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여름, 김혜진

「다른 기억」(『21세기문학』 2018년 여름호)

선정의 말

“좋은 것을 좋은 대로 두는 일. 10년이 지나고 100년이 지나도록 그대로 두는 일. 망치거나 훼손하지 않고 간직하는 일. 시간을 거슬러 가서 그 모든 일을 없던 것처럼 무너뜨리지 않는 일”…… 그것은 ‘윤리’일까, ‘맹목’일까? 가령 오랫동안 존경해온 스승이 저지른 불법행위 앞에서, 그와 누렸던 지난날의 훌륭한 기억들은 그의 인격과 함께 부정되어야 할까 아니면 인격과 분리되어(혹은 인격 자체가 문제시되지는 않는 상태로) 간직되어야 할까?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에 등장했던(이제는 관습화되어 버린) 대사 ‘우리는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완전히 사랑할 수는 있다’라는 윤리적 정언명령에 따를 때, 그 기억은 간직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른바 ‘좋았던 시절’에 대한 집착이 한 인격을 어떤 방식으로 파괴하는가(광화문에서 여전히 고집스럽게 휘날리는 저 태극기들을 보라)를 알고 있는 입장에서 볼 때, 수정되거나 훼손되지 않는 기억은 맹목의 산물이다. 그럴 때 기억은 수정되거나 부정되어야 한다. 고약하게도 김혜진의 「다른 기억」이 우리 앞에 던져놓는 것, 그것이 바로 어떤 윤리는 맹목이 될 수 있고, 또 어떤 맹목은 윤리적일 수도 있다는 이 역설이다. 타자에 대한 절대적 환대의 윤리를 강변하는 일은 쉬운 일이다. 역으로 타자의 낯선 드러남 앞에서 그의 정체성 전체를 부정하며 뒤돌아서는 일도 쉬운 일이다. 그러나 김혜진이 우리 앞에 던져놓은 저 역설을 긴 고뇌 없이 돌파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_김형중(문학평론가)


대부분의 소설이 그렇듯 김혜진의 「다른 기억」에도 갈등이 존재한다. “임 선생님 수업이 없어질 수도 있대”라는 첫 대사에 암시된 대로, 그 갈등은 한 대학 신문사의 주간 교수를 둘러싼 학내 분쟁의 외양을 띠고 나타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연구비 횡령이나 연구 실적 조작 등 언론을 통해 끊임없이 반복되는 몇몇 키워드로 요약될 수 있는 사건이 그리 새롭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그 사회적 중요성이 희석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다른 기억」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갈등은 임 교수의 혐의에 관한 학내 분쟁 자체가 아니라 그 분쟁이 낳은 또 다른 갈등이다. 그 갈등은 대학 신문사 편집장인 ‘너’, 그리고 대학 신문사 기자로 ‘너’와 매우 가까운 ‘나’가 임 교수 사건을 받아들이는 태도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갈등, 어쩌면 큰 갈등에 대한 작은 갈등 혹은 중심 갈등에 대한 부차적 갈등으로 부르는 것도 가능할 것 같은 이런 종류의 갈등을, 랑시에르의 개념을 (엄밀한 차원이라기보다는 비유적 차원에서 빌려와) ‘불화’라고 불러보자. “불화는 하얗다고 말하는 사람과 검다고 말하는 사람 사이의 갈등이 아니다. 그것은 하얗다고 말하는 사람과 하얗다고 말하는 사람 사이의, 하지만 같은 것을 알아듣지 못하는 또는 상대방이 하양이라는 이름 아래 같은 것을 말하고 있는지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이다”(자크 랑시에르, 『불화: 정치와 철학』, 진태원 옮김, 길, 2015, p. 17).
서로 상반된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뭔가를 잘못 알고 있거나 혹은 애매한 것을 오해하는 것도 아니지만, ‘너’와 ‘나’는 불화를 느끼고 그 불화의 골은 메워지기는커녕 마침내 손쓸 수 없을 만큼 깊어질 것이다. 이번 계절에 같이 발표된 「동네 사람」 경우, 한 동성 커플에게 혐의 어린 시선을 거두지 않은 동네 사람들, 그리고 그러한 외부의 시선과 갈등하게 된 커플 안에서 또 다른 갈등이 작동하는 구성 역시 「다른 기억」과 부분적으로 문제의식을 공유한다고 볼 수도 있다. 거시적인 적대관계로 규정되기 어렵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다루기 어려운 불화에 대한 작가의 관심에 새삼 주목을 요한다.

_이수형(문학평론가)

관련 작가

김혜진 소설가

1983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201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고 소설집 『어비』, 장편소설 『중앙역』 『딸에 대하여』가 있다. 자세히 보기

5 + 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