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겨울, 정영수

「더 인간적인 말」(『문학동네』 2017년 겨울호)

선정의 말

뒤돌아보면 정영수는 소설 한 편에 기나긴 시간을 담아낸 것 같은데, 정작 그리 흐르지 않은 시간을 들려주었다. 정영수의 소설 한 편엔 짧은 시간이 이야기되고 있는 듯한데, 정작 소설이 읽는 이를 끌고 가는 시간은 매우 길다. 특히 그에게 복기란 소설을 가로지르는 시간을 향한 실천이다. 비유하자면 정영수의 소설 속 인물은 되돌아보고 뒤돌아보며 현재라는 수족관에 지나왔던 시간을 쏟아붓는다. 수족관에 물을 부으면 잠깐의 동요는 일지만 물꼬를 다른 방향으로 틀진 못한다. 정영수의 사람들은 그렇게 시간을 인식하며 산다.

고로 정영수의 근작 「더 인간적인 말」을 다른 제목으로 부른다면, ‘더 시간적인 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돌연 작중 화자에게 유산을 남긴다고 밝힌 채 스위스에서 여생을 마감하겠다는 이모 덕분에, 화자와 그의 아내는 말이 비춰준 시간, 시간이 비춰준 말을 떠올려본다. 말로 맺어진 사이는 각기 다른 성격과 환경을 지닌 두 사람이 보내온 시간의 사이를 좁혀주었지만, 말로 맺어진 사이이기에 두 사람이 보내온 시간의 사이는 점점 벌어진다.

그러나 정영수는 시간을 두고 (부러) 심각해지거나 비장해지지 않는다. 지난날 이모가 스페인에서 수산업자인 동료가 큰 내기를 걸며 백개먼 게임을 하자 제안했을 때 동참했던 까닭이 “그저 무료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듯, 정영수가 견지하는 시간을 향한 방도란, 무료(無聊)함이다. 활력은 없고 이것이 정말 힘인가 느껴지지도 않는 이 ‘여력’의 시간. 「더 인간적인 말」은 여력의 시간이야말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들을 서로 나눌 수 있는 ‘필요한 피로의 시간’임을 잘 보여준다.

그간 발표된 정영수의 소설에서 피로가 남달리 다가오는 이유는 여력의 시간을 통해 누설되고 열거되는 취향의 목록과 그 의미 때문이다. 여행지, 음반, 영화, 세계문학…… 이는 인물들의 내력을 설명하는 단단한 기호라기보단, 그저 피로한 자에게 남겨진 ‘요설’을 위한 재료다. 잇자면 정영수는 피로도 취향이 될 수 있음을 그만의 무료함으로 매력 있게 선보이는 작가일 것이다. 「더 인간적인 말」은 이런 특색들을 ‘내보이면서’ 시간을 ‘보내는’ 작품이다. 물론 시간을 보낸다고 해서 시간은 가지도, 시간을 보낸다고 해서 시간을 겪는지도 우리는 제대로 알 수 없다. 시간을 향해 “기다렸고, 그리고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았다”고 할 뿐.

작가에게 미안하지만 나는 정영수가 계속 피곤했으면 좋겠다. 나는 그의 피로가 탐난다. _김신식(산문가)

 

정영수의 「더 인간적인 말」은 평소 윤리적 가치관과 정치적 견해의 차이로 인해 끊임없이 논쟁하고 대립하던 한 부부가 직면하게 된, 근본적인 곤혹스러움에 대해 말하는 소설이다. 이 곤혹스러움은 불현 듯 당도한 이모의 유산 상속 소식으로 인해 자각되기 시작한, 언어의 한계와 무능함에서 기인한다. “우리는 말이 너무 많다는 게 문제”라는 ‘나’의 고백처럼 이들 부부에게 있어 말은 “모든 문제의 원인임과 동시에 해법”에 가까웠으나, 논리와 관념으로 무장된 말들로 현학적인 주제에 대해 토론하곤 했던 이들 부부는 자발적으로 죽음을 결정한 이모의 생각과 마음 앞에서 철저하게 무력해진 자신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물론 정영수의 소설이 단순히 말의 불가능성을 확인하는 데 그치는 것은 아니다. 소설의 부부는 이모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언어의 논리로 충분히 담아낼 수 없는 삶의 순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삶의 깊이를 부여하는 근본적인 요소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런 의미에서 정영수의 「더 인간적인 말」은 구체적인 생각과 정치적 의견을 교환하는 말의 대화뿐만 아니라, 말의 근본적인 한계를 공유하는 일, 다시 말해 침묵의 형태로 제시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를 서로 나누는 행위야말로 공동체를 이루는 토대라고 말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유머러스하지만, 한편으로 따뜻한 시선으로 인간과 말의 관계를 다시 성찰하고 있는 정영수의 소설은 말의 근본적인 무력함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다시 말해 말의 한계를 증언하는 침묵이야말로, 우리가 윤리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적인 것’임을 매력적으로 그리고 있다. _강동호(문학평론가)

