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김성중

쿠문

선정작

나는 밀고자들의 방파제가 좋다. 이곳에는 자기를 고발하는 사람들이 끓어 넘친다. 한 손에 술병을 들고 혼잣말을 하는 사람들, 그들은 아마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죄를 지껄이고 있을 것이다. 도시의 가장자리에 아무나 걸터앉을 수 있는 방파제가 있다는 것은 근사한 일이다. 덕분에 마음껏 죄를 짓고, 고해사제인 바다에 대고 털어놓을 수 있으니 말이다.

심술궂은 삶에 이제는 지쳐버렸다. 더 이상 사람들의 결점을 찾아 음미하는 일이 즐겁지가 않다. 어릴 때는 똑똑하다고 따돌림을 받았고, 커서는 음침한 성격이라며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았다. 모두가 피서지로 떠난 여름에도 혼자 도서관에 앉아 모래 대신 잉크를 묻히던 청춘의 시간들. 그때 내 목표는 일찌감치 교수가 되어 지나치게 똑똑한 나머지 마음의 온도를 잃어 차가워진, 그런 인간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섯 살 어린 내 동생이 먼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아둔패기로 여겼던 애가 필즈 메달을 따왔을 때, 손쉽게 거두는 동생의 성취를 지켜보기만 할 때, 나는 내 자신의 무능이 놀라울 지경이었다.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재능이라니. 다른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재능 같은 건 왜 존재하는 것일까? 자기의 우수성을 뽐내기 위해 타인을 배경처럼 만들어버리는 재능 말이다.

더 나쁜 것은 이걸 나 혼자서만 의식한다는 점이다. 동생이 중요한 논문을 연달아 발표하는 동안 나는 꺼지지 않는 질투에 끌려 다니느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열정을 발견했는데 하필이면 하나밖에 없는 자매를 죽도록 미워하는 마음이었다. 나는 카인을 이해할 수 있다. 이 괴로운 정열을 끝내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동생은 선천적으로 귀 안쪽에 이상이 있어 자주 넘어지곤 했다. 넘어진 동생을 일으켜 세우는 건 내 오랜 습관이었다. 이 습관에 저항하기로 마음먹은 어느 목요일에, 우리의 처지는 영원히 바뀌었다. 넘어진 동생을 외면한 순간 우리 사이로 검은 차 한 대가 지나갔다. 잠깐 동안 검은 막이 드리워졌을 뿐인데 그 애는 두 번 다시 학교로 돌아올 수 없었다.

나는 천재 동생보다 바보 동생의 언니 역할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사고 후 꼬박 삼년을 간병에만 매달렸으니까. 동생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를 정도의 지능밖에 남아 있지 않았는데, 그 사실이 내게 도움이 됐다.

이제 그 애는 혼자 힘으로 휠체어에 앉아 식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됐다. 그러니 동생의 랩톱 안에 든 논문에 손을 댄 것은 내 헌신에 대한 수고비로 해두자. 병원 치료가 끝나자 나는 동생을 요양원으로 보냈고 그 후로 한 번도 만나러 가지 않았다. 매달 요양원의 계좌로 송금을 하는 것만이 나의 유일한 안부인사가 되었다…

해와 함께 구겨진 낮이 바다로 들어가고 밤이 내려온다. 별들이 키들거릴 때까지 술을 마시기로 한다. 지금쯤 고분고분하게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동생을 생각하니 텅 빈 우월감이 솟았다. 뒤이어 눈물이 흘렀는데 질투가 종결되자 영혼에 곰팡이가 내려앉았기 때문이다. 목적과 생기를 잃은 나는 권태에 빠져들고 있었다.

한 청년이 내 손에 든 담배를 보고 다가왔다. 눈물이 흐르는 뺨이 겸연쩍어서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라이터를 내밀었다. 그에게서는 시큼한 냄새가 났는데 냄새를 맡자마자 재채기가 나왔다. 거기에 훗날 내가 받게 될 은총의 전조가 들어 있었는데, 내 신체는 거부 반응부터 일으킨 것이다.

선정의 말

누군들 아마데우스를 부러워하지 않을 수 있으랴. 신의 은총에 값하는, 아마데우스의 천재성에 대한 뭇사람들의 선망은 차라리 자연스럽다. 모차르트와 한 시대를 살았던 안토니오 살리에르 궁정악장만이 질투하는 인간일 리 만무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늘 아마데우스 주변에는 질투하는 인간들이 넘실댔을 터이다.

