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지문학상 14회 - 2024

함윤이 / 소설 부문 / 천사들(가제)

송희지 / 시 부문 / 루주rouge

함윤이

수상자: 함윤이

장르: 소설 부문

작품: 천사들(가제)

수상 소감:

「천사들(가제)」을 처음 썼을 때는 몇 해 전이고, 그때 나는 지금보다 이별을 덜 겪은 사람이었다. 미래의 나에 비하면 지금의 내가 이별을 덜 겪은 사람인 것처럼.
그 사실을 알게 된 후로 다가올 미래가 부쩍 두렵고, 그때마다 덜 게으르고 더 착하게 살아야지 다짐하게 된다. 나는 천성이 몹시 나태한데, 본성을 거스르면서 덜 게으르게, 그리하여 선하게 지내자니(선하게 지내려면 남들에게 밥도 차려주고 재미없는 이야기도 잘 들어주는 등 부지런하며 체력도 좋아야 하므로 운동에도 가열 찬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삶이 좀 재미가 없어졌다. 재미없이 지내는 것치고 제대로 착하게 사는 느낌도 아니어서 다시 게으름이라도 피워보기로 했다. 그 결과 요새는 양껏 늘어져 있다. 다만 식사와 글쓰기, 달리기만은 꾸준히 한다.
직장을 그만둔 여름부터 요새까지 주로 강변에서 뛰고 있다. 한강 중심부이든 한강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작은 천들이든 간에, 서울 강변에는 오리와 왜가리 그리고 이름 모를 새가 많이 산다. 며칠 전에는 조그만 갈색 오리가 물속으로 몸을 휙 기울여 엉덩이를 들쳐 올릴 때마다 뒤집어지게 웃는 남자애들을 봤다. 파란 체육복 차림이었고 네 명인가 다섯 명이었으며 오리들 무리보다 서로에게 꼭 달라붙은 채였다. 오리가 뒤집을 때마다 그들은 대단한 묘기를 본 서커스 관객처럼 소리를 지르고 손뼉을 쳤다. 그걸 보며 좀 속상했다. 요새는 아름다운 것을 볼 때마다 속이 상한다. 목 안쪽의 푹신한 구간에 침을 꽂아 넣는 것 같다.
「천사들(가제)」을 처음 쓰던 나는 지금의 나보다 만남도 덜 겪은 사람이었다. 그 때문인지 체력은 더 좋고 생각은 더 많아서 아는 사람들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실재하는 사람이나 허구의 인물에 대해서도, 서로 알거나 나 홀로 일방적으로 아는 이에 관해서도 잦게 곱씹었다. 그들의 아름다움이나 추함, 좋은 점과 싫은 점, 밥 먹을 때의 독특한 습관이나 웃는 모습 등을 그리고 뜯어보다가 잊어버리곤 했다. 사람들은 중요하다. 그들만큼 중요한 게 없어 보였다. 「천사들(가제)」은 그런 심보로 쓰기 시작한 소설인 것 같다.
작년 이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새로 다시 썼을 때 나는 전보다 사람에 대해 훨씬 덜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친구나 애인의 말 한마디에 죽을 것 같았다가도 마음이 녹아내려 세상이 투명해지는 시기가 떠나고, 요사이 나는 이따 먹을 것이나 달리는 순간 착용할 옷에 대해 더욱 골몰한다. 그리고 밥을 먹고, 뛰고, 일(주로 글 쓰는 방식으로)하다가 문득 깨닫는 것이다. 지금의 내 몸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이 소설을 처음 쓴 때보다도 더 오래전의 일이다. 그때도 나는 잘 먹는 사람이었다. 상가 접객실에 앉아 육개장과 육전을 먹고 꿀떡을 집는데 한때 친하던 사람이 말했다. “참 잘 먹는다……” 그것은 그 나름의 농담이었고, 나도 멋쩍었지만 식 웃었다. 그날은 빈소 안쪽 방에서 잤다.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지 못해 끙끙거리자, 또 다른 친하던 사람이 말했다. “왜 이렇게 잘 자니.” 그것은 분명한 힐난이었다. 겸연쩍었지만 그래도 계속 잤다. 지나고 보니 농담도 힐난도 모두 애매한 깊이의 상처로 남아 있었다. 잘 먹거나 잘 자는 일이 어떤 배반 같았다.
그날 내게 농담과 힐난을 준 사람들은 이후에도 내게 꾸준히 잘 지은 밥 그리고 여러 번 세탁한 이부자리를 마련해줬다. 과거에도 그래온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오래도록 나를 살게 만든 쪽이었지, 못살게 구는 이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기록하고 만들어내는 일을 택한 나는 구태여 이런 부위의 기억만 기막히게 꺼내어 여기 고자질한다. 그날 남은 상처가 천사들과 닮았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다. 동시에 그날 내게 농담하거나 힐난했던 이들의 상처를 만졌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인 것도 같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을 만들었을 농담과 힐난에 관해서 조금씩 알아가게 된다.
그 이후로 나 역시 이것저것 많이 만들었다. 혼자 만든 것도 있고, 친구들과 같이 만든 것도 있다. 숲속에서 영화를 찍거나 한강을 배경으로 한 시나리오를 주고받았고, 영혼이 사람이 모두 사라진 모스크바를 헤매는 게임을 설계하고(정확히 말하면 친구가 프로그램을 돌리고 나는 옆에서 감탄했다), 오디션장에 모인 천사들처럼 그늘진 방에 여러 사람이 모여 서로의 몸을 조심스레 만지고 자신이 원하는 자세를 취하게 했다. 나중에는 이 일을 바탕으로 다시 소설을 썼다.
무엇인가 만들 때 나는 내 몸이 무엇으로 이뤄져 있는지 혹은 천사들이 우리를 따라다니는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리하여 나중에 돌아보면 깜짝깜짝 놀라고 만다. 그때 나를 비롯한 우리는 얼마나 생각 없이 무서운 짓을 한 건가 싶다. 어쩜 그렇게 조심성 없이 친밀해지고 무언가 만들어내고 우리 사이 서 있는 천사를 두들겨 패거나 끌어안았는지, 혹은 천사들에게 두들겨 맞고 포옹당했는지. 그리고 급기야는 그런 일만이 의미 있는 것처럼 기억되기도 한다.

