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가을, 박상영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문학동네』 2017년 가을호)

선정의 말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동성애를 소설의 소재로 다루는 일에는 얼마간의 비장함이 필요했다. ‘하나님이 금지한 사랑’이라는 근본주의자들의 어리석은 믿음, 그리고 오랜 세월 건재해온 유교적 전통의 이데올로기, 그것들에 도전해야 한다는 심리적 부담감 같은 것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명백히 어리석은 신앙이나 이데올로기는 무시하면 그만이다. 비장함은 오히려 다른 이유에서 비롯된다.

서구의 퀴어 비평에서 여러 차례 주장되어온바, 동성애는 다분히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여러 질문들을 의제화한다. 이성애자 중심주의 사회의 편견에 대한 고발과 비판은 말할 것도 없고, 젠더와 주체성, 섹슈얼리티와 글쓰기, 서발턴과 발화(불)가능성 같은 일련의 민감한 주제들이 퀴어 서사 주위에서 유의미한 담론 구성체를 형성하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목도해왔다. 그럴 때, 퀴어 서사는 대체로 비장해진다. 물론 그런 비장함은 정치적으로 올바르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볼 때, 동성애의 대상화 또한 그런 방식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마치 내셔널지오그래픽 유의 오지 다큐멘터리가 다른 세계의 불행을 인도주의라는 이름으로 전시하는 행위와 유사하다. 우리는 연민에 빠지고 비장해지지만, 오지인들의 삶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박상영이 다음과 같은 문장을 통해 항의하고 싶었던 것도 어쩌면 그와 같은 모순적 상황이었을 것이다. “퀴어영화들은 하나같이 과잉된 감정에 사로잡힌 신파이거나 투명할 정도로 정치적인 목적을 드러내고 있었고, 남성 동성애자의(즉, 나의) 현실과는 거리가 멀었다.”(222)

물론 우리는 최근 다른 유형의 퀴어 서사들을 접한 경험도 적지 않다. 그러니까 신파나 과장, 정치적인 목적 같은 것이 전혀 없어 보이는 퀴어 서사들, 이를테면 두 인물의 생물학적 성별을 모르고 읽는다면 그야말로 일상적인 연인들의 사랑 이야기와 아무런 차이도 느낄 수 없을 것 같은 고요한 퀴어 서사들. 그럼으로써 동성애를 신파와 정치로 만드는 일 자체가 대상화의 다른 방식이라는 사실을 침묵으로 설득하는 서사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문제는 있어 보이는데, 가령 작중 영화감독인 화자의 다음과 같은 자기반성은 뼈아프다. “내 영화는 별로 특별할 게 없는 사람들이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사랑을 하다 맥빠지게 끝나버렸다. 주인공이 게이라는 것 말고는 아무런 특색도 가치도 없는 그런 영화. 굳이 장편 분량의 서사일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240)

박상영의 소설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문학동네』 2017년 가을호)가 문제적인 작품으로 읽히는 지점이 여기다. 우선 이 작품은 예술가 소설의 유형에 속할 만하다. 그리고 연애소설이고, 메타소설이고, 세태소설이다. 하지만, 물론 역력히 퀴어소설이다. 퀴어 서사의 양극단을 피하면서, 동성애자들의 고통을 그리되 유별나지 않고, 일상적인 사랑을 그리되 자기 성찰 속에서 그린다. 문장은 비장하지 않고, 신랄하지만 발랄하다. 냉소적이고 유머러스하지만, 날카롭고 섬세하다. 보기 드문 퀴어소설이다. 김형중(문학평론가)

인터뷰

이경진_ 안녕하세요? <이 계절의 소설>에서 처음 인사드리는 것 같습니다.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박상영 안녕하세요. 소설가 박상영입니다.

소설가, 라는 말이 어색해서 제가 쳐놓고는 잠시 가만히 그것을 들여다보게 되네요.

