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정소현

어제의 일들 - 『한국문학』 가을호

선정의 말

거의 모든 과거 시간들이 단지 ‘어제’로 치환될 수밖에 없는 사정이 딱한 인물의 이야기. 혹은 어제보다 더 먼 과거에의 기억이 명확하지 않거나 기억할 수 없는 가련한 여성의 이야기. 과거 시간의 질적 차이가 무화되면서, 아니 무화되었기에 그저 무심하게 지낼 수 있었던 어처구니없는 인물의 핍절(乏絶)한 속사정. “나를 뺀 나머지”로부터 철저하게 버림받고 혹독한 트라우마를 견딜 수 없어 자살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던 상처받은 내면아이의 비가(悲歌). 이보다 더할 수 없을 정도로 가혹한 운명 비극. 그럼에도 ‘어제의 어제’, 또 ‘어제의 어제의 어제’를 복원하기 위한 핍절(逼切)한 염원의 시도. 그 잃어버린 시간, 잃어버린 자기를 찾아나서는 가혹한 이야기. 만약 주인공의 그림 작업을 통해, 그 치유 예술을 통해 서서히 기억을 찾아가고 상처의 힐링을 중층적으로 모색했더라면 더 인상적이었을 텍스트. 서사 전략의 착종에도 불구하고 강열한 인물의 이미지로 뜨거운 작품…… 그러니까 정소현의 「어제의 일들」은…… _우찬제(문학평론가)


인간이 짓는 죄 중 가장 큰 죄는 무엇일까? 참척(慘慽)이 인간이 겪는 고통 중 가장 끔찍한 고통이라 하니 고의적으로 참척을 범하는 일이 가장 큰 죄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정소현의 「어제의 일들」을 읽고 나면, 자신의 죄를 끝내 모르거나, 모르는 척하면서 그 죄를 되풀이하는 태연함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미수에 그친 자살로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나’를 우연히―이 우연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만난 율희의 이상한 선의는 모두 의도된 악의의 다른 모습이며, 율희 자신의 죄를 씻고자 하는 이기적 정화(淨化)에 불과하다. 희미한 ‘나’의 기억과 망각을 샅샅이 뒤져 자기에게 유리하게끔 기억을 채색하고 주입하려는 그녀의 웃는 낯은 어느 순간 추한 악의 얼굴로 드러난다. 그리고 그 얼굴이 너무나 평범하고, 너무나 일상적이고, 너무나 흔한 얼굴이라는 사실에 머리에서 발끝까지 얼음알갱이가 혈관 속으로 쏟아지는 서늘함을 느끼게 된다. 악한이 친구로 위장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아무 죄도 짓지 않는다고 믿으며 태연히 죄를 짓는 순진과 죄가 없고 지은 죄 또한 모르니 속죄를 모른다는 무지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 자주 보도되는 사건들의 양상과 매우 닮았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무분별한 오해와 풍문과 편견을 양산하고 퍼뜨리면서 죄-있음을 모른다. 죄-지음을 알려 하지 않는다.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에 이르렀을 때야 비로소 부랴부랴 성토하고, 후회하고, 애도한다. (그런 점에서 너무 지나친 애도는 기실 자기 속죄를 위한 방편이다.) ‘율희’의 친구들은 그러한 우리의 평범성을 대신하며, ‘율희’는 다만 그 평범성을 조금 초과한 인물이다. ‘나’를 찾아와 집요하게 과거를 상기시키고, 자기 뜻대로 응하지 않는 ‘나’를 다시 험담하는 그녀의 행동은 자기 죄를 알기에 그것을 감추고 싶은 방어심리에서 비롯하며, 순진한 무지를 가장(假裝)하여 자기기만을 이어가려는, 미성숙한 소녀의 이기심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타인을 죽음으로 모는 어린 소녀의 사악함이란 얼마나 무서운가? 그리고 그 소녀가 마음도, 정신도, 도덕도 영영 자라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더 무서운가? 우리는 모두 때로 그런 소녀이지 않은가? 그런 소녀를 키우고 있지는 않은가? ‘율희’와 친구들은 비극을 비극이 아니라 흔해빠진 일상으로 만드는 주범이 나 자신이자 우리 모두라는 것을 인정하게 만든다. 우리가 우리의 ‘혀’로 끝내 자살로 내몰았던 이들이 누구누구였던가를 떠올려보면, 이 소설이 품고 있는 고통과 절망은 허구 속 가상 인물들이 빚어낸 예외적 ‘과거’의 죄가 아니라 한국 사회 전반의 ‘현재’의 죄에서 기인한다.

