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겨울, 손보미

「정류장」(『자음과모음』 2017년 겨울호)

선정의 말

손보미의 「정류장」은 잘 빚어진 항아리 같은 소설이다. 군더더기 없이 매끄럽게 이야기를 엮어가면서, 인간의 심연에 내재된 가학적 폭력성에 대한 잔잔한 반성의 계기를 부여한다. 작은 방송국 아나운서로 일하던 주인공은 열다섯 살 때 학교폭력에 가담했던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직한 다음, 일곱 살 터울의 누나가 있는 미국으로 도피 여정을 떠난다. 공항 정류장에서 중국인 학생과 대화하던 중 특정 단어를 발음할 때,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았는데, 그 단어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소설 도입부에서는 알아듣지 못했다고 했던 그 단어를 누이의 집 체류를 마치고 귀국하면서 불현듯 떠올리게 된다. “bewildered. 그 단어를 발음할 때 그 여자는 마치 곧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 역시 그날 밤에 버스에서 내려서 누나를 기다리는 동안 어리둥절해지는 기분을 느꼈었다. 아무도 그를 데리러 나오지 않을까 봐. 정말로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받을까 봐.”(『자음과모음』 2017년 겨울호, p. 43).

당혹스럽고 어리둥절해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상태. 말하자면 주인공은 그런 “bewildered”의 상태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상대적으로 잘난 누나에 비해 상대적으로 못난 열등감에 시달려야 했던 상처받은 내면 아이를 지니고 있는 주인공은 소박하고 성실한 소시민적 삶을 영위하려 했지만, 학교폭력 사건이 드러나는 바람에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갔다고 느낀다. 아니 어쩌면 그 가학성 폭력성을 숨긴 채 거짓말처럼 살았는지 모른다는 반성을 한다. 아나운서로서 남들에게 보이는 모습, 그것이 기만일 수도 있었음에 회한에 젖는다. 두 조카들이 본능적으로 보이는 가학성을 보면서 자기 유년기를 겹쳐 보기도 한다. 남에 대한 동물적 가학성에 즉물적으로 노출될 때, 남을 위해 진정한 교감도 축하도 하기 어렵다. 미국 여정을 통해 작가는 영어를 세 번 직접 노출하는데, 그것들이 이 소설의 주제적 요소로 기능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눈여겨 볼 일이다. 앞서 언급한 “bewildered”와 “every body lies”(p. 23) 그리고 “I hate celebration!”(p. 37). 이 셋을 중층적으로 포개어 생각하면 작가가 「정류장」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소통하고 싶었는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일찍이 이청준은 「가해자의 얼굴」을 통해 가해자 의식을 인상적으로 전경화하면서 반성적 성찰을 유도한 바 있다. 오랜 피해의 역사 속에서 피해자 의식에 익숙해 있던 사람들에게, 그 피해의식이라는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라도 가해의식을 바탕으로 발본적 성찰을 해야 한다고 했다. 누구나 피해자 의식을 갖기는 쉽지만 가해자 의식에 입각해 반성을 제대로 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 사람들만 모여 산다면 억울한 사람들만 존재하는 불행한 사회가 될 것이다. 그런 사회라면 정녕 인간적인 세상이라고 보기 어렵다. 서로가 “bewildered”의 상태를 억압적으로 조성하기 일쑤일 터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가해자 의식은 인간이 반성적 사유를 보일 수 있다는 깊은 가능성의 원천이요, 심연의 윤리 감각이다. 그런 윤리 감각을 작가 손보미가 새롭게 가다듬었다. 낯선 정류장에서의 당혹스러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이들의 어리둥절함. 그런 인생 정류장의 신산한 풍경을 넘어서 서로를 애틋하게 보듬을 수 있는 정겨운 정류장 풍경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라도, 가해자 의식에 바탕을 둔 반성성의 지평은 매우 요긴하다는 사실을 웅숭깊게 형상화했다._우찬제(문학평론가)

 

간암에 걸린 친구 김은 죽기 전 화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 윤종을 찾고 싶어. 죽기 전에 그 애에게 용서를 받고 싶어.” 매달 기부 계좌에 입금하기, 욕설 하지 않기, 대중교통에서 자리 양보하기 등과 같은 “기본적인 도덕 법칙”을 절대로 어기지 않고 살아온 화자에게도, 그 말과 함께 윤리적 위기가 찾아온다.