꽤 어릴 적부터 작가, 그중에서도 소설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글 쓰는 연습을 한다는 명목으로 중학교 때부터 대학생까지 쭉 학생기자 생활을 해왔고, 첫 직장도 인터뷰 전문 잡지사였습니다. 이러한 배경을 가진 만큼 많은 작가의 인터뷰를 읽고 썼는데요, 대다수의 작가들이 친구가 별로 없으며 고독의 힘으로 말미암아 글을 쓴다고 하더군요. 그런 걸 볼 때마다 고독을 잘 견디지 못하고 타인(혹은 알코올)에 의존하는 저 같은 천진난잡한 사람은 작가가 될 수 없는 걸까? 절망하곤 했습니다. 만약에 내가 작가가 되어 인터뷰를 당할(?) 기회가 생긴다면 기필코 친구들과의 쓸모없는 술자리로 말미암아 글을 쓴다고 선언하리라, 다짐하곤 했답니다. 뭐 그런 쓸데없는 결심을 하며 독을 품고 글을 쓰던 시절에는 죽어도 등단이 되지 않더니 온갖 개인사적 풍파를 겪으며 어깨에 힘이 다 빠져버린 작년에야 운 좋게 문학동네 신인상으로 등단을 하게 된, 만 일 년 차 소설가입니다.

본격적으로 인터뷰에 들어가기에 앞서 (아무도 묻지 않으셨지만)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는데요. 저는 쓸모없는 친구들, 그리고 그들과의 술자리의 힘으로 말미암아 소설을 쓰는 소설가입니다. (소원 성취!)

 

이경진_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는 최근 한국문학계에 새롭게 등장한 퀴어소설의 한 경향을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기존의 퀴어문학이 주로 동성애자가 사회에서 받는 억압과 차별의 폭로에 치중해 있거나 동성애자들의 사랑이 갖는 암울함과 비극성을 강조하는 식으로 그 사이에 어느 정도의 전형성을 구축해 놓았다면, 이 소설은 그보다는 훨씬 일상적이고 발랄한 퀴어의 세계를 표방합니다. 이런 점은 김조광수 감독이 “왜 항상 퀴어영화는 우울해야 하는가?”라고 반문하며 퀴어의 새로운 명랑성을 강조했던 것을 떠올리게 하는데요. 이와 관련해서 어떤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지 듣고 싶습니다.

박상영_ 이전에도 제 작품의 어조나 캐릭터를 두고 ‘발랄’하다거나 ‘명랑’하다고 말씀해주신 분들이 꽤 계셨는데요. 이런 표현을 접할 때마다 조금 의아한 기분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한 번도 발랄하고 명랑한 분위기를 의도하고 소설을 쓴 적이 없거든요. 특히 이 소설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이후 「자이툰 파스타」)의 경우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전쟁터의 참상 속에서 피어나는 가슴 절절한 사랑과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청춘의 좌절을 담으려 했습니다.

제가 애써 명랑 발랄을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방식으로 제 소설이 읽힌다는 것은 결국 제 자신의 평소 말투가 명랑하고 발랄하다는 의미일 텐데. 머리맡에 녹음기를 두고 사는 것도 아니고 제 말투가 어떤지 제가 객관적으로 알 수가 없더군요. 고민하던 저는 결국 (아무도 그러라고 한 사람은 없지만) 제 주변의 친구들에게 자문을 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작가의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가 성실성이라고 밝혔던 다른 작가분들의 인터뷰를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우주에서 제일 한가한 두 명의 친구에게 연락해 제 평소의 말투가 어떠한지를 물었습니다. 중복 응답된 것들만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항상 화가 난 것 같은 느낌이다.
  2. 비판적이다. (존나 저지 멘탈하다,라고 말한 것을 제가 해석 및 순화하여 기술했습니다.)
  3. 염세적이다.
  4. 행간에 심술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생긴 것도 놀부 같다, 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5. 됐고 말이 정말 많다.

제 화법에 대해 저 자신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친구들의 답변 그 어디에도 발랄과 명랑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발랄과 명랑/염세와 분노의 간극이라니요. 사하라 사막의 모래를 몽땅 들이부어도 그 간극을 다 메울 수는 없을 것만 같습니다. 결국 저는 리서치를 통해서도 명랑과 발랄의 원인을 찾는 데 실패했습니다.