여기까지 쓴 다음 글을 마무리하지 못해 대체 무슨 말로 끝맺어야 하나 고민하며 강변에 나가 뛰었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나가서인지 아주 많은 사람이 있었다. 달리거나 걷거나 멈춰 선 채 각자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내일이면 11월이고, 눈 깜짝할 새 우리는 공식적으로 사라진 질서(‘세는 나이’ 얘기다)에 따라 한 살씩 더 먹을 것이다. 미래는 내가 두려워하든 말든 꾸준히 온다. 이삿짐 트럭처럼 이별과 만남을 잔뜩 실은 채 올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계속 천사들을 붙들고, 그들을 함께 만들어낸 얼굴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예전보다 드물게 생각하거나 덜 골몰하더라도 말이다. 실존 인물이거나 허구의 존재거나 서로 알든 나 홀로 흠모하든 상관없이.
이 소설을 처음의 처음으로 썼을 때부터 꾸준히 읽고 응원과 조언을 해준 소영과 솔이에게, 소설을 새로 굴리던 무렵 적재적소의 피드백을 건네준 윤과 지지에게, 때마침 부산행 완행열차를 타서 안내방송을 녹음해준 소빈에게, 이 글을 읽고 자신의 천사들에 관해 말해준 이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운이 좋다면 이듬해에는 이들 중 몇몇과 함께 물 마시는 오리를 만나러 가고 싶다.

작가 소개:

2022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음.

