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회. 행위로의 이행: ‘치정’이었는데 ‘정치’가 됐네

사르트르는 젊은 시절부터 “스피노자이면서 스탕달”(지영래, 「한국 사르트르 희곡 작품 수용 양상」, 강충권 외 6명, 『실존과 참여: 한국의 사르트르 수용 1948~2007』, 문학과지성사, 2012, p.267)이 되고 싶어 했다. 그는 철학과 문학 양쪽에서 성공하고 싶어 했고, 실제로 그는 『구토』(1938), 『존재와 무』(1943) 같은 저서를 통해 자신의 희망을 실현했다. 하지만 사르트르가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소설도 철학서도 아닌 희곡(연극)이다.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점령 중이던 1943년 파리에서 공연된 사르트르 최초의 희곡 『파리떼』는 그리스의 오레스테스 신화를 빌려 독일 점령의 부당성과 프랑스인의 집단적 패배주의를 환기시킴으로써 관객과 비평가 들에게 큰 인상을 주었고, 1947년에 착상하여 1948년에 초연된 다섯번째 작품『더러운 손』은 전후 최고의 희곡이라는 열광적인 찬사를 비평가들로부터 끌어내면서 사르트르를 대극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연극을 대하는 사르트르의 열의는 그것이 그에게 가져다준 명성에 비추어 매우 미온적이었다. 앞서 언급한 지영래에 따르면 “글을 쓴다는 것은 곧 소설을 쓴다는 것”이었던 사르트르에게 연극은 “다소 열등한 장르”(이상 『실존과 참여』, p.269)였다. 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사르트르 평전』(을유문화사,2009)에서는 예의 “다소 열등한 장르”라는 표현이 “사생아와 같은 장르”(p.622)라는 좀더 노골적인 표현을 입고 나왔다. 사르트르의 연극에 대한 태도를 잘 보여주는 일화는 『파리떼』의 공연이 이루어지기 3개월 앞서,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같은 작품의 단행본이 나왔을 때였다. 배우들의 공연을 참관하고 있던 사르트르는 새로 나온 책을 두드리며 이렇게 말했다. “이게 중요한 거라구! 이게!” 이 일화야말로 스스로 글쓰기와 책이 되고 싶어 했던 사르트르의 초상이 아닌가? 나는 이 아까운 일화를 어디서 읽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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