이렇듯 보편적인 테마인 ‘질투하는 인간’에 대한 작가 김성중의 상상력이 참으로 어지간하다. 그녀의 신작 「쿠문」은 필록테테스의 후예들을 위한 상상적 도상이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필록테테스」에서 필록테테스는 백발백중 영광의 활을 지녔지만, 그 반대급부로 고통스런 상처를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인물이다. 그 상처와 활의 우의를 통찰하면서 비평가 에드먼드 윌슨은 낭만주의 예술관의 특성으로 거론한 바 있거니와, 만약 근대 경제학자들이 이 사례를 들었다면 아마도 상처는 활을 위한 정당한 기회비용이라고 말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소설에서 ‘쿠문’은 “자기표현을 향한 의지”를 위한 활이자 상처이다. 쿠문에 감염되면 강렬한 창의적 감정으로 인해 그 어떤 장르에서도 천재성을 보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병은 깊어지고, 그렇다는 것은 목숨이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목숨을 걸고 예술적 천재성을 욕망하는 것이다. 「쿠문」에서 주인공은 천재적인 동생을 기망하고 교수가 되었다는 죄책감과, 천재성을 타고나지 못한 것에 대한 원망, 그리고 천재성에 대한 질투로 범벅이 되어 있는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 ‘쿠문’의 비밀을 접하게 되고, 결국 그녀 자신이 ‘쿠문’에 입문하고자 온몸을 던지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천재성을 위한 혹은 예술을 위한 희생 제의랄까, 아니면 천재적 성화(聖化)를 위한 입사식이라고 해야 할까. “자잘한 인간들이 시시한 행복만 누리는 곳”(p. 107)을 넘어서려는 주인공의 초극의지가 참으로 결연해 보인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작가가 이 소설을 왜 이렇게 시작했는지도 어느 정도 가늠해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밀고자들의 방파제가 좋다. 이곳에는 자기를 고발하는 사람들이 끓어 넘친다”(p. 88). 질투로 인해 벌어진 자잘한 잘못에서 큰 죄에 이르기까지 자기를 고발하고 고해하는 반성의 기제로 방파제를 설정한 것이 흥미롭다. 이런 반성을 거쳐 결단에 이르면 모종의 입사식이나 희생 제의로 돌파할 가능성이 높다. 쿠문의 일원이었던 류가 뿌렸던 프로파간다 전단에는 “다른 상상이 다른 권력을 만든다”(p. 95)는 문구가 씌어 있었다. 쿠문은 패러다임 이동을 넘어서 새로운 패러다임 창출을 욕망한 것이다. 그것을 위한 다른 상상에의 열정과 의지가 도저하다. 작가 김성중 또한 다른 상상을 통해 다른 문학을 하고 싶다는 강렬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 아닐까 싶다. 자잘한 문학에 대한 자기 고해를 단행한 후, 자기 몸을 쿠문에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전혀 새로운 문학을 창출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드러낸 ‘출사표’와도 같은 소설로 읽는다면, 그건 너무 무리한 읽기가 될 것인가?_우찬제(문학평론가)

 

천재적 재능의 소유자와 마주한 우리의 첫 감정은 경외일까, 질투일까. 만약 질투라 한다면 그때 우리는 무엇을 욕망하고 있는 것일까. 천재적 재능 자체를 갈망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러한 재능을 지닌 누군가의 위치를 부러워하는 것일까.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혐오스러운 몰골로 죽어가지만 죽기 직전까지 천재적인 예술혼을 불태우는 천재병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김성중의 「쿠문」은 사실, “내가 정말 질투한 것은 무엇이었을까”라는 작가 스스로의 뼈아픈 질문이 담겨 있는 소설로 읽힌다.