명쾌한 대답을 드리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다소 찝찝한 죄책감 같은 게 듭니다. (반드시 정답을 제시해야 하는 한국적 교육을 받으며 자라났기 때문일까요?) 죄책감에 젖은 채 홀로 방구석에 누운 저는,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열심히 굴리며 발랄과 명랑의 근원을 탐구해보았습니다. 일단 심술궂고 수다스러운 제 본연의 말투가 일종의 리듬 같은 것을 형성해서 발랄과 명랑한 어조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아니면 제 소설 속 정신 빠진 치인들이 저지르는 술주정이 일종의 발랄한 페이소스를 자아내는 것일 수도 있고요.

그러나 평론가님께서 말씀하시는 발랄함이 됐고 일단 노래하고 춤추자는 ‘발리우드식 흥겨움’과 연개되는 종류의 감정이라면…… 글쎄요. 그런 요소도 어떤 작품 속에는 당연히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제 이번 소설 「자이툰 파스타」 속 인물들이 그러할까요?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받지 못해 끊임없이 모욕적인 상황에 놓일 수밖에 없는 인물들이 하는 음주가무가 ‘발랄’한가요? 세계로부터 번번이 거절당하는 청춘들의 얘기가 그저 ‘명랑’하기만 한 것일까요? 오히려 그 어떤 서사보다도 암울하고 비극적으로 읽힐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해석은 저마다의 몫이겠지만요.

말씀하신 부분들 중 제가 특별히 공감하는 것은 ‘일상적인 서사’라는 부분입니다. 작가로서 저는 눈에 보이는 작위를 최대한 배제하고 매끄럽고 자연스러운 서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나 이번 작품에서 제가 좋아하는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서사의 전개가 퀴어됨(이라는 것의 명확한 정의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이 있다면 그런 것들)을 부각하기 위해 의도된 장치는 아니었습니다. 언제나처럼 소설 속 인물을 떠올리며, 그의 입장에서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서사를 쓰기 위해 노력했을 따름입니다. (이전에 다른 작품에서도 현실적이고 유머러스한 화법을 구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퀴어를 다룬 작품에서만 그런 부분이 두드러진다고 평가하는 분들이 많은 것에 대해 신기하기도 합니다. 이런 부분에 대해 독자 여러분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도 있고요.)

뭐, 이건 어디까지나 제 생각에 불과하고, 소설 속 기술된 요소들을 어떻게 해석하는지는 독자의 고귀한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자의 모든 의견을 존중합니다.

 

이경진_ 약간 겹치는 질문일 수 있겠는데요. 이 소설에서 ‘나’는 “동성애를 훈장처럼 전시하지도, 대상화해 신파로 소모해버리지도 않는 순도 백 퍼센트의 퀴어 영화”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품고 영화계에 뛰어든 인물입니다. 퀴어를 대상화하거나 소비하지 않고 퀴어를 재현하는 방식이란 어떤 것일까요? 이런 어려운 작업에 성공한 소설이나 영화가 있으면 예로 들어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박상영_ 박 감독이 치기와 취기에 젖어 한 말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셨군요. 학부 시절에 장편을 찍어 칸 영화제에 진출하겠다는 포부를 밝힐 정도로 주제 파악 안 되는 인간이 하는 얘기인데요. (하긴 누구나 대학 다닐 때 한번쯤은 그런 말도 안 되는 꿈을 꾸는 것 같기도 하네요. 로또 당첨, 우주 정복, 성숙하고 아름다운 연애와 같은.) 아무튼 말씀하신 질문에 대한 대답부터 하자면, 그런 소설이나 영화 작품은 본적이 없고 아마 앞으로도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어떤 대상을 대상화하지 않고서 예술 작품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만큼 힘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창작자가 어떤 캐릭터나 사건 배경을 설정을 상정해놓는 순간부터 자동적으로 대상화가 진행되는 것 아닐까요. 아무리 뛰어난 작가일지라도 한정된 ‘앎’을 전제로 기술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심지어 자신의 이야기를 일기처럼 쓰더라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비단 창작의 영역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우리는 모두 끊임없이 나와 나 자신을 둘러싼 세계(즉 타자)의 영역을 상정하고, 자기 멋대로 해석해버리는 멍청하고 한심한 존재가 아닐까요? 그렇다면 서로를 대상화하지 않은 관계는, 예술 작품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하는 뭐 그런 노인 같은 믿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실패할 게 뻔하다고 해서 손쉽게 대상화해버리는 경향에 저항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중력과 같은 사고의 경향성에 저항하는 것이 예술 활동의 지향해야 할 덕목인 것 같습니다. 이만하면 됐다, 하는 마음을 갖는 순간 결국 주저앉고 썩고 마는 것 같다는 불안감이 있고요. ‘현재형’의 작가로 활동하는 동안은 그러한 사고의 경향성에 저항하고 싶은 (다소 허황된) 욕심이 있습니다. (친구들이랑 했던 얘기인데요. 서로 작품이나 사고가 손쓸 도리 없이 구려지면 그만 쓰고 죽으라고 말해주기로 약속했어요.) 결국은 구려지겠지만(이미 구린 것일 수도 있지만), 구려지지 않기 위해 한없이 노력하고 싶어요.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믿고 싶어요.