송희지

수상자: 송희지

장르: 시 부문

작품: 루주rouge

수상 소감:

굵은 털이 자라나기 시작한 순간부터,
내 몸은 숲이었어. 검고 구불거리는 나무들이 내 살갗에 뿌리를 내리고 사방으로 뻗어 나갔어. 하나같이 야생이었어. 조경사의 의도 없이, 산지기의 구획 없이 아무렇게 자라고 엉키고 뒤덮었어. 숲은 누구보다도 생생하게 살아 있었고 또 엄격해 보였어. 그 어떤 길도 만들어지기를 허락하지 않는 듯했어. 칼날 같은 숲의 잎과 가지 들은 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어. 숲을 가질 수 있는 건 숲뿐이라고. 숲을 만들 수 있는 건 숲뿐이라고. 숲의 왕은 오로지 숲의 내면에만 있을 따름이라고.
그리고 나는 숲의 침입자였어.
나는 오래 그곳을 헤맸어. 나는 오래 그 숲의 바깥이었어. 내게는 작은 손과 발이 나 있어 무언가를 붙들고 밟을 수 있었는데, 그것으로 몇 개의 가지를 부러뜨리거나 수풀 몇 개를 뛰어넘을 수는 있어도 나의 영지를 만들어낼 수는 없었어. 밭을 일구거나 집을 짓는 일은 모두 나의 능력 밖이었어. 나는 그 숲의 무엇도 쓸 수 없었고, 그것은 모두 나 밖의 일이었고, 내가 쓸 수 있는 거라곤 오직 나뿐이었어. 나의 불결함. 나의 외로움. 나의 부끄럼. 나의 화기(火氣). 그 숲속에서 나만이 내가 쥘 수 있는 유일한 도구였어. 가소로운 악력으로 나를 붙든 채로 나는, 가끔 예감했지. 내가 오래도록 숲을 떠돌게 되리라고. 숲을 지켜보게 되리라고. 숲과 나의 간극이 절대 줄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 사실이 나를 오래도록 있게 하리라는 것을 깨닫곤 했던 거야.

요즈음 이런 것을 겪고 있어.
어떤 것 같아?
내가 말을 마쳤을 때, 맞은편에 앉아 있는 나는 잠깐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수그렸다. 그는 나의 긴 이야기를 끼어듦 없이 다 들어주었다.
내가 고개를 든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쓰자. 희지야. 그것을 모두 써보자.

​그리하여 내가 썼다.

* * *

나의 이름 ‘희지’에서 점 세 개를 덧붙이면 ‘화자’가 된다. 그러니까 희지는 줄임표(……)를 갖지 못한 화자인 것이다.
어떤 화자는 침묵으로도 말한다. 누구보다도 격렬하게 말한다.
그러나 나의 화자는 아직 몸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들이 많다고 느끼는 듯하다.
조충처럼 꿈틀거리는 말들을, 하루빨리 바깥으로 토해내고 싶은 듯하다.

* * *

​수상을 알리는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 있었다. 남자친구가 운전하고 있었고, 나는 조수석에 탄 채였다. 우리는 인사동에서 전시회를 보고 전통찻집에서 차를 마셨었다. 통화를 마치고 나서는 조금 울었다. 참으로 좋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인생에서 몇 안 될 기쁨의 순간을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이.
내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 나를 사랑해주는 모든 이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나의 기쁨이 그들에게 닿았으면 좋겠다. 나의 기쁨이 우리의 기쁨이었으면 좋겠다. 우리의 기쁨이 순간이어서, 순간에 불과하여서, 그 순간을 밀고 더듬으며 모두가 기어이 긴 삶을 다 살아낼 수 있으면 좋겠다.

나에게 쓸 시간이 아주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나를 설레게 한다. 나는 최선을 다해 미래와 접촉하려 들 것이다. 계속해서. 온몸을 다해서.
더는 그럴 수 없을 때까지 그럴 것이다.
이 거대한 법정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자세란 그뿐인 듯하다.

작가 소개:

2019년 『시인동네』를 통해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음. 시집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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