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회. ‘박근형’의 희곡 ㅡ 두 가지 특징에 대하여

박근형의 희곡은 두 개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의사 가족성’이다. 「청춘예찬」이나 「푸른 별 이야기」에 잠시 등장하는 패륜적 부자가 보여주듯이, 그들의 관계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러해야 할 인륜적인 부자관계를 체현하고 있지 못하다. 「쥐」에 나오는 며느리는 남편(큰아들)이 아닌 시동생(작은아들)의 아이를 임신한 게 분명하고, 막내딸 역시 작은아들(작은오빠)과의 근친 행위로 임신을 했다(박근형의 희곡에서는 부권이 그랬듯, 장자 또한 실추되어 있다. “나는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어.”). 또 「푸른 별 이야기」에서는 끝내 함께 살기를 거부하는 형부(감독)를 처제가 칼로 거듭 찌르며 “사랑해요” “같이 살아달라”고 애원한다. 그래서 두 사람은 죽음도 뛰어넘는 사랑으로 맺어진 것일까? 방금 든 이런 예들로 보아, 애초부터 이들은 가족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가족을 흉내 내고 있는 것이다. 뒤에 살펴볼 「대대손손」의 비밀이 거기 있다.

가족이 아니면서 가족이라는 ‘끈끈이’에 묶여 사는 의사 가족성을 잘 드러내주는 사이가 「청춘예찬」의 아버지와 어머니다. 그들은 이혼을 했으면서도, 의사 가족성이라는 허위의 울타리에 여전히 구속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쥐」에서는 ‘죽음의 집’의 가족들이 가출한 아들을 찾는 방송을 부탁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방문객에게 이렇게 말한다.

 

어머니 에미 싫다고 지발로 나간 자식 찾으면 뭐하나요.
그런 자식은 없느니만 못 해요.
돌아오면 또 뭐하나요. 지발로 또 나갈텐데.
그냥 엿 바꿔 먹었다 생각하세요.
이참에 여기서 그냥 우리랑 삽시다! 이모!
얘들아 뭐하니, 이모님께 인사 올려라!

 

착취와 이용을 위해 급조되는 이런 가족(왜냐하면 그들은 서로를 실컷 부려먹다가 서로를 먹어 치울 테니)은 가족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누군가가 말한다면, 그 사람은 역설적이게도 오늘날의 가족을 너무 신성시하고 있는 것이다. 카프카의 「변신」이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듯이 자본주의 문명 하의 가족이란 사회적 침탈에 대한 자경(自警=방어벽) 역할만 아니라, 가족애라는 이름으로 착취와 이용이 벌어지는 자본주의의 전초기지가 된 지 오래다.

자신들이 먹어치운 소년의 어머니에게 이모가 되어 함께 살자고 권하는 ‘죽음의 집’의 후안무치한 일화는 「삽 아니면 도끼」에 다시 반복된다. 영화감독을 사칭하면서 친구 여동생의 몸과 마음을 빼앗은 주인공 맨발이 뒤늦게 찾아온 아내와 아들을 따라 나서려고 하자, 순정을 빼앗긴 친구의 여동생은 마치 체호프의 어느 여주인공처럼, 감독과 그의 본 부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감독님! 언니! 감독님은 언니를 버린 게 아니라 예술을 위해 언니 만나기를 참고 계셨던 거 같아요. 하시고 싶은 그걸 할 때까지 스스로를 누르고…… 전 감독님이 불쌍해요. 그날이 올 때까지 여기서 우리 모두 조금씩 참고 살아요?” 그러자 맨발의 아내가 뭐라고 즉답했던가? 곧바로 “동생!” 하지 않았던가? 이러구러 세월은 흘러, 이들은 ‘성聖 가족’이 된다.

 

여동생 (아내의 방을 가리키며) 감독님 날이 찬데 들어가 주무시지 않고?

아내 아니예요 동생.

저 여보, 내일 큰일도 있고 한데 오늘은 동생 방에서 주무세요.

[……]

 

맨발 오늘은 우리 함께 잡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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