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봄, 조남주

「가출」(『창작과비평』 2018년 봄호)

선정의 말

“아버지가 가출했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조남주의 「가출」은 72세의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선택한 가출이 야기하는 가족 구성원들의 변화 혹은 성장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한국적 가부장의 삶을 전형적으로, 한편으로는 모범적으로 살아가던 아버지가 돌연히 감행한 가출의 실존적 원인과 이유에 대해 이 소설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이 소설은 아버지의 부재라는 미스테리한 사건 이후의 시간에 남게 된 사람들, 다시 말해 가부장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던 가족 내 관계의 변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흥미로운 것은 서사가 진행될수록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 구성원들이 아버지의 부재에 익숙해져간다는 것, 더 나아가 아버지의 가출을 계기로 다른 가족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소통의 장이 구성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의 가출은 아이러니하게도 삶의 새로운 계기를 모두에게 제공하는, 일종의 생산적 사건으로 여겨질 수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의 부재가 일상화되고 마침내 “미안하지만 아버지 없이도 남은 가족들은 잘 살고 있다”라는 쿨한 현실 인식에 도달할 때, 비로소 소설은 부성성에 대한 우울증적 죄의식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해방되기에 이른다.

이처럼 한국적 가부장의 자발적 소멸이라는 소설적 사건은 복구되거나 애도되어야 할 일이 아니라고 소설은 말한다. 다소 도식적인 측면이 없지는 않지만, 한국적 부성성의 소멸을 일종의 자연사(自然史/自然死)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소설의 쿨한 태도는 한국 사회가 현재 당면하고 있는 세대 갈등, 젠더 정치 등의 현안들을 환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인 소설임에 틀림없다. 소설의 말처럼, 오랜 시간 동안 우리 사회를 군림하고 있던 한국의 아버지들이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남은 우리는 여전히 잘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리 미안해할 일도 아닐지 모른다.강동호(문학평론가)

 

 

탈존인가 폐존인가: ‘출가외인의 사회학

1993년 10월 박완서는 『월간 말』에 「여자만 출가외인인가」라는 산문을 기고했다. 요(要)는 이렇다. 어느 날 박완서는 「아침마당」을 봤다. 방송에선 한 가족의 맏아들이 출연했다. 부모를 향한 서정적인 고백이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점이 박완서의 의구심을 자아냈다. 맏아들의 효심이 서정적으로 전달되는 데엔 아내가 가진 고충이 삭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박완서의 표현을 빌자면, 이는 “여자를 비인간화”시켜 지켜낸 서정이었다. 이로부터 25년 뒤 조남주의 「가출」은 다시 묻는다. 여자만 출가외인(出嫁外人)인가. 본 소설은 같은 질문을 던지나 25년 전과 다른 맥락으로 둘러싸여 있고 보다 확장된 고민을 공유한다. 관련하여 「가출」을 읽어나가는 데엔 현대인이 자신의 비참을 마주하는 결단인 ‘자기실종’을 끄집어낼 필요가 있다. 일본 사례이긴 하지만 우리는 르포르타주 『인간증발』이나 드라마 「전력실종」을 통해 인생을 리셋하고자 자기실종을 선언하는 ‘죠-하츠(蒸發)형 인간’을 지켜봐왔다. 한데 이러한 자기실종의 기록은 정상적 경제인간에서 탈락했다고 인식하는 남성의 비극을 위무하는 데 중점을 둔다. 왜 그들은 증발해서라도 인생을 리셋하고 싶어하는가라는 질문엔 한 가족과 가정 그리고 사회를 이끄는 경제인간의 위상과 인식 범주를 남성으로 제한시키는 단계가 역설적으로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한국 사회라고 다를까. 조남주의 「가출」은 자기실종을 조망하는 기록들에 가려진 젠더적 불균형을 꼬집는다.

작품 속 큰아들의 말에 따르자면 아버지는 “자의에 의한 가출”을 했다. 영화적 서사에 빗대어 소설 전개를 언급하자면 여기까진 1960년대 한국영화의 아버지상을 대표했던 배우 김승호가 연상될 정도다. 당신이 새벽녘 케이블 영화채널에서 우연히 봤던 옛 장면들을 떠올려보자. 더 이상 직장을 다니지 않는 아버지가 가족을 어떻게 먹여 살릴지 전전긍긍하다가 말없이 떠난다. 아버지는 방황하다 창문 속에 비친 식구들의 화기애애한 모습을 아련하게 쳐다만 본다. 이러한 응시엔 결국 가장인 남성 당신이 지켜야 할 곳은 바로 이곳, 가정이며 화기애애함의 원천이었던 아버지 당신이 결국 귀환해야 화기애애함이 완성된다는 동의와 함의가 있었다.

