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17회 - 2017
윤은성 / 시 / 「공원의 전개」 외 4편
심사 경위
올해로 17회째를 맞는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에는 시 부문 501명, 소설 부문 466명, 문학평론 부문 19명이 응모해주었다. 우선 4월 7일 『문학과사회』 편집동인(강동호, 금정연, 김신식 , 이경진 , 조연정 , 황예인 )들이 전체 응모작을 살피며 예심을 진행했고 , 이후 본심에 오른 작품들을 대상으로 2주간의 독해 기간을 가진 뒤 4월 21일 문학과지성사 사무실에서 최종 수상작을 결정하였다. 본심에는 『문학과사회』 편집동인을 비롯하여 문학평론가 우찬제, 이광호, 김형중, 이수형이 함께했다.
먼저 각자 흥미롭게 읽은 응모작들을 추천하는 과정을 거쳐 어떤 작품들이 다수의 심사자들로부터 고른 지지를 받는지, 또 어떤 작품이 비록 소수일지라도 유독 강력한 지지를 받는지 살피는 시간을 가졌다. 응모작들에 대한 상이한 감상과 해석의 끝에는 전통적 미학의 자장권 내에 있는 응모작들이 주는 안정감과 아쉬움, 새로운 감수성을 보여주는 응모작들이 주는 충격과 의혹 중에서 무엇을 좀더 신뢰하고 무게를 둘 것인지 결정하는 시간이 놓여 있었다. 결정은 응모작과 심사자 들 사이의 밀고 당기는 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어서, 어떤 때에는 느슨한 선택이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또 어떤 때에는 반드시 그 결정이 아니면 안 될 엄중한 선택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 결과 시 부문에서는 어렵지 않게 당선작을 낼 수 있었던 반면 소설과 평론 부문은 기나긴 논의 끝에 당선작을 내지 못했다. 당선작으로 그 정도면 괜찮다고 혹은 읽어볼 만하다고, 그런 이유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인식을 심사자 모두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학과사회』에서 왜 지금 이 응모작을 신인상 당선작으로 결정하려 하는가. 이 질문이 그 어느 해보다 수차례 강하게 환기되었던 것 같다. 응모자와 독자 들에게는 어떠한 응모작을 당선작으로 내는 이유만큼, 그해에 ‘당선작 없음’을 설명하는 이유 또한 중요하리라. 무엇보다 그것이 그해에 접수된 응모작들의 수준이 낮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작품의 성취를 분별하는 심사자들의 밝은 눈과 권위의 객관성을 신뢰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사실 문학 작품의 미학적 가치를 평가하는 과정은 어떤 근본적인 아이러니에 직면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특히 신인을 배출해야 하는 자리에서 그 딜레마는 더욱 심화되기 마련이다. 많은 경우, 아니 최소한 『문학과사회』가 기대하고 희망하는 신인은 심사자들의 기대를 행복하게 충족시키는 현재적 작품이 아니라, 『문학과사회』의 미학적 기준으로 촘촘하게 짜인 비평의 그물마저도 과감하게 찢어버릴 수 있는 미래의 텍스트이다. 물론 이러한 희망과 욕망은 모순적인 데가 있다. 실제로 그와 같은 미래의 텍스트가 도착한다면, 같은 이유에서 심사자들이 그 작품의 진정한 가치를 자신 있게 알아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 신인에게만 패기가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심사에 있어서도 도박에 가까운 과감한 결단이 필요한 것이다 . 당선작이 없다면 , 그것은 뛰어난 작품이 없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어쩌면 우리가 기꺼이 그 과감한 내기에 동참하기를 주저했다는 뜻일 수도 있다. 이번에는 과연 어느 쪽일까. 물론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오늘 선택받지 못한 작품들을 가까운 미래에 우리의 선택과 주저함을 반성적으로 되돌아보게 하는 사례로 다시 만나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끝으로 이번에 당선된 시 부문의 윤은성 씨에게는 아낌없는 축하의 인사를 전하며,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에 관심을 보내준 모든 응모자와 독자 여러분께 다시 한 번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 심사위원 일동
[시부문]
‘좋은 시를 쓰는 사람이 좋은 시인일까 ?’ 심사를 앞두고 새삼스럽게 이런 질문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싶다. 최근 시단에 충격을 주었던 일련의 사건들의 여파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신인에게서 발견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미학적 덕목이 무엇인지를 되물었을 때 결과적으로 직면해야 했던 질문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인을 뽑을 때 좋은 시 작품을 골라야 할까, 아니면 좋은 시인을 선택해야 할까. 좋은 시를 쓰는 사람이 곧 좋은 시인이라는 빤한 대답을 내놓을 수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시적인 것’의 외연이 확장되는 과정을 기대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시와 시인(혹은 삶 ) 사이의 간극과 대면할 필요가 있다. 김수영이 제시한 이념으로서의 ‘온몸의 시학’이 말하는 것 역시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시와 삶이 일치할 수 있다는 순진한 믿음을 가리키지 않으며 반대로 시와 시인의 분리라는, 문학의 자율성에 대한 고루한 인식에 머물지도 않는다. 그가 말하는 온몸은 시와 삶의 일치를 겨냥하는 가운데, 그 사이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간극이 시와 삶을 전체적으로 견인하는 운동의 원천으로 작용해야 한다는 이념을 뜻한다. ‘시인은 자신이 쓰는 시를 몰라야 한다’는 김수영의 다소 극단적인 주장이 가리키고 있는 것 역시 이 간극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시/시인’이라는 개념과 양자 사이의 관계는 고정된 것이라기보다는 그 확장과 전개의 운동성 속에서 실천되어야 할 무엇이다. 어떻게 이 간극을 발견할 수 있을까 ? 이러한 고민 속에서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열한 명의 응모자들 (김가람, 류휘석, 안수연, 윤은성, 이솔, 이원미, 이이름, 전명환, 정화연, 최화영, 하진진)의 작품들을 꼼꼼하게 검토한 끝에 나는 최종적으로 안수연(「표백된 혹은 스쳐가는; 스」 외 9편 ), 이솔 (「잭–오–랜턴」 외 13편 ), 윤은성( 「공원의 전개」 외 9편 ), 이이름 (「십일 분째 우주비행사」 외 9편)의 시에 주목했다.
