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회. 아, 인생은 조르바처럼!

박연준(시인)

 

2018년 여름을 베를린에서 보내는 중이다. 여행 준비의 묘미는 단연 여행지에서 읽을 책을 고르는 때! 고심 끝에 고른 다섯 권 중 한 권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새로 펴낸 『그리스인 조르바』다. 국내 최초 그리스어 원전 번역이라니, 카잔자키스의 문체를 좀더 가깝게 느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거의 스무 해 전에 읽은 책이기에, 다시 만나는 조르바가 궁금하기도 했다. 카잔자키스는 프롤로그에서 “이 글에는 추도의 모든 요소들이 들어 있다”고 밝혔는데, 나 또한 지금은 찾아보기 어려운 삶의 방식, ‘조르바처럼 사는 삶’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
나는 베를린 미테(Mitte) 지구의 노천카페에서, 호텔 침대에서, 아이들이 물놀이하는 공원 벤치에서 이 책을 읽었다. 여름 저녁 카페에 앉아, 해지는 풍경을 바라보며 책 읽는 순간은 특히 좋았다. 고개를 들 때마다 한 움큼씩 사라지는 빛의 무게여! 어쩌면 행복은 낯선 곳에서 스무 해 전 읽은 책을 다시 찾아 읽는 일일지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알던 사람을 처음 만나는 사람인 듯 다시 보는 일. 조르바는 행복을 편애하는 자가 아니라, 행복이 편애하는 자다. 불행은 쉽게 전염되지만 행복은 잘 전염되지 않는다. 행복은 능동적으로 찾아내고, 배워야 한다. ‘행복의 교본’이 있다면 나는 먼저 이 책을 떠올리리라.

카잔자키스는 조르바를 “가장 자유로운 외침이자 가장 열린 영혼과 튼튼한 육체를 지닌, 대식가이자 술고래이고 일벌레이며, 바람둥이 방랑자인 이 비범한 사람”, “먹물들을 구원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진 인물이라고 말했다. 책을 읽는 동안 조르바는 내게도 다른 색깔로 몸을 바꾸며 나타났는데, 나는 그를 ‘평가’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여성의 입장에서, 조금이라도 ‘먹물을 지니거나 사용하려는 자’의 입장에서 말이다(조르바는 1883년생인 카잔자키스보다 앞서 태어난 인물이다. 옛날 옛적 사람을 페미니즘 관점에서 평가하고, 성토하는 일? 흠, 그건 다음 생에서 하련다). 조르바는 도덕적이지도 성숙하지도 완벽하지도 않은 인물이다. 나는 그저 달리는 심장처럼 구제불능이고, 깃발처럼 자유로이 살다 간 어느 천둥벌거숭이, 드물게 행복에 겨운 영혼으로서 그가 좋았다.
미간을 찌푸린 채 오늘 밤 어둠이나 내일 아침 불안에 대해 고민하는 아기는 없다. 아기는 눈앞의 것을 보고 판단하지 않는다. 만져보고 판단한다. 모든 위험요소가 아기에겐 위험이 아니다. 위험을 감지하고 동동거리는 것은 그 옆을 지키는 어른이다. 아기에겐 편견이나 걱정, 유예가 없다. 지금 이후의 시간이 없다. 생이 이끄는 대로 살뿐이다. 그런 순간은 인생에서 얼마나 짧은가? 짧아서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조르바는 이 짧은 시간을 자기 의지로 ‘길게’ 늘여놓은 인물이다. 그는 ‘늙은 아기’다. 늙었지만 도무지 늙지 않아, 마땅히 해야 할 일도, 하지 못할 일도 없는 사람이다. ‘행복’은 ‘생각’을 우습게 따돌린다. 생각과 따로 존재한다. 가령 내가 이런 생각을 할 때―‘생각하고 행동하는 자와 행동하고 생각하는 자’, 둘 중 어떤 사람이 행복할까?― 조르바라면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뭘 그렇게 따분한 이야기를 하는 거요? 자, 일어나 일단 춤을 춥시다!”

나는 아직 베를린에 있다. 나는 너무 많은 생각과 고민을 하느라 인생의 대부분을 쓰고 있지 않은가, 회한이 든다. 바뀌지 않을 습성일 테지만. 한낮 30도가 넘는 태양 아래서 춤추는 베를린의 젊은이들을 바라보면 괜히 부끄럽다. 그들의 그을린 피부와 땀방울을 보며, ‘노는 정신’을 부러워하며 중얼거린다. 아! 인생은 조르바처럼, 그리고 당신들처럼!

8 +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