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회. ‘박근형’의 희곡 ㅡ 두 가지 특징에 대하여

일제 강점기에서 한국동란을 거치는 동안 ‘장자 의식’으로 무장한 한국의 남성가부장 권력은 아베의 ‘장구질’로 요약될 만큼 방만하고 무력했다. 말로만 남성을 앞세웠지, 남성들은 국권을 지키지도 못했고 여성을 건수하지도 못했다. 그처럼 무력하고 방만한 남성에 대한 한국 여성의 저항이, 저항의 수단이자 강한 ‘남편’으로 모신 것이 ‘예수’다.

「경숙이 경숙이 아버지」가 박근형 작품에서 독특한 것은, 어메의 ①자해와 ②예수의 출현처럼 부조리한 극적 설정이다. 먼저 ①자해는「너무 놀라지 마라」의 아버지의 자살과 「선착장에서」의 규회도 보여주었던 것으로, 이들은 자해를 통해 산산히 부서지려는 가족과 공동체를 그러모으려고 한다. 이런 안간힘은 「백무동에서」의 아들과 그 친구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상림’으로 들어가는 설정에서도 볼 수 있다. 만약 그들이 아버지들의 총격을 받는다면, 희생양 아닌 희생양으로 더럽혀진 상림(세계)을 정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안스러운 자해가 모두 성공하는 것은 아닌데, 「너무 놀라지 마라」에서 아버지의 자살이 흩어진 가족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던 것과 달리, 같은 작품의 끝 대목에 나오는 며느리의 자해는 헛된 노고가 되었다.

②부조리한 극적 설정은, 연극의 처음부터 끝까지 화장실에 목을 매고 있는 아버지의 시체가 말을 하는「너무 놀라지 마라」가 대표적이다. 여기에 신발장과 싱크대에 숨었다가 튀어 나오는 노래방 손님과 예언자를 더해보라. 또 작가는 「백무동에서」란 작품에서 여성이 단 몇 시간 만에 임신을 하고 만삭이 되거나, 남자도 임신을 할 수 있다는 설정을 아무렇지도 않게 밀고 나간다.

이번 작품집에 나오는 자해의 의미에 대해서는 앞서 잠시 언급했듯이, 의사 가족을 비끌어 매려는 안간힘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자해를 통해서만 건사되는 가족이나 공동체란, 더 손써볼 수 없을 만큼 악화된 상태라고 해야 한다. 예컨대 「너무 놀라지 마라」에서 가족들은 목매단 아버지의 시신 주위에 모이지만, 가족을 끌어 모은 아버지의 살신성인(?)은, 함께 모인 가족들이 한 지붕 아래 살 수 없는 상처를 끄집어내면서, 마늘쪽처럼 흩어지는 것으로 무산된다. 덧붙이자면 「너무 놀라지 마라」에서 아버지가 목을 맨 장소는 화장실로, 언제부터인가 아버지는 안방이나 마루(응접실)를 차지하지 못하고, 외진 자리로 밀려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말 놀라운 것은, 그 아버지가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면서, 연극을 주제主祭한다는 것. 무의식이 인간의 내면이라면, 화장실은 무의식의 공간이다. 목을 맨 아버지가 무의식의 공간을 차지하고 연극의 흐름(시간)을 장악하고 있는 이 사태가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매우 분명하다. 우선 미라처럼 폐비닐처럼 좀비처럼 ‘목 매 단 아버지’가 시종일관 무대를 장악하고 있는, 도저히 있을 법하지 않은 부조리한 설정으로 봉합된 가족이란 이미 환상에 바탕한 것임을 작가는 희화화하고 있다. 동시에 저 설정은, 아버지 혹은 가부장으로 상징되는 전통적인 가족이 가사假死 상태로, 우리 사회의 무의식(‘빈 공간’)을 점령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진정한 연극은 항상 한 시대의 파국을 드러내며, 파국을 두려워하는 대중적 장르의 관습을 전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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