안수연은 마치 부조리극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상황을 연출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아울러 연출된 상황 속에서 창출되는 기괴하고도 유머러스한 순간을 시적인 것과 어렵지 않게 조우시킨다는 점에서 독특한 시적 재능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때로는 연출에 대한 강박이 지나쳐 상황을 조직하는 구조적 원리가 전체의 시편들을 통제하고 규약하는 법칙으로 등극하기도 했다. 그의 시들 사이에서 창조적 간극이 발견되지 않았는데, 전반적으로 보내준 원고의 스펙트럼이 넓지 못하다는 사실 역시 그와 무관해 보이지 않았다. 이이름의 시는 일상의 시선으로 포착되지 않는 감각들, 망각된 감정과 존재들을 되찾으려는 의식으로 가득했다. 이를 동화적이고도 우주적인 상상력으로 펼쳐나가고 있다는 점은 인상적이었지만 때때로 평이한 수준의 소재를 활용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결정적으로 시편들 사이 낙차가 크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이솔의 시는 본심에 오른 작품들 가운데 가장 안정적인 시 세계를 보여주었다. 이미지를 매력적으로 배치하는 기술적 능력이 돋보였고 , 이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시적 주제 역시 명확한 편이었다. 완성도로 보자면 다른 어떤 작품들보다 완숙한 수준에 도달한 것처럼 보였는데, 바로 그러한 지점들이 오히려 아쉬운 대목으로 지적될 수밖에 없었다. 동시대의 다른 시인들을 긴장시킬 만한 간극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당선작으로 선정된 윤은성의 시가 주는 첫인상은 관념적인 색채가 강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단점이라고 할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그의 관념성은 세상이 말로 이루어졌다는 지적 소신과 더불어 말을 물질과 동등한 수준에서 다루려는 과감한 시적 의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산출되는 존재론적/인식론적 간극에 대한 성찰로부터 비롯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표제작인 「공원의 전개」가 대표적으로 잘 보여주거니와 그는 말을 물질화하는 과정에서 촉발되는 운동성에 근거하여, 시적 언어로 전개되는 모험의 풍경을 아름답고 활달하게 그려낸다. 그의 시가 전개시키고 있는 모험은 말로 구성된 세상의 균열을 드러내는 데까지 확장되는데, 가령 「커튼 사이로 흰」은 말들의 감옥 안에서 발견하는 간극이 어떤 희망의 전조가 될 수 있다는 것, 또 다른 세계와의 만남을 환기하는 가능성의 원천일 수 있다는 것까지 매력적으로 포착해낸다. 간혹 그의 모험이 협소한 시구절이나 이미지 들에 잠시 머무는 경우도 없지 않았지만, 이 역시 시인 자신이 극복할 수 있는 창조의 매개로 삼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당선자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전한다. – 강동호 (『문학과사회』 편집동인 )
시를 둘러싸고 가장 불행한 말들이 오갔던 시기를 보내서일까, 언제나처럼 마냥 들뜬 마음으로만 이번 심사를 대할 수는 없었다는 사실을 먼저 고백해야 할 것 같다. 시를 쓰고자 하는 일 자체로 , 혹은 시인이 되고자 한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가 끔찍한 상처에 노출되고 있다는 사실은 시인을 뽑는 일,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시인 될 자격을 주는 일의 무거운 책임을 곱씹게 한다. 시인을 뽑는 일이 대개는 시에 대한 어떤 확신을 재확인하는 과정이 아니라 기존의 태도를 재조정하며 시에 대한 정의를 확장하는 일이 되곤 한다는사실을 생각하면, 신인상 심사의 책임은 한층 더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이번 심사 역시 나에게는 시에 대한 나 자신의 무지와 무능을 점검하는 자리가 되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윤은성, 이솔, 이이름, 전명환, 정화연 등의 시를 읽으며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는 뿌듯함을 느꼈다. 본심에서 심사위원들을 마지막까지 고민하게 만든 시는 윤은성과 이솔의 것이었다. 어떤 심사에서든 두 개의 선택지 사이에서 마지막까지 고민하게 되는 것은 작품의 우열 때문은 아닌 경우가 많다. 다른 성향의 작품을 두고 서로 다른 취향을 가진 심사자가 대립하는 경우도 많지만, 신인상의 경우 그것은 투고작이 보여주는 세련된 안정감과 투박한 새로움 사이의 고민이기 쉽다. 시인이 된다는 것이 누군가로부터 ‘시인 될 자격’을 얻음으로써 완료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 끊임없는 자기 갱신을 통해 완성되는 것이라고 할 때, 저 둘 중 어떤 선택이 성공적일지는 경험의 축적을 통해 따질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이솔이 전자의 경우에 윤은성이 후자의 경우에 꼭 들어맞는다고 볼 수는 없지만, 심사위원들은 「공원의 전개」등이 보여준 윤은성의 생경한 목소리에 손을 들어주기로 합의했다. 윤은성의 시는 간혹 그 정도가 지나쳐 요령부득의 관념적인 문장을 만들어낼지언정, 익숙한 조합으로 이루어진 구절이나 문장은 거의 쓰지 않으려고 한다. 태만한 태도로 진술하는 문장도 발견되지 않는다. 시를 대하는 그녀의 성실함과 진지함이 한 편 한 편의 단단한 시로 축적되어 결국 어떤 세계를 만들어낼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싶다.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 조연정 (『문학과사회』 편집동인 )
