 응모자가 조금씩 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평론가 지망생이 늘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며, 무엇보다 그렇게 말하기에 서른 명을 조금 웃도는 응모자 수는 여전히 민망한 수준이라고 해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결정적으로는 최근 몇 년간 문단 안팎의 다양한 사태들로 한국 문학비평에 대한 독자들의 신뢰가 많이 떨어진 점을 고려할 때, 평론 응모자 수의 눈에 띄는 증가는 기성의 평론가로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것은 일단 다른 문학, 정확히는 다른 비평에 대한 요구로 읽힌다. 이번 응모작들에서 공통적으로 읽히는 것도 기존의 문학적 평가에 기대지 않으려는 어떤 새로움에 대한 의지였다고 할 수 있다. 그 목소리를 가장 강력하게, 그리고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한 글은 김동환의 「‘퀴어–픽션’에서 ‘퀴어–오토’로—김봉곤식 글쓰기에 대하여」와 민경환의 「바로크 놀이터의 겨울」이다.
모든 문학적 글쓰기가 그렇겠지만 평론 역시 기존의 것과 ‘얼마나 다른가’가 그 글을 평가하는 가장 민감한 척도가 될 수 있다. 나아가 시의성이 분명한 글이라는 점에서 평론은 그 대상 텍스트를 적절하게 선정하는 민감한 판단력도 증명해야 한다. 작품 분석을 위한 이론적 깊이, 작품에 대한 정확한 분석력, 작품이 놓인 맥락에 대한 균형 잡힌 시선, 나아가 문체의 매력까지도 모두 갖추기를 요구받는 것이 평론이다. 물론 이러한 모든 조건을 훌륭하게 갖춘 완벽한 글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조건들이 결국 누군가의 글을 흠잡기 위한 조건으로서만 동원되는 것도 사실이기는 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민경환의 글이 2010년 초반에 출간된 김승일의 『에듀케이션』을 비평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 의문을 표하는 독자들도 있겠으나, 글의 논리에 의해 그 선택의 필연성이 충분히 해명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민경환의 글은 2000년대의 ‘미래파’ 시인들과 김승일의 시가 어떤 점에서 결정적 차이를 보이는지, 나아가 그간 김승일의 시를 분석해온 평론들이 잘못 읽거나 놓쳐버린 지점이 무엇인지를 설득력 있는 텍스트 분석을 통해 매우 논쟁적으로 풀어낸다. 그러한 분석의 과정에서 이론적 깊이가 확인되며, 나름의 문체로 인해 읽는 흥미가 더해진다. 김동환의 글이 김봉곤 소설에 대한 비평적 논점이 “담론의 퀴어에서 욕망하는 퀴어의 층위로” 이동해야 한다는 충분히 의미 있는 시각을 제안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아가 “‘퀴어–픽션’에서 ‘퀴어–오토’로”라는 적절한 명명을 고안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의욕을 담아내는 문장들이 정돈되지 못한 점은 그 글의 무시하지 못할 아쉬움으로 여겨졌다. 최종 선정작은 심사위원들의 고른 지지를 얻은 민경환의 「바로크 놀이터의 겨울」이다.
여담이지만 수상 소식을 전달하고 수상 소감을 전달받는 과정에서도 우리는 민경환이 문학 혹은 글쓰기에 대해 품고 있는 새로운 관점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앞으로 민경환이 한국 문단에 제출할 혁신적인 논점들을 기대하며, 수상자에게 축하는 물론 특별한 지지의 마음을 건넨다.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조연정(『문학과사회』 편집동인)

민경환

수상자: 민경환

장르: 평론

작품: 바로크 놀이터의 겨울

수상 소감:

1.
너희와 너희가 아닌 모두에게, 우리의 다정한 무한을 믿는다.

2.
당신은 시체의 반복을 충분히 반복할 수 있다.
우리는 햄버거의 역사적 기억 앞에서 어떤 책임을 질 수 있다.

3.
망치가 무엇을 구제할 수 있을까요?
슈니발렌, 깨 먹는 독일 과자.

4.
부정신학을 극복할 무엇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겠지만
지루해할 수는 있겠지.
—「화자가 지루해한다」

5.
오직 하나의 이미지, “권위의 황금 사슬을 두른 채 거침없이 사유하는 천재”의 이미지에 의존해서 썼다. 오늘은 그런 옷을 입고 싶다는 기분으로. 그런데 나는 여벌의 옷장 같은 게 있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취향에 고약한 구석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황금 사슬을 걸 옷걸이는 없는 게 상식이니까. 그런 욕심을 부리는 워드로브는 아니다. 옷장이 부리지 않는 욕심을 내가 부린다.

위험한 버전의 하이데거가 있다. 슬리데린 하이데거. 늘 이상한 기분으로 쓴다. 쓰고 나면 늘 이상한 기분이다. 정확할까 ? 사소한 문제다. 독창적인가 ? 불필요한 질문이다. 이해할 수 있을까? 이상한 질문이다. 재밌는 것만 따라다니자.