그렇기 때문에 퀴어,라는 영역 있어서도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별로 없습니다. 저는 제 작품에 있어서만 작가이자 창작자일 뿐, 타인의 작품에 대에서는 어디까지나 1/n의 지위를 갖는 독자일 뿐인 걸요. 제게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일상적이고 주체적인 서사로 읽히는 퀴어 작품들이 누군가에게는 매우 불편하고 더러는 불쾌하기까지 한 작품으로 보일 수가 있지요. 제 작품이 누군가에게는 그렇게 읽힐 수도 있고요. 호평도 혹평도 제 자신의 영역에서만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다만 아무렇지도 않게 타인을 잘 이해한다고 말하는 사람(이나 작품)을 경계하는 편입니다. 보통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좋고 선한 사람인지를 얘기하기 위해 손쉽게 남을 불쌍하기만 한 존재로 만들어버리곤 하더군요. 제가 제 얼굴에 침을 뱉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눈물)

우리 모두는 그저 각자의 위치에서 묵묵히 나름의 궤도를 돌 뿐인 것이겠지요. 모두들 알아서 저마다의 궤도를 잘 도시길 빕니다.

 

이경진_  소설에서 자이툰 부대가 등장하는 것이 소재의 측면에서 신선하기도 하면서 어쩐지 「태양의 후예」가 떠올라 통속적인 느낌도 받았거든요. 자이툰 부대에 대한 이야기는 어떻게 생각하게 된 것인지 궁금합니다.

박상영_  김은숙 작가의 「태양의 후예」는 인터넷 짤만 많이 보고, 개그 프로에서 대사 패러디하는 것만 들었지, 정작 작품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자이툰 부대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인지는 알지 못했네요. (반성합니다. 이번 기회에 한번 봐야겠네요.)

자이툰 부대와 이라크 전쟁이라는 소재는 사실 작가로 데뷔하기 전부터 언젠가 꼭 써야지 마음먹고 있던 ‘총알’ 중 하나였습니다. 그와 관련된 몇 가지 일화가 있는데요, 별로 중요하지도 궁금해하실 것 같지도 않지만 한번 주절주절 늘어놔보도록 하겠습니다. (시간이 없으신 분들은 스크롤을 내리시는 게 유익할 것 같습니다.)