[소설 부문]
본심에 오른 스물여덟 편의 면모를 살펴보니, 두 가지 정도의 특징이 쉽사리 눈에 띄었다. 첫째로 ‘메타픽션’이 많았고 , 둘째로 언어에 대한 강한 자의식 속에서 씌어진 작품들이 주를 이루었다. 이 두 경향은 자주 한 작품 안에서 겹치기도 했는데, 거칠게 말해 ‘문체실험적 경향을 보이는 메타픽션’이 올해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에 투고된 소설 작품들의 대세였다. 우선은 반가웠다. 알다시피 그간 『문학과사회』는 어떤 형태의 ‘미학적 실험’에 대해서도 가급적 민감하게 반응하려고 노력해왔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Where is my love」「작품 해설」 「조슈아 런」 「GG」 「쌍둥이를 쫓는 남자」 같은 작품들에 시선이 먼저 갔던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 작품들에서 시대를 획할 만큼 새로운 문학적 사유와 형식의 출현이 발견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문학적 새로움은 항상 ‘어쩔 수 없음’에서 탄생한다는 사실을 이 예비 작가들이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자신할 수 없었다. 좀 모질게 말 하자면 글재간에 비해 사유와 성찰의 깊이, 그리고 절실함이 대체로 부족했다. 아쉬움 속에서 작품들을 추려내다 보니 「홍연」 「기계」 「마사히로의 식탁」, 이렇게 세 편이 남았다. 「홍연」의 작자는 머릿속에 떠오른 강렬한 이미지를 언어로 정교하게 옮길 줄 아는 이 같았다. 극히 수동적으로 보이는 여성 주인공의 내면에서 폭발 직전에 이른 일탈 욕망을, 별다른 행위나 사건 없이 오로지 문체의 힘만으로 표현해낸 솜씨가 훌륭했다. 다만 구성이 지나치게 깔끔해서 되레 도식적이라 해도 할 말이 없겠다는 아쉬움이 남았다. 「기계」는 의도적으로 구사된 관념적인 어휘와 낯선 구문의 파괴력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문학사적으로 시야를 넓혀볼 경우 그와 같은 특징이 ‘낯익은 낯섦’이란 사실을 부인하기는 힘들었다. 읽는 내내, 마치 ‘21세기에 다시 등장한 전후세대 작품’ 같다는 인상을 주었다. 결국 수상 여부를 두고 가장 오래 고민했던 작품은 「마사히로의 식탁」이었다. 문장의 밀도가 아주 높아서 오래다듬어진 흔적이 역력했다. 성(性)과 성(聖)이 기묘하게 뒤섞인 세계의 그로테스크함을 주관과 객관을 나누기 힘든 느리고 섬세한 묘사로 그려내는 솜씨가 오정희 소설이 이룬 어떤 성취를 방불케 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 뻑뻑한 문장들의 벽을 가까스로 밀고 나아가야 하는 노고의 끝에서, 묵직한 주제 의식이나 번뜩이는 통찰력을 만날 수는 없었다. 여느 해에 비해 투고된 작품들의 수가 적지 않았고 , 또 질적으로도 수준 이하라 말하기 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 결국 긴 논의 끝에 당선작을 뽑지 못해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이다. 투고자들께 고마움과 송구함을 함께 전한다. – 김형중 (문학평론가)
당선작이 없는 심사의 심사평을 쓰는 일은 쉽지 않다. 어떤 기준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심사란 결국 구체적인 독서 경험에 의해 좌우되고 , 그래서 심사평은 어느 정도는 당선작이 왜 좋은지를(물론 몇몇 단점이 없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말하는 데에 바쳐질 것이다. 당선작 없음의 심사평은 왜 당선작이 없는지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는데, 이때 언급되곤 하는 심사 기준이란 한편으로는 너무 교과서적이라 민망하기 그지없거나 또 한편으로는 너무 독단적이라 책 잡히기 딱 좋은 췌언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이다.응모작들 가운데 네 명이 보낸 소설에 좀더 주목했고 , 그중 김환의 「기계」, 민진의 「작품 해설」, 백운호의 「쌍둥이를 쫓는 남자」는 다른 심사자의 입에도 오르내렸고 다른 한 편은 별 반향을 얻지 못했다. 심사 경위에도 밝혀두었지만 그 밖에도 몇 편의 소설들이 본심에서 당선 가능한 후보작으로 집중 검토되기도 했다. 끝내 당선작 없음의 결과를 앞에 두고 교과서적이거나 독단적일 말을 한마디 덧붙인다면, 현실이든 독자든 혹은 다른 소설이든, 뭉뚱그려 타자라고 부를 수밖에 없을 존재에 대한 고려나 배려가 소설 쓰기에 전제되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것이다. 만약 셋이라면, 그 셋 모두를 고려할 필요까지는 없겠으나 그중 하나나 둘을 고려하지 않으면서 좋은 소설을 쓰는 것은 아주 어렵지 않을까. 물론 심사자의 선입견을 무너뜨릴 작품을 만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겠지만. – 이수형 (문학평론가)
소설 독자는 갈수록 줄어든다는데 응모작 수는 매번 일정하다는 사실이 늘 신기했다. 이번에도 그랬다. 예심과 본심을 통해 내가 읽은 작품은 크게 두 부류다.
