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 중요한 건 특이성 자체가 아니라 흔해빠진 클리셰를 바라보는 특이성이다.

듀나 (SF 소설가, 영화평론가)

 

아무래도 여기서 나의 의무는 크리스 마커의 <환송대>가 SF로서 얼마나 독창적이고 가치가 있는 작품인지를 설명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 설명에서 필요한 건 엉뚱하게도 <환송대> 원작이 아니라 <환송대>를 리메이크한 테리 길리엄의 <12 몽키스>와 이 영화를 또 원작으로 삼은 동명의 텔레비전 시리즈이다. 대재난 이후 살아남은 주인공이 시간여행을 해서 과거로 돌아간다는 <환송대>의 아이디어는 이 두 편에서 모두 보존된다. 단지 영화판에서 처음 등장한 12 몽키스의 아이디어가 텔레비전 시리즈에서는 점점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환송대>에서는 필요 없었던 아이디어다. 이 영화가 나왔던 냉전 시대 사람들은 제3차 세계대전 + 핵전쟁이면 모든 게 만족스럽게 설명이 됐다.
왜 이 이야기를 위해 굳이 <12 몽키스>를 거쳐야 하느냐고? 그건 <12 몽키스> 영화와 드라마가 <환송대> 아이디어의 확장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환송대>의 아이디어와 이야기는 썩 만족스럽게 마무리된 4시즌의 텔레비전 시리즈를 커버한 재료이다. 이 정도면 성공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12 몽키스>는 <환송대>의 확장 가능성을 보여주는 일종의 배양액이다.
거꾸로 말한다면 <환송대>의 원작 자체는 그렇게까지 대단한 SF 아이디어를 보여주는 작품이 아니다. 여기저기에 발전 가능성이 있는 재료들이 숨어 있기는 하지만 작품 내에서 발전하지는 않는다.
한번 이 이야기를 문장만으로 요약해보자. 한 소년이 공항에서 어떤 여자와 총에 맞아 죽는 남자를 본다. 제3차 세계대전이 터지지만 소년은 살아남아 어른이 된다. 그는 미친 과학자들의 실험 대상이 되어 과거로 돌아가 그 공항의 여자를 만난다. 과거와 미래를 오가며 임무를 마친 그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지만 여자 앞에서 총에 맞아죽는다. 다시 말해 어린 시절에 그가 본 건 미래의 그 자신이었다.
이 아이디어 자체는 <환송대>가 나온 1960년대에도 흔해 빠진 클리셰였다. 비슷한 종류의 시간 여행 이야기는 정말 매 주마다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크리스 마커도 알았을 것이고 관객/독자들도 그 사실을 인지할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환송대>는 진부함을 의도한 작품이다. 두 편의 리메이크를 지탱한 아이디어는 아마도 우연히 나왔을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의 시간여행 아이디어를 너무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환송대>의 아이디어는 시간여행 이야기 전체의 아이디어인 것이나 마찬가지다.
의도적인 진부함은 대부분 다른 것들을 돋보이기 위해 사용된다. 사실 이 작품에서 가장 먼저 눈에 뜨이는 건 시간여행 SF의 아이디어가 아니라 그 아이디어를 풀어내는 스타일이다. 영화 <환송대>는 거의 전적으로 흑백 스틸 사진만으로 구성된 작품이며 마커는 오프닝에 ‘포토 로망’이라는 자막을 붙인다. 포토 로망은 1940년대부터 유럽에서 유행한 하이브리드 소설이다. 사진으로 구성된 코믹북 또는 영상 소설을 생각하면 되겠다. 이들은 대부분 흔해빠지고 전형적인 장르 스토리를 사용했다. 그리고 <환송대>가 영화에서 벗어나 책의 몸으로 옮겨지면서 이 작품은 진짜로 ‘포토 로망’이 되었다.
어떻게 이 흔해빠진 이야기가 역시 지독하게 통속적인 매체를 거쳐 영화로 옮겨졌을 때 압도적인 경험으로 완성되었는가? 물론 특이한 경험이며 지금도 그렇다. (이런 식으로 영화를 만들면 다 <환송대> 스타일로 여겨지기 때문에 성공적인 모방작이 별로 없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특이성 자체가 아니라 흔해빠진 클리셰를 바라보는 특이성이다. 마커는 진부한 장르 클리셰, 그리고 그를 넘어 1960년대 동시대 프랑스를 바라보는 완전히 새로운 시선을 만들어냈다. 윌리엄 깁슨이나 J. G. 발라드와 같은 노련한 장르 장인이 이 작품을 충격으로 받아들인 이유도 여기에 있었으리라. 이 익숙한 이야기와 익숙한 공간을 이렇게 낯선 의미로 만들어낼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상상도 할 수 없었는데, 그 재료들 자체도 엄청 통속적이었다. 21세기 한국 기준으로 본다면 엄청나게 가성비가 좋은 실험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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