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가을, 이주란

「멀리 떨어진 곳의 이야기」(『자음과모음』 2017년 가을호)

선정의 말

이 이야기는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흩어져버린 낱장들을 대충 그러모아놓은 듯한 일기들의 모음으로 돼 있다. 예컨대 이야기는 7월 8일의 일기로 시작되어 7월 26일로 건너뛰었다가 다시 7월 9일로 돌아오기도 하고, 7월 15일은 따로 떨어진 채 세 차례나 기록된다. 아마도 제목은 8월 1일의 일기에서 비롯된 것 같다. 이날의 기록에 따르면, 어떤 소설가는 한때 멀리 떨어진 곳의 이야기를 듣는 일을 병적으로 좋아했는데, 그런 그에게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는 것이다. 그 소설가는 아마 하루키일 것이다. 그는 7월 8일의 일기에 등장한다. 부산으로 여행을 간 나는 지하철을 탔다가 하루키를 닮은 남자를 보고 마치 미행을 하는 형사라도 된 것처럼 그가 아내인 듯한 여자와 나누는 이야기를 엿듣는다, 그의 부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각각의 기록은 총 19개의 일기들로 이루어진 이 소설의 맨 처음과 끝에 놓여 있다. 이렇게 제목, 그리고 처음과 마지막이라는 형식이 부여하는 힘으로 「멀리 떨어진 곳의 이야기」는 내가 한 소설가에게 들려주려는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내가 하루키와 만나는 일이 과연 일어나겠는가? 그러니 굳이 부여한 이 형식을 털어내고 시간 순서대로 일기들을 재배열해본다면, 그러니까 7월 1일로 시작하여 8월 1일로 끝이 나도록 하여 이 이야기를 다시 읽어본다면 30년 넘게 한 도시에 살았으나 경전철과 함께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서자 떠나야 하는 상황에 처한 한 삼십대 여성의 이야기가 된다. 종종 조카를 돌보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너 어디 커서 나만큼 사나 보자” 하고 생각하고, 형편에 맞지 않게 모델하우스를 구경 갔다가 경품으로 받게 된 피아노를 포기하지 않고 돈을 빌리면서까지 그걸 들이는 엄마에게 화를 내고, 기약 없이 스웨덴으로 떠난 사람이 남기고 간 병든 개를 돌보는 나의 이야기. 그러니까 이런 식이라면 이 일기들을 한 문장으로 줄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힘겨운 7월이 가고 겨우 8월이 왔다, 고.

그런데 굳이 삶을 비참함으로 귀결시킬 뿐인 질서를 부여하여 이 일기들을 읽어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 떨어뜨렸다 그러모은 기록들은 ‘굳이’의 힘을 무심하게 떨궈낸다. 그래서 일기들은 젊은 여성이 담담하게 들려주는 가난한 삶의 이야기로 읽히는 대신, 정말 멀리 떨어진 곳의 이야기처럼 들려온다. 이때 남는 것은 수많은 순간들 속의 ‘나’이다. 버스를 타고 창밖을 보거나 날씨를 구경하는 일을 좋아하는 나, 거래처에서 온 메일을 보며 “자신 없으면 자신 없다고 말하고 가끔 넘어지면서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나, 엄마가 보내온 “베란다 방충망에 매미가 아직 안 갔나 봐봐”하는 문자를 받고 매미가 아플지도 모른다는 말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는 나…… 그런 ‘나’들로 이루어진 7월의 이야기.

날짜를 뒤섞어놓는다고 해서 현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그런 누군가에게는 어떤 순간의 ‘나’를 꺼내 답하면 좋을까. “어떤 순간이 한 번뿐이라고 생각하면 어쩔 줄을 모르겠다”고 말하는 ‘나’라면 괜찮을까? 황예인(문학평론가)

 

이주란의 「멀리 떨어진 곳의 이야기」는 서늘한 아이러니 효과를 자아낸다. “자신 없으면 자신 없다고 말하고 가끔 넘어지면서 살고 싶다. 무리해서 뭔가를 하고 넘어지지 않으려고 긴장하는 것이 싫다”(『자음과모음』 2017년 가을호)고 말하는 청년 세대, 그럼에도 자신 없다고 말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고, 더욱이 자신 없다며 넘어지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 현실의 억압으로 인한 갈등, 존재의 애틋함이 아닌 갈등만이 존재하는 청년 세대의 고통스런 처지와 상황을, 가능하면 가볍게 다루면서 결코 가볍지 않은 파장을 함축하고 있는 소설이다.