정소현은 일상에 내재된 폭력(성)에 날카로운 통찰을 지닌 작가다. 「어제의 일들」도 그러한 예민한 통찰력이 빛을 발하며 만연한 폭력과 보편화된 죄의 형상을 일깨운다. 어느 고등학교에서 있었을 법한 ‘왕따’ 사건의 과거와 현재가 인물들의 각기 다른 발화 속에서 기억과 망각이 상호교차하며 쓰이고 지워지고, 다시 쓰이고 다시 또 지워지는 반전 속에서 그 전모가 점차 드러나는 과정은 독자를 대면하고 싶지 않은 고통의 진원지로 데려간다. 읽는 내내 괴로움을 떨치기 힘들었고, “정말 살아 있어 다행이다. 다행이라 말할 수 있어 다행이다”라는 마지막 문장이 오랫동안 떨쳐지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것은 진실한 이야기만이 선사하는 행복한 불쾌이다. 그러한 진실의 불쾌가 성찰의 즐거움을 동반하는 것이 문학의 의의라는 고전적 명제를 「어제의 일들」은 다시금 확인시키는 소설이다._강계숙(문학평론가)

인터뷰

조연정 「어제의 일들」은 사고로 기억력을 상실한 ‘상현’이 이미 잃은 기억은 찾기 위해, 그리고 현재의 기억을 잃지 않기 위해 고투하는 이야기이다. 잃어버린 과거의 기억은 친구들의 증언을 통해 각색되어 전해지거나 파편적인 장면들의 순간적 기억을 통해 재구성된다. 이렇게 정리해놓고 보면 「어제의 일들」은 기억의 존재방식에 관한 보편적인 이야기로 확장되는 듯도 하다. 인간의 기억력에는 한계가 있으며 무엇이 기억되고 무엇이 잊힐 것인지에 대해서 우리는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다. 잊고 싶은 기억은 오래 남아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기도 하고 오래 기억하고 싶은 순간들은 애쓰지 않으면 쉽게 잊힌다. 나아가 이러한 기억의 존재방식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인간의 능력과도 관련이 깊다. 파편적 장면들을 이어 붙여 과거를 재구성하는 능력은 소설의 구성 원리와도 일맥상통한다. ‘기억’이라는 테마에 주목한 이유가 무엇일지 궁금하다.

정소현 기억의 공백이 있었다. 그것을 알게 되기 전까지 그런 공백이 있었는지조차 몰랐다. 기억이 돌아오기 전까지 나에게 그 시간이 없었거나, 그 시간에 내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나는 기억력이 무척 좋은 편이고, 무모하리만큼 내 기억을 신뢰했는데 그 사실을 자각한 후 더 이상 내 자신을 믿을 수 없었고, 나의 존재마저 믿을 수 없었다. 그런 경험이 소설을 쓰게 했다.


조연정 기억력이 온전치 못한 상현은 메모와 그림을 통해 망각에 대비한다. 하지만 이 소설은 상현이 그린 그림을 친절하게 묘사해주지는 않는다. 자신과 추문에 휩싸인 중학교 시절의 선생님을 떠올리며 “나는 종이에 만년필로 페인트를 칠하는 한 남자의 뒷모습을 검지 손가락만 하게 그렸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버려진 것들을 모아 새집을 짓고 정원을 만드는 남자의 이야기를 그려봐야겠다고 생각했다”(『한국문학』 2014년 가을호, pp.86~87)라고 묘사하는 정도가 거의 유일하다. 작가가 상현의 그림을 자세히 묘사해주지 않기 때문에 그녀가 그림을 통해 자신의 현재를 어떤 식으로 표현하고 있을지에 대해 독자는 흥미로운 상상을 해볼 수도 있다. 이 소설에서 상현의 그림이 적극적으로 묘사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정소현 자세히 묘사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림 그리는 행위를 통해 상처를 들여다보며 스스로 치유하는 시간을 통과했다는 사실이 중요했던 것이지 그림의 모양새가 중요하지는 않았다. 상현이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 속의 남자는 자신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모든 것을 잃었으나, 남들이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통해 삶을 다시 추스른 사람. 선생님도 그랬다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고.


