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회. 행위로의 이행: ‘치정’이었는데 ‘정치’가 됐네

말 많은 위고의 경박성은 자신의 비밀 임무를 아내에게 발설하는데(pp.57,62)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슬라보예 지젝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을 은폐하기 위한 알리바이 혹은 주체의 무기력을 감추기 위한 과잉 행동을 가리켜 ‘행위로의 이행’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자신을 억압하는 대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거나 억압의 구조와 정면 대결하기를 회피한 결과로 생겨나는 자기기만이자 오인 공격이 바로 행위로의 이행이다. 지젝이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단골로 드는 텍스트가 마틴 스콜세지의 <택시 드라이버Taxi Driver>(1976)다. 그 영화 속의 트레비스(로버트 드 니로)나 『더러운 손』의 위고는 주체의 무능과 무기력을 감추기 위해 총을 쏜다. 사르트르는 이런 인물을 그의 단편소설 「에로스트라트」에서 다시 한 번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
사르트르와 카뮈가 정치 문제로 심하게 반목했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사실이 아니다. 정치 문제로 뒤틀어진 두 사람은 지면에서뿐 아니라, 파리의 극장에서도 경쟁을 이어갔다. 사르트르의 이 작품과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카뮈의 『정의의 사람들』(1944)은 ‘목적이 수단을 정의롭게 해주는가?’라는 동일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로널드 애런슨의 『사르트르와 카뮈: 우정과 투쟁』,연암서가, 2011)에 재미난 일화가 나온다.

1949년 12월에 있었던 <정의의 사람들>의 초연[때], 관객들 속에서 한 여자가 [곁에 있 는] 사르트르를 알아보지 못한 채 카뮈에게 자기는 『더러운 손』보다도 『정의의 사람들』을 더 좋아한다고 소리쳤다.(p.235)

주) 본 글에 나오는 ‘거짓말’에 대해서는 강충권의 논문 「『 더러운 손 』이 지닌 애매성의 문제」(『불어불문학연구』,46권 1호,한국불어불문학회,2001)를 참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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