잊고 살았지만 그는 어린 날 타인(윤종)에게 씻지 못할 상처를 준 적이 있다. 그러므로 ‘윤종’이란 이름은 어쩌면 ‘윤리적 종기’의 줄임말 정도로 읽어도 무방하겠다. 쉽사리 그 뿌리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어떤 조건하에서는 불수의적으로 돌출하는 환부. 「정류장」은 바로 그 윤리적 환부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나 만약 이 소설이 철없던 날 가담했던 학교폭력의 후일담에 그쳤다면 클리셰를 면하기는 힘들었으리라. 누나와 나의 이야기, 그리고 누나가 낳은 두 조카들의 이야기가 ‘나’와 ‘윤종’과 ‘김’의 사연 위로 겹쳐진다. 조카 지호는 ‘나’의 면전에서 동생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럼 준호를 하수구에 버려.” 아마도 지호는 준호에게 품었던 이 적의를 잊고 살게 되리라. 삼촌처럼 기본적인 도덕 법칙을 지키며 사는 훌륭한 시민이 되리라. 그러나 무심코 행해진 그런 적대의 말과 행위 들이 타인의 삶 전체에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그러니 우리의 의식이 아무리 결백을 주장해도, 산다는 것은 항상 타인을 적대하며 산다는 말이다.

타인에 대한 적대는 ‘인간 조건’이다. 「정류장」은 우리에게 그와 같은 사실을 뼈아프게 상기시킨다. 우리는 살아 있는 한 타인들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죄인들이다. ‘자기 점검의 윤리’라고 불러도 좋을 이 염결한 주체의 행보는 각별한 주목을 요한다. 타자 윤리로부터 자기 윤리로 이행해가는 바로 저 지점 어딘가에서 이즈음 한국 소설이 심한 성장통을 앓고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_김형중(문학평론가)

인터뷰

조연정_ 지면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건 처음인 것 같은데, 이렇게 만나니 또 반갑네요. 우선 <이 계절의 소설> 선정작이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2017년에는 첫 장편도 출간하셨고 하반기에는 큰 상도 받으셨죠. 여러모로 의미가 깊은 한 해를 보내셨을 듯한데, 그래서 새해를 맞는 기분도 남다를 것 같아요. 새해 계획은 세우셨나요? 어딘가에 적어놓았을 손보미 작가의 새해 다짐과 목표가 궁금해집니다.

손보미_ 매해 그랬듯이 특별한 계획은 없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연말을 연말답게 보내지도 않았고요. 2017년 상반기에는 단편 원고를 하나도 쓰지 않았는데, 돌이켜보면 단편 말고 다른 글들은 꽤 썼던 것 같기도 해요. 하반기에 오랜만에 단편을 다시 쓰기 시작하면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사실 장편을 쓰는 1년 동안 단편 원고는 하나도 쓰지 않아서 그 후로 좀 헤매고 있었는데 감을 찾기도 전에 또 단편원고와 멀어진 삶을 살았으니까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몰라요. 여름에는 학교 도서관에 거의 매일 나가 있었는데, 원고에 집중하지 못하는 시간이 더 많아서 좀 괴롭기도 했죠. 작년에 원고를 쓰는 동안 제가 가장 바란 건 아, 다음 날에도 또 쓰고 싶다, 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완벽하진 않지만 때때로 그런 감정을 느끼곤 했고, 소설의 완성도와는 상관없이 기쁘기도 했습니다. 올해에는 좀 더 그런 감정을 많이 느끼고 싶어요. 소설을 쓰는 일이 즐거운 행위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조연정_ 「정류장」은 돌이킬 수 없는 과오에 대한 회한을 말하는 소설 같아요. 너무나 멀리 떨어진 과거 속의 과오, 그러니까 외면하기 위해 애써왔고 이제와 자책을 하기에도 어쩌면 어색한, 더 이상 나였다고 생각되지도 않는 시간 속의 내가 저지른 과오와의 대면을 말하는 소설이라고 읽힙니다. 이럴 때 인간은 어떤 감정 상태가 되는 것일까. ‘체념’이라는 말이 가장 정확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고요. 학교폭력 가해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진 현직 아나운서가 휴직계를 내고 미국에 살고 있는 누나의 집을 방문하는 이 소설에서도 폭로 ‘이후의’ 시간들을 보내고 있는 그가 일상적으로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이 섬세하게 그려지고 있죠. 사실 이 소설에서 피해와 가해의 구도를 선명히 하거나 과오에 대한 책임이나 윤리를 성찰하는 것보다는, 그러한 모든 시간들을 거쳐 오고 있는 한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이 더 의미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런 이야기를 쓰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 이 소설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싶었던 게 무엇일지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손보미_ 이 이야기를 구상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어느 인터넷 게시판에서 읽은 글이었습니다. 학교폭력 가해자가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을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글을 읽은 누구나가 그랬듯이 저 역시 마음이 좀 복잡해졌어요. 무엇보다 피해자를 만나고 싶다는 가해자의 마음에 대한 궁금증이 컸죠. 이를테면 우리는 자신의 삶이 다른 사람에게 ‘그럴듯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라잖아요. 죽음을 앞둔 사람은 어떨까요? 죽음을 앞둔 사람이 결백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그런 게 궁금해졌습니다. 만약 신에게 자신의 삶을 ‘그럴듯한’ 것으로 보여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라면, 자기 자신에게는 어떤 식으로 바라봐지기를 원하는 걸까 하는 그런 궁금증이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소설은 그런 것을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는 것 같아요. 다만 그런 것은 있었죠. 나는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있는가?라는 궁금증이요. 나는 나 자신을 완전히 용서할 수 있는가? 이 소설에서 그는 자기 자신의 과오를 어떤 식으로 판단하고 있는가, 그가 만약 체념을 하고 있다면 그건 온당한 감정인가? 그가 체념하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면 어떤 식의 태도를 취했어야 하는가?라는 그런 질문들을 제 자신에게 던지고 싶었던 것 같아요.