a. 익숙한 소설
b. 낯선 소설
a는 기존의 문법에 충실한 소설이고 b는 거기서 벗어난 소설이다. (상대적으로) a에서 중요한 것이 작품성이라면, b에서는 그 낯섦이 얼마나 매혹적인지가 문제일 것이다. 문제다, 라고 쓰지 않고 문제일 것이다,라고 쓴 것은 이것이 어디까지나 탁상공론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언제나 이론을 초과한다. 하지만 심사에는 일정한 기준이 필요한 법. 따라서 현실적인 문제는 다음과 같다. 익숙한 것은 익숙해서 판단하기 힘들고 낯선 것은 낯설어서 판단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나는 b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그게 내가 내기를 거는 방식이다.
민진의 「작품 해설」과 「조슈아 런」, 김환경의 「GG」와 「노노노우」, 차양진의 「Where is my love」와 「qkfr」이 내게는 그런 작품들이었다. 읽으며 이런저런 코멘트나 감상을 기록한 다른 응모작들과는 달리, “재밌네” 혹은 “이게 뭐지?” 같은 짧은 메모와 함께 별표를 치게 만든 소설들. 하나같이 요약은커녕 종잡을 수조차 없는 내용이지만, 문장과 문장의 충돌이 만들어내는 리듬과 유머가 나를 사로잡았다. 세 명의 작가가 공유하고 있는 모종의 정서와 태도는 심사위원들에게 그들이 동일인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사실이라면 대단한 열정이고 아니라면 신기한 일이다. 나는 그들 (중 한 명)을 뽑아야 한다고 끝까지 주장하지는 못했는데, 작품의 흠결 때문이라기보다는 내가 가진 판돈이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재밌지 않아요 ? 나는 재밌었는데”라는 말에 설득당할 평론가는 세상에 없다는 말이다). 새로움을 발견하는 것과 새로움을 적절히 분석하고 평가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응모작들의 전반적인 경향 속에서 글쓰기écriture의 분명한 변화를 느낄 수 있었는데, 그것을 뭐라고 말해야 할지는 아직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아쉽고 부끄러운 심사였다. 더불어 ‘당선작 없음’이라는 결과 앞에서 허탈감을 느낄 응모자 여러분 모두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린다. – 금정연 (『문학과사회』 편집동인 )
전반전 _난수random number의 발생과 조합, 그 확률값으로 조형된 미지를 선보이는 알고리즘아트와 같은 작품이 여럿 올라왔다. 김환경과 차양진 등의 응모자들은 특정한 입력값이 뽑아내는 아웃풋으로 소설을 재정의하고 싶은 듯 보였다. 이들에게 소설이란 프로그램을 돌려버리면 나오는 산출물인 걸까. 그 생각이 심사 내내 떠나지 않았다. 낯선 것을 만나면 계보를 신경 쓰는 (나쁜) 습성이 있어서 이들의 참조점을 한유주로 , 윤해서로 , 김엄지로 간주한 채, 후보작을 기존의 궤도로 눌러앉히려고 시도했지만, 재차 읽다 보니 그런 시도 또한 찝찝하고 헛헛했다. 외려 이들에게 짙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이는 일찍이 난수 발생기로서의 문학을 고찰했던 프리드리히 키틀러 같았다. 일단 2017년의 기록시스템이 되고자 하는 야심은 흥미로웠다. 한데 작품 속에 언뜻 보이는 ‘앙심’이 문제였다. 의미가 무엇일까, 꼭 주제가 드러나야 하는가, 표현이란 무엇인가, 소설이란 무엇일까 등으로 정리되는 근본적인 질문을 군데군데 심어놓은 부분이 걸렸다. 이들이 심사자와 문학장을 향해 내보인 가운뎃손가락은 뭉툭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리저리 활개 치고 다니는 너드식 유머와 문자의 시각화 실험에 너무 신경 쓴 나머지 ‘메타 –’가 든든한 작품 설명서가 되리라 쉽게 믿었던 건 아니었는지 되묻고 싶다.
