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가을, 이주란

이주란 「위해」 (〈문장 웹진〉 2021년 6월호)

선정의 말

이주란의 「위해」는 ‘깊이를 알 수 없으나 얕지는 않을 거란 기운’을 희미하게 풍기는 소설이다. 이 기이한 단편이 독자들의 상념 속으로 주입하(려)는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조용히 산다는 건 무엇인가?’ 이 소설이 암시하는 조용한 삶이란 비사회적이거나 반사회적인 삶이 아니라─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기(寄)사회적인 삶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기사회적인 삶은 사회의 일반적인 흐름에 저항하거나 그 흐름을 배태하는 원칙들로부터 일탈하려는 시도를 일절 단념하고 그저 그 흐름에 ‘매달린 채로’ 모종의 지속을 도모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삶은 ‘과연 그러한 지속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라는 범사회(학)적인 질문을 원천봉쇄하거나 적어도 회피하는 삶이다. 물론 기사회적인 삶 역시 어디까지나 하나의 사회적인 삶이라는 원론적인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추측하건대, 그러한 주장에 대해서도 기사회적인 삶의 동작주(動作主, agent)는 다만 무관심하거나 무기력할 것이다. 하지만 이 무관심과 무기력을 단순히 수동성의 한 양태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이는 소설의 주인공인 수현이 명확하게 진술한 제 삶의 원칙을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다. “불행해지는 것은 괜찮다. 그러나 동정이나 도움을 받을 만큼 불행해져서는 안 된다.”
동정과 도움을 거절할 수 있을 정도의 불행을 짊어지는 삶. 이것이 바로 ‘조용한 삶’이다. 이 삶은 그러나 개발과 우발의 폭력 앞에서 지극히 취약한 삶이다. 일반적인 의미의 사회 속에 거주하면서 (타인과 자신의) 삶을 (단지 소박하게) 관찰하는 ‘우리’로서는 그 취약성이 유발하는 고통을 가늠할 길이 전혀 없다. 반면 수현과 정호가 서로에게서 발견한 눈빛은 그 고통을 잘 아는 눈빛, 그 고통에 수없이 떨렸을 눈빛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그 눈빛들이 함께 (혹은 지근거리에서) 공존할 수 없다는 사실은 기사회적인 삶의 근본적인 한계를 표시한다. 소설 속에서 이 한계는 ‘남산 서울타워 돈가스’로 표상된다. 수현이 정호와 연애하는 동안 늘 가고 싶었으나 끝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장소와 오직 그곳에서만 먹을 수 있는 음식. 작품 말미에 이르면 수현이 옆방 아이 유리와 주말 등산을 한 후 다음에는 함께 ‘남산타워’에 가자고 약속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는 저 근본적인 한계가 사실은 별것 아니며 따라서 얼마든지 돌파할 수 있다는 전언처럼 읽힐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 가능성은 버스에서 내린 후 유리가 따로 걸어서 귀가하길 원했다는 진술에 의해 곧장 차감되고 만다. 그러니까 수현처럼 유리도 남산에서 돈가스를 먹지 못할 거라는 이야기다. 또한 유리가 그토록 기다리는 언니는 아마도 오지 않을 것이며, 설혹 오더라도 그녀가 원하는 모습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조용한 삶’은 지속된다, 행복의 피안에서 그리고 불행의 근처에서. 기이한 기운을 내뿜는 이 소설 역시 그녀들처럼 ‘조용한 삶’을 오래 이어갈 것이다. _조효원(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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