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여름, 우다영

「앨리스 앨리스 하고 부르면」(『Axt』 2019년 5/6월호)

선정의 말

‘일생(一生)’이란 단어를 오래 들여다보거나 조용히 반복해서 발음해보면 참 슬퍼진다. 이 단어가 지시하는 인간의 유한성 때문이기도 하고, 매 순간 달리 선택했을 수도 있었을 또 다른 삶들이 허망하기도 해서다. 완전히 다른 삶들을 살 수도 있었겠으나, 우리는 다 한 번 산다. 한 번의 삶만이 현실태가 되고 그것을 제외한 모든 삶들은 잠재태로 남는다. 우다영의 「앨리스 앨리스 하고 부르면」은 바로 그 이상한 슬픔과 허망함 속으로 독자들을 데려다 놓는다. 이 작품은 일곱 살 소녀의 꿈을 기록한다. 그러나 독자들은 소설의 결말에 도달하기 전까지 이 꿈의 주인공이 소녀란 사실을 알지 못한다. 꿈속에서 화자는 이미 일생을 거의 다 살아낸 노인이기 때문이다. 노인들이 다 그렇듯이 꿈속의 화자에게도 ‘일생’은, (이 단어에 삶의 모든 무게를 실어서) ‘파란만장’…… 수많은 (잘했거나 잘 못한) 선택과 엇갈리는 우연들 속에서 슬픔과 기쁨, 사랑과 이별, 죽음과 상실 같은 것들을 다 겪은 그녀다. 그러나 이국의 아름다운 (꿈이므로 그로테스크하기도 한) 섬 도시,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마시며 만년을 되돌아보고 있으니 그 삶이 크게 나쁘지는 않았던 듯하다. 그러나 그 순간 꿈은 자각몽으로 변한다. 노인은 자신이 꿈속에서 한 생을 다 살았으며, 이제 깨어나면 여전히 자신에게 무한한 선택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일곱 살의 소녀로 되돌아가게 될 것임을 짐작한다. 그러나 나는 의심스럽다. 꿈은 어느 앨리스가 꾸었나? 소녀가 꿈속에서 한 생을 살았나, 노인이 꿈속에서 일곱 살의 소녀로 되돌아갔나? 꿈은 살아가게 될 삶의 연습인가(작가는 그렇게 말한다), 살아보지 못한 삶에 대한 보상(나는 그렇게도 읽는다)인가? 이렇게 말해도 되겠다. 우다영의 「앨리스 앨리스 하고 부르면」은 소설적으로 아주 잘 번안된 장주 ‘호접몽’이다.
_문학평론가 김형중

관련 작가

우다영 소설가

199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14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소설집으로 『밤의 징조와 연인들』이 있다. 자세히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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