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13회
정지돈 / 소설 / 눈먼 부엉이
2002년 처음 제정된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이 2013년 올해로 13회를 맞았다. 3월 말까지 접수된 응모작을 대상으로 4월 6일에 예심, 19일에 본심이 진행되었다. 심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편집동인들은 응모작에 대해 많은 의견을 나누었는데, 문학됨이라는 가치가 어디 초월적인 별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들의 협의에 의해 이르는 것이라는 상식적인 진실이 여실히 드러나는 현장이었다. 당선자에게 축하와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시 부문>
총 874명이 응모하여 예년과 비슷한 성원을 해주었다. 심사위원들은 그중 예심을 통과한 11명, 강민근, 구현우, 김창훈, 김해슬, 김혜린, 이시용, 이재은, 임지은, 최설, 최세운, 최수현의 시에 주목하였다. 이 중 습작 수준에 머물러 있거나 기성의 시를 연상시키는 경우를 우선 배제하였고,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이 전통적으로 중요하게 고려해온 덕목인 자기만의 개성적 목소리가 시편에 내재되어 있는가를 중시해서 최종적으로 5명의 응모작으로 압축하였다. 강민근, 구현우, 김창훈, 임지은, 최수현 시를 두고 심사자들은 장고(長考)에 들어갔으나, 흔쾌히 당선작을 내기 어렵다는 데 모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최종심에 남은 대상작들이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우선 시편의 완성도가 높은 경우는 누군가의 시와 닮았다는 인상을 강하게 주었다. 몇 해 전부터 신인상 심사 때마다 2000년대 이후 한국 시단에서 크게 주목받았던 시인들을 떠올리게 하는 시편들이 많다는 사실은 계속해서 제기되었던 문제다. 올해에도 여전히 유사한 한계가 되풀이되고 있음을 확인했다. 한편, 완성도 면에서는 다소 아쉬움을 준다 해도 앞으로의 가능성에 기대를 걸어봄직한 특유의 패기와 고유의 독특함이 묻어나는 시편이 눈에 띄었다면 그 또한 반가운 일이었을 텐데, 매력적인 신인들이 보유하기 마련인 그러한 미덕을 발견하기 어려웠다는 점도 심사자들의 고민을 깊게 하였다. 마지막까지 이야기된 것은 최수현의 시였다. 속칭 ‘B급 정서’로 불리는 도발성과 불량함이 스산한 불안감과 우울의 정서와 결합된 양상이 또 다른 세대적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고 여겨졌고, 이를 파격적이거나 자극적인 요설의 형식이 아닌 정제된 언어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 큰 장점으로 지목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정서의 양식화가 심사자들이 판단하기엔 모 시인의 경우와 너무나 닮아 있다는 점이 단점으로 지목되었다. 최수현의 시를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것을 끝내 주저하게 만든 것은 바로 이 기시감 때문이다. 자기만의 시적 개성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좀더 과감한 실험성과 용기 있는 일탈이 그에게는 더 필요할지 모르겠다. 심사자들은 이러한 논의 끝에 결국 올해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시 부문의 당선작은 내지 않기로 뜻을 모았다. 기대를 갖고 소식을 기다렸을 응모자 분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응원과 감사의 말을 드린다.
<소설 부문>
단편 혹은 중편소설을 투고한 응모자는 총 441명으로 448명이 투고했던 작년과 거의 같은 수준이었다. 우리는 산처럼 쌓여 있는 원고들에 숨어 있을 한국 소설의 빛나는 미래들을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해 마지않았다. 편집동인들은 1차 예심 독회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매력적인 가능성이 엿보이는 작품들은 다소 수가 많더라도 본심 작품으로 남기고 보다 꼼꼼하고 자세하게 읽기로 합의했다. 그렇게 해서 공현진, 곽문진, 김봉곤, 김세정, 김우성, 박현서, 성상희, 양선형, 이성진, 이수진, 이이수, 이창재, 임슬애, 정수인, 정지돈, 최설, 팽이언 총 17명의 작품들이 본심에 올랐다. 이들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자신만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일부는 완성된 작품으로서의 소설에 도달하는 데 실패했고, 또 일부는 설사 완성작으로서의 소설이 되었다고 해도 그 가능성을 끝까지 개화시키지 못했다.