인터뷰

금정연_ 안녕하세요. 먼저 이 계절의 소설에 선정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지난해에 첫 소설집 『애호가들』을 출간하셨죠. 『악스트』에 첫 장편소설 「미래는 사랑으로 가득하다」를 짧게 연재하시기도 했고요. 첫 소설집을 낸 이후, 그리고 장편 연재를 시작한 이후로 혹시 달라진 게 있는지 궁금합니다. 작가로서의 마음가짐이나 태도 같은 것들. 어떤 생각과 다짐으로 새해를 맞으셨는지도 듣고 싶고요.

정영수_ 안녕하세요. 그동안 많은 것이 달라졌는데 그게 첫 소설집을 내서 혹은 장편 연재를 시작해서인지, 아니면 그저 시간이 지나서이거나 나이를 한 살이라도 더 먹어서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예전에는 문학에 대한 질문을 많이 했다면 요즘은 삶 자체에 대한 질문을 더 많이 합니다. 삶이 뭔지 조금은 알 것도 같고 도무지 모를 것도 같습니다. 인간들이 지겹고 인간들이 그립습니다. 소설로 뭔가를 이루고 싶다는 생각보다 뭔가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올해의 가장 큰 다짐은 더 이상 다짐하지 말자, 입니다. 더 이상 새 인생을 살지 않는 것이 목표입니다만 저는 늘 제 자신을 혐오하기 때문에 새 인생을 꿈꾸지 않는 것은 다음 생에나 가능할 것 같기도 합니다. 사실 어제만 해도 얼마 전 중국에서 시행한 7차 화장실 대혁명에서 영감을 받은 7차 인생 대혁명을 통해 새 사람이 되어보기로 결심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무래도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서요. 아무래도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요.

 

금정연_ 「더 인간적인 말」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논쟁을 즐기던 부부가 이모의 안락사 선언이라는 (실재적이고 직접적인) 사건 앞에서 갈등하며 관계와 삶에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 이야기입니다. 기존의 정영수 소설과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달라졌다고 느끼게 되는 것은 이모라는 인물의 존재예요. 주인공들은 그대로인데 그들이 대면해야 하는 상황이 달라졌다고 할까요? 이제까지의 주인공들이 마주했던 현실은 인간의 의지를 뛰어넘으며 주인공을 무력하게 만드는 무엇이었다면, 이번 소설에서는 그것이 한 인간의 실존적인 결단이라는 구체적인 행위로 나타나는 거죠.

정영수_ 저는 늘 실재적인 문제에 대해 쓰고 있다고 생각해왔는데요, 실재적인 문제에 대해 ‘쓴다’는 것에 대한 회의감에 휩싸일 때가 종종 있습니다. 문학을 언어 바깥의 것을 표현하는 언어 형식이라고 한다면 문학을 수용하는 이는 제가 지금껏 경험한 것보다는 실재를 더 깊이 감각해야 한다고 믿어왔습니다. 그런데 『필경사 바틀비』나 『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감명받은 이들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실제 문제들에 대해서는 집단적 믿음에서 기인한, 주관성이 결여된 윤리적 판단을 통해 손쉽고 빠른 결론을 선택하는 것을 보다 보니(물론 여기에는 저도 포함됩니다) 문학은 무엇을 하고 있나, 문학은 도대체 지금까지 무엇을 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나누는 말들이 과연 유의미한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가 회의하면서도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결국 말 외에 뭐가 있을까,라는 생각에 몰두하고 있는 도중에 어떤 이야기를 쓰게 되었는데 그 이야기가 방금 앞에서 말한 것들과 정말로 연관이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금정연_ 소설에는 두 종류의 말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윤리 논쟁’을 즐기는 부부의 말. 다른 하나는 스위스에 가서 죽을 거라는 이모의 말입니다. 오래된 이분법(혹은 편견)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전자가 현실과 유리되어 있기에 공허하다면 후자는 실천을 전제하고 있기에 충만하다는(별로 좋은 요약은 아닌 것 같네요). 재미있는 것은 그 말을 하기 앞서 이모가 쑥스러워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녀가 다음에 이어서 한 말을 생각하면 전혀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면서도 역시나 그 상황에서 쑥스러움을 느낀다는 건 사실은 어딘지 굉장히 이상하고 비상식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는 어쩐지 이것이 작가의 쑥스러움처럼 느껴지기도 했는데요. 이모가 쑥스러워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정영수_ 저는 사람이 자신의 가장 내밀한 욕구나 가장 사적인 행위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때 부끄러움을 느끼는 경우를 보아왔습니다. 죽음은 그 무엇보다 사적인 행위이고 자살은 가장 내밀한 욕구에 해당하지 않을까요. 그것을 일말의 쑥스러움도 없이 엄숙하게 선언하는 광경은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마치 블랙코미디의 한 장면 같기도 하고요.