혐오스러운 몰골과 죽음 대신 천재적 능력을 얻게 된다는 이 소설의 설정은 물론 ‘병든 천재’에 관한 낭만주의적 예술관, 혹은 ‘예술과 승화’에 관한 프로이트적 예술관을 떠올리게 한다.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에드먼드 윌슨이 『상처와 활 The wound and the Bow』에서 소개한 소포클레스의 비극적 인물 필록테테스Philoctetes가 떠오른다. 적수 없는 활과 치명적인 화살을 상속받았지만 독사에게 물려 고약한 냄새를 풍기게 된 신화 속 인물 필록테테스는 「쿠문」의 천재병 환자들의 모습과 그대로 일치한다. 재능은 누군가에게 우연히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어떤 대가를 요청한다는 사실, 천재 수학자였던 ‘나’의 동생은 사고로 인해 지능을 잃었으며 ‘쿠문’들도 천재적 재능과 죽음을 맞바꾸고 있다는 사실은, 범상한 능력밖에는 소유하지 못한 불행한 우리들에게 어떤 안도마저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병든 천재’에 관한 고전적 정의만을 되풀이하는 것이 이 소설의 최종 목적지는 아니다. ‘질투의 천재’였던 1인칭 화자가 “내가 정말 질투한 것은 무엇이었을까”라는 질문과 함께 징그러운 벌레가 바글거리는 천재병의 진원지에 온몸을 내어주고 있는 마지막 장면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소설적 결말이기는 하지만, ‘인정욕망’의 노예인 일상의 질투병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재능을 향한 순수한 갈망이라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김성중의 「쿠문」은 재능을 향한 순수한 갈망과 재능의 소유자에 대한 질투 사이에 죽음에 이르는 병을 가로 놓아 보며, 예술에 대한 순수한 갈망에 대해 곱씹어볼 것을 권유하는 소설이다. 독자들에게는 물론, 어쩌면 작가 스스로에게. 고전적인 주제를 정공법으로 다루고 있는 이 진지한 소설을 작가 김성중의 또 다른 출사표로 읽어도 좋을까. 천재병자 ‘류’에게 ‘내’가 그랬듯, 앞으로 이 작가가 걷게 될 고통스러운 길에 “장미수”를 부어주는 독자가 되고 싶다._조연정(문학평론가)

 

천재적 재능에 대한 인간의 동경과 질투는 그 역사가 매우 오래된 것이다. 인간이 주어져 있는 삶에 그저 만족하는 존재가 아니라 어떤 생산(포이에시스)을 통해 스스로의 삶을 의미 있는 것으로 채우려는 시적 인간(호모 포에티쿠스)일 수밖에 없는 이상, 예술의 역사에서 많은 이들이 그 비범한 재능에 대한 욕망에 포박된 채 고통을 겪어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꽤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 갈망이 생각보다 너무 강하다는 데에 있다. 인간은 때로 자신의 삶을 파멸의 길로 접어들게 만들 것이 뻔해 보이는 순간에도 그 재능에 대한 갈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바로 그런 점에서 재능에 대한 욕망은 프로이트적인 죽음 충동과도 근친 관계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김성중의 「쿠문」은 바로 그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런데 소설적 상황 설정이 다소 특이하다. 이 소설에서 예술에 대한 열정과 능력은 하늘로부터 부여된 소수자들의 예외적 능력이라기보다는, 벌레에 물림으로써 인간이 걸릴 수 있는 일종의 의도된 병처럼 그려진다. 이것은 분명 판타지적인 요소이지만, 이 가상적인 설정이 가미되면서 여러 가지 형태의 결정적인 질문들이 생산되고 있다. 예술에 대한 능력이 선택된 누군가에 수동적으로 강림하는 것이 아니라 소설에서 설정하는 것처럼 벌레에게 물려 병처럼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과연 우리는 이 재능의 주체라는 것이 정당하게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설령 우리가 인위적으로 재능을 얻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모두가 천재성을 확보할 수 있는 이상적인 세계가 도래하더라도, 예외적인 변별점을 찾지 못한 예술의 존재 가치의 근거를 어디서 확보할 수 있을까. 도대체 천재성에 대한 인간의 갈망이란 무엇이며, 그것이 얼마나 강하기에 자신을 처참한 죽음의 심연으로 몰아갈 것이 분명한 악마의 거래마저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일까. 얼핏 재치 있는 소재와 설정, 그리고 속도감 있는 서사로 무장한 것처럼 읽히는 김성중의 소설은 이렇듯 진중하고도 풀기 어려운 대담한 질문들을 독자에게 던지고 있는 중이다._강동호(문학평론가) 

인터뷰

이수형  우선 웹진 문지 이달의 소설 5월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기쁜 마음으로 전합니다. 몇 달째 지구 반대편(상투적이지만 제가 ‘천재’가 아닌지라 이 표현밖에 생각이 안 나네요^^;)에 머물고 계시죠? 문장 웹진에 연재하고 있는 쿠바 통신(?) 잘 보고 있습니다. 지금은 멕시코 혹은 남미의 다른 나라를 여행 중인가요? 소설에 대한 얘기와는 직접 관련은 없지만(아니,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곳 생활은 어떤가요?

