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봄, 위수정

위수정 「은의 세계」 (『문학동네』 2020년 겨울호)

선정의 말

한국 문단에는 어느새 망각의 뒤안길로 밀려난 한 가지 진실이 있다. 무릇 좋은 작품은 격한 해석의 갈등을 유발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한 작품을 둘러싼 다양한 해석들이 활발히 산출되고 그것들이 창창한 대립을 이룬다는 점이 반드시 해당 작품의 높은 예술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강력하고 조야한 확신들이 깊고 거대한 세계관인 양 쉽사리 포장되고, 요애한 복잡성을 삽시간에 집어삼킨 요란한 분위기가 작금의 현실을 지배하는 것을 목도한다. 이렇듯 들뜬 분위기가 정치와 문화에 관한 모든 결정을 오롯이 선취하는 것이 현 세계의 풍경이란 점을 감안하면, 첨예한 해석의 갈등을 도발하는 작품의 출현은 어떻든 일단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것은, 바꿔 말하면, 독자들로 하여금 모종의 숙고를 하게 만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각인의 숙고하는 방식이 천차만별이라는 아찔한 문제는 제쳐두도록 하자.) 어떤 작품에 대한 해석의 목록이 너무 길어져 급기야 해석의 역사가 성립될 정도가 되면, 그것은 흔히 고전classic이라 일컬어진다. 하지만, 모두가 느끼듯이, 오늘날의 정신─과연 그런 것이 있다면 말이지만─은 세상의 모든 고전과 영원한 이별을 준비하는 중이다. 과거의 고전은 더 이상 읽히지 않고, 미래의 고전은 더는 태어나지 않을 듯 보인다. 현재는 전통을 경멸하면서 다만 파국을 두려워하기에 급급할 따름이다.
「은의 세계」가 앞으로 얼마나 많은 해석을 거느리게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이 작품은 좋은 의미에서 ‘문제작’으로 꼽히기에는 손색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는 것은, 이 작품이 시대의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는 당찬 기백을 지녔다는 뜻이다. 이 관점을 뒷받침하는 것은 가령 한국 문학의 지루함을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배 속으로 쑥 들어오는” “날이 바짝 선 식칼”로 환유하는 대목이다. 익명의 한국 작가의 소설집 한 권을 한국 문학 전체의 제유synecdoche로 간주하는 것은 지나친 오독이라는 항의가 물론 가능할 것이다. 이 항의에 대해서는, 갖가지 복잡한 문제들을 모조리 전염병 탓으로 돌리는 하나의 모습이 마치 “날이 바짝 선 식칼”처럼 느껴진다는 말로 응수할 수 있다. 이 해석을 조금 더 이어가 보자. 하나를 그토록 사랑하는 지환이 수차례 끔찍한 ‘상상 사고’에 시달리다가 마침내 맥주잔을 깨부쉈을 때, 그를 자극한 것은 다름 아닌 하나와의 대화였다. 그녀에게 “아무 얘기나 하고” 싶은 지환은 그러나 끝내 하고픈 얘기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지환이 제 악몽의 출처로 소파 옆에 놓인 소설을 구체적으로 지시하는 것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는 다음과 같은 심드렁한 대답을 내놓을 뿐이다. “스트레스 때문이야.” 하지만 곧바로 이어지는 하나의 이야기는 이 맥락에서 사뭇 징후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나도 요즘 그렇거든. 며칠 전엔 꿈을 꿨는데, 아는 사람들 앞에서 내가 쉴 새 없이 연설을 했어. 그런데 사람들이 막 이상하게 쳐다보는 거야. 그래서 거울을 봤는데 글쎄 내가 아니라 처음 보는 외국인이 있는 거야. 엄청 백발에 노인이. 심지어 남자.” 이 꿈을 혹시 한국 문학이 느끼는 자멸감(自蔑感)에 대한 암시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이런 관점에서 독자들은 명은의 기억과 기행이 어떤 것을 상징하는지, 더 나아가 ‘은의 세계’라는 제목은 어떤 문제의식을 내포하는지에 대해 제가끔 궁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물론 가능한 여러 해석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이 작품의 의연한 기상에 부응하는 많은 흥미로운 해석이 등장하기를 기대한다. 조효원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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