이론적 채산성이 떨어진 곳에선 화해시켜선 안 될 것들을 화해시키고 싶어지는 법이다. 이를테면 일회적인 것에 집착하는 텍스트를 위해 벤야민을 동원하는 일. 방법으로서의 폐허를 지지하는 일. 하지만 폐허는 방법이 아니다. 미도리야 김승일, 검은수염 메이야수, 내가 기다리는 것은 카게야마 벤야민이다. 괄호 안으로 들어가서 괄호 안으로 나오기. 코트 안으로 들어가서 코트 안으로 나오기. 받을 수 없는 공을 던져주세요 .

6.
시라는 미디어는 어떤 타자를 유통시킬 수 있는가 ? 미디어의 관점에서 본다면 알파벳처럼 지루하겠지만 잠재성이 현실화되기 위해선 인간적이거나 온통 비인간적인 손의 피로함이 필요하다.

7.
정은호에게 감사한다. 초고를 읽어준 서호준, 이은형에게 감사한다.
성을 빼고 부르면 다정하게 들린다. 재성, 보원, 서련, 신애, 보영, 원준, 세미, 민욱, 승열, 자
은. 한번 시작되면 끝나지 않는 대학 교재의 증보판처럼 계속할 수도 있겠지만, 모두의 공평
한 실망을 위해.

작가 소개:

* 당선자의 사정으로 인해 약력을 공개하지 않습니다.

서이제

수상자: 서이제

장르: 소설

작품: 셀룰로이드 필름을 위한 선

수상 소감:

수상 소감에 대하여.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사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말이 아니라서 말을 할 수가 없다.
나는 항상 온전히 말하는 일에 실패한다. 그렇지만 종종 실패라도 보여주고 싶을 때가 있고, 그러므로 나는 지금 실패하는 방식으로 말하고자 한다.

욕심부리지 않고, 용기를 내겠다.

나는 하지 말라고 하면 하고 싶고 , 하라고 하면 하기 싫다. 나도 내가 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겠고, 제발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가끔 그런 내가 좋다.
어기고, 어긋나는 게 재밌다. 공연 중, 악보에서 이탈된 음을 듣는 일이 즐겁다. 중고로 산 책 속에서 찢어진 페이지를 발견하고 싶다. 무슨 내용인지 이해되지 않는 지루한 영화를 보고 싶다. 먼지 낀 필름은 감동적이다. 고장 난 카세트테이프를 가지고 싶다. 쓸모없는 물건을 사서, 후회하고 싶다. 맛없는 음식을 먹고 , 새로운 맛에 대해 알아가는 게 좋다. 가끔 친구들은 내 옷차림이 난해하다고 놀리고 , 그럴 때 나는 내 패션에 만족한다. 잘못 들어선 길에서 바라본 서울은 언제나 아름답다. 지하철에서 책을 읽다가, 내려야 할 역에서 내리지 못했을 때, 사는 게 만족스럽다. 다시 되돌아가는 길에 만난 풍경들을 사랑하게 될 것만 같다. 말도 안 되는데, 이상하게 말이 되는 문장을 만들어낼 때, 나는 기쁘다. 목적 없이 써 내려간 문장들이 내 마음에 쏙 든다. 문장을 계속해서 이어나갈 때만, 모든 일이 잘 되어가고 있다는 확신이 든다. 그게 착각이라면 나는 그 착각이 마음에 든다. 나는 글을 쓰는 내가 마음에 든다. 글을 쓴 후에야, 비로소 나는 내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못난 나를 사랑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사랑해버려서, 다행이다.
이렇게 살려고 했던 건 아니었는데 이렇게 살아버려서, 다행이다.
수상 소감을 멋지게 쓰려고 했는데, 별로 안 멋있어서, 다행이다.
실패한 모든 문장에 애착이 간다.
내 의도는 항상 실패하고, 실패하기에 의도했던 것보다 한결 나아진다.
글쓰기는 내가 꿈꿔본 적도 없는 곳으로 나를 데려가고, 나는 글쓰기가 나를 멀리 데려가도록, 나를 내버려두는 게 좋다. 산책이 좋고, 자유가 좋다.

당선 소식을 알렸을 때, 운 사람들이 많다.
정말 하나같이 뭐 하는 사람들인지 모르겠고, 그러므로 나는 그들을 사랑한다.
그들과 함께

읽고, 잊고 싶다.
쓰고, 지우고 싶다.
끝내 지워질 모든 문장에도 책임을 가지고 쓰겠다.
백지 위에 썼다가 지운, 사랑하는 모든 이름에게 감사드린다.
문학과지성사와 심사위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그리고 부모님을 사랑한다.

나는 내가 해낸 사랑만큼 아름다워질 예정이다.

작가 소개:

1991년 충북 청주 출생. 서울예대 영화과 졸업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