 

금정연_ 두 종류의 침묵도 있습니다. 하나는 말이 너무 많아 위기를 맞이한 부부가 이혼이라는 행위를 미루기 위해 선택한 잠정적인 침묵. 다른 하나는 소설의 마지막에서 이모를 스위스의 안락사 센터에 내려주고 나서 무언가를 기다리며(혹은 기다리지 않으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그래서 “말하는 법을 잃은 사람들처럼” 지켜야 했던 침묵. 질문은 이렇습니다. 제목이 가리키는 ‘더 인간적인 말’은 두 종류의 말과 두 종류의 침묵 중 어느 것인가요? 혹은 어느 것도 아닌가요?

정영수_ 저는 문학을 수수께끼놀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때로는 분명하지 않은 것이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때로가 아니라 거의 항상 그렇지요. 제목인 ‘더 인간적인 말’은 질문일 뿐이고요, 그것은 제가 스스로에게 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금정연_ 말이라는 말이 나와서 말이지만, 정영수 소설의 문체적 특징 중 하나는 괄호의 빈번한(그러나 과하지는 않은) 사용입니다. 괄호 안의 말은 앞의 말을 부연하거나 비트는 역할을 하는데요. 어떤 독자들은 그런 것을 재미있어하는 반면, 어떤 독자들은 좋아하지 않거나 심지어 부적절하다고(소설에 몰입을 방해한다나 뭐라나) 생각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괄호에 대한 입장을 밝혀주세요.

정영수_ 제 시도가 성공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소설에 몰입하는 데 방해가 되는 요인들을 제거하는 데 괄호를 이용합니다. 어떤 말을 첨언하고 싶은데 그것을 서술에 추가하면 흐름이 끊길 때, 서술자의 생각이 정리가 안 되어 분열되는데 그 분열의 양상을 중언부언 늘어놓고 싶지 않을 때 사용하지요. 예를 들어 「더 인간적인 말」에서 이모의 고양이의 이름이 ‘복순이’라는 사실을 전달하고 싶은데 그것을 전달하려고 굳이 이모가 고양이의 이름을 말할 때까지 기다리면서 진을 뺄 필요가 있을까요(“내 고양이 말인데, 알잖아 그 왜, 이름이 복순이이고 열네 살 먹은, 내가 지금 하려는 말과는 상관없지만 네가 기억 못 할 것 같아서 말이야, 아 참 그나저나 내가 하려는 말은……”). 그냥 서술자가 끼어들어서 (그 고양이의 이름은 복순이었다)라고 말해주면 훨씬 간단한데요. 실생활에서 대화를 나눌 때에도 괄호는 유용합니다. 아직 그렇게까지는 편하지 않은 사람과 함께 점심 메뉴를 정할 때 “○○ 씨 먹고 싶은 걸로 드시죠(오늘 같은 날에는 우동이 어울릴 것 같긴 합니다만)” 하고 말하면 지나치게 자기주장이 강하게 느껴지지 않으면서도 원하는 바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어떤가요, 유용하지 않나요. 여러분도 지금 사용해보세요.

 

금정연_ 소설은 생각이라는 단어를 세 번 반복하면서 시작합니다(“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걸려온 전화에서 어떤 남자가 자신을 변호사라고 소개했을 때, 나는 이 여자가 이번에는 정말로 해볼 생각인가보군, 하고 생각했다. 여기서 이 여자란 내 아내인 해원을 말하는 것인데, 나는 전화 속 남자가 그녀가 고용한 이혼 전문 변호사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중간에는 생각이라는 단어가 다섯 번 반복되는 문장도 등장해요(“그래 어차피, 하는 생각을 하다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에 대해서 놀랐고, 그래서 어차피, 까지만 생각하고 그다음에 생각하려 했던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저는 생각이 지루하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되도록 생각하지 말자고 생각하는 편인데요, 생각에 대한 정영수 작가의 생각은 무엇인가요.

정영수_ 저도 생각이 지루하고 그래서 되도록 생각하지 말자고 생각하는 편입니다만 생각을 멈출 수가 없어요. 아무래도 생각 중독 같습니다. 생각을 하지 말자는 생각도 하기 싫은데 자꾸 생각을 하게 되어서 머리가 아플 지경이고요. 그럴 때마다 이지엔6를 먹습니다. 그럼 좀 나아지거든요. 이부프로펜이 액상 형태로 들어 있는 연질캡슐형이라 타이레놀보다 효과가 빠릅니다.