후반전 _후보는 이서아의 「홍연」, 김환의 「기계」, 박새롬의 「마사히로의 식탁」으로 좁혀졌다. 어느 미술학원 청소부의 착란을 그린 이서아의 「홍연」은 색깔과 색감을 화살표로 삼아 장면을 계속 이어놓는 묘사가 인상적이었다. 다만 이야기의 핵심인 화자의 불안을 점점 진공 상태로 가두어야 하는 설정 속에서 일상을 영위하는 보통 사람들이 화자의 심리 상태에 부합하기 위한 대비로 너무 안일하게 소모되고 있어 아쉬웠다. 아울러 심리를 최대한 예민하게 보여줘야 할 테마에서 분노와 무기력, 혐오와 나르시시즘, 무감과 매혹 같은 단어들이 작품 속에 스며들지 못하고 그대로 노출된 것은 약점으로 작용했다. 기계화에 대한 둔중한 고찰을 선보인 김환의 「기계」는 심사자 사이에서 ‘모처럼’이란 표현이 자주 나왔을 정도로 고전적 향취를 풍기는 고뇌가 매력으로 다가왔다. 도주와 추적이라는 구도 , 굉음의 공포 아래 화자가 거주하는 공간을 일종의 ‘벙커’로 인식게 하는 긴장감의 유발, 인간이 기계가 되어가는 과정을 치명적인 잠식으로 영상화하려는 시도가 좋았다. 그러나 글쓴이가 중요하게 내세운 고민이 개념과 용어를 통해 제시될 때, 신적 권능·기계적 권능·기계성을 정의하고 싶어 하는 의욕이 과연 화자가 처한 서사적 여건 안에 성공적으로 안착하고 있는지는 의문이었다. 가족잔혹극을 표방하는 박새롬의 「마사히로의 식탁」은 동체 시력이 빼어난 작품이었다. 마치 인물·동물·사물을 격자에 대고 인물·동물의 동작, 사물의 상태를 샅샅이 훑어내려는 듯한 시도가 인상적이었다. 가령 지면을 스크린에 견준다면, 지면을 꼼꼼한 미장센을 올려놓는 곳으로 여기는 듯한 글쓴이는 소노 시온의 「노리코의 식탁」, 박찬욱의 「박쥐」에서 나왔던 ‘둘러앉는’ 식구와 그것이 주는 섬뜩한 분위기를 세밀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하나 소설 속 주요 인물 중 한 명인 기상목의 직업을 지리학자로 둔 점을 그냥 지나치기엔 글쓴이가 꽤 자주 언급하고 있었던 것이 의문스러웠다. 왜 지리학자였는가라는 설정이 학자가 얻어온 명성 수준으로 처리되었던 점은 아쉬웠다. 과도하게 촘촘한 묘사가 소설을 피로하게 만들고 있지 않은가라는 동료 심사자들의 지적도 수긍할 만했다.
인저리 타임_심사를 마치고 응모작의 입장으로 돌아가는 상상을 해보았다. 혹시 내가 ‘문지적인 소설’이 무엇이라고 기출문제를 나누듯 주변인에게 들은 적인 있다면, 그 감정은 무엇일까. 그리 들은 이후 과연 나는 어떻게 했을까. 오늘날 ‘문지적인 것’이 무엇인지 다시금 묻고 싶다. – 김신식(『문학과사회』 편집동인 )
신인문학상 심사에서 가장 새롭지 않은 장면이 있다면, 그것은 새로운 소설이 아니라 는 이유로 응모작들을 탈락시키는 장면일 것이다. 올해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소설 심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최종심에 올라온 스물여덟 편의 작품들이 기성 작가의 스타일을 답습하고 있다거나 정형화된 신춘문예형 스타일을 보여주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많은 소설들이 심사위원들을 당혹게 할 정도로 일견 새로운 스타일과 전위적인 실험정신을 내세우고 있었다. 따라서 심사 의견은 조심스러웠고 숙고는 길게 이어졌다. 하지만 이 새로움의 외피를 쓴 소설들이 정말로 새로운 소설인가에 대해서 결국 많은 이들이 확신하지 못했기에 아쉽지만 당선작을 정하지 못하였다. 민진과 김환경의 소설은 번득이는 기지와 세련된 시적인 문장이 군데군데 발견되었지만 소설적 난센스를 만들려는 몸짓이 과장되고 억지스런 느낌을 주었고 , 새로운 소설을 쓰겠다는 과잉된 의식에서 자신을 충분히 객관화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차양진의 소설 또한 경쾌한 감각의 문장이 매력적이었지만 생뚱맞은 서사의 흐름을 젊은 감각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유치하고 덜컹거리는 면이 있었다. 이런 소설들 속에서 역설적으로 1950, 60년대의 한국 관념소설을 연상시키는 김환의 소설이 외려 신선해 보였다. 신과 같은 추상적 관념에 대한 집요한 유희와 탐구, 사유의 변증적인 전개를 숨 막힐 정도로 그대로 노출하는 문장 등은 최근 한국 소설에서 유난히 희귀해진 유산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의 소설 「기계」와 「쥐」에서 장용학 등의 관념소설의 문제의식을 뛰어넘는 현재적인 것을 뚜렷하게 발견하기는 어려웠다. 많은 응모작들이 새로운 소설에 대한 강박적인 열망을 뿜어냈지만 오히려 소설의 특정한 경향과 유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탈역사적인 무중력의 시공간에서 어지럽게 부유하는 서사나, 무국적적이고 무성적이며, 이니셜로 대변되는 실체 없는 인물의 묘사 등이 이미 ‘새로운 소설’의 클리셰가 되어버린것이 아닌가 싶다. 이런 비슷비슷한 인상을 주는 소설들이 많다 보니, 이것이 오히려 자의식의 과잉이 아니라 자의식의 부재를 난해함으로 메우려는 하나의 시대적 징후가 아닌가, 그래서 이런 소설들이 바로 현재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정당하게 평가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솔직히 헷갈리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의 독서와 사유를 교란하는 난해함이 미학적 새로움과 유의미한 즐거움으로 이어졌던 작품들을 떠올리면서 조금 더 신중하게 그와 같은 작품을 기다려보고 싶다. – 이경진 (『문학과사회』 편집동인 )