제대로 된 일자리를 확보하기 어렵고, 그래서 경제적 고통에 적잖이 노출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크로키처럼 제시된다. 이를테면 “돈이 많았다면 쉽게 잊힐 만한 것들이었지만 나는 그 모든 것들에 맨몸으로 부딪혀야” 했던 인물의 이야기의 세목들이 어지간하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건 나만의 문제가 아니었고 나 혼자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해야 할 일은 미루고 미뤄도 되는 일들부터 하고 살아”가거나, “나는 일부러 실수를 하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실수하고 싶다”고 말하는 역설로, 청년세대의 저항적 우수를 담아낸다. 게다가 “앞으로 내게 많은 불행한 일들이 예고되어 있다는” 걸 안다고 말하지 않는가. 어쩌면 그토록 비관적일까.

이 소설의 주인공은 우리 시대 어떤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이른바 치유 인문학이나 긍정 심리학의 어떤 코드들을 추문화한다. 가령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든지 ‘아픈 만큼 성숙해지고’, 혹은 ‘믿는 대로 된다’, ‘긍정의 힘’ 같은 레토릭이야말로 ‘멀리 떨어진 곳의 이야기’이고, 지금, 여기 가까운 곳의 이야기는 저토록 비관적이며 많은 불행한 일들이 예고된 것이라는 점을 작가는 환기한다. 그 불행한 일들은 무질서하고 불연속적으로 혹은 파상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 이 텍스트에서 일기의 날짜들이 뒤죽박죽일 수밖에 없는 사연도 그 때문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표제인 ‘멀리 떨어진 곳의 이야기’를 비롯한 이런저런 아이러니의 무늬들을 통해, 이 소설은 동시대의 청년 상황에 대한 의미심장한 성찰과 예리한 비판의 지렛대를 제공한다. 퍽 시리다.(다만 일기체 서술을 활용한 것은 좀 쉽게 쓰려는 형식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이 대목을 더 논의하고 싶기도 했다. 그러다가 혹시 이 작가가 작품 속 주인공의 말처럼 “일부러 실수를 하고 싶”어서, 아니 실수하지 말라고 강요하는 현실에 맞서 적극적으로 실수하고 싶어 하는 청년 세대의 도발적 저항 담론을 형상화하기 위한 수사 전략의 일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잠정 보류하기로 한다.) 우찬제(문학평론가)

인터뷰

금정연_  안녕하세요. 처음 인사드립니다. 최근 첫번째 작품집 『모두 다른 아버지』(민음사, 2017)를 출간하셨는데요, 소감과 근황을 말씀해주신다면.

이주란_ 안녕하세요. 이주란입니다. 출간 준비를 하면서 개인적으로 안 좋은 일들이 닥쳐와 생각처럼 기뻐하지 못했으나 들뜨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다행일까?’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다만 늘 폐를 끼치며 사는 것 같았는데 주변에서 저보다 더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또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고 너무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근황으로는 출간을 계기로 무언가를 녹음하거나 인터뷰 같은 것을 해보았는데요, 모두 다 망쳐버렸으며 개인적으로는 매일 일을 나가기 때문에 계속 하던 일을 하며 지냅니다.

 

금정연_ 「멀리 떨어진 곳의 이야기」는 7월 1일부터 8월 1일까지의 일기를 날짜와는 무관하게 재배치한 소설입니다. 이런 형식을 택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이주란_ 원래 이야기를 길게 이어서 못 쓰는 스타일인 것 같습니다. 일단 저는 무언가를 빼먹으면서 쓰는 것이 쓸 때 재미있고요, 날짜와 무관하게 배치한 이유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요, 우선 날짜대로 가면 조금 심심할 것 같았기 때문이고 두번째 이유는 예를 들자면 1일에 몇 가지 일이 있었는데 한두 가지만 적었다가 20일쯤에 어떤 다른 일로 인해서 1일에 있었던, 적을 필요가 없다고 느껴 지나쳐버렸던 어떤 일이 생각나고 하는 적이 있기 때문에 그런 형식을 택했습니다.

 

금정연_ 주인공은 가난한 30대 여성입니다. 뭐랄까, 총체적 난국 같다는 생각도 드는데요. 스웨덴에서 불법체류 중인 헤어진 애인을 잊지 못하고, 친구도 연인도 아닌 모호한 상태로 만남을 이어가던 M은 전 애인과 재결합을 선언하고, 스웨덴으로 떠난 애인이 두고 간 강아지는 난치병에 걸렸지만 투약을 거부하고, 건방진 조카는 이모를 무시하고, 직장은 마음에 들지 않고, 언니와 엄마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고… 충분히 절망적인 상황을 특별히 절망적이지는 않게 서술하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주란_ 그것은 화자가 아직 아주 절망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M과는 어떤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차인 것은 아니고 사랑을 정말 찾고 싶으면 스웨덴에 가면 되지요. 그리고 조카는 안 만나면 되고요, 직장 스트레스는 참으면 됩니다. 엄마와 언니도 도움은 되지 않지만 크게 해가 되는 존재는 아닙니다. 화자는 진짜 절망을 마주치는 것을 평생 이런 식으로 미뤄왔는데 미안하지만 이제 곧 절망적인 상황에 놓이게 될 것 같습니다.