조연정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잃는다는 것이 아니라 “나를 믿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기억력을 상실한 인물이 기억을 찾기 위해, 그리고 기억을 잃지 않기 위해 애쓰는 이 소설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 인물의 과거를 재구성해 보여준다. 상현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얼개를 맞춰보는 와중에 독자는 종종 혼란에 빠지게 되는데 그 이유는 「어제의 일들」이 1인칭으로 서술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기억의 능력을 상실한 ‘내’가 나 자신의 기억은 물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온전히 신뢰할 수 없듯, 독자 역시 이 1인칭 화자를 충분히 신뢰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현에게 진짜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이 소설이 말해주는 것은 별로 없다고 해야 한다. 1인칭 시점의 설정에는 어떤 의도가 있었을지 궁금하다.

정소현 독자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종종 1인칭으로 서술했는데, 이 소설의 경우는 그것들과 다르다. 상현이 보는 세상, 아는 세상을 독자에게 딱 그만큼만 들여다보게 함으로써 그녀가 겪고 있는 혼란을 함께 느꼈으면 했다. 그 모든 일을 겪어낸 상현의 진술들이 독자에게 절절하게 가 닿기를 바랐다.


조연정 상현은 여중, 여고에서 지독한 따돌림을 당했고 가정이 있는 남자 선생님과 추문에 휩싸였다. 선생님에게서도 외면당한 상현은 충동적으로 아파트 5층에서 투신했고 유일한 가족인 조부모와 고모에게서 버림받았다. 그리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작은 주차장에 “쓰레기”처럼 홀로 버려져 있다. 한없이 불행한 인물이 아닐 수 없다. 그뿐일까. 상현을 측은히 여기고 용서를 구하며 자신들의 죄책감을 해소하려는 옛 친구들의 등장은 상현을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한 인물을 이처럼 비참한 상황으로 몰아넣음으로써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일까. 이 소설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난다. “차마 다 기억할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그것들은 명백히 지나가버렸고, 기세등등한 위력을 잃은 지 오래다. 정말 살아 있어 다행이다. 다행이라 말할 수 있어 다행이다”(p.93). 이 다행스러움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정소현 상현에게 고통을 몰아주기 한 것 같아 미안한 기분이 들지만 그녀가 겪은 일들은 결코 가공되거나 과장된 것이 아니라 내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거나 목격한 사건이다. (가공이 한 가지 있긴 하다. 가해자들의 사죄, 이것은 소설의 밖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일이었다.) 고통은 늘 현재화되어 여전히 상현을 괴롭히고 있지만 사실은 모두 어제의 일들일 뿐이다. 다행스럽게도 시간은 그녀의 젊음과 함께 고통도 모두 쓸어가주었다.

한때 고통을 겪었거나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었다. 그 고통이 당신을 성장시키기도 한다고, 자고 나면 모두 어제의 일들이 된다고, 그러니 살아 있으라고, 살아 있음 자체를 온전히 긍정할 날이 올 거라고.

작가의 말

이 소설은 시간에 관한 이야기이다. 모든 것을 공평하게 파괴하는 시간.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던 어린 나는 그처럼 서글프고 무서운 문장이 없다고 생각했으나, 삼십 년이 지난 지금은 그 문장보다 더 희망적인 말은 없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흘러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오늘을 맞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것을 다행이라 말할 수 있는 이 순간이 나는 참 좋다.

여기까지 오는 데 한참 걸렸다. _정소현

관련 작가

우찬제 평론가

서강대학교 경제학과와 동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하여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세계의 문학』『오늘의 소설』『비평의 시대』『포에티카』『HITEL문학관』편집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소천이헌구비평문학상과 김환태평론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욕망의 시학』(1993), 『상처와 상징』(1994), 『타자의 목소리―세기말 자세히 보기

조연정 평론가

서울대 국문과와 동대학원 졸업. 200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등단. 자세히 보기

강계숙 평론가

지은이 강계숙은 1973년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국문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2002년 창비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평단에 나왔다. 비평집 『미언』과 편저 『내 생의 중력』이 있다. 2013년 현재 『문학과사회』 편집동인으로 활동 중이며, 자세히 보기

정소현 소설가

1975년 서울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 예술학과와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양장 제본서 전기」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2010년 제1회 젊은작가상과 2012년 제3회 젊은작가상에 선정되었다. 자세히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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