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회. 절벽 끝에서 부르는 노래 – 볼프강 보르헤르트의 『이별 없는 세대』

허연 (시인)

보르헤르트는 영원히 젊다. 진행되지 못하고 어느 순간 잘려나간 필름처럼 보르헤르트의 상(像)은 정지되어 있다. 그리고 그 ‘상’의 배경은 늘 폐허다. 불타버린 집과, 짐승의 뼈, 녹슨 철모, 깨어진 유리잔, 주인 잃은 신발…… 이런 것들이 널려 있다. 폐허 속에서 젊은 보르헤르트는 더욱 슬프게 빛난다.
1947년 스위스 바젤의 병원에서 한 청년이 스물여섯의 짧은 생을 마친다. 자신의 작품을 무대 위에 올리는 것이 생의 소원이었던 청년은 안타깝게도 그 무대를 보지 못했다. 병상에서 쓴 「문밖에서」가 초연되기 하루 전날 그는 숨을 거둔 것이다.
불운한 청년의 이름은 볼프강 보르헤르트다. 그는 한 번도 가혹한 운명을 빗겨나가 보지 못했다. 역으로 말하면 가혹한 역사는 예외 없이 늘 그의 생 한가운데를 할퀴고 지나갔다. 조금 스쳐 지나가도 좋으련만 야만의 시대는 그를 관통했다.
보르헤르트는 가장 빛났어야 할 젊은 날들을 참호와 감옥, 병실에서 보냈다. 그는 눈처럼 하얀 영혼이었지만 매번 운명의 무게에 짓밟혀야 했다.

“남자들은 군인이었기 때문이다. 전쟁 중이었기 때문이다. 못을 박은 그들의 군화 밑에서 눈이 비명을 질렀다. 역겨운 비명을 질렀다, 〔……〕 눈은 말이 없었다.”
– 「눈 속에서 얼어 죽은 고양이」에서

가슴이 아프다. 그의 생은 비명이었다. 그의 책 『이별 없는 세대』에 수록된 글들은 너무나 간결해서 비명처럼 들린다. 그렇다 그는 비명을 남긴 것일지도 모른다.
『이별 없는 세대』에 수록된 스물다섯 편의 단편과 열네 편의 시는 대부분 전선의 참호와 감옥, 그리고 병상에서 구상되고 씐 것들이다.
볼프강 보르헤르트는 1921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났다. 히틀러의 망령이 막 독일에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한 시절이었다. 역사는 그를 히틀러 소년단으로 끌고 갔다. 시와 음악을 좋아하고 배우가 되고 싶어 했던 소년은 환멸을 배운 채 세상으로 뛰쳐나와 시를 쓰기 시작한다. 하지만 나치는 시 내용을 문제 삼아 그를 요주의 인물 명단에 올려놓는다.
보르헤르트는 스무 살 무렵 배우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운명을 그를 놓아두지 않았다. 소집 영장을 받고 독일군에 징집된 그는 혹한의 러시아 전선에 투입된다. 그는 전선에서 반국가적인 편지를 썼다는 이유로 재판에 회부되어 총살형을 선고받는다. 천신만고 끝에 총살을 면한 그는 다시 전선으로 끌려간다. 그곳에서는 부상과 포로생활 또 다른 죄목의 투옥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쟁터와 감방을 오가던 끔찍한 삶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이번에는 병마가 그를 덮친다.

“우리 머리 위에는 우연이라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이 제멋대로인 신이 있지. 무자비하고 폭력적인 이 우연이라는 놈은 잔뜩 술에 취해 세상의 지붕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있어. 그리고 지붕 아래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믿음을 가진, 무사태평한 우리가 살고 있어.”
-「지붕 위의 대화」에서

보르헤르트는 ‘제멋대로인 신’에게 철저히 유린당한 삶을 살았다. 그가 일어서려고 할 때마다, 창조의 기운을 받으려고 할 때마다 술에 취한 신은 그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일삼았다. 하지만 보르헤르트는 가혹한 운명 속에서도 무엇인가를 상상했고, 무엇인가를 써냈다.
그가 남긴 글이 유독 수정처럼 맑은 것은 그의 몸이 야만의 시대를 살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야만의 시대 한복판에서 그는 세상의 죄를 대속하듯 수정 같은 글을 썼다. 절망 속에서 수정 같은 글을 길어 올리는 것은 그만의 저항이자, 기록이자, 도피였을 것이다.
청춘의 무게가 만만치 않던 시절 필자는 힘들 때마다 보르헤르트를 떠올렸다. 불도 안 땐 자취방에서, 최루탄이 자욱한 거리에서, 첫눈이 오던 신병 교육대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광장에서, 어머니를 땅에 묻으며 필자는 보르헤르트를 떠올렸다. 그랬다. 나의 아픔은 보르헤르트 앞에서는 사치였다.
보르헤르트는 절벽에 서 있었다. 절벽에서 그는 십자가를 어깨에 진 채 노래를 불렀다. 잘못 태어난 한 세대의 노래를 불렀다. 끝 모를 나락만이 기다리고 있는 이별조차 없는 세대의 노래를 불렀다. 지층 속에 들어가 화석이 되는 노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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