정지돈의 「눈먼 부엉이」는 독해 과정에 참여했던 동인들의 대부분이 호감을 표했던 작품이다. 이 작품은 얼핏 읽으면 최근 2~3년 사이에 등장하기 시작한, 흔히 지식조합형 소설이라 불리는 어떤 흐름에 동참하고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현실에 대한 재현에 소설이 큰 강박을 느끼지 않는 추세는 2000년대 이후 누누이 지적되어온 점이지만, 간접적으로 획득된 정보의 무더기들의 짜임을 통해 유사 현실을 창안해내려는 면모는 분명 최근에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지돈의 소설들은 그러한 일군의 흐름들 속에서도 단연 독보적인 매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소설이, 벤야민의 용어를 빌리자면, 경험Erfahrung이 일천하고 단지 단발적인 체험Erlebnis의 스펙터클만이 가능한 시대의 세대가 최대한으로 보여줄 수 있는 자기 분신(焚身)적인 형태의 이야기의 경험성을 만들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지돈의 지적인 이야기들이 그저 유사 현실을 만들어내는 조형적 기쁨에 만족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경험이 불가능해 보이는 시대에서 파괴적인 경험의 계기를, 일종의 멜랑콜리적 향수를 통해 열고 있다는 뜻이다. 정지돈의 활달한 지성과 진지한 위트에 내기를 걸어도 좋겠다고 믿은 까닭도 거기에 있다. ‘기대’라는 말이야말로 이런 자리에서는 거의 관습적으로 사용되는 말이겠지만, 그가 향후 쓰게 될 작품들이 우리의 기대가 관습의 답습이 아니었음을 증명해줄 것이라 기대한다.
정지돈에게는 축하와 격려의 인사를, 그리고 아쉽게 당선되지 못한 이들에게는 위로의 말을 건넨다.
<평론 부문>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의 평론 부문은 올해도 당선작을 내지 못하였다. 당선작이 없다는 점도 아쉽지만,
총 응모작이 7편에 그쳤다는 점은 계간 『문학과사회』가 문학평론가들의 편집동인지를 표방한다는 것을 떠올리면 참담한 심정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최근 인문적 교양이 활성화되고 있다는 증거로 출판 시장에서 인문학 관련 도서가 소위 대중에게 ‘먹히는’ 상품이 되어가고 있음을 꼽는 것은 순진한 진단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인문학의 대중적 상품화와 비판적 지성의 구축은 별개의 것이며, 오히려 지성이 사회적으로 비판적 지성 본연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속물적 형태의 개인적 치장의 수단으로 변질되고 있지 않은가라는 우려를 갖게 한다. 다소 극단적일 수 있는 이런 말을 감히 쓸 수 있는 이유는 전통적으로 한국 지성사에서 비평의 영역이 가장 튼튼하게 뿌리내린 문학 분야에 비평문을 쓰고자 하는 이들이 이만큼 수적으로 크게 줄어들고 있다는 현상보다 지성의 표현 영역의 약화를 더 뚜렷하게 보여주는 예는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적고 보니 응모작이 7편이라는 점을 오히려 다행스럽게 여겨야 하는 것일지 모른다는 아이러니한 생각도 든다. 올해 응모작 중 김주선의 「(도달하지 않는) 부쳐진 편지」 외 1편이 가장 눈에 띄었다는 점은 다소 위안이 된다. 김주선의 글은 비평문이 갖추어야 할 요건을 잘 구비하고 있었다. 대상 텍스트에 대한 주밀한 독해와 그러한 독해의 틀을 구축하는 과정이 마치 추리소설의 서사가 감춰진 파편적 복선을 따라 촘촘히 짜이듯 비평문 내부에서 제시된 문제의 실마리를 찾아가며 전체 윤곽을 드러내는 서사를 품고 있었고, 이를 위해 필요한 텍스트 분석이 설득력 있게 제시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좋은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끝내 당선작으로 결정하지 않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비평의 중추로 전면에 내세워야 할 것과 배경과 참조 사항으로 삼아야 할 것을 요령 있게 배치하는 기술이 다소 부족해 보인다는 점이 아쉬웠다. 그리고 그런 이유 때문에라도 좀더 시간을 들여 자신의 장점을 잘 갈무리한 뒤에 등단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도 있었다. 그만큼 그는 평론가에게 필요한 자질을 잘 갖추고 있다. 그의 이름을 비평가의 목록에서 곧 만나게 될 것이라는 짐작이 든다. 비평이 발 딛을 곳을 점점 잃어가는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평문을 보내준 소수 정예(!)의 응모자들에게 부디 기운을 잃지 말라는 말을 안부를 묻듯 감사 인사를 대신해 드린다.