한데 여기서부터 조남주의 「가출」은 다른 목소리를 낸다. 정말 저 화기애애함은 아버지가 돌아와야 충족될 수 있을까. 소설을 이끄는 화자인 딸은 말한다. “미안하지만 아버지 없이도 남은 가족들은 잘 살고 있다”고. 소설은 자기실종을 시도한 아버지가 집을 비우자 서서히 변하는 가족상을 강조한다. 아버지가 사라지자 남은 사람들은 여느 때처럼 식사를 준비하고 맛있게 먹는다. 이 의례는 점점 자연스러워진다. 또한 아버지가 집 안에 존재하던 시절, 아버지는 ‘자신의 일’을 부각시키는 데 혈안이 되었지만, 아버지가 사라지자 남은 가족들은 하고 싶었던 ‘자신의 일’이 무엇이었는지 생각을 주고받는다. 특히 아버지가 사라진 뒤 딸은 아들은 엄마는 자신이 꿈꾸고 설계했던 생애가 무엇이었는지 입 밖으로 꺼내기 시작한다. 어쩌면 「가출」은 자기실종을 택할 수밖에 없는 경제인간으로서의 남성과 그 비극을 주시하는 소설이 아니라, 가장으로 온화하게 ‘군림’했던 남성이 부재했을 때 남은 가족들에게 다시 찾아온 ‘생애 전망’의 희망을 말하는 소설이 아닐까.

이처럼 소설은 오랫동안 뿌리내렸던 ‘출가외인’이라는 사회적 통념, 즉 결혼한 여성은 남이라는 인식을 뒤집어 아버지-남성에게로 겨냥한다. 이때 소설은 출가외인을 출가와 외인으로 구분한 뒤 아버지를 가족의 ‘외인(外人)’으로 두려는 화자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으로 마무리된다. 사회학자 김홍중은 최근 자신의 존재를 사라짐에 두는 현대인에 대해 “탈존주의”라는 용어를 제안한 바 있다. 비록 이 용어가 청년세대의 결단을 다루긴 했지만, 오늘날 자기실종을 감행하는 사람들의 용어로 확장·적용해볼 때 조남주의 「가출」은 탈존의 층위를 넘어 폐존(廢存)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토론하고 싶은 지점들이 있다. 그렇다면 과연 폐존의 대상은. 작가는 물론 확답하진 않는다. 하나 힌트로 삼고 싶은 작품 속 종교용어가 있다. “출가(出家)”. 차라리 ‘속세’의 모든 고통과 번뇌를 내려놓고 종교에 귀의하는 것이라면 아버지를 잠깐 원망하고 오래 안쓰러워했으리란 화자의 스치는 말이 꽤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는 세속을 함께하는 한 남성, 한 가장이라는 존재에 대한 절단을 논하는 급진적 발화라고 볼 수 있을까.

당신의 우려를 알고 있다. 익히 알다시피 우리는 한 작품에 ‘급진’이라는 평어를 쉽사리 붙여 작가와 작품을 동시에 틀 지웠던 실패담을 자주 접해왔기 때문이다. 전형과 급진이라는 구도에 복속되지 않는 가운데,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실천은 결국 조남주 작가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수차례 이야기했던 실천과 결을 같이할 것이다. 소설을 읽는 당신의 목소리를 들려주기. 아버지가 ‘출가-외인’이 되자 비로소 자신에 대해 입을 열기 시작한 이들처럼.

25년 전 박완서의 목소리를 통과해 김태용의 「가족의 탄생」 등 2000년대 당시 가족영화의 새로운 흐름으로 도출된 ‘대안가족과 젠더 담론’이 잠시 퇴색된 화두로 치부되던 상황에서, 그러한 담론을 작가 자신의 목소리로 다시 불러내고 변주한 「가출」은 할 말이 쌓인 당신의 입을 간질이기에 충분한 ‘작금(昨今)의 작품’이다. _김신식(산문가·시각문화연구자)

인터뷰

이번 계절부터 <이 계절의 소설> 선정작의 인터뷰는 웹페이지에 실리지 않습니다. 대신 2018년 8월 출간 예정인 『이 계절의 소설(가제)』 단행본에서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관련 작가

조남주 소설가

이화여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PD수첩」 「불만제로」 「생방송 오늘아침」 등 시사교양 프로그램 작가로 10년 동안 일했다. 2011년 장편소설 『귀를 기울이면』으로 문학동네소설상을, 2016년 장편소설 『고마네치를 위하여』로 황산벌청년문학상을, 2017년 『82년생 김지영』으로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했다. 자세히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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