김성중  이 메일은 페루 쿠스코에서 받았습니다. 쿠바와 멕시코를 거쳐 남미 여행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조금 못 되었구요. 내일 드디어 마추픽추를 보러 갑니다! ‘그곳의 생활’이 어떠냐고 물으셨는데, 제 거처들은 계속 떠다니는 중이라, 게다가 고산 지역들이라, 예방하지 않으면 숨이 가쁘고 어지럽습니다. 지금까지 높은 곳을 갈 때마다 ‘소로체’라는 약을 먹어두어 한 번도 고산병을 앓진 않았어요. 소로체와 언어, 두 개의 알약이 있으면 어디를 가든 숨 가쁘지 않게 다닐 수 있는 것 같아요.

지구 반대편을 구경하며 세계의 의미를 물으려 했는데 막상 다녀보니 온통 한 사람의 의미만 묻고 있어요. 그 사람이 누구겠어요, 별수 없이 저 자신이지요. ‘내가 이런 사람이구나, 내가 이런 순간이 오면 이런 반응부터 보이는구나, 이런 무능이 있구나……’. 뭐 이런 식으로 여행이라는 거울에 제 모습만 비춰보고 있는 형국입니다.

그래도 행복합니다. 어제는 여행 후 처음으로 ‘너구리’도 끓여 먹었어요!


이수형  이달의 소설을 위해 심사하는 과정에서도 많이 얘기되었지만, 「쿠문」은 어떤 측면은 좀 신화적이고 또 어떤 측면은 좀 낭만주의적이기도 하고, 아무튼 이른바 포스트모던한 21세기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의 삶에는 좀 낯선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떻다는 게 아니라 그래서 좋았다는 말입니다.^^ 천재와 범인, 예술(창조)과 일상, 병(죽음)과 삶 그리고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질투 같은 클래시컬한(?) 모티프들을 소설로 만든 동기나 과정 같은 것들에 대해 좀더 얘기를 듣고 싶은데요……(혹시 쿠바에서의 덜 복잡하고 덜 최첨단인 생활이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르겠네요)

김성중  모티프는 쿠바에 가기 전부터 지니고 있었고, 가서 마감을 한 셈입니다. 도서관에서 매독에 관한 책을 읽다가 “모파상은 구속복을 입은 채 환각의 나비를 쫓았다”라는 문장을 만났는데 거기서 떡잎을 틔웠습니다. 보들레르나 니체, 슈베르트 등이 한결같이 매독으로 죽음을 맞이하면서 한때 매독이 천재병 소리를 들은 적이 있잖아요? 읽다 보니 매독이라는 균이 아니라 ‘천재 자체가 병인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까지는 평범하고 일차적인 반응이지요. 문장으로 써놓으면 아주 흔한 은유에 불과하고요. 제가 소설이라는 상자를 좋아하는 것이 바로 이런 지점인데, 이 생각을 이야기에 넣었더니 뜻밖의 이스트를 만나 부풀기 시작했습니다.

천재는 신과 마찬가지로 찬양할 무언가가 필요한 인간들이 만들어낸 신화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인들이 가장 찬미하는 분야가 IT 쪽이니 스티브 잡스라는 IT 천재가 나오는(불리는) 것처럼요. 저는 많은 사람들이 열렬히 바라보는 ‘지점’보다 그 ‘방향’에 관심이 더 많은데, 때문에 선망의 시선을 가진 사람이 주인공으로 선택되고 소설이 풀어야 할 궁극적인 미스터리도 그 사람이 겪는 갈등에 맞춰지곤 합니다.

작업은 주로 아바나 대학 도서관에서 했습니다. 아바나에 있으나 서울에 있으나 쓰는 일상은 다를 것이 없더군요. 물론 인터넷, 광고, 쇼핑이 없고 말이 안 통하는 곳에 살아보니 집중이 잘 되기는 했습니다. 그래서 서울에서의 글쓰기가 얼마나 분열적이었나 되돌아보는 계기도 됐구요.