응모작들을 읽을 때에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심사를 위해 동인들이 다 함께 한 자리에 모였을 때 자신이 분열적인 고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미학적으로 새로운 작품을 읽고 싶다는 욕망. 동시에, 그것이 (다수는 아닐지라도) 적지 않은 독자들에게 가급적이면 호감으로 읽혔으면 좋겠다는 생각. 그러니까 새롭긴 하지만 내키지 않는 무엇, 혹은 기껍지만 익숙한 무엇, 그런 것들이 아니면 좋겠다고 기대하며 응모작들을 읽었음을 알게 되었다. 나에게 그러한 고민의 타협안은 김환의 「기계」로 응모작들 중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몇몇 심사자들은 이것이 한국 전후소설이 보여준 것과 무엇이 다르냐 (그러니까 미학적 새로움과는 너무나 먼 것이 아니냐)고 반문했고 나 역시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충분히 알아들었지만, 지금의 독자들에게는 전혀 다르게 읽히리라 여겼다. 살 집을 구하러 나선 화자의 이야기라고 했을 때 지금 이 시기를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가질 법한 어떤 예상들 (비싸지만 열악한 환경, 우여곡절 끝에 그나마 집을 구하지만 반드시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을 다 떨쳐내고 거리낌 없이 관념소설로 가버릴 때의 쾌감은 결코 작은 게 아니었다. 또한 문장들이 흘러가는 방향을 아주 분명하게 틀고 잡아주는, 흔히 소설의 재료가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단어들의 선택으로부터 오는 쾌감 또한 아주 분명한 것이었다. 작가는 도대체 소설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며 이 작품을 신인상에 응모한 것일까 ? 그런 의문이 기분 좋게 떠오르는 작품이었다. 김환경의 「GG」 「노노노우」, 민진의 「작품 해설」 「조슈아 런」, 차양진의 「Where is my love」 「qkfr」을 두고 꽤 긴 시간 논의가 이루어졌다. 문장의 의미와 서사의 진행을 꼼꼼히 따져보다가 혹시 내가 작가에게 지금 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 불안해지고 어리둥절해지는 순간이 새로운 것에 열려 있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피해 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Where is my love」가 그랬다. 이 작품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잘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틀림없이 뭔가 있다는 확신이 오는 지점들이 있었다. 문장을 드래그하여 통째로 날리거나 손쉽게 다른 위치로 이동하는 방식, 적어도 처음부터 이러한 방식의 글쓰기를 익힌 세대라면 감각이 전혀 다를 수밖에 없지 않을까 ? 일부러 그러한 방식을 구현하려 애쓴 흔적이 아니라, 그것이 그저 자연스러워서 그렇게 쓴 것처럼 느껴지는 장면이 있었다. 그러니까 미학적 전통을 이어받으며 잘 단련된 소설로부터 한참 벗어나 있을 때, 하지만 그것이 전혀 애써서 이룬 것처럼 보이지 않을 때, 무언가 실험하려 한 것이 아니라그냥 그렇게 쓸수밖에 없어서 그렇게 쓴 것처럼 여겨질 때 누구라도 ‘새로운 세대의 출현’이라고 말하고 싶어지지 않을까. 나도 그랬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문학적으로 새로운 세대라는 것에 대한 환상이 나에게 있는 것은 아닐까 의혹을 품게 되는 순간이 곧 뒤따라왔다. 답을 내리는 데에는 시간이 좀더 필요할 것이다. 이서아의 「물개 시대」는 인물의 구도만으로도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작가는 레즈비언 커플로 추정되는 이웃집 여성들과 감정 상태가 불안정한 누나 사이에 남성 화자를 놓아두었다. 그런데 작가는 왜 이러한 여성들을 다루려는 것일까 ? 그리고 그녀들 사이에 왜 남성을 놓아둔 것일까 ? 소설에서는 이 의문이 잘 풀리지 않는 듯했다. 여성들의 위태로움을 관찰하고 두려움을 느끼는 남성의 내면이 소설로부터 생겨나는 것인지, 아니면 그 구도만으로 이미 주어져버리는 것인지 모호하다고 생각했다. 작가에게 이 지점이 좀더 분명해진다면 훨씬 흥미로운 작품으로 틀림없이 다시 만나게 되리라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응모작은 박새롬의 「마사히로의 식탁」이다. 문장 자체의 밀도가 대단하고 각각이 맡은 역할도 굉장히 크게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문장과 문장 사이 또한 매우 밭아서 그다음으로 넘어가기가 적어도 내게는 무척 버거웠다. 누군가 작품의 완성도가 높고 자신만의 세계 또한 잘 구축되어 있다고 한다면 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독자의 숨통을 조금만 트이게 해준다면, (이런 요구가 작가에게는 실로 무의미한 것이고 또 결례가 되리란 것도 알지만) 그래서 독자들이 문장들을 타고서 결국 가야 하는 지점까지 낙오되지 않도록 갈 수 있게 도와준다면 이 작가의 다음 작품을 충분히 읽고 싶어질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동인으로 합류하자마자 닥친 일이 심사였다.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게 아닐까, 싶었으나 결국 작품 앞에서는 누구나 그저 독자일 뿐이어서 읽고 평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당선작 없음’에 응모자와 독자 들이 느낄 감정들에 대하여 헤아려본다. 지금 이 시기 분명한 이유로 , 문학과사회 신인상 당선작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의 기쁨을 다음 해에는 함께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 황예인 (『문학과사회』 편집동인 )
[평론부문]