심사 위원_강계숙, 강동호, 김형중, 이수형, 조연정, 허윤진
수상자: 정지돈
장르: 소설
작품: 눈먼 부엉이
수상 소감:
작년 여름 오한기와 후장사실주의analrealism 그룹을 결성했다. 통화 중에 우연히 나온 것으로 내가 후장사실주의를 결성하자고 말하자 오한기는 핸드폰을 손에 쥐고 데굴데굴 굴렀다. 후장사실주의는 『야만스러운 탐정들』에 나오는 내장사실주의의 패러디이다. 우리는 한 포털에 비밀 까페를 개설하고 이런저런 글을 올렸다. 당선작인 「눈먼 부엉이」를 처음 올린 곳도 그곳이다. 독자는 나와 오한기가 전부였다.
나는 작년 8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직업으로서 소설을 쓰고자 한다면, 괜찮다. 플롯을 짜고 캐릭터를 만들고 구체화와 형상화를 거듭해 의미를 만들고, 의미를 해체해도 괜찮다. 그러나 소설가가 되려는 게 아니라 작가가 되고 싶다면 그러지 않는 게 좋다.
작가가 되는 방법은 간단하다.
삶을 써라.
대화를 기록하고
자신의 생각을 기록하라.
그것뿐이다.
올해 1월 일기에는 이렇게 썼다.
비싼 가방을 샀다. 기쁘지 않다. 더 비싼 가방이 많기 때문이다.
좋은 작품이 뭔지 모르겠다.
그저 쏟아지는 농담 속에서 아름다운 장면 하나 둘 건지고 싶다.
2월 14일에는 고바야시 잇사가 두 세기 전에 쓴 하이쿠를 베껴 썼다. 존 버거가 인용한 것을 재인용한 것이다.
부자들을 위해
새 눈에 대해 너절한 글을 쓰는 것은
예술이 아니다.
2월 말에는 앙드레 고르의 문장을 필사했다.
‘아무도 자신이 소비할 것을 생산하지 않고, 아무도 자신이 생산하는 것을 소비하지 않는다.’
가장 최근에 발견한 문장은 아래와 같다. 스페인의 인테리어 잡지인 apartamento(#8)에서 찾았다.
A Real living space is made from living, not decorating.
나는 이를 문학에도 동일하게 적용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비에르 세르카스의 2001년작 『살라미나의 병사들』의 196페이지에 로베르토 볼라뇨가 등장한다. 그는 상상력이 없어 소설을 쓰지 못하겠다는 세르카스의 넋두리에 이렇게 답한다.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필요 없습니다. 단지 기억이 필요합니다. 소설은 기억을 조합하면서 쓰이지요.’
수전 손택은 곰브로비치의 최고작이 「포르노그라피아」나 「페르디두르케」가 아닌 그의 일기라고 했다. 곰브로비치의 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일요일.
나.
화요일.
나.
수요일.
나.
현재 오한기의 카카오톡 배경이미지는 곰브로비치의 일기이다.
오한기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내 작품이 있게 해준 모든 친구들, 가족들, 선생님들 그 외 지금은 연락하지도 보지도 않는 이들에게도 진심으로 감사하며 내 작품을 뽑아준 심사위원분들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2013. 5. 정지돈
작가 소개:
2013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내가 싸우듯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서 살 것이다』 『농담을 싫어하는 사람들』 『작은 겁쟁이 겁쟁이 새로운 파티』 『야간 경비원의 일기』 『문학의 기쁨』(공저) 『영화와 시』 등을 썼다. 2015년 젊은작가상 대상, 2016년 문지문학상을 수상했다. 2018년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 한국관 작가로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