이수형  「쿠문」의 주인공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데, 저 역시 “누가 왜 그런 선택을 할까?” “나는 어떨까?” 같은 질문을 생각해봤습니다. 저는 천부적 재능이 별로 없는 범인이고 게다가 필요 이상으로 꼬치꼬치 캐묻는 “심술궂은”, 그러니까 「쿠문」의 주인공과 비슷한 성격의 소유자라서 이런 것이 궁금했습니다. 쿠문에 걸리기를 원하는 첸은 한 번만이라도 천재로서 뭔가를 해보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부나 명예가 아니라 그리고 어떤 것을 해야겠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천재 자체를 원하는 것이겠죠. 그건 어떤 상태일까요? 행복? 만족? 주인공은 말합니다. “내가 바라는 유토피아는 다른 이를 질투하는 영혼들을 만드는 천재들이 없는 곳이다.” 그곳은 자잘한 인간들이 시시한 행복만을 누리는 그렇고 그런 비루한 세계임이 명백한데, 또 역설적인 게 주인공은 천재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런 시시한 행복조차 누려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결말에서 주인공이 마침내 쿠문이라는 병을 받아들이려는 것은 시시한 행복을, 그러니까 자신에게는 없는 천재를 타고난 동생에 대한 질투 때문에 한 번도 누려본 적 없는 평범한 행복을 위해서였을까요?

김성중  이 소설에서 줄기차게 다룬 감정은 ‘질투’인데, 질투는 내가 나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 같아요. 따지고 보면 콤플렉스 한 점 없는 인간은 백치밖에 없고, 잘났든 못났든 부단히 성찰하고 노력해야 겨우 남 부러워하는 감정을 마음에서 쫓아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보면 질투처럼 보편적인 감정도 없지 않나 싶습니다.

이 소설에서 ‘나’는 처음에 천재가 될 수 있는 문 앞에서 달아납니다. 그러다 요양소의 동생을 다시 만나러 가고, 그때 깨닫게 되는 것은 ‘내가 왜 내 마음의 주인으로 살지 못했는가’입니다. 쿠문은 천재와 고통스러운 죽음을 동시에 선사하기 때문에 정말로 원하지 못하면 받아들일 수 없는 병(은총)입니다. 그러니 주인공은 천재가 아니라 천재를 의식하고 살아온 세월의 굴레를 벗어나, 천재와 둔재라는 가짜 신화에서 벗어나, 그 신화를 부수고 나오는 진짜 나를 되찾기 위해 죽음을 불사하고 쿠문을 선택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천재가 되기 위해서라기보다 ‘질투에서 해방된 상태’ ‘자기 고유의 상태’가 더 중요했을 것 같아요. 자기 고유의 상태는 천재든 범인이든 누군가에게나 필요한 대륙이기도 하고요.


이수형  천재나 예술 등의 모티프가 등장한 덕분에 「쿠문」은 일종의 예술관을 드러내는 소설로 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주인공 ‘나’는 “재능을 대량화하면 더 이상 재능이 아니지 않아?”라고 묻지만 쿠문을 많은 사람들에게 퍼뜨리려고 하는 류는 모종의 프로젝트를 꿈꾸고 있었던 듯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던지면, 김성중 작가가 꿈꾸는 소설가가 류 같은 사람인가요?^^

김성중  오히려 첸이나 주인공 ‘나’와 같은 사람입니다. 류는 자기 재능을 신념에 바치는 혁명가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실패할 줄 알면서도 다른 삶을 선택하지 않고 가진 것을 헌신하는 혁명가는 그리스 비극의 영웅 같은 면모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술가, 특히 소설가는 이 풍경 속에 어떤 모습일까요? 히어로가 의인화된 역사라고 가정한다면, 히어로(역사)를 바라보면서 전율하거나, 선망하면서도 밀어내는 사람일 것 같아요.