 

금정연_ 개인적으로는 소설 이후의 주인공 부부의 삶이 몹시 궁금합니다. 마침내 이혼을 실행했을까? 아니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결혼 생활을 이어가게 되었을까? 혹시 알고 계신 게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정영수_ 저는 마음 안 맞으면 각자 갈 길 가자는 주의지만 그래도 두 분은 원만히 해결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래도 좋은 게 좋은 거니까요(?).

 

금정연_ 매순간 무언가를 읽고 있지만 늘 책 읽을 시간이 부족하다고 투덜대고, 그러면서도 읽을 책을 천장에 닿을 정도로 쌓아놓고 빈둥대는 것을 즐기시는 것으로 유명하신데요. 최근에는 어떤 책을 읽고 계신가요? 독자들에게 추천하고픈 책이 있다면?

정영수_ 얼마 전 편안히 책을 읽고 싶어서 레이지보이사(社)의 리클라이너를 구입했는데요, 너무 편안해서 자꾸 잠이 옵니다. 그래도 그 와중에 종종 완독의 기쁨을 맛보고 있어서 돈이 아주 아깝지는 않습니다.
최근에 재미있게 읽은 책은 로렌스 크라우스의 『無로부터의 우주』입니다. 無에서 우주가 어떻게 탄생되었는지 알려주는 입문 과학서인 줄 알고 읽기 시작했는데 본론으로는 나아가지 않고 無란 무엇인지에 대해서만 한참을 떠들고 같은 질문을 조금 틀어서 다시 하고 뜬금없이 또 다른 질문으로 비껴가고 하는 것이 참 소설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재미있었습니다. 중반부까지의 중심 화두는, 지금은 아무것도 없지만 후에 우주가 생겨날 가능성이 존재하는 상태를 완전한 無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인데 저자는 정자와 난자가 각각 존재한다고 아직 인간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처럼 우주의 생성 가능성만으로는 有의 상태라고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저는 늘 머릿속에 이미 쓸 것이 다 들어 있으니까 나는 아직 아무것도 쓰지 않은 게 아니야, 인식론적 관점에서 이미 나의 원고는 완성되어 있다,라고 믿곤 했는데 로렌스 크라우스에 따르면 그것을 과학 언어로는 원고 無의 상태라고 하고, 그래서 그동안 저의 무모함(과 뻔뻔함)을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독자분들께 추천하고 싶은 책은 장 샤를르 부슈의 『악성 나르시시스트와 그 희생자들』인데요, 정신분석학에 관련된 이론서 같지만 사실은 (불행하게도) 악성 나르시시스트와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을 위한 실용서입니다. 주변에 악성 자기애자가 있다면 일단 도망치시고, 그럴 수 없다면 이 책을 읽어보세요. 방금 책을 한번 펴보았는데 이런 말이 보이네요. 폴-클로드 라카미에의 말을 재인용한 것으로 “악성 자기애자들이 특히 좋아하는 무대이자, 주 무기는 바로 말이다”(p. 43)라고 씌어져 있는데요, 주변에 말이 많은 사람이 있다면 일단 멀리하시기를 권합니다. 참고로 그들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악성 자기애자, 그들의 내면은 얼음처럼 차갑다. 그들 자신은 죄책감을 모르나 타인에게는 가차 없이 죄책감을 안겨준다. 그들의 가치관, 감정, 태도는 그가 대하는 사람과 그를 둘러싼 환경에 따라 수시로 바뀐다. 외면적으로만 보면 그들은 사랑스러운 사람이며 동정과 연민을 가장한다”(pp. 9~10). 저자에 따르면 악성 자기애자는 매우 위험합니다. 악성 자기애자의 먹잇감이 된 사람은 무기력에 빠져들고 우울감에 휩싸이며 심한 경우 도착, 광기에 사로잡히고 끝내 육신과 정신이 황폐해지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합니다. 책에서는 악성 나르시시스트의 주요한 특징으로 (뜻밖에도) 자기혐오를 꼽고 있습니다.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악성 자기애자들 역시 자기애의 결핍으로 고통받는데, 자기애가 강할수록 그것이 극단적인 자기혐오로 발현된다는 이야기입니다. 혹시 주변에 자기혐오에 빠진 사람이 있나요? 그렇다면 그 사람은 악성 자기애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서 도망치세요.

 

금정연_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해주세요. 두서없는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영수_ 올해의 목표는 7차 인생 대혁명에 성공해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너무 싫습니다. 아무래도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요.

관련 작가

정영수 소설가

1983년 서울 출생. 2014년 창비신인소설상으로 등단. 자세히 보기

5 + 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