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회. 책과 불

금정연 (서평가)

언젠가 카잔자키스의 『최후의 유혹』(전 2권)을 읽으려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흉내 내어 사거리에서 맞아 죽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서였다. 나는 읽지 않았고, 쓰지도 않았다.
언젠가 카잔자키스의 『영혼의 자서전』(전 2권)을 읽으려고 했다. 자서전 혹은 오토픽션(autofiction)이라는 장르에 대한 짧은 글을 쓰기 위해서였다. 나는 읽지 않았고, 쓰지도 않았다.
내 인생의 많은 부분은 읽지 않은 책과 쓰지 않은 글들로 채워져 있다. 그걸 채워져 있다고 말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인생의 다른 부분은 읽어버린 책과 써버린 글들로 채워져 있다. 그걸 채워져 있다고 말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카잔자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이윤기 옮김)를 읽은 것은 내가 2박 3일짜리 동원예비군 훈련에 참석하며 484쪽짜리 양장본을 들고 가는 종류의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달리기를 하겠다고 『잘 달린다』를, 기타를 배우겠다고 『록기타 음악이론』을, 복싱을 시작하겠다고 『현대 복싱 교본』을, 남을 웃겨보겠다고 『웃음』(앙리 베르그송 지음)을 사는 인간, 그게 바로 나였다. 그중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책을 읽지 않았는지 이제는 가물가물하다. 분명한 것은 달리기를 하지도, 기타를 배우지도, 복싱을 시작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이다. 베르그송은 전혀 웃기지 않았다는 것도……
낯모르는 예비군들 사이에 누워 뚱뚱한 양장본을 펼쳐든 나는 ‘먹물’이나 ‘책벌레’, “대가리에 잉크를 뒤집어쓴 채 종이를 씹으면서” 같은 구절에 밑줄을 치며 ‘진정한 삶’에서 멀어져 ‘지식인’이 되어버린 35세 화자의 ‘자기연민’에 뼈저리게 ‘공감’했다. 예비군 훈련장만큼 ‘지식인’의 ‘자기연민’에 공감하기 좋은 곳이 또 어디 있겠는가? 돌이켜보면(돌이켜보고 싶지 않지만) 그때 내게는 최소한의 작은따옴표도 없었다. ‘진정성’이 넘쳤다는 말이다. “두목, 당신의 그 많은 책 쌓아 놓고 불이나 싸질러버리시구랴, 그러면 알아요? 혹 인간이 될지?”라는 조르바의 말에는 차오르는 눈물이 흐르지 못하게 살짝 웃어야만 했다.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예비군은 민방위가 되었고, 책을 파는 서점 직원은 책에 대해 쓰는 프리랜서 서평가가 되었다. 배가 나왔다. 지구는 점점 더 뜨거워졌고, 그럴수록 책장의 책은 늘어만 갔다. 책을 쌓아 놓고 불이나 싸질러버리라는 조르바의 말을 떠올리는 일이 잦아졌다. 몇 명의 조르바들을 만나기도 했는데, 정확히 말하면 스스로를 조르바라고 생각하는 아저씨들이었다. 덕분에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더는 ‘책과 유희’하며 ‘도피’하지 않고 ‘진짜 현실’과 ‘맞장 뜨는’ 조르바처럼 살겠다고 마음먹은 아저씨들만큼 짜증나는 존재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간혹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지 않고 조르바처럼 살겠다고 마음먹은 아저씨들도 있었는데, (굳이 따지자면 이쪽에 더 ‘진짜’에 가깝긴 하지만) 짜증나기는 마찬가지였다.
내가 파이로마니악(pyromaniac, 방화광)한 조르바의 말을 되뇌지 않게 된 게 꼭 그들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2016년 12월 18일 오전 8시경. 작업실 건물에 불이 났다. 4천 권 가량의 책이 있는 곳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3층에서 시작된 불은 5층까지 번지지 않았고, 작업실의 책들은 불에 타는 대신 검고 끈끈한 분진을 뒤집어썼다. 모든 책이 상했다. 버린 책도 5백 권이 넘는다. 소름. 말이 씨가 된다는 게 이런 건가? 일종의 자기충족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 그렇다고 내가 인간이 된 건 또 아니었는데, 그 많은 책들이 그을음만 뒤집어쓰고 불타지는 않았기 때문이려나. 어쨌거나 그날 이후로 나는 책을 태워버리겠다는 생각은 두 번 다시 하지 않는다. 불은 너무 무섭다.

새롭게 번역된 『그리스인 조르바』(유재원 옮김)를 읽다가 문제의 구절을 마주쳤다. 이런저런 글을 쓰며 두어 번 인용하기는 했지만 소설을 처음부터 다시 읽는 것은 10년 만이었다. 반갑고 새삼스러운 기분. 65세 조르바의 말투가 기억과 달리 무척 정중하고 조심스러워서 조금 낯설기도 했다. 조르바는 이렇게 말했다.

“대장, 좋은 생각이 났어요. 듣고 화내면 안 돼요. 대장이 가지고 있는 모든 책을 한곳에 쌓아놓고 불을 질러버립시다. 그러면, 혹시 알아요? 대장은 바보가 아니고, 또 좋은 사람이니까…… 그러면 대장도 뭔가를 좀 알게 되지 않을까요?”

이제 나는 조르바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화를 낼 것도 아니지만. 시간이 제법 흘렀고, 나는 나대로 또 다른 책들을 읽어온 탓이다. 나는 더 이상 ‘책에 파묻혀 현실과 동떨어진 삶을 사는 지식인’과 ‘자유로운 야만인’이라는 구도를 믿지 않는다. ‘진짜 현실’, ‘진짜 삶’이 따로 있다는 생각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때와는 얼마간 다른 사람이 되었고, 『그리스인 조르바』 역시 지금 내게는 전혀 다른 책처럼 느껴진다. 그건 좀 신기하고 재미있는 경험이다. 신기하고 재미있는 데다 길기까지 해서 이 자리에서 늘어놓을 수는 없는 경험이다. 다만 그것을 통해 나도 뭔가를 좀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해두고 싶다. 책을 태우는 것보다는 읽는 것이 더 낫고, 어떤 책은 한 번 읽는 것보다는 두 번 읽는 게 더 낫다는 것. 그러니 앞으로의 내 인생 또한 읽지 않은 책과 읽은 책과 두 번 읽은 책으로 채워질 거라는 뻔한 예상도. 그걸 채워진다고 말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오해하면 안 된다. 나는 지금 책 읽기의 공허함에 대해 (‘자의식’ 가득한 ‘책벌레’의 ‘자기연민’으로 점철된) 불평을 늘어놓으려는 게 아니다. 단지 인생의 공허함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는 거다. 그리고 그럴 때면 책은 늘 도움이 된다. 설령 그것이 책 따위는 모두 태워버리라고 말하는 책이라도.

 

*편집자 주(註): 『그리스인 조르바』는 5회 연재로 기획되었으나, 필자 중 과학자 이명현의 개인 사정으로 인하여 서평가 금정연의 글을 마지막으로 마칩니다. 관심 가져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과 함께, 기획대로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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