2007년, 뉴욕에 체류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때 그라운드 제로의 땅을 직접 밟아보게 된 적이 있어요. 일부러 간 것은 아니었고, 사실 그 근처의 명품 아울렛으로 향하다 우연히 지나치게 된 거였습니다. 한 블록 전체가 완전 공사판이었고 철판이나 철망으로 임시 도로가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저는 철판으로 된 임시 계단을 열심히 밟으며, 성공적인 쇼핑의 전의를 다지고 있었습니다. 거의 2층 높이 정도의 계단에 올라서자 공사장 안전막 너머로 아주 커다랗고 깊은 구덩이 같은 게 보였습니다. 움푹 파인 토대 위에 신나게 공사를 하고 있더군요. 몇 발짝 더 걷다보니 이곳이 9․11 테러가 일어났던 공간이라는 표지판이 묘비처럼 세워져 있더군요. 철지난 명품을 싸게 사겠답시고 부지런히 움직이다 문득 그 표지판을 보니 기분이 좀 묘했습니다. 별로 오래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돌아서면서도 (일찍 가야 좋은 물건을 건질 수 있었거든요.) 괜히 뒤통수에 구덩이 하나가 남아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답니다. 언젠가는 내 뒤통수에 새겨진 그 구덩이에 대해 한번쯤은 얘기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마치 흥미진진한 에피소드인 것처럼) 자이툰 부대와 관련된 우연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데요.

다른 많은 예술에 대한 선망과 허세를 지닌 젊은이들처럼 저 역시도 미술관에 가는 것을 즐겨하는데요. 특히 국립 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되는 ‘올해의 작가상’ 전시는 빠지지 않고 관람하려 노력하는 편입니다.

2015년에 열린 올해의 작가상 전시에서는 오인환 작가의 <사각지대 찾기>라는 설치 미술 작품을 흥미롭게 봤습니다. 벽에 설치된 스크린에서는 부대 내부에서 사각지대를 찾아 몰래 자위행위를 했던 군 사병들의 인터뷰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그 영상을 몹시 집중해서 보는데 제가 아는 얼굴이 나오는 겁니다. 오래전부터 친분이 있으나 딱히 잘 연락을 하고 지내지는 않던 선배였습니다. 화면 속의 그가 자이툰 부대의 풍광을 세세하게 묘사하는데 좀 기분이 야릇했습니다. 평소에는 답답하리만큼 말주변이 없는 선배였는데 그의 느리고 단조로운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놀랍게도 이라크 사막의 장면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그려지는 것이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오랜만에 그 선배한테 연락을 해 만나자고 약속을 잡았어요. 안국역 근처의 보쌈집으로 가 돼지 보쌈을 나눠 먹으며, 수다를 빙자해 자이툰 부대에 대한 얘기를 좀 나눴습니다. 얘기를 나누다 보니 아르빌의 주둔지며, 벽화 제작 분대 같은 금싸라기 같은 얘기가 술술 흘러나오는 것 아니겠어요? 이거 괜찮은데? 완전 소설인데? 하는 생각이 들어 형에게 양해를 구하고 열심히 기록해놨습니다. 그날 보쌈 값은 제가 냈습니다. (해당 선배에게 작품의 초고를 보여주며 고증을 거치기도 했답니다. 역시나 술친구의 힘으로 소설을 쓰는 작가가 맞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오랜 시간에 시간과 노력, 금전적인 투자를 통해 얻게 된 자이툰 부대라는 소재는 사실은 좀더 프로답게 소설을 잘 쓰게 됐을 때 좀더 볼륨이 큰 얘기로 씌어질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등단 1년차에 불과한 올해, 이 소설을 꼭 써야만 한다는 제 나름의 내적 필연성이 생겨버렸습니다. 4월에 발생한 ‘A대위 사건’이 그 발단이었습니다. (이 인터뷰에서 해당 사건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잘 모르시는 분들은 검색을 추천합니다.) A대위 사건의 추이를 지켜보며, 또 그 사건에 대해 말하는 세간의 사람들을 보며 저는 제 나름대로 세상을 해석해야 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급하게 이 소설을 쓰게 되었습니다.