평론 부문 응모작들이 작년에 비해 늘어났다. 대부분 동시대의 문학 상황이나 지형에 대한 비평적 성찰을 보이려 했다. 동시대의 문학 현상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새로운 문학적 질서를 발견하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아쉬움도 많았다. 전반적으로 문제의식이 큰 응모작은 그 문제의식을 위해 구체적 문학 현상의 일부를 작위적으로 맞추려는 경향을 보이거나 짐작 가능한 문제의식에서 멈춘 사례가 많았고 , 문학 현상의 구체를 존중하려한 응모작들은 비평적 문제의식이 취약한 면모를 보였다. 무엇보다 자신의 비평적 질문과 그 질문을 해결하기 위한 텍스트 분석과 해석, 그 결과를 종합한 응답의 구조 전체를 나름대로 보여주는 것이 비평의 요체일 터인데, 그 어떤 부분에서 각각 다른 방식으로 미진함을 보인 응모작들이 많아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마지막까지 고민했던 응모작들을 중심으로 심사독자의 의견을 적어본다. 「제니퍼와의 짧은 연애 아카이브 : 이장욱의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의 미시적 순간」은 이장욱의 시집을 대상으로 하여 동시대의 시인이 시간의 문제와 어떤 방식으로 수사학적 대결을 하는지 탐문한 평문이다. 영원이나 순간의 문제, 시제나 시차 문제에 착목한 것은 인상적이었으나, 전반적으로 본인의 비평적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전체를 일관되게 구성했다는 느낌을 주지는 못했다. 비평적 질문을 명료하게 하고 , 그 질문을 풀기 위해 참조한 발터벤야민 등의 논거들을 왜 가져와야 했는지 논리적 정합성이 보태지고 , 시 인용을 조금 더 세련된 방식으로 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우로보로스에게 자유를 허하라 : 이연주론」은 응모작 중에 완성도가 가장 높았던 평문이다. 시를 분석하고 해석하는 과정이나 자기 논리를 밀고 나가는 문장력도 어지간하다. 그런데 2017년 지금 여기서 왜 이연주를 다시 읽어야 하는가, 1990년대 초반 이연주 읽기와 지금 이연주 읽기는 어떻게 달라야 하는가, 하는 지점에 대한 궁금증을 끝내 풀어주지 못했다. 「잉여의 윤리와 타자의 연대: 정용준론」은 정용준 소설의 의미 있는 특징을 구명한 비평문인데, 대상을 성실하게 읽어냈지만, 비평가로서의 자기 문제의식을 풀어나가는 측면에서는 제한적이었다. 함께 보낸 「기록으로서의 소설 쓰기: 은폐된 폭력의 구조와 진실의 목소리」는 상대적으로 자신의 비평적 문제의식에 근거한 비평적 질문을 분명히 한 글이다. 문제의식은 분명했지만, 그 문제의식의 차별화 지점에서, 또 문제의식을 심원하게 설득하는점에서, 약점을 보였다. 물론 심사독자가 읽지 못한 다른 미덕들이 많았을 수도 있고 실제로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이번에는 『문학과사회』의 이름으로 새로운 비평가를 초대하지 않기로 했다. 그들의 가능성을 믿지만, 그 가능세계가 더 무르익을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하는 것이 더 좋겠다는 판단이었다. 결과적으로 응모자 모두에게 퍽 미안한 심사 독회가 되었다. 그럼에도 멀리 않은 미래에 저마다의 가능성을 입증하여 좋은 비평가의 새로운 탄생을 알릴 수 있을 것이라는 예감은 버리지 않기로 했다. – 우찬제 (문학평론가)
이번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평론 부문 심사에는 작년보다 많은 응모작들이 투고되었다. 여전히 비평적 분석력과 문장의 매혹을 함께 보여주는 글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당선작으로 고려한 글은 「제니퍼와의 짧은 연애 아카이브」와 「우로보로스에게 자유를 허하라」 였다. 두 글 모두 상대적으로 안정되고 정확한 문장을 구사하고 있었고 ,텍스트를 분석하는 능력과 논리의 설득력이 있었다. 이장욱 시집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을 분석한 「제니퍼와의 짧은 연애 아카이브」는 감각적인 문장이 돋보였다. 시집의 한 국면을 보들레르와 연결시켜 하나의 장면으로 제시하는 방식도 매력적이었다. 이 매력적인 세계는 그러나 이장욱의 시집 가운데 한 권, 그리고 그중에서 하나의 국면을 미시적으로 절단했을 때 가능해지는 세계이기 때문에, 이장욱 시의 전체적인 맥락에 대한 독서를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니었다. 이연주의 시를 분석한 「우로보로스에게 자유를 허하라」의 경우는 품위 있는 문장력과 설득력 있는 텍스트 분석이 돋보였고 , 완성도가 높은 비평이었다. 문제는 ‘왜 지금 이연주의 시인가 ?’라는 질문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연주의 시가 ‘지금’ 문제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추가될 필요가 있었으며, ‘예외자’와 같은 개념들은 거의 모든 시인에게 해당될 수 있는 것으로 이연주 시의 미학적 특이성을 드러내는 날카로움을 갖지는 못했다. 고민스러운 논의 끝에 ‘당선작 없음’으로 결론을 내게 된 것에 대해 아쉬움이 크다. 이 아쉬움은 미지의 비평들에 대한 또 다른 기다림으로 메워야 할 것이다. 투고해준 모든 분께 고마움을 전한다. 비평적 글쓰기는 동시대의 감각과 연결되어야 하며, ‘문학적인 것’의 잠재성을 밀고 나가는 것이라는 생각은, 비평을 둘러싼 포기할 수 없는 ‘편견’이다. – 이광호 (문학평론가)
수상자: 윤은성
장르: 시
작품: 「공원의 전개」 외 4편
수상 소감:
할 일을 다 하지 못하고 있다. 나 자신을 계속 속이고 있다. 가만히 들어와 있는 햇빛이었는데. 애를 쓸 것도 없이 움켜쥔 손을 풀면 되는 것일 텐데. 그러면 질문 하나. 자리를 털고서 일어날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오는가. 햇빛 아래에서 한참을 보내고 나의 살갗은 얼얼하고 쓰라렸다. 벚꽃이 지는 동안 덧붙일 말이 필요 없는 정확한 말을 나는 얻고 있었다. 은성 씨는 정말 자기중심적이네요 . 선명한 그의 이 말을 기억하려고 한다. 애를 쓰고 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라는 말 역시 그가 내게 가르쳐준 적이 있으니까. 커다란 보폭으로 그새 저만치 나아간 그가 나에게 보인다. 단단하고 묵묵한 손을 가진 그에게. 종종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기도하는 마음을 보낼 것이다. 단호해지겠다는 마지막 다짐도 함께.