 

금정연_  이주란 작가의 작품을 말할 때 농담을 빼고는 이야기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실없는 농담이라고 해야 하나, 진지한 상황에서 튀어나오는 농담이 매력적인데요(개인적으로는 「참고인」에서 임신한 언니가 호주로 떠난(떠났다고 생각하는)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의 도입부를 좋아해요. “주연아. 그곳 생활은 어때? 너무 덥지 않니? 넌 더위를 많이 타서 여름을 싫어하잖아. 얼굴 전체에 땀이 나고…… 특히 콧잔등과 인중에 땀이 많이 나서 늘 콤플렉스에 시달리곤 했었지. 수염이 난 것도 아닌데 늘 인중이 퍼렇고 말이야. 그러고 보니 얼굴도 검은 편인데 더 검어졌을까 봐 걱정이다.”). 이번 작품에서도 복지 천국 스웨덴으로 떠난 옛 애인의 소식에 주인공이 “불법체류 신세니까 아주 제대로 살지는 못하겠지. 복지국가……불법체류……복지국가……불법체류……어떤 면에선 멋진 선택이라고 생각했지만 무언가 찜찜함이 남았다”라고 말하는 부분을 보고 혼자 웃었습니다. 혹시 이런 유머 스타일에 영향을 준 작가가 있나요? 좋아하시는 작가와 작품이 궁금합니다.

이주란_  처음에 진지하지만 어딘가 웃기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왜 그런지 잘 몰랐습니다. 감히 농담을 하려는 의도조차 갖지 못했다는 편에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소설을 쓸 때 막 의도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 어느 부분이 그렇구나, 하는 정도는 알게 되었는데요, 이런 스타일에 영향을 준 것은 친언니인 것 같습니다. 언니는 제게 안 좋은 일이 있거나 이유 없이 우울할 때 늘 저를 웃겨주는, 기억력이 좋고 성대모사를 잘하며 목소리가 크고 잘 웃는 사람입니다. 가끔 누군가 언니에 대해 이야기할 때 “걔 웃긴 애?”라거나 “걔 웃기잖아”라는 말을 듣는 사람인데요, 그런 그녀가 저의 성격이나 가치관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고, 그것이 제 소설 속 화자들에게도 자연스럽게 드러나지 않았나 싶습니다.

좋아하는 작가나 작품이라면…… 세계 명작이나 교과서에 나오는 소설들만 읽다가 대학교에 와서 처음으로 한국 현대 소설 같은 것들을 접했는데요, 하루키와 김종은, 박성원 작가를 특히 좋아했고 그 후로는 무언가를 읽을 때마다 거의 다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금정연_  소설 앞부분에서 조카에게 창의력이 있는 것 같다는 주인공의 말에 언니가 “그러면 이상한 어른으로 자라더라구”라고 대꾸해요. 그 말은 중반부에서 조카의 입을 통해 “엄마는 이모가 가난하댔어. 그래서 책도 많이 읽지 말랬어”라고 다시 한 번 반복되는데요. (갑자기 진지하게 질문하자면) 책과 가난의 상관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이주란_ 없다고 생각합니다.

 

금정연_ 소설은 하루키를 닮은 남자의 목격담으로 시작해서 멀리 떨어진 곳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걸 병적으로 좋아했던 소설가를 언급하며 끝나요. 마지막의 소설가가 누구인지 물어도 될까요(라고 말하면서 물어버렸네요. 개인적으로는 하루키가 아닌가 싶은데)?

이주란_ 정확히는 하루키가 아니고 하루키 소설에 나오는 어떤 화자인데 제가 소설 속에서 소설가라고 치고 쓴 것입니다.

 

금정연_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이주란_ 저는 계획을 세우지 않는 편이어서 앞으로의 정해진 계획은 없습니다. 너무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고 그래도 막연하게나마 한두 달 앞은 내다보고 삽니다. 물론 계획을 세워본 적도 있었으나 아주 사소한 일들이 새롭게 발생해 제 계획을 방해했고 그래서 실제 계획대로 된 적은 없었습니다. 그 후 곰곰이 생각해보니 계획을 세울 때의 저와 그것을 지켜야 하는 순간의 저는 전혀 다른 자아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급히 계획을 세워보자면 마음의 빚을 진 사람들에게 그것을 갚으면서 사는 것이 계획이라면 계획입니다. 자꾸 계획, 계획 하다 보니 문득 계획이라는 말이 아주 낯설게 느껴지는 가을입니다.

관련 작가

이주란 소설가

1984년 경기도 김포 출생. 추계예대 문창과 졸업. 명지대 문창과 석사과정 휴학 중. 2012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 소설집 『모두 다른 아버지』가 있음. 자세히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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