애초에 계획에 없던 작품이다 보니 예상보다 이야기의 분량이 너무 방대해졌고, 때문에 시간이 한없이 모자랐습니다. 서사나 인물이 제대로 잡히지 않아서 쓰면서도 정말 고통스러웠습니다. 작품을 발표해 좋은 평가까지 들은 지금도 사실은 「자이툰 파스타」가 애초에 제가 원했던 지점까지 나아가지 못했다는 생각에 부끄럽고 절망적이기도 합니다. (사실 작품 내부에서 A대위 사건과의 연관성을 찾기는 쉽지 않죠. 일부러 연관성을 만들려 하지도 않았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성된 작품을 봤을 때 다른 누구도 아닌 저 자신을 위해 이런 작업이 너무나 절실히 필요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기적인 마음이지만 쓰고 나니까 정말 그렇더라고요. 그런 의미에서는 참 고마운 소설이에요, 이 작품이.

 

*작품의 초고 단계에는 위에 말씀드린 일화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요, 분량 및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다 빼버리게 되었답니다. 언젠가는 위의 장면들이 제 다른 작품에 재활용되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행여 어딘가에서 소설을 읽으시다 위 장면들을 마주치게 되시면 그때 그 말 많은 작가가 인터뷰에서 엄청 길게 떠들어댔던 그 얘기구나, 반가워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경진_ ‘나’가 찍은 영화 「알려지지 않은 보편의 사랑」는 제목부터 보편 대 특수 논쟁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아요. 지난해에 영화 「캐롤」을 둘러싸고 퀴어의 사랑을 보편적 잣대로 볼 것이냐, 아니면 특수의 잣대로 보아야 하느냐 논쟁이 있었잖아요.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요?

박상영_ 일단 토드 헤인즈 감독의 영화 「캐롤」은 케이트 블란쳇의 저음이 근사하게 들린다는 점 말고는 별로 하고 싶은 얘기가 없는 영화입니다.

모든 사랑은 다 다르죠. 한 사람이 현재 하고 있는 사랑이 과거의 사랑과 다를 수도 있고요. 모두가 매순간 다른 사랑을 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결국은 모두가 같다고도 볼 수 있겠네요. 그것이 ‘퀴어’라는 프리즘을 통과하면 조금 다른 의미가 되는 것일까요?

질문에 대한 고민을 하면 할수록 이 인터뷰가 모조리 ‘퀴어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요. 그런 질문에 대해서 지금 즉시 그것이 무엇이다 제 주관적인 생각을 명확히 밝히는 것은 손쉬울 수 있으나, 오히려 그런 단적인 규정은 제가 작품을 통해 도달하려고 했던 ‘지점’에 방해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제 대답이 미진하게 느껴지신다면, 퀴어에 대한 제 나름의 해석을 담기 위해 고군분투한 「자이툰 파스타」 속 인물들의 대사와 구도를 참고해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그것으로도 충분한 대답이 되지 않는다고 느껴지신다면, 제가 일전에 발표한 퀴어소설인 「중국산 모조 비아그라와 제제 어디에도 고이지 못하는 소변에 대한 짧은 농담」(『현대문학』 2016년 12월호)을 보시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소설가로서, 소설가이기 때문에 드릴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인 것 같기도 합니다.

 

이경진_  이제 등단한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신인 작가이신데요. 앞으로 어떤 소설을 쓰고 싶으세요? 무척 궁금하고 기대가 됩니다.

박상영_  (자기 본위적인 착각이기는 하지만) 제 작품을 읽어준 분은 그게 누가 됐건, 조촐한 술자리에서 함께 떠들고 논 친구처럼 느껴집니다. (제멋대로 술자리에 끌어들여 죄송합니다만) 기왕에 시간을 내서 나의 일부와 함께해준 사람들이니, 적어도 헛수고를 했다는 생각만 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있는데…… 그것은 소설 속 박 감독의 꿈만큼이나 허황된 것이겠지요?
앞으로 어떤 소설을 쓰게 될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매 순간마다 다음 작품이 무사히 완성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모쪼록,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으면 좋겠네요.
안녕.

관련 작가

박상영 소설가

1988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성균관대학교에서 프랑스어문학과 신문방송학을,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문예창작학을 공부했다. 2016년 문학동네 신인상에 단편소설 「패리스 힐튼을 찾습니다」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자세히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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