온기를 지나고 .나는 잠시 나에게로 . 시인이 됐다는 말을 이제 막 전해 들은. 텅 빈 상자 하나 놓인 듯한 서늘한 나의 얼굴에게로 . 상자의 밖을 보자고 격려하는 것을 잊지 않을 것이다. 할 것이 지금 아주 많으니까. 잠깐 선물인 척 놓여 있어도 보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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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수 교수님. 강의실 한편 울 수 있는 책상과, 생각을 말해도 되는 품을 허락해주신 것, 뒤돌면 언제나 생각이 납니다. 안전하다고 공부하자고 기다린다고 눈빛을 보내주신 것 잊지않겠습니다. 또 늘 진지한 마음가짐을 새롭게 주시는 박명진 교수님, 김흥식 교수님께 이렇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부족하지만 차분히 주어진 것들을 배우겠습니다. 선율, 선희, 현진, 영신, 성실한 예술가 민근이 오빠와. 철없는 저를 신경 써준 우신 오빠. 현아, 진솔, 휘원. 함께 부대끼는 것을 포기하지 않아준 이름들입니다. 모두 다 잘되자. 시 쓰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마음을 주시는 전형철 선생님, 오래 따끔하고 고마운 이현승 선생님, 뚫린 마음을 마주 봐도 괜찮단 마음을 주시는 이찬 선생님, 등 두드려주신 채상우 선생님께. 국, 호석, 상준, 현일, 우덕 오빠에게. 밥 사주고 시 읽어준 선배 시인들에게. 김남규, 최세운, 김건영, 김승일, 최원 선배에게. 마음 전합니다. 친근한 임곤택 선생님, 예쁜 김지녀 선생님께도요 . 그리고 장석원 선생님. 저 시 씁니다. 아직 시작도 안 한 것이라고 여길게요 . 흔들리고 텅 빈 눈으로도 시를 가져볼 수 있다는 것, 아주 어린 날의 제가 첫 시 수업에서 주워 붙이기 시작한 깃털들입니다. 나의 자랑인 현우와 음악가 폴린딜드 . 김회권 목사님과 가향의 벗들께. 이 소식을 얼마나 전하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또 , 광운 아벱에게. 사랑스러운 지현·혜리 언니, 내게 천사인 지혜와 해리. 지홀에게. 신승철 간사님께. 우림에게. 나무인 영광에게. 예대에서의 나의 빛, 혜련 언니, 아람, 누리, 경, 재아, 민정, 슬, 서원과 종원에게. 무대 건너편 영리한 친구 세영에게. 현구 오빠의 극작품들에게. 상훈 오빠에게. 신해철과 한웅재의 곡들에게. 좋은 박상수 선생님. 지희 선생님. 승환 선생님께. 수유너머의, 환영해주신 선생님들께친구 세라와 나영, 수현에게도 . 다정한 인사를 보냅니다. 영원과 윤중의 이제는 다 큰 꼬마들과. 삶의 한 방식을 가르쳐준 제이브로스에도. 나의 첫사랑 남웅 오빠. 고운 진영 언니. 귀여운 조카 찬. 속 깊은 철민. 순녀 씨와. 나의 여린 나뭇가지, 엄마와 아빠. 마음을 정리하면 언제나 이것을 다시 써, 나의 모든 걸음들에 당신들의 이름이 묻어 있어. 서윤, 시영 아프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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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잘 못해서 언제나 저녁의 도서관에서는 일기를 썼습니다. 제가 적은 글자들인데도 단번에 믿기가 어려웠습니다. 후회를 했는데도 또 후회했습니다. 조연정·강동호 심사위원 선생님. 더 단단해지고 싶습니다. 그렇게 살아야죠 . 주신 믿음에 답하는 시인으로 살도록 끝까지 노력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 격려해주신 채호기·김혜순·이광호 선생님. 깊이 감사드립니다.
작가 소개:
1987년 전남 해남 출생. 중앙대학교 국문과 대학원 재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