 

조연정_ 손보미 작가의 소설은 일견 그 톤이 건조하고 냉철해 보이지만, 순간적으로 작은 감정의 파동을 일으키는 지점들이 있다고 생각해요. 독자로서 저는 사실 그런 지점들에 매료되기 때문에 소설을 읽어온 것 같다는 새삼스런 생각을, 「정류장」을 읽으며 하게 되었어요. 가령 이번 소설에서 그가 어린 조카를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하죠. “만약 나중에,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저 애가 자라나서 오늘을 기억한다면, 어떤 식으로 기억할까? 이상하게도 그런 생각을 하니까 그는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라고요. 또 이런 표현을 쓴 문장도 있어요. “마음속의 무언가가 와르르 쓰러지는 기분을 느꼈다.” 사실 별것 아닌 이러한 표현들이 어쩌면 더 정확하게 어떤 감정들을 전달하게 된다는 생각도 듭니다. 인물의 감정이나 마음 상태를 전달하는 방식에 대해 어떤 고민을 하시는지도 궁금합니다.

손보미_ 사실은 그런 식의 표현, ‘와르르 쓰러지는’ ‘찢어지는’ 같은 표현이 정확한 표현이 맞는가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합니다. 사실 묘사의 경우는 내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지만, 사람의 감정을 묘사하는 것은 언제나 어렵습니다. 잘하고 있나, 하고 의문이 들 때도 많고요. 하지만 결국 내가 ‘그’의 감정에 대해서는 그 정도밖에 말할 수 없는 것 같다는 결론에 다다르곤 합니다. 이를테면 그 감정에 대해서는 그런 식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하지만 그 감정을 느낀 상황을 좀더 정확하게 묘사하기를 바라지요. 만약 그 맥락이 정확하게 잘 표현되기만 한다면 독자들이 ‘그’의 감정을 스스로(혹은 개인적인 맥락으로) 읽어낼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믈론 언제나 그렇듯이 제가 그 앞뒤 맥락을 잘 전달하고 있는지는 확신하지는 못합니다.

 

조연정_ 『디어 랄프 로렌』은 물론 「정류장」도, 그리고 이제까지 손보미 작가가 써온 많은 소설들이 이국을, 특히 미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요. 의식적이든 그렇지 않든 이러한 배경 설정을 고수하는 어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이러한 배경 설정이 손보미 작가가 생각하는 ‘소설적인 것’과도 관련이 있는 걸까요? 이 질문과 꼭 이어지지 않을 수는 있지만, 그렇다면 손보미 작가가 생각하는 가장 ‘소설적이지 않은 것’은 무엇일까요?

손보미_ 늘, ‘이국’을 배경으로 하는 것에 특별한 의미는 없다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를 공간으로 설정해서 소설을 쓰는 게 훨씬 더 자유롭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 같아요. 누군가 제 소설에 대해 ‘일종의 SF’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 비유가 아주 맘에 드는 건 아니지만 일견 맞는 말이라고는 느낍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소설을 쓰는 게 언제나 제 맘에 드는 건 아닙니다. 도리스 레싱이 『런던 스케치』라는 작품집을 출간한 것처럼 저 역시 언젠가는 ‘서울’에 대한 작품집을 내고 싶다고, 구체적인 지명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도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걸 떠올리면 언제나 좀 어색해집니다. 무언가를 경유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무언가를 지시한다는 것, 직접적으로 무언가를 설명하는 게 저에게는 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심지어는 무언가를 직접적으로 서술하려고 하면 할수록 정작 중요한 것이 빠져나간다고 느끼거든요. 어쩌면 약간 미신 같은 생각일지도 모르지만요.