첸은 재능이 없지만 창작의 봉오리가 탁 터뜨리는 순간의 경이로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고, 그것만을 원하지요. ‘나’는 여러 사건을 겪고 나서 ‘왜 내가 지금의 내가 되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 굴레처럼 씌워진 헛된 신화를 부수는 사람이고요. 이 두 타입의 인간들이 진짜 예술가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과격하게 말하자면 이런 두 마음, 경이로움을 향한 시선과 자기 고유의 질문이 결여되었음에도 단지 재주가 출중해 예술가 노릇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예술기계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이수형  김성중 작가는 신선한 상상력, 개성적인 언어와 서사를 갖고 있지만 무엇보다 인간을 긍정하고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려는 눈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라면 반론을…^^) 그게 소설가로서 장점일 때도 있고 단점일 때도 있을 것 같은데요?(물론, 저는 그런 점을 좋아하고 장점으로 작용하는 게 더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김성중  그러려고 그러는 건 아니고, 그렇게 생겨먹어서 그렇게 쓸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난 이런 게 정말 싫어’의 힘으로 쓰는 작가도 있고, ‘난 이런 게 정말 신기해’라는 힘으로 쓰는 작가도 있을 테지요. 전 후자의 경우인데 이건 언어를 떠나 천성에 관련된 것 같아요.

반론은 아니지만 첨언을 하자면, 저는 제 자신이 인간의 긍정적인 면보다 경이로운 면에 초점을 맞추는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필경사 바틀비」의 마지막 문장처럼 “아, 인간이여!”라는 탄식이 절로 나오는 그러한 순간들을 동경하는 마음에서 소설을 쓰는 것 같아요.

제 자신이 그러지 못해서 그렇겠지만, 자기 고집과 자기만의 신화를 가지고 깨지든 부서지든 밀고 나가는 인간들을 정말 멋있는 것 같아요.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이런 풍경과 마주치면 ‘전 닥치고 찬양하는 수밖에-’ 이런 마음이 되어버려요. 그럼에도 제 소설에는 해피엔딩이 거의 없는데 열심히 찾아낸 ‘너무도 인간적인’ 순간은 거의 다 패배의 순간이고, 그 지점까지 도착하려면 인간이 아니라 신적 경지에 가까울 만큼 의지적이어야 할 판이라 끝없는 회의감이 밀려옵니다.

당위적으로 긍정적인 시선이 필요하니까 긍정적인 척하는 것처럼 역겨운 것은 없죠. 제가 생각하는 진짜 긍정은 오래전 디드로가 그려낸 「캉디드 혹은 낙천주의」와 비슷한 형상입니다. 비참을 다 통과한 후에 겨우 획득한 희미한 진정성 같은 거라고 할까요. 사실 ‘인간적인’ 풍경들은 도처에서 발견됩니다. 냉소나 패배감에 일찍 굴복하기에는 멋진 인간들이 꽤 많은 데다, ‘후진 인간에게도 멋진 면’들이 있기도 하니까요. 언젠가 제대로 발견해서 맷집 좋고 박력 있는 인간을 그려내고 싶어요. 아주 무겁고 묵직하게.

작가의 말

여러분은 지금 쿠문에 걸리지 않은 소설가의 민낯을 보고 계십니다. 여러 모로 민낯, 마음도 얼굴도 무장해제. 마지막으로 글을 쓴 게 언제인지도 가물가물. 돌아갈 날은 멀지 않은데 발자국 찍을 나라는 아직도 세 나라나 남아 있네요. 마추픽추에서 가장 좋았던 순간은 낮잠 자고 눈을 뜬 순간이었어요. 한숨 자고 일어나도 여전히 그대로인 공중도시에서 난 또 멍하니 홀려 있었지요. 마추픽추는 유적도 좋지만 그 앞의 산들이 굉장해요. 자연이 거대하면 모종의 트랜스 상태가 찾아오는데, 유년에는 그토록 자주 갈 수 있던 천국이 지구 반 바퀴를 돈 후에야 찾아오다니 좋으면서도 슬퍼집니다.

‘극진한’, 뭔가 극진한 상태랄까요. 이런 때에는 종이와 펜을 찾게 되고 적다 보면 쿠문 벌레에게 빵, 쏘이고 싶습니다. 모자라는 재주 때문에 한 소설의 마침표를 찍을 때마다 언제나 절망. 천재를 줄 벌레는커녕 오천 원짜리 호스텔의 베드버그에게나 빵빵 물리는 나날입니다. 무릇 작가의 말은 흰소리에 지나지 않은데(작가의 글을 보셔야죠!) 제 말이 더 보잘것없는 건 너무 가려워서, 가려워서 그래요… 혈관을 따라 계속 무는 베드버그 대신 다른 것으로 근지럽고 싶은 밤, 남반부에서 몇 자 적었습니다. 아디오스. _김성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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