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겨울, 이미상

이미상 「여자가 지하철 할 때」(<문장 웹진> 2020년 9월호)

선정의 말

처음엔 오타인가 싶었다. “여자가 지하철 할 때”라니. ‘탈’ 자를 ‘할’ 자로 오타를 낸 것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자판에서 ‘ㅎ’과 ‘ㅌ’의 위치가 너무나 다르기에 단순한 오타일 가능성은 줄어들었다. 그러면 뭐지? 왜 이 작가는 왜 지하철이라는 탈것과 수행성의 동사를 결합한 것일까? 그리고 수행성의 내포에는 어떤 것들이 포함될까?
이 소설은 결국 20분 동안 지하철을 타는 동안 수진의 내면에서 벌어진 분열적 심리 사건들을 몽타주처럼 병치해놓은 텍스트다. 얼굴이 분열적으로 증식되고, 그에 따라 존재와 대상, 모든 것이 분열적이다. 그럴 때 사람들은 대체로 이상한 사람이거나 위험한 사람들이다. 혹은 그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다. 어쨌든 대상은, 타인들은, 존재자를 두렵게 한다. 불안케 한다. 특히 여성들의 경우 “지층적 두려움”과 더불어 더 복합적인 상황에 놓일 수 있다. 두려운 여자는, 두렵고 불안함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러니까, 지하철에서 ‘환대’를 지향하는 들숨과 날숨으로 의식적인 소망의 지평을 응시한다. 극단주의자들이 가공할 만한 테러를 자행하는 분위기 속에서도 과연 사람들은 자기 집 앞에 모든 이를 환영한다는 팻말을 걸어둘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 그 수행성의 단초다. 수진은 그런 팻말을 거는 쪽으로 무의식적 의식적 에너지를 탈주시킨다. 모든 이를 환영한다는 팻말을 건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손톱 조반월만 한 집이라도 문 앞에 모든 이를 환영합니다 팻말을 걸면 그 집은 그 어느 집보다 큰 집이 돼. 모두를 들일 수 있는 가능성이 무한의 집이 되게 해. 우리를 끝없는 집에 살게 해. 그러니 이 싸움은, 무한의 집을 지켜 얻는 것과 잃는 것 사이의 싸움일 테지. 얻는 것은 보잘것없어. 그 어떤 일에도 환대를 포기하지 않은 우리 자신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극히 드물게 일어나는 새로운 사람이 선사하는 세계관의 확장 같은 것이겠지.”
환대에 대한 자부심과 세계관의 확장을 얻는 대신 “잃음의 끝은 목숨”이라는 진술이 이어진다. “차갑게 거리를 두는 도덕심”에 경종을 울리는 독한 생각이다. 무의식적 의사(擬死) 놀이를 통해 주인공은 “열린 세상에서 닫혀 살거나, 닫힌 세상에서 열려 살거나” 둘 중의 하나를 강요받는 세상에서 “열린 세상에서 열려 살자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을 수행하면서 어미 새 역할놀이를 한다. 우선 수진은, 어미 새가 되기 위해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쉰다. “들숨에 자기 자신을 자신으로부터 떼 내고, 날숨에 자신을 상대에 포갠다. 이제 그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 그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이제 그가 하고 싶을 말을 상상하고 바로 그 말을 할 수 있도록 정교히 고안된 질문을 던진다.”
푹 찌르기만을 잘 하는 남자와는 달리 여자는 그런 어미 새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분열적인 수진의 ‘생각하는 창’들은 그런 어미 새의 윤리를 환기하는 구멍과도 같이 작은 창으로 수렴되었다가 분산되었다가를 반복한다. 험한 세상에서 그 어떤 경우에도 환대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자부심과 그로 인한 세계관의 확장을 우리는 어떻게 수행할 수 있을까, 작가 이미상의 질문은 이 험한 역병의 시절에 더 깊은숨을 쉬게 한다. 우찬제(문학평론가)

6 + 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