 

조연정_제가 아는 한 손보미 작가는 어떤 대상에 한번 빠져들면 최선을 다해 애정을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물리학에 빠져 있다고 하신 글도 보았는데, 최근에 가장 빠져 있는 대상이 무엇인지도 궁금해지네요.

손보미_ 물리학에 빠져 있다고 말하기도 어설퍼서 창피해요. 시간이 허락한다면 산수(수학 아니고요) 공부를 다시 시작하고 싶긴 해요. 요즘은 미국 드라마 「매드맨」을 처음부터 다시 보고 있어요. 아, 「매드맨」은 정말 좋은 드라마예요. 종종 이 드라마는 시청자들의 능동적인 해석을 요구할 때가 있어요. 잠깐씩 보여주는 사물, 인물의 표정, 대사들을 스스로 이어서 생각해볼 때 말하고자 하는 바를 보다 더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거든요. 몇 년 전에 봤을 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인물에 대해서도 다시 이해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럴 땐 좀 기뻐요. 진짜로 살아 있는 사람과 두 번, 세 번, 네 번 반복해서 대화를 나눈 기분이 들어요. 아, 당신은 그래서 그때 그런 행동을 했군요,라고 비로소 이해하게 되는 기분이랄까.

 

조연정_ 손보미 작가가 첫 책을 묶을 즈음 저희 대화를 나눌 기회가 많았잖아요. 이번 대산문학상 수상 소감을 읽으며 그 시절이 많이 생각나더라고요. 수상 소감에서 이런 말을 하셨죠. ‘소설 쓰는 사람’이라는 자의식을 갖는다는 것에 대해 그간 좀 어색해했던 것도 같다, 하지만 『디어 랄프 로렌』을 쓰는 동안 그 자의식에 대한 어떤 ‘용기’를 갖게 되었다, 그러니까 “내가 행복할 만한 이야기를 쓰는 것. 내가 쓸 수 있는 이야기를 쓰는 것. 그 이야기를 쓰면서 겪은 시간들을 잘 흘려보낼 수 있는 것” 그걸로 어쩌면 충분할 수도 있다고요. 손보미 작가의 이런 변화가, 그러니까 ‘소설 쓰는 사람’이라는 자의식에 대해 자신만의 답을 찾아가고 있는 과정들이 어쩐지 저한테도 작은 위로가 되는 것 같았어요. 그렇다면 손보미 작가가 ‘쓸 수 있는 이야기’, 그러니까 앞으로 쓰게 될 이야기는 어떤 이야기일지, 혹은 도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어떤 이야기일지도 독자들이 궁금해할 것 같아요.

손보미_ 제 수상 소감을 읽고 어떤 시절을 떠올렸다니, 어쩐지 마음이 뭉클해져요. 왠지 제가 엄청 나이가 든 것 같은 기분도 들고요. 올해 하반기에는 장편 연재에 들어갈 예정이에요. 아마 예전 같았다면 이렇게 빨리 다시 장편을 연재할 생각은 안 했을 거 같아요. 그냥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려고 했을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어쩐지 약간 기대가 돼요. 재미있는 활동이 되기를 바라죠. 사실, 이 「정류장」 원고를 보내고 한 달 정도가 지났을 때, 그러니까 문예지가 발간된 후에 어떤 부분들을 좀 고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원고를 쓸 당시에는 그저 떠오르는 대로, 무언가 더 덧붙이거나 꾸미거나 하지 말자는 생각으로, 나 자신을 닦달하지 말고 그저 있는 그대로 쓰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완성도가 낮아진 게 아닌가 하는 자책이 많이 들었거든요. 일주일 정도 그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누군가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완성된 소설을 하나의 게임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어떻겠냐고 말하더군요. 하나의 게임을 클리어했다면 어떤 식으로 끝마쳤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게 아니겠냐고요. 저는 이 비유에 만족했습니다. 물론 저는 게임은 거의 하지 않지만요. 앞으로는 좀더 멋지게 게임을 끝내고 싶은 욕심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패배해도 상관없어요. 중요한 건 어쨌든, 아, 내일도 또 다시 쓰고 싶다,라는 마음이 드는 것이니까요.

관련 작가

손보미 소설가

1980년 서울 출생. 2009년 『21세기 문학』신인상. 2011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자세히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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